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스승 나옹 선사…"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공민왕 스승 나옹 선사…"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풍경 1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노여움도 내려놓고 아쉬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이 한시를 쓴 사람은 나옹(懶翁, 1320~76) 선사입니다. 우리는 “나옹 선사” 하면 “청산은 나를 보고…”를 쓴 고려 시대 스님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옹 선사는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上) 공민왕의 스승은 나옹 선사였다 나옹 선사는 고려뿐 아니라 중국에도 이름을 드날렸던 인물이다. 중국 황제가 그에게 절을 맡기기도 했다. [중앙포토] 나옹 선사는 고려 말 공민왕의 스승이었습니다. 또 무학 대사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무학 대사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왕사(王師)였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나옹 선사는 인도의 붓다, 중국의 선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을 우리말로 풀어냈던 사람입니다. 내면에 확고한 경처(見處ㆍ깨달음의 자리)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나옹 선사를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정도로만 기억하는 건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당시 나옹 선사는 고려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이름을 드날렸던 고승이었습니다. 풍경 2 나옹 선사는 출생부터 험난했습니다. 고향은 경북 영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방의 하급 관리였고, 집안 형편은 어려웠습니다. 세금을 내지 못해 관가로 끌려가던 만삭의 어머니가 길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나옹 선사입니다. 그러니 날 때부터 생사를 넘나든 셈입니다. 스무 살 때였습니다.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죽어버렸습니다. 젊은 나이에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 그는 주위 어른들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사람은 왜 죽습니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사람은 왜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옹은 절망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숨을 거두어야만 하는 인간의 생이 그는 너무 절망스러웠겠지요. 나옹 선사가 출가해서 머리를 깎았던 경북 문경의 묘적암이다. [중앙포토] 나옹은 결국 경북 문경의 묘적암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했습니다. 삶과 죽음은 그에게 거대한 물음표였습니다. 그걸 풀기 위해 그는 출가자가 됐습니다. 사실 부처님의 출가 이유도 그랬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생사(生死),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부처님도 출가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풀어야 할 ‘첫 번째 단추’였으니까요. 풍경 3 나옹은 묘적암을 거쳐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로 갔습니다. 거기서 마음을 모으고 수행한 끝에 4년 만에 눈이 열렸습니다. 나옹은 자신의 깨달음을 짚어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중국 땅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려와는 갈등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원나라의 수도 옌징(燕京, 지금의 베이징)에는 인도 마가다국 왕자 출신인 지공(指空) 선사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가섭으로부터 내려오는 부처님 법맥을 잇는 108대(代) 조사(祖師)라 하여 “서천국 108조(西天國百八祖)”라고 불렀습니다. 나옹 선사의 스승인 지공 선사. [중앙포토] 나옹 스님은 지공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지공 선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고려에서 왔습니다.” “배로 왔나, 육지로 왔나, 신통력으로 왔나?” “신통력으로 왔습니다.” “신통력을 한 번 보여보라” 나옹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지공 선사에게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오거나 육지로 걸어오는 건 몸이 오는 겁니다. 불가(佛家)의 깨달음은 그 몸이 본래 공(空) 함을 깨치는 겁니다. 그때 진리가 드러나고, 진리와 통하게 됩니다. 나옹 선사는 그게 바로 ‘신통(神通)’임을 보여줍니다. 신기한 기적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마술이 신통이 아닙니다. 나옹에게는 떠들든, 침묵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모두가 신통입니다. 내가 아니라 진리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공 선사에게 다가가 가만히 손을 잡았습니다. 그 자체가 신통이니까요.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는 지공 선사와 나옹 선사, 그리고 무학 대사의 유적이 남아 있다. [중앙포토] 지공 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나옹 스님은 이미 상당한 경지였습니다. 마음 밖에서 신(神)을 찾는 게 아니라 마음 안에서 찾은 신을 몸소 보여주니까요. 이런 나옹에게 지공 선사는 “선에는 안이 없고 법은 밖이 없다(禪無堂內法無外)…”는 말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는 깨달음에 대한 인가(印可)의 징표인 가사(袈裟)까지 전수했습니다.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제자 가섭을 통해 내려오던 선맥(禪脈)이 108대 조사 지공 선사를 거쳐 나옹에게 전해졌습니다. 나옹 선사의 선맥은 다시 무학 대사로 이어지고, 조선 선(禪) 불교의 든든한 토대가 됐습니다. 풍경 4 깨달음에 대한 인가는 스승이 마음으로 도장을 “꽝!” 찍어주는 겁니다. 나옹 스님은 지공 선사의 도장만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친링산맥과 화이허(淮河) 강을 기준으로 강북(江北)과 강남(江南)으로 나뉩니다. 당시 중국의 강북에는 조동종(曹洞宗)이 중심이었고, 강남에는 임제종(臨濟宗)이 중심이었습니다. 조동종의 가르침이 부드럽고 자상하다면, 임제종의 가르침은 거칠고 용감했습니다.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 공주. 나옹 선사는 공민왕의 스승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나옹 스님은 옌징을 떠나 중국 땅을 주유했습니다.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점검을 했습니다. 강남땅으로 간 나옹 스님은 임제종의 선맥을 잇는 평산(平山) 선사에게서도 마음의 도장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평산은 나옹에게 가사와 불자(拂子, 번뇌를 털어내는 걸 상징하는 불교의 도구)를 전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놀라운 대목입니다. 중국인 중에도 숱한 출가자와 수도자가 있었을 테니까요. 나옹은 그중에서도 ‘군계일학’의 존재였던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공 선사나 평산 선사가 머나먼 고려에서 온 나옹에게 굳이 가사를 전할 리는 없으니까요. 나옹 선사는 인도의 선맥과 중국의 선맥, 양쪽에서 모두 마음의 도장을 받았습니다. 그런 인물이 우리 역사에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참 뿌듯합니다. 나옹 선사는 당시 원나라 수도에 머물던 숱한 고려인들의 자부심이었다고 합니다. 왼쪽부터 무학 대사, 지공 선사, 나옹 선사.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었고, 나옹은 무학의 스승이었다. [중앙포토] 나옹 선사는 꼬박 10년간 중국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려로 돌아왔습니다. 고려에서 법문을 할 때도 나옹 선사는 인도 불교의 어법과 중국 불교의 어법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체화된 깨달음을 자신의 말로, 고려의 언어로 쉽게 풀어서 대중에게 전했습니다. 풍경 5 고려 시대에는 한글이 없었습니다. 나옹 선사의 법문도 한자로만 기록돼 있습니다.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우리말 그대로, 나옹 선사가 드러냈던 어투를 그대로 들을 수 없다는 건 애석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옹 선사의 한시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의 고유한 정서는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3ㆍ4ㆍ3ㆍ4의 음절이 마치 우리 몸속에 흐르는 아리랑 가락이 다시 살아나는 듯합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경내에 있는 나옹 선사의 부도와 석등. [중앙포토] 청산의 법문과 창공의 법문을 들으며 나옹 선사는 깨달음의 법을 펼쳤습니다.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왔을 때 나옹 선사는 불과 37세였습니다. 〈나옹선사 하(下) 편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출처] 공민왕 스승 나옹 선사…"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