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
김하정
양지바른 곳으로 나와 앉은 할머니들
담벼락에 무채색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든
빛바랜 점묘들
주름을 말리느라 햇살들 분주하고
희미한 배경색으로 기억들이 다가오면
한때는 꽃이었던 시절
대낮처럼 환하네
허공을 응시하는 뜨거운 눈빛이여
수없이 그리고 색칠하고 싶은 그 자리
지금은 여백 속으로
새들이 날고 있다
유월의 번역
녹음을 번역하러 수풀 속으로 들어간다
우거진 낱말들이 열거된 그 속에는
자연이 생산해 내는
수많은 문장이 있다
잎들의 대화를 귀 열고 들으면
갈피를 넘길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들
속마음 열어 보이듯
향기를 내뿜는다
부리로 숲의 자간을 쪼아대는 새소리
우듬지를 교열하는 바람 사이로 어느새
원본을 뒤적이고 있는
태양의 손도 보인다
백화점
1.
성곽을 지키고 있는 제복 입은 기사가
목각 인형처럼 고개를 숙이지만
방향을 가리킬 때는
날렵한 선이 된다
2.
층층마다 진열된 욕망의 소비재들
냉정한 핸드백들이 제아무리 다짐해도
결국엔 모래성처럼
지폐들은 빠져나간다
3.
첫 출근 했다는 신입사원 AI 로봇
눈부신 조명만큼 상냥한 매너로
상품을 판독하면서
앞장서 걸어간다
― 김하정 시집, 『파피루스가 일러스트에게』
김하정
경남 함안 출생. 창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백화점」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