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84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동래온천과 금정산성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정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정산(金井山)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샘이 있다. 둘레가 10여 자이며 깊이는 7치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그리하여 산의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 1) 라 불렀다.
범어사 일주문 © 유철상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하여 산의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라 불렀다고 한다.
금정산 오솔길 © 유철상『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정산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산마루에 3장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샘이 있다”라고 하였다.
금정산 아래의 동래는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나라의 온천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동래온천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 때 온정(溫井)은 현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온천물의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는 정도이고,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곧 낫는다. 왕이 여러 번 여기에 오고는 하여 돌을 쌓고 네 모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그 구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라고 적혀 있다.
동래온천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영취사」조에도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 시절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 즉 동래의 온정에서 목욕을 하고 경주로 돌아갔고, 그 외에도 신라의 왕들이 경주에서 울산, 양산을 거쳐 동래에서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조선 세종 20년에는 한양에 왔던 일본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하는데, 동래온천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때의 일이다. 동래고을에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절름발이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집 근처의 논배미에 백학 한 마리가 날아와 절름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저 학도 나와 같이 절름거리는구나!” 하고 할머니가 같은 처지인 학을 가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날도 학은 그곳에 와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3일째 되던 날 학이 이상하게도 다리를 절지않고 돌아다니다가 날아가는 게 아닌가. 그것을 지켜본 할머니가 “이상한 일이네. 그렇게 절름거리던 학의 다리가 나았다니” 하고 중얼거리며 학이 서 있던 논으로 가보자, 그곳에서 따뜻한 샘물이 솟고 있었는데 그 샘 주변이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나도 이 물에 다리를 담가봐야겠다. 이 샘이 다리를 고쳐주는 샘인가 보구나!” 하고서 절름거리는 다리에 몇 번이고 그 약수를 찍어 발랐다. 그런데 효험이 있어 그 약수를 바른 지 며칠 만에 그렇게 아파서 절름거리던 다리가 원래대로 회복되었으며, 그것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