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벽 4시 30분에 맑은 종성 소리를 시작으로 예불,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독송을 차례대로 했습니다.
경전 독송이 끝나고 스님이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백일, 천일, 만일
“하루하루가 모여서 100일을 이룹니다. 100일 기도에 입재하신 분들은 이제 내일 100일 기도를 마치게 됩니다. 또 하루하루가 모여서 1000일이 됩니다. 오늘은 999일째니까 천일결사에 처음부터 참여하신 분들은 내일이면 천일결사 회향을 하게 됩니다. 또 만일결사에 참여한 분들은 오늘이 9999일째니까 내일 만일결사 회향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모두 백일이든 천일이든 만일이든 쉬지 않고 여기까지 오신 것에 대해 환영하고 축하도 드립니다.
기도를 회향하면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마침내 성도 하시는 장면을 읽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시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제 어둠의 세계는 타파되었다. 내 이제 다시는 고통의 수레에 말려들어가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며 이제 여래의 세계를 선포 하노라.’
부처님은 이제 고통이 왜 생기는지 그 원인을 다 알게 되신 겁니다. 무엇이 쥐약인 줄도 다 아는데 그걸 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번 기도와 정진을 통해서 여러분도 자기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겼길 바랍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바로 세상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흐름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흐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흐름에 의해 부화뇌동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삶에 대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게 됩니다. 그물에 걸리는 물고기들의 흐름에 따라가지 않게 되고, 사냥꾼이 쳐놓은 덫에 걸리는 짐승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미 부처님께서 그 길을 가셨고, 또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두셨으니, 다만 우리는 그 길을 향해 부지런히 가면 됩니다. 이 좋은 법을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마지막 천일 정진을 한 이후에는 다시 그 정진의 결과를 가지고 대화를 해나가 봅시다.
또 만일결사를 한 사람들은 내일이 만일 째가 되는 날이니까 만일결사를 회향하게 됩니다. 만일결사 회향 때는 지난 만일 동안 한 번이라도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지난 만일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동안 잘했는지 한 번 살펴보고, 잘했다면 다음에도 이어서 새로운 만일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갑시다.”
생방송을 마친 후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경전대학 학생들은 지난 시간까지 반야심경에 대한 공부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배운 반야심경 내용 중에 의문이 생긴 점에 대해 스님에게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먼저 그동안 교실별로 실천 활동을 했던 모습과 소감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길벗 모임과 연탄 배달 봉사를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수행 연습을 해 온 두 분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스님은 수행 연습을 통해 삶이 변화하기 시작한 두 분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 적용하는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며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사람들 중에 다섯 명이 선정되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불생불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과연 생로병사에서 우리의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질문자는 학교 다닐 때 지구의 역사, 생명의 역사에 대해 배웠습니까?”
“네, 공부했습니다.”
“우리 은하계에 태양과 같은 별이 현재 1천억 개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대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1천억 개, 2천억 개가 있다고 하다가 지금은 1조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숫자가 늘어나는 이유는 망원경이 점점 발달하니까 관측할 수 있는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태양 하나가 형성되고 폭발한 다음 사라지고, 새로운 태양이 형성되고 폭발하고 사라지는 과정이 마치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태양이 있습니다.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항성(恒星)이라고 하고, 지구와 같이 그 주변을 도는 천체를 행성(行星)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태양 주변을 도는 여러 개의 행성 중 하나입니다.
지구는 생긴 지가 약 46억 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런 지구 위에 바이러스와 같은 단백질 덩어리가 생긴 지는 약 39억 년 정도 된다고 해요. 즉, 물질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첫 단계인 단백질 덩어리가 생기는 데 수억 년이 걸렸다는 얘기예요.
이런 단백질 덩어리가 단세포 생물로 진화하고, 단세포가 발달해서 다세포가 되고, 더 진화해서 식물과 동물로 나뉘고, 동물 중에도 무척추동물과 척추동물로 나뉘고, 척추동물 중에서도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이렇게 등장하게 되는데, 포유류가 등장한 시기가 약 6천만 년 전 가량이라고 해요. 인간의 조상인 영장류가 나온 건 700만 년 전으로, 그 후 영장류에서 구인류의 조상이 진화되어 나오죠. 현생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건 약 2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정도로 추측하고 있어요.
구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현인류인 크로마뇽인은 처음에는 공존해서 살았는데 약 3만 년 전쯤 이유를 모르게 구인류가 전멸했어요. 그래서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 흑인이든, 뉴기니에 있는 원주민이든, 뉴욕에 사는 현대인이든, 유전자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종입니다. 즉, 생물학적으로는 교미를 하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같은 종에 속합니다.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현생 인류가 정착한 시기가 3만 년 전이라고 해도, 인류 문명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보기 때문에 약 1만 년 전부터 문명사회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 후로 수많은 문명이 생성, 소멸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우주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를 알고 나면, 죽어서 어디에 가는지는 더 이상 안 궁금하지 않나요? 이런 걸 모를 때는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죽어서 어디에 가는지 등이 궁금할 수 있지만, 여기까지 공부를 해놓고도 아직 죽어서 어디에 가는지를 궁금해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질문이 아닌가 싶어요. 만약 그런 질문을 한다면 ‘풀 한 포기가 자라다가 죽었는데, 죽어서 어디로 갔느냐’, ‘다람쥐는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 이렇게도 생각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다른 건 다 그대로 있고, 사람만 죽어서 어디로 간다고 생각할까요? 이런 생각 자체가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 세상에 대해 모를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라 시대의 기록을 보면 당시 용이 비를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삼국유사를 봐도 용과 관련된 신앙이 많고, 다른 역사적 기록에도 온갖 신앙들이 있어요. 옛날에는 임금이 왕후를 두고 후궁한테 빠져서 놀다가 가뭄이 들면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시선으로 보면 비가 안 오는 것과 남녀가 같이 노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비가 내리는 원리를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기우제도 지냈잖아요.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일기예보를 통해서 비가 많이 올 확률, 비가 적게 올 확률, 이런 상황을 수시로 확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아예 안 오는 것도 아니에요. 예측 속에 불규칙성이 있는 거죠.
계절이 바뀐다는 걸 예측해도 매일 추워지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11월이 되면 전체적으로 추워지는 건 맞지만 매일 더 추워지는 게 아니라, 어느 시기에 갑자기 확 추워졌다가 또 며칠 따뜻했다가 다시 추워졌다가 따뜻했다가를 반복하면서 점점 추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하늘에서 누가 조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대기의 흐름상 북극에 있는 찬 공기들이 움직이다가 아메리카 대륙 위에서 내려가면 워싱턴에서 춥다고 난리를 피우고, 아시아 쪽으로 내려오면 제주도까지 얼음이 언다고 난리가 나고, 이렇게 출렁이다가도 차가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 12월에 꽃이 피기도 합니다. 다만 대기가 출렁거릴 뿐이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작용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댐을 설치해서 홍수도 막고, 물이 필요할 때 가뭄도 막을 수 있어요.
이것도 너무 지나치게 개발을 하면 안 됩니다. 지나치게 개발하면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죠. 그러니 적절히 조절해야 합니다. 지하수도 여러모로 유용하지만 지나치게 파면 지하수면이 낮아져서 땅이 꺼지는 일이 발생하고, 또 지하수가 오염돼서 큰 위험을 초래합니다. 뭐든지 적절해야 하는데, 좋다고 해서 지나치면 또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도 그냥 자연 현상 중 하나예요. 물질세계가 형성되고, 생명세계가 형성되고, 그걸 바탕으로 정신세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인간이 가장 발달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동물들에게는 정신 현상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 정신 작용이 있어요. 굼벵이나 지렁이처럼 아직 초기 단계로 발달한 것도 있고, 인간 외 다른 포유류에게도 발달된 정신 작용이 있습니다.
현재 인간만큼 정신 작용이 발달한 생명체는 지구상에 없지만, 우주 과학 이야기를 보면 다른 별나라에는 코끼리 같이 생긴 종이 머리가 뛰어나거나 원숭이 같이 생긴 존재가 머리가 뛰어난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은하계에만 태양이 천억 개가 넘는데, 그중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 정도 되는 행성만 해도 1억 개는 될 거예요. 그러면 생명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중에는 우리 인간보다 문명이 더 발달한 곳도 있고, 문명이 덜 발달한 곳도 있을 수 있죠. 또, 문명이 더 발달했는데 지구 환경 파괴처럼 그 별에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멸종한 것도 있을 것이고, 더 발달해서 다른 곳으로 탈출한 것도 있을 수 있어요.
옛날에는 이런 생각들을 다 공상(空想)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이런 공상들이 점점 현실이 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요즘 핸드폰을 쓰고, 화상회의를 하는 것도 옛날에는 다 공상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들이 다 현실이 되고 있죠.
그러니 물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도,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모두 다 이런 작용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이런 원리를 알면 죽어서 어디에 간다는 생각은 더 이상 안 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이런 생각을 왜 했냐면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재물을 가지고 있다가 재물에 집착하게 되면 재물을 잃을 게 두려워지듯이, 물질이나 생명의 이치를 모를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수행이라는 건 뭐냐? 이런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생명의 이치를 알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게 별 거 아닙니다. 법륜스님이 이렇게 법문을 하고 있지만, 스님도 건물이 무너지면 깔려 죽고,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도 전원 코드를 빼면 화면이 다 나가잖아요. 그렇다면 그 화면은 어디로 갔을까요? 조금 전 화면에 있던 사람이 어디로 간 건가요? 그냥 화면에 나오는 작용이 멈춰버린 거예요.
화면에 있던 사람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화면이 꺼지고 난 다음 어디로 가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도 단견(斷見)인데, 시작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창조라는 말도 나오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종말이라는 용어도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자연의 원리를 보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냥 변화만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 창조나 종말이라는 말 자체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창조나 종말이라는 용어를 쓰고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은 창조나 종말을 논하기 전에 이미 시작과 끝이 있다는 단견을 가졌기 때문에 ‘시작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떻게 됐을까?’ 하고 창조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건 시작과 끝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전생 이야기도 나오고, 내생 이야기도 나오고, 천당 이야기, 지옥 이야기도 나오는 거예요.
또,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불평등한 일들이 많습니다. ‘왜 나쁜 짓 많이 하는 저런 놈한테는 누가 벌을 안 주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현실에서는 못된 짓을 하고도 잘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답답한 마음에 ‘저런 놈은 죽어서 지옥에 간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어차피 지옥에 갈 놈이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하고, 또 지옥에 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나쁜 짓을 조금 덜 하게 되는 효과도 있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지옥에 가는지 안 가는지는 몰라요. 다만 현실에서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좋은 인생은 아니라고 봐야겠죠.
여러분은 자꾸 오래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오래 사는 게 좋은지 안 좋은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법문 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오면 이 자리에서 법륜스님이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 보기에 법륜스님 불쌍하다고 하는데, 그게 왜 불쌍합니까? 누가 일부러 죽인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맞아 죽은 것도 아니고, 아무런 통증 없이 그냥 갔으니까 좋은 일이에요.
부모가 자는 듯 죽으면 막상 죽은 사람한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은 사람들이 아쉬우니까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사고나 재난으로 사람이 죽어도 ‘죽어서 천당 갔다’고 하는 건 위로의 말이에요. 너무 섭섭하고 마음이 아프니까 ‘좋은 나라에 갔다’, ‘좋은 곳에 갔다’ 이렇게 위로해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재물에도 연연하지 않고, 권력에도 연연하지 않고, 사는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데, 왜 굳이 죽은 다음에 연연하겠어요? 이런 이치를 아는 것이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아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연연하잖아요. 돈 10원에 연연하고, 내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에 연연하고, 회사에서 승진하는지 못 하는지에 연연하고, 차를 좋은 것 타냐 나쁜 것 타냐에 연연하고, 아파트 평수에도 연연하죠. 얼굴 생긴 것에도 연연하니까 코를 이렇게 세웠다가 저렇게 세웠다가, 볼을 깎았다가 붙였다가 하고, 머리를 이렇게 깎았다가 저렇게 깎았다가 하고, 목걸이를 이걸 달았다가 저걸 달았다가 하죠. 이렇게 연연하면 끝이 없습니다.
먹는 것에도 연연하면 이리 볶고 저리 볶고, 이 양념을 쳤다가 저 양념을 쳤다가, 비벼 먹고, 볶아 먹고, 삶아 먹고, 끝이 없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에 연연하니까 TV에도 매번 요리만 나와요. 차 마시는 데 연연하는 사람은 차 한 통에 몇 천만 원씩 주고 사고, 커피에 연연하는 사람은 좋은 커피를 찾아다니고, 담배에 연연하는 사람은 좋은 담배를 찾아다니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몇 천만 원짜리 술을 마시는 것에 연연합니다.
이렇게 연연하면 끝이 없어요. 조경에 연연하는 사람, 수석에 연연하는 사람 등 세상을 한번 보세요. 수백, 수천 가지 연연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재미를 느끼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돈을 쏟아붓고,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뭣 때문에 그러는지 이해가 안 돼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뭣 때문에 저 난리지?’ 이렇게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해서도 너무 연연하면 종교에 지나치게 의지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연연하면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법니다. 차 마시는데 연연하면 차 장사가 돈을 벌고, 커피에 연연하면 커피 장사가 돈을 벌고, 죽음에 대해 연연하면 종교인들이 돈을 벌어요. 재(齋)를 지내준 다음 천만 원 내라, 얼마 내라, 이렇게 하면 거기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돈을 낼 거잖아요. 장례 절차에도 연연하면 또 누가 장례 절차를 잘 꾸민다, 꽃가마를 잘 만든다, 이렇게 해서 돈을 벌게 됩니다. 결혼식에 연연하면 결혼식 하는데도 돈이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뭐든지 의미를 부여하고 연연하게 되면 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뭐라고 그랬어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 장례를 어떻게 치를까요?’하고 여쭸더니 ‘그건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할 테니 수행자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여러분도 누가 ‘죽은 뒤에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어보면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어떨까 싶어요.
이렇게 말하면 ‘죽어서 어디에 가는 게 아니면 굳이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하고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선 스님의 이야기는 내생이 있다,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창조와 종말이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빚어지는 것처럼, 내생이 있다, 없다는 생각 자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근원인 두려움을 해결해버리면 더 이상 그런 질문 자체가 필요 없어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왜 비가 옵니까?’ 이런 질문을 안 합니다. ‘용이 정말 비를 내립니까?’ 이런 질문도 안 하잖아요. 용이 비를 내린다고 하니까 ‘용이 어떻게 해서 비를 내립니까?’ 이런 질문이 생기는데, 용이 비를 내린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니까 용이 어떻게 비를 내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안 생기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질문이니까 근원적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면 그다음 질문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알아듣는 사람들은 ‘스님은 내생도 부정하고, 윤혜도 부정한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건 스님의 법문을 제대로 듣지 않은 거예요. 뭔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인해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공(空)의 차원에서는 늘 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공의 차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세계에서 무슨 양반이 있고 쌍놈이 있으며, 어떻게 남자가 잘나고 여자가 못났겠으며, 어떻게 인물이 잘생긴 사람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고, 인물이 못생긴 사람은 전생에 죄가 많은 것이겠어요?
도대체 잘생김과 못생김의 기준이 어디에 있어요? 만약 원숭이가 사람을 본다면 원숭이가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사람이 잘생겼다고 생각하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것도 다 자기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거기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듣고 보고 자라고 느낀 데서 기준을 만들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얘기예요. 그 마을에서 벗어나 버리면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동산이니 동산이 아니니 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마을에 살면 동산이라는 걸 증명하려고 동네 사람한테도 물어보고, 책도 뒤져보고, 관측도 해보고 난리를 피웁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가르침은 이런 것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거예요.
막상 연연하며 사는 현실에서는 이런 기준들을 부정하면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그런 게 전혀 없는데도 뒤죽박죽 안 되잖아요. 풀들을 한번 보세요. 씨가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데도 싹이 날 때 뒤죽박죽 되지 않습니다. 먼저 떨어진 씨가 싹을 틔우면 다른 씨들은 땅에서 싹을 안 틔웁니다. 그 풀이 죽으면 그다음 밑에서 다시 싹을 틔워서 나오고, 그게 죽으면 또 밑에서 싹을 틔워서 나와요. 여러분들은 풀이 죽으면 그게 끝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땅 아래에 씨앗이 많이 있다가 서로 봐가면서 싹을 틔우는 거예요.
저는 요즘 공항에 가면 이런 걸 많이 느껴요. 공항에 짐을 찾을 때 기계가 돌면서 짐을 찾게 해 주잖아요. 옛날에는 짐이 있는데도 그 위에 다른 짐이 얹혀서 나왔는데, 요즘은 기계에 센서가 있어서 기다렸다가 짐이 지나가고 빈자리가 생기면 그때 짐을 놓습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과 비슷하죠.
여러분들도 제법이 공한 도리를 조금 더 깊이 자각하고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니까 ‘창조를 누가 했을까,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했다는데 불교에서는 누가 시작했다고 하지?’ 이렇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건 시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질문인데, 불교에서 창조 이야기를 안 하는 이유는 불교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창조니 종말이니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죠.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은 우선 덮어두세요. 그런 다음 또 공부하면서 듣다가 이해가 되고, 또 의문이 생기면 질문하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다시 덮어놓고, 이렇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뭐든지 억지로 믿으려고 하거나, 억지로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학교 공부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인생에 뭘 이런 공부까지 자꾸 억지로 하려고 해요. 그러니 조금 편안하게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