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시/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
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
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
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자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
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
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詩)해설, 문태준 시인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반세기 동
안이나 그는 우리말을 정갈하게 빚었고 우리말의 숨결을 세
세하게 보살펴 고아(高雅)하게 했다. 놀랍게도 (즐거운 편
지)는 황동규 시인이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그의 데뷔
작이다.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과 (편지)등에서 낭송이 되
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시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허전
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원제목도 ‘즐거운 편지’ 였
다고 한다. 이제 이 시는 한국인의 애송시가 되었다. 만남과
이별의 회전 속도가 이처럼 빠른 시대에 이 시는 왜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왜 여전히 막막하게 하는가.
헤어져 돌아가던 옛사랑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가.
하늘이 먹먹하게 어두워지고 주먹눈이 막 내리는 날이면
어디 먼 산골이나 바닷가 민박집에라도 가고 싶어진다. 작은
넝쿨에 말라붙는 붉은 열매 같은 눈빛을 하고서 눈이 내리는
그 시간을 살고 싶어진다. 눈이 그치면 순백의 설원과 설원
위를 유행(遊幸)하는 바람의 노래를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멀리 두고 온 사람을 ‘가까스로’ 떠올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
장 적막한 시간에 나를 선택하지 않은 사랑을 떠올리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손을 놓고 아무 일
도 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잊혀진 듯 살 것이다. 폭설에 갇힌 순한
산짐승처럼 우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마
지막으로 건넨 이별의 말은 나의 가슴에서 깨끗하게 씻어 낼
것이다. 겨울 하늘에 뜬 달이 천강(天江)을 비추어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나의 사랑을 다시 받아 안는 날
이 와도, 내가 아직 저 산골짜기 깊은 산막에서 그대를 기다
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그런
아주 짧은 후일에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