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법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법을 지켜야 한다는 준법 주의는
법치주의의 다양한 의미 중에서 매우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동안 우리는 이 준법 주의를 법치주의의 전부로 생각해 온 것 같다.
특히 기득권자가 불합리한 법을 내세워서 억압하거나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할 때 법치주의라는 이름을 활용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를
취합하는 데 작동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반해서 법치주의는 형성된 의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원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국민의 의사를 취합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기초해 있고
법치주의는 취합된 의사를
안정적으로 집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법치주의와 준법 주의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거다.
법치주의는 법을 통한 지배를 이야기하는 거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법치주의 다시 말해서 법을 통한 지배에서
지배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법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더 나아가서 법치주의는 법 자체의 정당성에
그 법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까 법치주의는 기득권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법의 지배는 나중에 형식화되는데 내용에 관계없이
어떠한 법도 만들 수 있고 그런 법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진화하게 되는 거다.
법치주의는 권력의 남용을 통제하기 위한 원리이지
준법을 강요하기 위한 정당화 논리는 아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려면
그 법이 정당하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부당한 법을 준수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물론 준법 주의도 법치주의의 한 부분이기는 하나
법치주의이라는 이름으로 준법 주의를 들이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논리적 순서가 뒤바뀐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어느 사회에나 민주적인 규범과 질서가 있다.
다수의 의견이나 토론도 없이 나 홀로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모순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싸움과 갈등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인 것이다.
자신이 잘난 줄 알고 다른 것을 쉽게 폄하하는 사람
실제로 잘난 사람들은 그렇게 떠들지 않는다.
잘난 줄 알고 설쳐도 더 잘난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완장질, 독불장군에 편견과 오만,
우월감에 심취해 잘난 척, 아는 척
내가 최고인양 사사건건 남을 가르치려 들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으면 비난하고 험담하며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한다.
사람들은 참 쉽게 남을 가르치려 든다.
편견의 감옥이 높고 넓을수록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본인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상대의 생각을 교정하려 든다.
상대의 입장과 감정은
편견의 감옥 바깥쪽에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처럼 따뜻하지만
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다.
오로지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다 보니
여기저기 주변에서 왕따 신세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단순한 인과관계라면 사람끼리의 관계가 멀어지는 걸로 끝이지만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어떤 모임 같은 곳에서
함께 즐겁고 공유해야 할 목표의 지향성은
그다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세월의 흐름에 인간은 누구나 다 늙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성숙하게 늙는 것은 아니다.
자기주장만 옳다고 큰소리치고 자꾸 이것저것 따지면 추해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겸손과 배려 매너를 지켜야 한다.
살아가면서 가끔 삶의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지금까지 내내 믿고 의지하던 앎이나 신념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인간관계 등이
갑자기 제자리를 잃고 비틀대는 순간이 있다.
이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된다.
현실에서의 삶이 여의치 않을 때,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의 신탁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