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감독의 명작 '애니 홀'(1977)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앨비 싱어(앨런)가 애니(다이앤 키튼)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다. 애니는 퉁명스럽게 "나치에 관한 4시간 짜리 다큐멘터리를 볼 기분은 아니네"라고 대꾸한다.
문제의 영화 제목은 '슬픔과 동정'(Le chagrin et la pitié, 영어 제목 The sorrow and the pity). 2부작이며 러닝 타임은 251분. 1969년 옛 서독에서 먼저 공개된 이 작품은 프랑스인들이 믿고 있던 '레지스탕스 신화'의 허상을 벗겨내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문제작이다.
1940년 나치 독일에 항복한 뒤 프랑스에는 비시 괴뢰 정부가 세워졌다. 나치에 항전하는 길을 택한 레지스탕스(저항군) 세력은 종전 후 정권을 잡아 비시 정부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렇게 해서 과거사를 깨끗이 청산했다는 믿음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레지스탕스의 신화’였다.
종전 후 20여년이 지난 시점에 이런 작품을 2차대전 가해국인 독일 출신 감독이 제작했다고 해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불편해 했다.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거장으로 떠올랐던 마르셀 오퓔스가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오퓔스는 이틀 전 프랑스 남서부 소도시의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고인의 손자는 “할아버지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가족과 함께 본 뒤 임종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유족으로 세 딸과 세 손주가 있다.
오퓔스는 1927년 11월 1일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막스 오퓔스(1902∼1957, 본명 막시밀리안 오펜하이머)는 영화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 등을 만든 유명한 감독이다. 유대인인 막스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유대인 탄압을 본격화하자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2차대전 발발 이듬해인 1940년 6월 프랑스가 나치에 항복하고 영토 대부분이 독일의 수중에 떨어지자 막스 가족은 비시 정부가 지배하던 프랑스 남부로 피난했다. 일 년가량 비시 정부 아래 생활한 뒤 피레네 산맥을 넘어 1941년 12월 스페인으로 탈출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퓔스는 독일인으로 태어났음에도 10대 소년이던 1938년 프랑스 국적을, 20대이던 1950년에는 미국 국적을 각각 취득했다. 로스앤젤레스(LA)에서 고교를 졸업한 오퓔스는 군대 의무 복무를 마친 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들어가 연기, 연출 등을 공부했다.
프랑스 해방 5년 뒤인 1950년, 오퓔스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갔다. 오래 전부터 영화감독을 꿈꾼 오퓔스는 1960년대 중반까지 몇몇 작품을 연출했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자 다큐멘터리로 눈을 돌려 어린 시절 겪은 2차대전의 기억을 떠올려 비시 정부 아래에서 프랑스 경찰이 유대인 추방을 어떻게 도왔는지 끈질기게 추적했다.
'슬픔과 동정’은 프랑스 중부 지방 도시 클레르몽페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농민들, 상점 주인들, 교사들, 흔히 ‘콜라보’라고 불린 나치 협력자들(또는 부역자들), 레지스탕스 대원들, 심지어 과거 나치 점령군의 부대장까지 모두 36명과 50시간 분량의 솔직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과거사를 완벽히 청산했다’는 프랑스 국민들의 인식과 자부심은 허구이며, '레지스탕스 신화'도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오퓔스는 미국 방송사들과 손잡고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8년 선보인 ‘오텔 테르미누스: 클라우스 바르비의 생애와 시대’는 부제에서 보듯 나치 친위대(SS) 장교 클라우스 바르비(1913∼1991)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바르비는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대원 색출과 처형에 앞장선 인물이다. 얼마나 악랄한 수법을 동원했던지 ‘리옹의 도살자’로 통했다. 이 영화로 오퓔스는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자가 됐다.
오퓔스는 거의 평생을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늘 이방인이란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2004년 언론 인터뷰에서 “프랑스인 대부분은 여전히 나를 유대계 독일인, 그것도 프랑스를 때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유대계 독일인으로 여기는 듯하다”고 토로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혼합된 일종의 '다이렉트 시네마'인 이 영화는 우리 네 일제 시대와 같은 프랑스 역사를 해부한다. 그가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 숨기려 들고 질문을 회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인터뷰로만 이뤄졌기 때문에 상당히 지루할 수 밖에 없다. 처음에 TV 용으로 제작됐다가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 간단치 않다는 판단 아래 방송 불가 조치가 내려져 다시 극장용 영화로 재편집됐다. 프랑스 방송을 통해 방영된 것은 1981년 들어서야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친일파 문제가 분명히 정리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았고, 여전히 친일파들이 거들먹거리는 상황에, 더욱이 정부가 반민특위를 강제로 와해시킨 전력이 있어서인지 방영되지 못했다. 친일파 청산이란 과제에 여전히 짓눌려 있는 우리로선 이 영화를 만든 거장의 떠남은 못내 아쉬운 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