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등불을 켜고
김 윤 재
하루 정도 정전이 되어 집집마다 호롱불을 밝히면 좋겠다.
발등거리 앞세워 하얀 눈밭을 거닐고, 따스한 불빛 아래서 긴긴 사랑을
나누고 싶다. 주위가 어두워질수록 더욱 환한 빛을 내는 호롱불 속엔 구
수한 된장 냄새가 베어 있고 행복했던 어린 날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얼마 전 친구가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토담집에 머물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존재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밤마다 밝히는 호롱불의 정겨움이 있어서인지 평소와 달리 나의 목소리
는 정감이 흘렀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지창문을 새어 나가는 우리의 이야기에 산짐승들도 귀를 기울이는지 숲
속의 밤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장작불로 따뜻해진 방안에 검게 그을
린 책과 낡은 옷을 비추이는 호롱불 속엔 동화책을 읽고 있던 나의 어린
모습이 담겨 있어 세상의 복잡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감겨드는 눈을 비비면서도 심청이가 임당수로 뛰어드는 문장에서는 청
이라도 된 양 눈물을 흘리며 꿈을 키웠던 어린 날의 겨울밤은 참으로 따
뜻했다.
적어도 그 시절만큼은 나의 마음은 선했고 위선이나 거짓을 몰랐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날카로워진 자신을 발견하며 순간순간 놀라곤 한
다. 사소한 일에 신경을 세웠고, 하찮은 일에 미련을 갖고 남편을 힘들게
하였다.
친구의 말대로 조금 멀리서 바라보니 내가 서운해하는 일들이 크거나
중요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가령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주지 않
았다던가 아이들의 문제로 고민을 할 때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 주지 않
는 다는 것들의 이유가 대부분이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일부러 그
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사랑의 허기를 느낀 것이다. 바
쁜 생활 가운데서도 생일을 기억하여 선물을 챙겨주고 수시로 남겨주는
쪽지 편지에도 이전처럼 설레임이 일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 남편을 배우자로 선택할 때는 백열등처럼 화려함보다는 부족한 것
은 많지만 등불처럼 따뜻한 마음에 끌렸었다. 그와 함께라면 작지만 따
스한 사랑을 엮어 갈 수 있으리란 꿈도 있었고, 다정한 연인처럼, 불편한
몸을 부축하는 친구의 마음처럼 늘 핑크빛 설레임으로 살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일어 사랑을
싹틔웠고 결혼을 했다.
그러나 살다보니 눈이 오는 날도 있었고 비바람이 부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인생살이임을 인생 중반에서 깨닫는
다.
성격 까다로운 내가 기쁨과 고통을 번갈아 겪으며 이만큼 살아 온 것도
잦은 여행을 허락하여주고, 슬그머니 안방청소도 도와주는 마음좋은 남편
이 곁에 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아내가 쓰러지면 남편이 손을 잡아주고 남편이 힘들면 아내가 위로해주
며 서로의 주름진 얼굴에 익숙해지며 끈끈한 연을 이어가는 것이 부부라
고 남편은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니 고마운 마음보다 좋지 않은 일도 눈에 뜨여 서운한 감정이 일 때도
있다. 그럴때면 오던 정은 사라지고 남편의 개성이나 빛깔까지 좋지 않
게 보인다. 술이라도 취하여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의 넓은 등을 보며 옆
구리를 스쳐가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일일이 트집을 잡아 싸움을 걸었겠지만 이제는 나이탓인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며칠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 단식하는 허기짐 같은 사랑이 그리워지며 그 동안 서운하던 마음
이 스르르 풀어진다.
언젠가 선배가 하는 말에 나이가 들어서인지 대중가요 가삿말들이 마음
에 닿는다며 열창을 할 때 웃음이 일었는데 나 역시 요즈음 유행하는
“사랑을 위하여”란 가삿말이 너무나 가슴을 울린다.
인생이란 가삿말처럼 아름다운 것이고 혼자보다는 함께 하는 삶이 더욱
따뜻한 것인데 그 동안 파랑새는 색다른 하늘에만 날아다니는 줄 알았었
다.
남편과 손을 잡고 살아 온지 이십여년.
친구는 이제 연애감정도, 신혼의 단꿈도, 아이들의 애미노릇도 웬만큼
했으니 이젠 지아비의 어머니 노릇을 해야 한다고 했다. 축 쳐진 남편의
어깨를 보듬어주고, 퇴근을 하여 그냥 눕고 싶어 할 때면 잔소리보다는
따뜻한 물에 발을 씻어 주는 사랑으로 남편을 대하라 하며 통나무 나르는
일을 권한다.
산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가득한 욕심을 버리기 위한 수행법으로 하
는 통나무 나르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자신의 몸무게 몇 배가 되는 통
나무를 어깨에 메고 몇 발자욱도 떼지 못한 채 포기하려고 하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네가 진 것보다 더 무거운 통나무를 진 남자
들도 마찬가지란다. 힘들지만 참고 있는 것 뿐이야, 이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에게 잘해줘. 지난번에 보니 많이 지쳐 있더라.”
그랬다. 지금까지 남편의 어깨에 맨 무거운 짐과 외로움을 다독여 준
적이 없었다. 남자니까 가장이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의
내면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기라도 하려는 듯 구슬땀을 흘리며
통나무를 지어 날랐다. 어깨는 피멍이 들었고 얼굴은 검게 그을렸지만 어
쩌면 남편은 가족들을 위해 이것보다 더한 고통을 지어 나르며 땀을 흘
렸으리라.
하루종일 통나무를 나르고 아랫목에 누우면 엿가락이 휘어지듯 나의 몸
은 천근 만근 녹아 내렸다. 여기저기 갈라진 구둘 사이로 연기가 새어 들
어오고 천장에선 새앙쥐들이 잔치를 벌여도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길도 없는 산 속에서 통나무를 지어 나르지 않아도
되었고 눈앞을 막는 잔나무 가지도 없었다.
남편도 퇴근을 하면 이렇게 쉬고 싶었겠지.
사지가 풀어지도록 네활개를 치고 아내의 살냄새를 맡으며 잠들고 싶었
으리라. 그러나 나는 무겁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고 온 통나무를 아무데
나 던져 놓듯이 남편에게 무관심했다. 아침에 깨끗이 해 놓은 걸레질을
다시 하고 애만 그릇들만 들었다 놓으며 남편이 잠들기를 기다렸지 않았
던가.
이제는 눈을 뜨리라. 밝은 전등불에서 뜨이지 못한 사랑이지만 따스한
등불아래에서는 나의 마음에도 사랑의 열정으로 뜨거워지리라.
잠시 통나무에 앉아 흐르는 땀을 씻으며 철부지 아내로 인하여 힘들었
을 남편을 생각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동안 가정을 이루어 오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지난해처럼
마음이 심난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너도나도 겪는 어려움 때문인지 유
난히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며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고 가까운 분들께 연
하장도 드리지 못했다.
물론 살아오면서 운좋게 복권 한 장 당첨된 일도 없고 좋은 옷에 좋은
것을 누리며 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인생이란 사랑과
돈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긴 세월을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결혼전의 시간은 지게꾼처럼 느리기만
하였었는데 요즘은 무엇을 느껴볼 사이도 없이 자전거 바퀴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이제 나의 까다로운 성격으로 싱싱한 과일을 고르는 것처럼 남편이 완
벽하기만을 고집했던 아집은 버리고 아픔과 상처를 싸매어 주는 사랑에
눈을 뜨리라.
내게 없는 것을 갖고 싶어 부린 욕심은 버리고 마음속의 생각을 바꾸어
바가지는 줄이고 격려의 말은 늘려야겠다.
친구의 말처럼 나이가 들어 갈수록 내 곁을 지켜주며 가려운 등을 긁어
줄 이가 이 세상에 남편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서둘러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작은 등불을 밝혀 마음의 창가에 걸어놓
아야겠다. 어둡던 방안에 따스한 불빛이 밝아오면 소박한 정담을 나누며
등불같은 연정을 피우리라.
1998
첫댓글 친구의 말처럼 나이가 들어 갈수록 내 곁을 지켜주며 가려운 등을 긁어줄 이가 이 세상에 남편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서둘러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작은 등불을 밝혀 마음의 창가에 걸어놓아야겠다. 어둡던 방안에 따스한 불빛이 밝아오면 소박한 정담을 나누며 등불같은 연정을 피우리라.
자신의 몸무게 몇 배가 되는 통
나무를 어깨에 메고 몇 발자욱도 떼지 못한 채 포기하려고 하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네가 진 것보다 더 무거운 통나무를 진 남자
들도 마찬가지란다. 힘들지만 참고 있는 것 뿐이야, 이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에게 잘해줘. 지난번에 보니 많이 지쳐 있더라.”
그랬다. 지금까지 남편의 어깨에 맨 무거운 짐과 외로움을 다독여 준
적이 없었다. 남자니까 가장이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의
내면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기라도 하려는 듯 구슬땀을 흘리며
통나무를 지어 날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