매쉬메리골드(Mash Marigold):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도대체가. 뭘 걱정하는 거야?”
걱정된다고. 거기서 잘 살고 있는 거야? 숨은 쉬어 지니? 한국 공기가 탁 해서 네가 갑자기 호흡곤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떡해?
“너 나 약 올리려고 작정 했어?”
약 올린다니? 그런 말 쓰지마라, 섭섭하게. 나는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네가 걱정이 되서.
“호흡곤란 일으키면 내가 알아서 어떻게 해서든 병원 갈 거야. 네가 내 성격을 몰라서 하는 말이야? 아침부터 왜 사람 성질 긁고 난리야. 안 그래도 시차 적응 안돼서 죽을 맛이거든?”
너 오늘이 제일 말 길게 한 거 알아? 한국 가고 나서 내내 내 전화 다 씹고. 받아도 무조건 단답형이고!!
골이 울릴 정도로 커지는 케일의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내가 그랬나…. 한국에 들어온 뒤 며칠간은 정말 지옥 이었다. 방금 내가 뱉어냈던 말 그대로 나는 프랑스와 한국의 무려 8시간의 시차를 견뎌내야 했으며, 프랑스에서 빠르게 정리해야 하는 일들을 급히 처리 하고 나오는 바람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머리가 배로 아팠고, 피곤함도 배로 밀려왔다. 그런 와중에 아침만 되면 나를 깨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도 없이 전화를 거는 내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케일 덕분에 이제야 겨우 일어난 것이다.
“졸려서 그랬지. 오늘은 그래도 제법 컨디션 괜찮네. 근데 넌 안자냐? 지금 여기가 9시 30분이 넘었는데, 거긴 1시가 넘었을 거 아니야. 일주일 내내 이렇게 늦게 자도 되는 거야? 오늘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너 잠결에 들은 말을 잊지도 않아? 무서워 끌레흐!!
“시끄러워. 얼른 자.”
난 끌레흐 목소리 더 듣고 싶은걸~ 우리 자기가 타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겠어?
자기라는 소리에 당장이라도 파리로 달려가서 녀석의 모가지를 쳐버리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저 욕 몇 번을 씨부렸다. 이 새끼 일부러 자기자기 하는 거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 화장실로 향했다. 으…. 일주일 내내 집 안에만 있었더니 사람 꼴이 아니야.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핸드폰 너머로 케일의 목소리는 끊이질 않는다.
내가 돈 들여서 국제통화 하는 건데, 목소리 좀 더 들려줘!
“자. 됐지? 이제 그만 끊자, 응?”
너무해 자기. 갑자기 한국으로 간다고 말만 하고 진짜로 가 버리고!! 나한테 상의도 안 하고 정말 너무 한 거 아냐? 내가 자기 한국 갔다는 소리 듣고 얼마나 놀란 줄 모르지! 보고 싶어 죽겠다고!! 뉴욕 갔다 오니 자긴 없지. 네 측근들은 다들 여행 떠났다고 하지. 한동안은 모든 일 세리나가 맡기로 했다면서? 세리나 보고 네 자리 뺏어 버리라고 할 거야!
케일의 전화는 한국에 온 뒤에도 수도 없이 걸려 왔지만 내가 매번 바쁘다는 핑계,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방적으로 끊거나 씹어버리기 일쑤였다. 자신이 출장 간 틈을 타 한국으로 튀어버린 나에게 이제야 제대로 된 투정을 부린다. 사실 왜 이렇게 조용하나 했다. 분명 보통의 케일이라면 사실을 알자마자 불 같이 화를 내며 돌아오라고 난리를 쳐댔을텐데. 아무래도 내가 지친 걸 꼴에 친구라고 알아주나 보다.
“말로만 투정 부리는 거 다 아니까 그만 해. 나도 이 정도면 네 투정 많이 받아 주고 있다고 생각 들지 않아?”
그럼 이유나 듣자! 도대체 갑자기 한국엔 왜 간 거야? 단지 쉬고 싶어서 한국까지 가다니. 끌레흐 네 성격을 너무 잘 아는 나로썬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이유나 알자고 좀!!
케일의 외침과 함께 커피가 다 끓은 모양이다. 나 커피 마셔야 해, 케일. 너랑 놀아 줄 시간 없어. 케일의 물음에 답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금방 다시 걸려오긴 할 테지만 원래의 케일이라면 한참 꿈나라일 시간이니 자기도 모르게 잠 들 것이다. 그래도 케일이 몇 번 전화를 할 것에 대비하여 핸드폰 벨소리를 무음으로 바꾼 뒤, 일주일 만에 한국에서의 제대로 된 아침을 맞았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건 내 생활 패턴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커피 향을 천천히 음미하다가 베란다로 나가 바깥 경치를 살폈다. 한국이네, 정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어냈다. 못 말려. 결국엔 정말 와 버렸잖아. 5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을 땐 막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피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오늘까지 잠만 잔 것 같다.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와서 그랬을 테지.
태어나서 처음 가져보는 휴식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에 한이라도 든 년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만 해댔다. 대학을 가서도 프랑스를 가서도 지금 이 위치에 서 있을 때 까지 나에게 있어 여유라는 단어는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어색하다. 여전히 휴식, 여유… 이 따위 단어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겐 한없이 사치스러운 것들이었다.
“이렇게 오래 잔 게 도대체 얼마만이야. 기억도 나질 않네.”
눈 왔었네. 고개를 휙 돌리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눈이 왔다고 좋아했을 테지만 난 보통의 여자들과 다르다. 감정에 무디다. 눈이 와도 별 감흥이 없다. 다 마신 커피를 아쉬워하며 샤워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샤워를 좀 해야겠다.
**
머리를 잘랐다. 고등학교 3년을 빼고 나는 줄곧 긴 머리 상태를 유지했다. 자른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귀찮아지고 싶어지지 않아서였다. 물론 나는 세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여성 디자이너라는 것과 다르게 얼굴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도 얼굴을 내비칠까 말까 한데, 하물며 한국이라고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6개월 전 유명 잡지에 내 얼굴이 실렸다는 사실을 집에서 나오기 전 알아차리고, 그 잡지가 한국에서도 팔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연치 않게 확인하고는 과감하게 잘라버렸다.
이 머리 하고 당장 파리로 돌아가면 다들 놀라겠는걸. 어깨를 으쓱 하고는 거리에 널린 가게 간판들을 보았다. 내가 대학 시절 살았던 곳은 조금만 더 가면 있을 것이다. 5년 지났다고, 허물진 않았겠지. 그다지 좋은 기억도 되지 못 하는 곳인데, 내 발걸음은 그쪽을 향했다. 그 집에서 4년 정도를 살았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머무른 흔적을 뒤돌아보곤 한다. 그 집이 뒤돌아 볼만 한 가치가 큰 건 아니지만.
“그대로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러다 금방 그 웃음을 거둬버렸다. 그간 집값이 장난 아니게 뛰어오른 모양인지 경비도 꽤 삼엄하다. 안으로 들어가서 기웃거리다가는 도둑년이라고 의심 받을 것이 뻔해서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택시를 잡았다.
“제가 한국은 오랜만이어서 그런데, 이 근처 번화가가 어디예요?”
“번화가? 제일 가까운 곳이면 명동이지 뭐.”
“그럼 명동으로 가주세….”
행선지를 말 하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낯선 놈 하나가 문을 벌컥 열더니 내 옆자리에 탑승했다. 뭐야. 이거?
“어라. 빈 택시인줄 알았는데.”
들려오는 조금은 숨이 찬 듯 한 목소리에 짜증이 일었다. 사람 있는 거 알면 내리면 될 것을 택시 기사에게 내 행선지를 묻는다. 기사 아저씨의 입에서 명동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기쁜 듯이 합승 좀 하자며 나를 향해 씩 웃는다. 아, 짜증나. 모자를 어찌나 깊게 눌러썼는지 코랑 입만 보인다.
“아저씨 저 합승 안 하니까 내리라…. 뭐예요? 아저씨 저 합승 안해요.”
“아이고 아가씨. 그냥 같이 가. 장소도 같구먼 뭘 그래.”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기사가 먼저 출발해버린다. 미친 거 아니야? 우리나라 택시가 언제부터 이렇게 합승에 관대해졌지? 먼저 탄 건 난데, 왜 내 의견을 존중해주지도 않아? 짜증이 치밀어 올라 눈치 없게 합승한 주제에 잘도 자리 잡은 녀석을 쳐다보았다. 내가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지 보이지도 않는 눈을 하고서는 웃는다.
그리고는 곧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빠르게 전화를 받는다. 나는 짜증이 정상 수치를 초과하면 말 한 마디를 하지 않는다. 정상을 초과 하는 순간 내 자신도 절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어디야.
“지금 가고 있어. 야, 네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해봤자 내가 무서워 할 것 같냐?”
장난 쳐? 지금 오고 있어? 야!!! 너 시간 약속 지키라고 했지!!
“그 아줌마가 저번에 30분이나 넘게 나 기다리게 했거든? 그새 까먹었냐?”
의뢰인이 기다리게 했다고 너도 똑같이 해? 이 멍청한 새끼야!
“걱정 마. 나는 그래도 10분밖에 안 기다리게 했어.”
이런 병신 새끼!! 끊고 빨리 오기나 해!!!
잔뜩 욕 투성이의 통화를 끊고는 고소하다는 듯이 웃어대는 놈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보이는 행동들이 기가 차서 이제는 화가 나서 말이 안 나온 다기 보다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나이 많은 내가 참자. 나이 들어서 느는 건 넓은 마음이라고 누가 그랬지 않은가. 한숨을 내쉬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나가다 보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건물에 안면근육이 굳었다. 하필 지금 보게 될 게 뭐야. 엿 같네 진짜.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다가 자꾸 느껴지는 시선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놈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긴 했지만 그게 나를 쳐다보는 것인지 창문 너머 밖을 쳐다보는 것인지 알 수는 없어서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편하게 자리를 잡고 등받이에 기대었다.
“문자 왔는데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다시 놈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눈을 가리고도 눈이 보이나 보네. 다분히 또라이 기질이 충만해 보이는 놈의 말에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보니 케일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케일 때문에 무음으로 해뒀던 걸 잊은 채 방황했던 모양이다. 벌써 시간이 3시가 넘었다. 하긴 워낙 일찍 일어나는 녀석이라서 지금쯤이면 벌써 일어나고 샤워도 5번은 족히 했겠다. 빠르게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두어 번 터치를 하고 액정을 바라 본 나는 하마터면 지금 이 곳에서 핸드폰을 던져버릴 뻔 했다.
갑작스럽게 더위가 찾아오는 것 같은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한국에서까지 일 하러 온 줄 알아? 화가 나서 거칠게 창문을 내리자 옆에 앉아 있는 녀석이 호들갑이다.
“으. 진짜 추워! 이봐요, 문 좀 닫아요. 혼자 탄 것도 아니면서.”
안 그래도 열받은 내게 녀석은 요란을 떨며 내 화를 돋웠다. 저 미친 새끼 내가 얌전히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진짜 병신쯤으로 여기나보네.
“그 쪽이 합승 한 거예요.”
“그게 뭐요? 합승 한 거 가지고 되게 쩨쩨하게.”
“그 쪽한테 쩨쩨하다는 소리 들을만큼 속 좁으면, 가는 길에 내리라고 차 세웠을 수도 있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염치없게 합승 한 건 그 쪽이니까 내가 창문을 열든 말든 말 할 권리 없어요. 그 쪽이 춥든 말든 저랑 관련 없다구요.”
갑작스런 내 말에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꾹 다문 놈이 고개를 돌렸다. 재수 없어. 고등학교 시절 늘 들어왔던 말들이 내 귀에서 또 다시 웅웅대는 것 같다. 치료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거. 몇 년이나 지났는데 도대체. 더 이상 짜증만 내봤자 내 체력소모이기 때문에 나는 명동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창문도 닫지 않았고. 놈 역시도 말 하나 내뱉지 않았다.
**
-끌레흐 밖이야? 일 문제로 급한 거니까, 문자 보면 나한테 콜!
합승한 놈이 먼저 내린 후, 3분 뒤 나 역시도 택시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빌어먹을 케일의 문자 때문에 곧바로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다시 파리로 가기만 해 봐. 내 말을 무시해?
어, 끌레흐! 왜 이제야 전화를 해!
그럼 그 택시 안에서 굳이 너랑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라는 거냐? 케일이 뭘 알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막상 한국까지 와서 일 문제라며 나를 다급하게 찾는 녀석에게 좋은 말이 튀어 나올 리가 없었다.
“짜증나게 할래?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은 내 권한 다 세리나한테 넘겼으니까 세리나랑 알아서 처리 하라고 했잖아. 너 말 못 알아 먹어? 내가 일일이 너희들 어떻게 해야 되는지 다 챙겨줘야 돼?”
보통 사람에게는 별 일 아닌 것도 나에게는 극도로 예민하게 다가온다. 특히 이미 좋지 않은 컨디션에서 그 무게에 더 힘이 가중 되면 더욱 쉽게 예민해지곤 한다. 길거리에서 통화 할 수가 없어서 눈앞에 보이는 커피 전문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여자가 그것도 프랑스어로 통화를 하고 있으니 시선이 한꺼번에 집중된다.
무슨 일 있었던 모양이네. 세리나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걜 시키지 내가 굳이 너한테 전화를 왜 하겠어.
“후……. 그래, 무슨 일인데. 얼른 말 해.”
조금 안정이 된 듯 한 내 목소리가 전해지자 케일의 목소리가 헛기침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이번에 미팅 할 남자가 하나 있어. 들었었지? 우리 측 브랜드 홍보 시안 담당인 인데, 이틀 전에 사정이 있어서 한국이래 지금. 무슨 일인지는 나도 모르지. 팩스로 보내면 되는데, 그 인간이 국제 팩스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못 하겠대요. 잘못 했다가 괜히 쓸데없는 곳에 세어나가면 안되니까!
“이해했어. 내가 접촉해서 시안 받고 팩스 보내라는 거지? 잠깐 머무르는 거니까 호텔에 있겠네. 그 새끼 이름이랑 호텔 이름 좀 문자로 알려줘. 또라이같은 새끼가 팩스 보낼 줄도 몰라? 국제 팩스라도 그렇지.”
유후- 역시 우리 자기야. 말을 안 해도 잘 안다니까. 자기 말로는 기계치라는데, 모르지 뭐. 어쨌든 땡큐!! 연락해뒀으니까 호텔 카운트에서 그 사람 이름말하고 내 이름 말하면 연결해줄거야!
“알았어. 하여튼 한번만 더 이딴거 시키기만 해 봐. 당장 파리로 날아가서 너 잘라버리는 수가 있어.”
말을 마치고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사람 진짜 많네. 케일과 통화 하는 동안에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앞에 아직도 한참이나 사람들이 빽빽히 서 있다. 커피 마시고 싶은데. 찰나의 고민을 하다가 발을 돌려 가게 안을 빠져 나왔다. 따뜻한 곳에서 밖으로 나오니 추운 바람이 뺨을 매섭게 스쳐지나간다.
어디 가는 거야?
금방 올 거야. 추우니까 이거 하고 있어.
뭐야 너…. 어디 가는 건데? 그거 말해주고 가. 너 손은 또 왜 이렇게 떨려.
금방 올게. 조금 늦는 한이 있어도 꼭 돌아올게. 너 목 춥잖아. 이거 하고 있어. 내가 다녀오면 다시 줘야 돼. 맡기는 거야.
갑작스레 떠오르는 아주 오래 된 기억 하나가 내 머릿속을 흔들어 놓았다. 겨울이었다. 그 때도 이렇게 추웠어.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목 쪽으로 가져갔다. 두툼한 털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진짜 웃겨. 자기하고는 더럽게 어울리지도 않게 무지막지하게 부드러운 목도리였다. 그 바보가 준 건.
뭐야.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해졌어? 웃기지도 않아. 목도리를 만지던 손을 치워냄과 동시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하여간 케일. 옆에 없어도 내가 쓸데없는 생각 안 하게 도와주는 건 너 밖에 없네. 씁쓸한 웃음이 번져나갈 것 같아 입술을 굳게 다문 뒤, 서둘러서 택시를 타고 케일이 말한 호텔로 향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사정이 있어서….”
“됐어요. 그건 담당자한테나 가서 말 하세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는데 감사합니다. 감사의 뜻으로 성함이랑 연락처를 좀….”
남자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그러자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자기 할 말에 열중을 하던 남자가 내 웃음소리가 들렸는지 하던 말을 멈추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손톱에 입혀진 매니큐어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내 눈빛에 몸이 굳어버렸는지 남자는 꼭 로봇 같았다.
“작업치고는 너무 식상한 거 아니에요?”
나는 내 눈빛이 지금 어떤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다들 내 눈은 오랫동안 마주하기 힘들다고 했었으니,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 알만하다. 케일이 말하기를 내 눈은 이유 없이 사람을 조종하는 듯 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눈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상태로 몸이 굳어버린다고. 그렇게 얘기 했었다.
“제가 누군지 알고 함부로 말 하시고 그러세요?”
“…….”
“혹시나 제가 디자이너 끌레흐면 어쩌려고요.”
내 말에 남자는 유리잔에 담겨있던 얼음물을 입 안으로 털어냈다. 재미없어. 귀찮게 만들어서 장난 좀 치려고 했는데, 그럴 만 한 가치도 없다. 놀랐는지 손을 떨고 있다. 그 손을 보다가 시선을 옮겨 남자를 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렇게 놀라고 그러세요.”
“저, 저기. 그…그분께서 한국에 있을 리도 없고… 그 분께서는 자기 이름을 함부로….”
“알아요. 자기 이름 떠벌리고 다니는 거 싫어한다는 것쯤은. 설마 그 쪽이 내가 함부로 말했다고 소문내는 건 아니겠죠?”
“제가 무슨 수로요…. 전 성함도 모르시는 분이고…….”
남자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남자 역시 나를 따라 일어난다. 내가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다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인사도 필요 없어서, 그냥 고개만 까딱 하고는 호텔에 자리 잡은 그 카페 안을 나섰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관련 된 사람들 쪽에 내가 무서운 존재인 건 알긴 했지만, 이름 하나 말 했다고 저 정도라니.
케일에게 시안을 받았다는 문자를 보내고는 빠르게 로비를 통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지는 혼잡한 모습에 내 두 발은 멈추었고, 얼굴은 두말 할 것 없이 찡그려졌다. 차들이 줄줄이 멈추어 선다. 내리는 사람들마다 엄청난 위인이라도 되는 마냥 조심스럽게 모두 같은 쪽으로 안내하는 걸 보니 이 호텔에서 큰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저 쪽으로 빠져나가려면 혼잡해질 것 같아서 호텔리어에게 다른 문이 없냐고 물었다. 내 말에 잘 이용하지 않는 문이 있다며 상세하게 알려준 길대로 따라가니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문을 열고나오니 아주 높은 담벼락과 좁은 폭의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라면 숨어도 모르겠네. 여전히 차가운 날씨에 절로 몸이 움츠려 졌다.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 졌다. 가방 속에 넣어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서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붉은 빛이 돌더니 이내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높은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이런 좁은 길에도 가로등이 있네…. 오른손으로 담배를 쥐고는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10년도 넘은 건데.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 보면 진짜 웃겠다 너. 나한테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매일 무시하기만 했는데. 너 이후로는 제대로 된 사람들 사귀어 본 적이 없다고 하면 웃으려나. 그렇게 널 싫어해놓고, 모순되게도 아직도 네 말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비웃겠지. 비웃어도 상관없어. 내가 언제 남 시선 상관 썼나. 너무 오랫동안 한국에 없어서 네가 나 못 찾고 있을까봐… 네가 나 찾아서 돌아오는 거 금방 할 수 있게…. 내가 왔어.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면 묻을수록 자꾸만 선명해지는 그 향에, 그 얼굴에 미칠 것 같았다. 보고 싶어서 흐릿해져가는 기억 속을 뒤져서라도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데. 네 향만이 아른거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대체가…. 괜히 이 목도리 하고 나왔나. 이러다가 로맨스소설 쓰는 작가까지 될 기세네 정말. 웃음이 나서 웃어버렸다. 들고 있던 담배를 땅에 비벼 꺼버렸다. 어차피 펴봤자 오래 피지도 않으니까 뭐.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함부로 찬 곳 앉는 거 아니라고 그랬었는데. 오늘따라 별 생각을 다 한다. 이럴 땐 케일이 옆에서 난리 쳐 줘야 하는데. 좀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말 하면 기세 등등 해질 거야 아마.
역시 자기는 나 아니면 안 돼! 돌아 와 얼른~
이따위 말을 지껄여댈게 뻔하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
“…….”
갑작스레 열리는 문으로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나왔다. 요새 저게 트렌드야? 너도 나도 모자를 왜 저렇게 눌러 써. 인상을 쓰고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걸로 보아서는 이 남자도 이 문으로 호텔을 빠져나갈 생각인 모양이다. 그리고 남자가 내 옆을 스친 순간.
“잠…깐.”
말도 안 돼. 어째서. 몸을 움직이기엔 이 상황을 너무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멋대로 입을 놀렸다. 내 말에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동시에 차 한대가 이 좁은길 앞을 가로 막고 서버렸다. 좁은 공간으로 들어올 수는 없으니까. 순간적으로 저 차를 이 남자가 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 급했다. 빨리 붙잡아야했다.
“이름 좀….”
“…….”
“죄송한데 성함 좀 알려주시겠어요. 그러니까 저기….”
여태껏 살면서 그 애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남 앞에서 말을 더듬은 적도 뜸들인 적도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잡은 거 였다. 본능적으로 물은 거 였다. 묻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조금 전 보다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안 돼. 이대로 가면 놓친다. 굳었던 몸이 풀어져버리고 차가 있는 쪽으로 뛰려고 하였을 때. 남자는 이미 차를 타고 이곳을 벗어났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잖아 이거. 지금 이 상황에서 이게 무슨…. 아무리 도리질을 쳐봐도 그 향기가 아직까지 내 주위를 감쌌다. 틀리지 않아. 어떻게 다른 사람을 그 애로 착각하겠어. 그렇게 기억해냈던 향기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씨발. 개새끼! 진짜 혼자 가냐!!”
뒤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엄청난 속도로 뛰어온 모양인지 숨을 고르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웃을 수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 나는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다. 근데 익숙한 목소리라니. 왜 그런 생각이…….
“힘들어 죽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이 되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발견했다. 멍하니 아무 표정 없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모자…. 아까 쓰고 있던 모자랑 같아. 가로등 빛으로 희미하게 보이긴 했지만 같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택시에서 그 놈도….
“택시?”
“택시?”
마주한 놈과 나는 동시에 입을 열었고,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분명히 누군가를 쫓아왔다. 그리고 혼자 가냐고 했었지. 그렇다면 이 녀석이 쫓는 건 그 남자가 틀림없다. 아는 사이다.
“미안한데 할 말이 좀 있어서.”
“……여기 계속 있었어요?”
“그런 건 말 할 여유 없고, 우선 나 좀 따라와요.”
거기까지 정리가 된 나는 다짜고짜 녀석을 끌고 골목길을 벗어났다. 얘기를 할 장소가 필요하다. 카페…, 어디 있지. 번화가 쪽이 아니라 그런가 잘 보이지가 않는다. 정신없이 카페를 찾다가 무심코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도로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5대의 경찰차가 무지막지하게 달려간다. 그리고는 호텔 앞에서 멈춘다. 그걸 보다가 갑작스레 빨라지는 걸음에 시선을 다시 앞으로 고정하고 걸음을 빨리하는 놈을 보았다.
“할 말 있어서 끌었던 거 아니에요?”
“아프니까 세게 잡지 좀 마요. 안 그래도 지금 말 할 장소 찾고 있으니까.”
“와, 웃긴다. 그 쪽이 먼저 잡았잖아요. 내 손목!”
“알았어요. 미안해요. 내가 급해서 그랬으니까 이제 팔 놔요.”
함부로 말하면 분명히 내가 물을 것에 대해 안 가르쳐 줄 것이 뻔해서 먼저 숙이고 들어갔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도 똑같이 쳐다봐주니까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웃어댄다. 놈이 내 팔을 쥐고 있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비틀어 내려는데 그걸 언제 또 느꼈는지 다시 한 번 꽉 쥐고는 발걸음을 빨리한다.
“이제는 나도 여유가 없어서 그러니까 빨리 좀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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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어요>< 되게 기네요 작가님 힘 좀 드셨겠어요~ 그남자는 누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