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웅이 되어라! 대학회④~72p ㅡ'청년학회'의 여명 미래상을 그릴 수 없고 정체된 사회에서 이케다 SGI 회장은 한 사람과 유대를 맺고 젊은 생명에 울림을 주었다. "그대가 곧 미래! 그대가 바로 다음 세대를 짊어질 힘!" 이라고. 1968년. 세계의 대학분쟁으로 상징되듯, 학생들은 기성의 권위와 권력 그리고 기성의 사회구조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 그 다음'이 없었다. 반대는 외쳤지만 창조와 건설이 없었다. 이윽고 대학분쟁이 마지막까지 달린 후에 남긴 것은……. 세계적인 정신의학자가 이렇게 분석했다. "오늘날의 세대, 현대의 청년에게는 이제 어떠한 이상적인 상(像)도 없습니다." (V. E. 프랭클) 다음 세대의 가슴에 뚫린 '체념'이라는 구멍이 넓혀지고 있었다. 그들이 포기한다면 다음 세대는 어둠이다. 변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케다 회장은 열중했다. 한 사람 그리고 다음 한 사람에게. "당신은 결코 작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당신이 바로 보배와 같은 존재입니다. 무한한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여명과 같은 사상이다. 회장은 멀리 돌아가는 듯 보여도 착실하게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지방의 첫 대학회를 간사이 땅에 결성하셨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지요. 제가 처음으로 선생님을 뵌 때는 1961년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넘치는 박력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은 의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이제 마음을 정합시다. 나와 함께 살고 살고 끝까지 살아갑시다!"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당시 저는 입회한 지 3개월째였습니다. 학회가 뭔지, 신심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껴 '평생 따라가자'고 다짐했지요. 이후 바라던 것은 오직 하나. 한 사람이라도 많은 벗을 선생님과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대학회 결성은 가장 큰 기쁨이었지요. 저희에게 깊은 추억으로 남은 한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1963년 10월이었습니다. 도시샤대학교의 교수가 출판한 책에, 사실을 잘못 인식하고 선입관만으로 학회를 비판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그 교수가 캠퍼스에서 책 내용에 관한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강연회 당일 질의응답을 할 때였습니다. 도시샤대학생 여러명이 "저는 창가학회 멤버입니다." 라고 일어서서 교수의 몰인식에서 비롯된 생각을 학생답게 도리에 맞게 논파했습니다. 자진해서 당당하게 말하는 벗의 모습에 감동 했습니다. 대학회 결성은 청년다운 정의로운 마음을 감지하신 결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교내 멤버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낮 12시 30분, 이케다 회장이 간사이본부 신관 3층 강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은 멤버들과 함께 근행을 하고 이어서 대학별로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멤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정식으로 교토대학회와 나란히 도시샤대학회를 발족합니다. 축하합니다." 회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편안하게 하세요. 모두 편하게. 근행할 때만 바르면 되니까요." 모두 웃었다. 회장은 형처럼 솔직하고 가식이 없었다. 더구나 회장이라는 직책을 느낄 수 없었다. 스스럼 없는 따스함이, 멤버들에게 있는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어뜨렸다. 저는 대학에 갓 입학한 1학년생이었습니다. 당시는 전국에 대학분쟁의 폭풍이 휘몰아쳤고, 캠퍼스에서는 대학 자체가 엘리트를 낳는 존재인데 민중과 '차별'을 만드는 데 가담하는 것이 아니냐, 가해자가 아니냐 하는 논의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저 자신도 대학에 진학한 의미를 자문자답했습니다. 그런 망상을 단숨에 날려버리듯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의미는 후에 반드시 알게 됩니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에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실하게 인재육성을 하고 싶습니다. 10년, 20년 뒤 광선유포를 총마무리 할 인재를 이 속에서 육성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육성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심정입니다. 그것이 이 대학회의 목적입니다." 그 열정에 빨려들듯 '그래, 선생님을 따라 나아가자. 광선유포라는 이상을 향해서!' 라고 결심했습니다. 목표가 명확해지고 눈앞이 밝아진 기쁨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이케다 회장의 말은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나와 함께 광선유포라는 위업을 향해 전진하기 바랍니다. 특히 간사이가 중요합니다. 간사이는 지방의 대표로서 모든 의미에서 '아성(牙城)'입니다. '인재의 보고(寶庫)' 입니다. 그리고 '광선유포의 챔피언'이 나오는 곳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사실 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그러한 긍지와 자신감을 품고, 원대한 희망을 안고서 나아가기 바랍니다." 당시 저는 세이쿄신문 체험담을 담당하는 기자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감동받은 일은 어머니와 둘이서 음식점을 꾸려가는 청년을 격려하신 이케다 선생님 모습이었 습니다. 청년이 처한 상황을 가만히 듣고서 "당신은 성공할 얼굴입니다. 도쿄 진출을 목표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때는 먹으러 갈께요."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대화는 개인지도의 본보기였습니다. 우선 철저하게 듣는다. 그리고 단순한 격려가 아닌, 희망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한마디 한마디에 자애가 담겨 있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반드시 일어서게 만들겠다.'는 기백에 넘친 눈빛. 선생님은 격려를 통해 우리에게 '학회의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한 청년이 손을 들었다. 어머니가 입회했지만 아버지는 신심을 몹시 반대하고 있고, 누이가 병에 걸렸다고 한다. "어머님이 제일 힘드시겠군요." 회장은 청년이 이야기하는 가족 상황에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었다. "자네는 아버님을 어떻게 부르나요?" 하고 물었다. 청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완강한 목소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느껴졌다. 그러자 회장은 "자, 이것을 아버님께 드리세요."라고 격려품을 청년에게 건넸다. "회장이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자네가 주는 거라고 하면서 드리세요." 청년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간파한 회장은 자상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달라지세요. 처음에는 연기라도 좋습니다. 효도하세요. 용기를 내세요. 주역을 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헤아리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좋은 의미에서 자식 위에 부모를 태울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은 웃는 얼굴로 집에 돌아가십시오." 청년은 고개를 숙였다. 회장은 말을 이었다. "어머님을 소중히 하십시오. 아침부터 밤까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하는 거예요. 알겠지요? '회사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하고 말이지요. 그렇게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세요." 청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제목을 열심히 부르십시오. 자기 신심을 철저하게 실천하세요. 자신이 성장한다, 자신이 성공한다, 그러고 나면 부모님이 바뀝니다. 그리고 오늘 모인 동지에게서 절대로 멀어지지 마세요. 그렇게 10년이 지나면 지금의 상황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변할 것입니다." "예." 청년은 눈시울을 적시며 고개를 들었다. 결성 장소에는 일찍이 이케다 회장에게 이렇게 지도받은 학생이 앉아 있었다. "자네는 용기가 없는 얼굴이네요. 용기가 없는 사람은 한번뿐인 인생에 반드시 후회를 남깁니다. 용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기다려도 절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용기는 나오는 게 아니다. 내야 한다.' 입니다." 이날 대학회 결성을 분수령으로 그 학생은 결의하고 포교에 도전, 우인 5명이 입회했다. 4년 뒤, 그 학생이 회장과 재회했을 때였다.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학회의 자식이 되었군요. 자네와 처음 만나고 벌써 10년이 됐군요." 회장은 잊지 않는다. 한사람 한사람을. 한사람 한사람과 맺은 만남을.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이 지나온 성장의 궤적을. 회장은 말했다. "나는 한번 만난 사람은 끝까지 격려합니다." 제가 이케다 회장을 처음 뵈었을 때는 대학회가 결성된 해 1월 2일이었습니다. 기념촬영를 했는데 그때 선생님은 제게 "아버님은?" 하고 물으셨습니다. "전사했습니다." 라고 답하자 "그렇군요. 그러면 앞으로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든 의논하러 오세요." 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감동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리고 반년 뒤, 대학회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날은 기이하게도 아버지 기일이었습니다. 제게는 생애 잊지 못할 날이 되었지요. 훨씬 훗날(2000년), 간사이를 방문한 선생님이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아버님이 전사하신 곳은 어디인가요?" 깜짝 놀랐 습니다. 30년 이상이나 지났는데 선생님은 아버지를 기억하셨습니다. "필리핀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연수원에 아버님을 위한 기념식수를 해드리고 싶군요."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뜨거운 것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희유의 스승을 만난 기쁨을 이때만큼 강하게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교토에서 대학회가 결성된 다음 날인 7월 24일. 오사카대학교와 고베대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대표가 오사카 간사이본부 신관에 모였다. 저녁 7시 반, 이케다 회장이 입장해서 근행한 뒤 로비에서 기념촬영를 했다. 모두 3층 강당에 모이자 기다렸다는 듯 회장이 말을 꺼냈다. "고베대학교, 그리고 오사카대학교 대학회를 결성합시다!" 흉금을 털어놓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도 바쁘겠지요. 학회는 성미가 급해서 말이에요. (웃음) 아니, 성급한 게 아니라 민첩하지요. 나이 든 사람의 경우에는 조급 한가. (큰 웃음)" 바짝 긴장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밝은 분위기가 촉발 되었는지 멤버들이 함성을 질렀다. "선생님! 고베대학교를 보러 와주시겠습니까?" "보러 가고 싶군요." "고베의 야경이 아름답습니다." "야경도 보고 싶네요. 그래도 여러분은 야경만 보지 말고 책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폭소)" 당시 저는 대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만난 이케다 선생님께, 불법(佛法)에서 설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의 관점에서 분자생물학과 양자론에 대한 질문을 준비해서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의 인격을 접하고서 질문 이상의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감동에 잠겼습니다. 일반적으로 '회장'이라고 하면 과장된 느낌이 있지요. 그러나 선생님은 말 그대로 '인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컸습니다. 게다가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불가사의한 마음이 가득 찹니다. 이날을 계기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선입관 없이 자연스런 모습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좌담회가 시작됐다. 멤버들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케다 회장을 에워쌌다. 회장은 한사람 한사람과 시선을 나누면서 말했다. "여러분과 추억을 만들고 성장시키 면서 인생을 위대하게 총마무리 하는 궤도만큼은 타게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염원입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 여러분이 나와 함께 광선유포라는 숭고한 사업에 도전하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해주고 싶습니다. 응원하고 싶습니다." 회장의 말은 정열에 넘쳤다. 그러나 강요는 없었다. 철저하게 상대방의 자발을 이끌어내는 대화였다. "난숙(爛熟, 더할 수 없이 충분히 발달해서 쇠퇴의 조짐까지 함축한 상태)하고 정체된 사회에서 안온하게 가족주의로 끝나기보다, 광선유포라는 말법만년의 건설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쪽이 청년다운 보람이 있다고 나는 생각 합니다. 어떻습니까?" "예!" "그런 의미에서 함께 열심히 했으면 합니다." "예!" 결의에 찬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회장은 말을 이었다. "여러분 중에도 자신이 지금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등등이 광선유포를 위해 도움이 될까 하고 고민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몇몇 사람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회장의 확신에 넘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도움이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를 여의고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남자는 모두 대학으로"라는 지침을 가슴에 품고 대학진학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대학분쟁이 한창이던 시절. 고베대학교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책상을 쌓아올려 마치 공사현장 같았습니다. 수업은 휴강이 되고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가정형편도 어렵고 전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학생시절을 보내서 무슨 이미가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속에 대학회가 결성됐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부아가 치미는 경우나 싫어질 때도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당면한 문제,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한 문제에 고민하는 시대는 있는 법입니다. 고민 한다는 것은 청년이 청년다운 까닭입니다. 거기에다 제목만 부른다면, 묘법(妙法)이 깨끗하게 정해줄 것입니다. 그 고민은 자연히 변독위약(變毒爲藥) 됩니다. 누구나 거치는 길입니다. 지금 자신 앞에 놓인 과제에는 인내심 강하게 분발하십시오." 저도 모르게 "예!" 하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에 광명이 내리쬐는 듯한 기분 이었습니다. 겨우 대학생활의 출발선에 섰습니다. 그날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격려품을 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전해드리자 어머니는 울면서 기뻐하셨습니다. 2003년에 어머니는 타계하셨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던 중 그 속에 결성식 날 받은 물건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선생님의 진심을 가슴에 안고 전진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60여명이 모인 회합이었지만 이케다 회장의 대화는 일대일이었다. 어느새 회합 종료 시간이 다가왔다. "그럼 또 만납시다."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어떤 멤버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사카대학교의 노래를 들어주십시오." "좋습니다. 불러보세요." 라고 회장이 응하자 오사카대학회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날을 위해 연습한 노래를 시작했다. 아아, 여명은 가깝도다 아아, 여명은 가깝도다 일어나라 나의 벗, 자유의 아들 제릉산하(帝陵山下)의 열혈아 간악(侃諤)한 논변 땅을 뒤흔들고 철인(哲人)의 목소리 사라지려 하네 …… 오사카고등학교 기숙사 노래인 '아아, 여명은 가깝도다'였다. 합창이 끝나자마자 회장은 박수를 보내며 "좋은 노래군요. 나도 배우고 싶네요. 이 노래 참 좋습니다. 청년부에서 부르면 좋겠군요." 라고 제안했다. 오사카대학회 멤버들 얼굴에 기쁨과 웃음이 번졌다. 또 회장은 "1절만, 이번에는 앉아서 부르세요."라고 요청했다. 노래가 끝나자 "좋은 노래네요. 4절은 부를 줄 아나요?" 라고 물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면 다시 "자, 이번에는 3절!", 또 끝나면 "5절, 6절도 참 좋군요, 부탁합니다!"라고. 우리가 노래를 끝내자 이케다 선생님은 가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아아, 여명은 가깝도다' - 광선유포입니다. '일어나라 나의 벗, 자유의 아들' - 이것은 동지. 자유의 아들은 지용보살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 대학부여, 우리 동지여, 우리 청년부여, 그리고 지용의 자식이여' 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가사를 불법 관점에서 말씀하셨지요. 모두 얼굴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제릉산하'는 오사카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 이 가사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청년부를 지도하세요.' 라는 뜻이네요. 오사카가 진정한 '열혈아'라는 말입니다. '간악(거리낌 없이 의견을 나누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것)한 논변' - 교학입니다. '철인의 목소리 사라지려 하네' - 지금까지 나온 철학자는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철학으로 여명의 광선유포를 향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대 걱정에 우리는 울고 내 기쁨에 그대는 춤춘다' - 이는 동지애의 극치다."라고. 그리고 "나도 배워야겠어요. 돌아가는 전차에서 배워야지……." 선생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니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제11회 대학부총회에 모인 1만 수천명의 학생들 앞에서 우리는 '아아, 여명은 가깝도다' 를 힘껏 불렀습니다. 그 뒤에 등단한 이케다 선생님이, 저 역사적인 '중일국교정상화 제언'을 발표하셨지요. 제언은 곧바로 중국으로 타진되어 국교정상화의 새로운 조류가 생겼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역사적인 자리에 불러주셨습니다. '그대들이여, 세계평화의 새벽을 열어라!' 라는 기대를 보내주신 것이라고 절절하게 느꼈습니다. 간담회 도중에 이케다 선생님이 계속 기침을 하며 "등이 아프군요."라고 하셨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저는 일어서서 기침이 가라앉을 때까지 등을 문질러드렸습니다. 선생님은 "고마워요. 젊을 때 가슴을 앓아서 계속 미열이 나는 경우가 있네요……. 신심을 해도 400킬로그램의 짐을 짊어지면 피곤한 것은 도리니까요."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러나 기침이 멎자마자 굉장한 기세로 한사람 한사람의 질문에 답하고, 상대의 생명을 뒤흔드는 격려를 계속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당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며 인재를 육성하셨지요. '선생님의 대성실에 보답해야 한다.'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더욱 활기 넘치게 유머를 섞어 멤버들과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타인을 안심시키는 사람이 불법자(佛法者)다." 라는 말은 회장의 일관된 철학이다. "홋카이도로 말하자면 맛있는 게가 잡히지요. 그런데 문어는 없나요?" 회장의 물음에 모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왜 문어일까? 게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있습니다. 구시로에서 잡힙니다."라고 어떤 학생이 대답했다. 그러자 회장은 "그럼 문어는 무엇을 먹는지 아나요?"라고 물었다. 저는 어부의 집에서 자란 탓에 이케다 선생님 질문에 "게입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래요. 그래서 게가 있는 홋카이도에 문어가 없다는게 이상했지요."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잘 알고 있네요. 자네 집은 어업인가?" 하고 알아챈 뒤 저를 "미스터 문어"라고 부르셨지요.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유머와 친숙해지기 쉬운 홋카이도에 관한 화제 덕분에, 모두 생명이 가벼워졌지요. 그래서 저마다 앞다투어 손을 들고 활발하게 질문을 시작 했습니다. 흉금을 터놓고 맞아들이고, 상대의 마음을 열고 감동시킨다, 선생님은 소통하는 대화방식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게와 문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든 깊이 파고들어 사색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과 하나를 놓고도 왜 빨개졌을까, 하고 깊이 사색하고 조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교재 같은 것이 없이도 최고의 공부가 됩니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선생님은 "고민하고 고민하고 철저히 고민해서 어떻게 나아갈 것이냐, 스스로 제목을 부르고 완벽하게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루어내면 강해집니다." 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철저히 고민하고, 깊이 사색하고, 끝까지 기원하고, 철저하게 행동에 옮기는 신심의 자세를 가르쳐주셨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나도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바로 사제(師弟)의 길이 있습니다. "가장 힘든 점, 고민이 되는 점을 기원하십시오." 이케다 회장은 그렇게 지도하고 멤버들과 근행을 했다. 이어서 대학별로 기념촬영을 했다. 기념촬영을 할 때 이케다 선생님 바로 옆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선생님이 제 학업 상황을 물으셨지요. "지금 대학원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박사가 되겠습니다." 라고 제 결심을 말씀드렸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그래요. 열심히 공부하세요." 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이후 대학부 활동과 연구소 생활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해내어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돌아보면 절실하게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스승께 승리한 보고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투쟁할 때, 포기하려는 마음이나 자기의 약한 마음을 이기는 힘이 용솟음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인생을 여는 최고의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기념촬영이 끝나고 이케다 회장을 중심으로 간담이 시작됐다. "홋카이도대학회, 무로란공업대학회, 홋카이도교육대학회로 명명하고자 합니다. 찬성하는 사람!" 모두 씩씩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회장은 말했다. "나는 속도가 빠릅니다. 따라온다면 모두 20년 뒤에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모두 여러분의 자각으로 결정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면 됩니다. '하겠다'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저를 보자마자 "어디 아픈 데는 없습니까?" 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위장이 약해, 쉬 피곤해지기 쉬운 체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감싸 안듯이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나도 자네 나이 무렵에 결핵을 앓았지요. 그러나 이 신심으로 완치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숙면을 취하면 반드시 건강해 집니다." 선생님 목소리의 울림으로 저는 달라졌습니다. 실은 '태어날 때부터 그랬 으니까…….' 하고 좋아지는 길을 체념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좋아진다!" 는 확신에 찬 목소리가 '낫는다.'는 희망과 '완치하겠다.'는 다짐을 끓어오르게 했습 니다. 확신으로 말한다.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을 가르쳐주셨지요. 어떤 학생이 이케다 선생님께 청원했습니다. 도쿄에서 열리는 대학부총회 뒤에 지방 멤버와 교류좌담회를 열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생각이군요. 그런 의견은, 늘 학회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나옵니다. 책임감에 선 사람에게는 지혜의 폭풍이 불지요. 책임감이 없는 사람에게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런 의견을 꺼린다면 그것은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서로 대화를 나눠 결정한 사항을 존중하고 찬동해야 합니다. 사이좋게 의견을 교환하고 단결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선생님은 무엇인가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단결의 급소를 가르쳐주셨습니다. 10월 6일. 나고야문화회관(당시) 3층 대강당에 나고야대학교, 나고야공업대학교, 아이치대학교, 메이조대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대표가 모였다. 잠시 뒤 행사담당이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멤버들은 의아해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은 추석날에다가 개기월식을 볼 수 있는 아주 희귀한 밤 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관측할 수 있는 시기는 2192년이라고 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날을 골라 대학회를 결성하고 또 천체망원경까지 준비하셨습니다. '생애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진심에,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옥상에 올라가니 이케다 선생님이 천체망원경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망원경 뚜껑이 덮여 있었습니다. 망원경을 조작하던 멤버가 서둘러 뚜껑을 벗겼습니다. "망원경 뚜껑을 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지요." 선생님 말에 모두 웃었습니다. 선생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망원경은 렌즈에 따라 40배, 80배, 160배까지 관측합니다. 신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력(信力) 여하에 따라 40배, 80배, 160배로 될 수 있습니다. 토성도 굉장한 속도로 움직입니다." 때마침 망원경은 토성의 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신심도 똑같습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선생님 이야기에 세차게 끌려들어갔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고구마 좋아하는 사람 있나요?"라고 물으셔서 "예."하고 손을 들자 "나도 좋아해요. 반씩 나눕시다." 라며 나눠주셨습니다. 고구마는 따뜻했습니다. 그 따뜻함 이상으로 선생님의 온기가 가슴을 물들였습니다. 또 선생님은 "맛있지요? 배가 고플 때는 무엇을 먹어도 맛있어요." 라며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민이 많고 고생이 많을 때일수록 본존님께 제목이 잘 통하고 잘 흡수됩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고민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본인이 속한 지구(地區)를 걱정한다거나 부서를 걱정하는 식으로, 광선유포를 위해 고민을 하면 공덕을 많이 받습니다." 생애 지침이 되었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제안했다. "오늘은 여러분이 동의한다면 나고야대학교, 나고야공업대학교, 아이치대학교, 메이조대학교에 대학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일동의 목소리가 한데 모였다. "이로써 결정합니다!" 회장의 말에는 아주 강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20세기의 대열이 완성되었습니다. 20세기 후반에 활약할 사람은 지금의 대학부 입니다. 여러분입니다." 회장은 역설했다. "신심만큼은 바보처럼 따라가세요." 이케다 선생님 말씀에, 마음 깊이 결의를 담아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거듭 "신심은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그만두면 안 됩니다. 자만하면 안 됩니다. 나를 믿고 따라오십시오. 때때로 근행을 하지 못할 때도 있겠지요. 그래도 반드시 따라오십시오. 나와 함께 전진하겠다는 다짐만 있다면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교 3학년으로 학회활동은 하고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믿고 가면 되는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선생님은 '사제에 끝까지 산다.'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어떤 일이든 나에게 보고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까지나 지켜보겠다.'고 하는 자애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중에 자동차 외판원으로 근무하다 점장을 지냈습니다. 아무리 일에 쫓겨도 이를 악물고 시간을 쪼개 학회활동에 도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때 선생님과 새긴 원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마흔살까지가 승부입니다. 우직하게 신심하세요. 쉰살부터 총마무리로 굉장한 복운이 쌓일 테니까요."라는 이케다 선생님 말씀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현지 기업에 취직한 저는 쉰한살 때, 일 때문에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선생님이 처음 중국을 방문하실 때와 똑같은 홍콩을 경유하는 루트였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날부터 선생님을 가슴에 품고 투쟁해 50대를 맞았다. 내 인생에 최고의 스승이 계셔서 얼마나 큰 복운인가.' "자, 근행합시다." 이케다 회장을 중심으로 근행하고 이어서 대학별로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회장의 제안으로 메이조공원을 산책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회장의 뒤를 따라 남학생이 타려고 할 때였다. 회장은 "레이디 퍼스트"라고 여성 멤버를 먼저 태웠다. 이케다 선생님이 탄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습니다. 그런데 회합 장소 구석에는 제가 가지고 간 수조가 놓여 있었습니다. 대학원 연구에서 인공적으로 성별을 바꾸는 데 성공한 송사리를 어떻게 해서든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심을 하고 "연구에 사용한 송사리……"라고 말하자마자 선생님은 "저 수조가 당신 것입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그 수조를 눈치 챈 참석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간과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저도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회관을 나선 일행은 이케다 회장을 선두로 오른쪽에 보름달이 비추는 나고야성을 바라보면서 가로수 길을 걸었다. 회장은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나고야성은 유명한 성입니다." "바람 좋고 초목 좋고 온도도 좋다. 달도 좋고 성도 좋고 그리고 여러분이 있다." "여러분이 성장할 때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활기차게 투쟁하겠어요. 오늘도 이렇게 건강하잖아요." 저희는 메이조공원 광장까지 가서 거기서 큰 원을 만들고 각 대학교의 교가를 불렀 습니다. 마지막에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 월식은 10년 뒤인 1978년이지. 10년 뒤에 다시 만납시다." 라고 말하며 한사람 한사람과 악수하셨습니다. 가만히 눈을 바라보고 사뿐히 감싸 쥐는 듯한 선생님 손의 감촉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평생 잊지 못할 원점입니다. 저희 집은 가난해서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과자 도매상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입회하고 선생님 지도를 배우면서 스무살에 야간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스물네살에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대학회 결성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인생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만나고 '남에게 철저하게 진력할' 때에 인생은 열립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부의 중핵은 모두 이렇게 해서 성장했습니다." 그때는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인재육성을 하셨구나.'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미에 광선유포의 비(碑)'(미에연수원) 제막식 전날이었습니다. 많은 청년부원이 제막식을 위해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지요. 연수원 안에서 선생님을 중심으로 협의회가 열려 청년부 간부였던 저도 참석했습니다. 그때였지요. 선생님이 저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청년이 있지 않은가! 고생해야 하네. 청년이 청년답게 고생해야 해! 어서 가서 돕게나." 저는 그곳을 뛰쳐나왔습니다. 저 메이조공원에서 스승이 하신 한 마디는, 청년속에 뛰어들어 땀범벅이 되고 진흙투성이가 돼서 고락(苦樂)을 함께 하고, 그렇게 전심전력 으로 육성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청년과 연계를 맺고 청년과 고생한다.'는 스승의 마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도 깊이 다짐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역설했다. "일본에서는 민중의 마음이 '공허'해지고 있습니다. '텅 비어' 가고 있습니다." "민중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의 내면'에 충실을 채우고 신뢰와 용기를 주며, 날카로운 비판력을 주는 단체가 창가학회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얼어붙은 체념의 땅을 두드려 깨는 것이 창가(創價)의 기상. 폐색된 세계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창가의 전진이다. 지금 창가의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장대한 도전이 시작됐다. 그러려면 진짜 인재를 발견하자. 육성하자. 미래의 학회를 위해. 다음 학회를 맡길 사람을 육성하자. 스승이 가르쳐준 것처럼. 새로운 청년에게 사제가 맥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아, '청년학회'의 여명은 가깝도다! 자, 출발이다! 여러분이 있기에 나는 안심이다! (1967년 3월, 도쿄) 한순간의 만남에 온힘을 쏟는다. 거기에 잊지 못할 추억이 (1968년 6월) 용솟음치는 정열이 젊은 마음을 두드린다. 희망과 용기의 태양을 솟아나게 한다. (1967년 9월) "절대로 증상만이 되면 안 됩니다. 내몸을 학회의 투쟁 속에, 학회의 노고 속에 두어야 합니다. 그 길밖에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