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쉬메리골드(Mash Marigold):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이름이요?”
“네. 그쪽이 쫓아왔던 사람 이름이요.”
겨우 찾아낸 카페에서 놈과 마주 앉자마자 내가 꺼낸 말은 그 남자의 이름을 묻는 것 이었다. 그러자 앞에 앉은 놈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는데요?”
“중요한 거라 그래요. 부탁할게요. 이름 알려주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당황했던 놈이 금세 표정을 굳힌다. 카페 안에 들어와서까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고민하는 듯 해 보였다. 그러다가 곧 결심했는지 등받이에 기대었던 몸을 앞으로 끌고 오더니 이쪽으로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몸을 밀착시켜 놈 쪽으로 기울었고, 동시에 그 입에서 말 하나가 터져 나왔다.
“그 새끼 이름 묻는 거면,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거네?”
뭐야. 이 새끼 반말하고 있다, 지금 나한테. 기분이 나빠서 얼굴을 찡그리니 갑자기 놈이 입술 끝을 위로 올려 곡선을 그린다.
“사실 내가 그쪽한테 물을 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냐는 거 였거든요. 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그쪽이 말하는 걔가 내가 이름을 묻는 남자라면, 봤어요.”
“있잖아요. 지금 그쪽이 봤다고 말하는 거 굉장히 위험한 발언인 거 알아요?”
무슨 말 하는 거야. 전혀 대화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놈이 너무 답답해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도움 좀 받으려고 했더니 이건 되레 내가 당하는 기분이다. 짜증이 치밀어서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살짝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이왕 여기까지 말한 거 끝까지 해 보자는 심보로.
“오랫동안 연락을 못 한 친구 하나가 있는데, 그 남자가 그 친구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름을 묻는 거예요. 맞는지, 아닌지 확인 좀 하려고.”
내 말에 검지로 일정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던 놈의 손길이 멈추었다. 약간 숙여져있던 고개가 서서히 들리더니 나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비록 놈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날 쳐다보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놈이 갑자기 몸을 뒤척였다. 전화가 온 모양인지 핸드폰을 꺼내어 액정을 확인하더니 전화를 받는다.
“어.”
미쳤냐? 곧바로 오라고 했잖아!!!
스피커폰으로 해놨는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내 쪽까지 들려왔다. 전화를 받던 놈도 시끄러웠는지 잠깐 동안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더니 다시 붙이고는 말을 잇는다.
“나 버리고 간 게 누군데. 그리고 뭐…사정이 생겼어. 넌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벌써 집이지!! 너, 그 근처 아니지? 벗어나 있는 거야?
“야, 에스.”
……뭐야, 너 누구랑 있는데.
“집에 가서 얘기해 줄 테니까 자지 말고 있어.”
알았어. 심각한 거 아니지?
“바보냐? 내가 심각할 때 전화를 받게?”
누가 바보야! 이 새끼가! 너 오기만 해 봐!!
놈이 뭐라 더 지껄여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하더니 이내 통화를 끝낸다. 도대체 언제 말 해 줄 거야. 점점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어서 몸에서 열이 날 지경이다. 답답해서 목도리를 풀어내려고 손을 움직이자 갑자기 내 앞으로 명함 하나가 놓여졌다. 명함 위에 쓰여진 글씨를 읽다가 어이가 없어서 놈을 쳐다봤다.
명함엔 굴림체로 작게 시크릿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밑에는 더 작은 글씨로 번호 세 개가 적혀있었다.
“내가 일 하는 곳. 그리고 방금 전화 온 내 친구도 일 하는 곳. 또 그쪽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일 하는 곳.”
“확실히 설명해요. 답답하게 하지 말고.”
짜증이 한계치에 다다른 내 말에 갑작스레 놈이 웃는다. 한심해 보여서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곧 웃음을 멈추고는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다.
“이름이 궁금하다고 했죠? 이름은 에스.”
“…….”
“진짜 이름일까요? 가짜 이름일까요? 참고로 내 이름도 에스, 방금 나랑 통화한 멍청이 이름도 에스.”
“…….”
“거기 적혀 있는 번호 세 개 중에 그 쪽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에스 번호도 있어요.”
점점 낮아지는 목소리에 내 표정도 굳어졌다. 처음 본 놈의 눈은 날카로웠다. 머리카락이 눈을 덮을 정도의 길이라서 자세히 보진 못 했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해요.”
“내가 언제 도움 필요하다고 그쪽한테 말한 적 있어요?”
“필요 할 것 같아서 알려준 건데. 친구 찾는다면서요. 근데 그 친구가 우리랑 같이 일하는 애라면서요.”
“그럴지도 몰라서 물었잖아요, 이름.”
“이름은 이미 알려줬는데. 어때요? 친구 맞아요?”
씩 웃으며 말하는 녀석의 얼굴을 발로 꾹꾹 밟아주고 싶었다. 나 정말 많이 참네. 대단하다. 박수 쳐 주고 싶은 심정이야.
“네. 맞네요.”
나 역시도 웃으면서 대답하자 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항상 들어왔던 말이지만 나는 말을 참 재수 없게 하는 특기가 있다.
“같이 일 한다고 했죠?”
“…….”
“무슨 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친구들이랑 일하는 곳 좀 데려다 줬음 하는데.”
“…….”
“친구를 만났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요. 부탁 좀 할게요.”
“…….”
“내 친구랑 이름 같은 에스씨.”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놈과 나의 두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
케일에게 팩스로 시안을 넘겨주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예상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에 Bar에 들어섰다.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코스모폴리탄 한잔을 주문하고는 방금 전 까지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미안한데요. 우리가 활동 스케일은 큰데, 일하는 곳이 알려지고 그런 쪽은 아니라서. 데려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 따위 말이 나오나 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곧 녀석의 입이 움직이는 것으로 호기심을 잠재웠지만.
의뢰를 받아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오늘 하루 애인이 되어주세요, 사람을 좀 찾아주세요…등등. 세상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스스로 찾고, 찾아내서 의뢰를 해요. 물론 우리들은 꽤 까다로워서 페이도 꽤 세요~ 그리고 의뢰 받는다고 해서 모든 일을 하는 건 아니죠. 근데, 이 바닥에선 우리 쪽 이름 대면 대부분 알던데… 그 쪽 여기 처음이에요?
앞에 놓여진 칵테일을 가볍게 입 안으로 털어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한다는 거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한테 의뢰를 받고, 그 의뢰 받은 것들 중 선정해서 도움을 준다고? 세상에 그런 일을 하는 새끼들도 있단 말이야?
찾고 있는 친구, 우리한테 의뢰하면 찾아 줄 수 있어요.
내가 찾는다는 그 사람이 당신들하고 함께 일하고 있다고 말 했을 텐데요.
의뢰를 하지 않는 이상 우리를 따로 만나는 건 불가능해요.
…….
의뢰는 명함에 적힌 세 번호 중 한 번호로 전화하면 되요. 누구를 만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정확한건 전화로 설명 드릴 거예요. 먼저 일어나도 되죠? 내가 지금 좀 급한데….
가지런히 피고 있던 오른손을 나도 모르게 꽉 쥐었다. 사람 갖고 놀려? 유명해? 스케일이 커? 지랄도 병이라던데, 병자새끼 하나가 병원에서 탈출 한 거 아니야? 점점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펼쳐갈 정도로 놈의 말은 실로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아까 그 좁은 길에서 나를 스쳐가던 남자가 떠올랐다. 모자로 얼굴도 가렸고, 가로등빛도 너무 희미해서 제대로 보진 못 했지만, 날 스쳐 갔을 때 그 향기만은 아직도 선명하다. 이 목도리에서 나던 것과 동일했다. 향수 따위가 아니야. 그 애가 지니고 있는 향기니까 어느 누가 어설프게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손으로 머리를 쓸다가 문득 녀석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저기요.”
재즈의 선율을 타고 흘러가는 내 목소리에 잔을 닦던 남자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크릿이 뭐예요?”
“시크릿이요?”
“네.”
“비밀이잖아요.”
“제가 설마 뜻을 몰라서 물었겠어요?”
내 말에 남자는 조금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내 시선에도 잘 모르겠는지 잔을 닦던 두 손을 내려놓은 채 고민을 하는 듯 해 보였다. 뭐야, 꽤 유명하다며.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혀로 입술을 훑고는 칵테일을 다시 한 번 입 안에 털어냈다. 그리고 그 때.
“시크릿…? 거기 일하는 사람들이 몽땅 이름이 같은 곳 맞죠?”
나와 두 자리 떨어져서 앉아 있던 여자가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물어왔다. 말투를 보니 뭔가를 아는 거 같아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내 끄덕임에 여자는 갑자기 뭔가 굉장히 흥미로운 일 이라도 생긴 것 마냥 조잘조잘 입술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 하던데. 나도 말만 들었는데요. 거기 일하는 사람들한테 뭘 부탁하면 그걸 이뤄준다거나 뭐 그러나 봐요.”
“…….”
“사실 내 친구들도 몇 번 의뢰하려고 그 사람들을 만났었는데, 하나같이 검은 모자로 눈을 가리고는 자기 이름은 뭐래더라, 그 뭐였지.”
신나게 떠들던 여자가 기억을 못 해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에스… 라고.
“그래요! 맞아! 이름이 그거였어요. 외국인도 아니고, 알파벳 s를 이름으로 했더라구요?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든 내 친구 중에 세 명이 그 놈들 얼굴 보려고 따로 만나서 의뢰를 했는데, 죄다 거절만 당했대요. 하긴 내 친구들이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긴 했어요.”
“…….”
“친구 셋이서 그 얘기를 하는데 다들 다른 놈을 만난 모양이더라구요. 근데 이름도 똑같지 모자도 똑같지 키도 비슷한가봐요. 잠깐 자기 이름을 말할 때 모자를 벗으면서 말을 한다는데 친구들 말로는 곧바로 다시 쓴대요. 눈빛이 어찌나 무섭다고들 하는지. 뭐, 거기서 일 하는 사람들이 몇인지도 모르겠다던데. 의뢰 한 거 허락해 주는 사람들도 꽤 상류층 사람들 인 걸로 알고 있어요.”
“혹시 친구 분들도 명함 같은 거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준.”
“한명이 가지고 있을걸요? 그 애 덕분에 나머지 두 명이 번호 알아낸 거로 알고 있어요, 난.”
“…….”
“근데 웃긴 건. 삼일 후인가 다시 전화 걸었을 땐, 이미 세 개 번호 다, 없는 번호라고 했다는 거예요.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그 일 하는 사람들 위험한 일도 많이 한다고 했는데… 뭐 그건 정확한 것도 아니고.”
여자는 자기가 알고 있던 시크릿의 관한 모든 정보를 입으로 쏟아냈는지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보다는 여자들 사이에서 더 유명한 것 같고.
한숨이 나왔다.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다. 시크릿이건 뭐건 이따위 명함 찢어서 개나주면 그만이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이란 말이다.
하지만, 너와 관련되어 있다. 네가 이곳에 있다. 내가 어째서 너란 존재 때문에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실 하나가 내 머릿속을 몽땅 헤집어 놓고 있었다.
**
머리아파. 웬만해선 과음 하는 편이 아닌데, 어제는 무작정 부어라 식으로 마셨다. 집 찾아 온 것도 신기할 정도로.
일주일이 흘렀다. 정확히 말해서 그 말도 안 되는 명함을 받은 지 일주일이 흘렀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그 애와 재회 아닌 재회를 한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 안에서 나는 다음 날이면 항상 되돌아오는 질문을 내 스스로 에게 하곤 했다.
어떻게 할 거야? 만날 거야? 도대체, 네가 원하는 건 뭐야? 그 애를 찾아서 어쩌자는 거야? 찾아서, 네게 도움이 되는 건 뭐가 있지? 왜 이렇게 까지 고민을 하는 거야?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찾아오는 통증에 다시 몸을 뉘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워서 본 천장이 너무 하얘서 눈이 부셨다.
학창시절부터 나는 내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생각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고, 타인과 말을 섞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허울 좋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대던 주변 인물들은 온통 나에게는 짜증 대상 1호였다. 일정 수준 이상의 짜증에 도달하면 속에서부터 거북함이 밀려와 항상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곤 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그 때는 내 수 많은 다른 감정들을 컨트롤하기에도 바빴기에 그 정도쯤은 감수해야 했다. 지금에 와서는 조절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관심을 갖고, 어쩌면, 친구가 될 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 한 녀석이다. 처음 그 애가 나에게 말을 걸어 왔을 때는 다른 애들과 같이 똑같이 대했다. 그러나 듣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내 말에도 그 애는 웃었다. 나를 먼저 생각해 줬다. 위선이라고 생각 했다. 저런 거 하나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녀석은 내 곁에도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아직도 마지막으로 본 그 애의 눈동자가, 물기가 가득 서려있던 그 눈동자가 아직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내 앞에서만은 항상 웃던 녀석이었다. 그러나 그 때 그 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래서, 잡지 못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에서라도 찾고 있는지 모른다.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보고 싶다. 아주 어렸을 적 이후로는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매일 같이 꿈꾸던 자리에 올라와서도 보고싶다는 생각은 점점 커져만 갔다. 강한 끌림이었다. 항상 계산적으로 생각만 해오던 나에게는 본능과도 같은 끌림. 그립다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에 못 이겨 결국은 여유를 빌미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물론 돌아온 이유가 그 애 전부는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파리에서 지내온 생활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타인을 대하는,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내가 상당히 변했다. 물론 내 주위 사람에 한에서만 말이다. 병적으로 얼굴이 알려지는 걸 꺼려하는 내 까다로운 성격 덕분에 방해 받지 않고 꽤 편하게 생활했다.
그토록 바라던 성공이었고, 바라던 위치에 올랐다. 나는 앞으로 더욱 더 성장할 것이다. 젊었고, 또, 내 인생에선 전부인 일이니까.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많은 감정이 흘러나왔다. 삼켜두었던, 답답하게 쌓여져있던.
그 애를 생각하다가 자연스레 예전 기억들까지 모조리 쏟아져 나왔다.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그 끔찍한 사람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살짝 감았던 눈을 세게 눌러 버렸다.
악몽이었음 했던, 그 기억들이 파편처럼 흩어져간다.
겨우 씻고 나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뉴스가 한창이다. TV에서 나오는 한국어는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내 스스로가 한국말을 하고 있으면서.
-국회의원 주00씨 딸… 피살… 00호텔…….
호텔. 순간 머릿속에서 그 애가 떠올랐다. 샤워를 하는 내내 생각했다.
녀석과 만나야 한다.
테이블에 커피 잔을 올려 두고는 지갑에 넣어두었던 명함을 꺼내었다. 뭐지? 내가 언제 이걸 구겼었나? 억지로 펴낸 자국이 선명한 명함을 쳐다보다가 어제 술을 먹고 했던 짓이 떠올라서 인상을 찌푸렸다.
버릴거면 버리던가, 미련 남은 것처럼 구겨놓고는 왜 또 폈던 거야. 괜히 찔려서 고개를 저어내고는 핸드폰을 들어 세 개의 번호 중 가장 아래 적혀 있던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누가 받는지는 모른다고 했지. 모 아니면 도지 뭐.
한참의 신호음이 가고, 어울리지도 않게 초조한 기분에 머리를 두어 번 쳐냈다. 그리고 그 순간.
네.
누구지. 목소리를 모르겠다. 난생 처음 내 스스로 병신이란 생각을 했다. 미치겠다. 어떻게 목소리를 기억 못 해?
말씀 하세요. 누구십니까.
그렇게 혼자 자책을 하다가 연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떨리는 입술을 떼어냈다. 아, 주책맞다 정말. 떨린다니.
“의뢰를 좀,”
…….
“하려고 하는데요.”
말을 꺼냄과 동시에 내 얼굴엔 나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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