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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용의출현" 에서 예전의 같은 감독의 영화 "명량" 을 생각하다!
여행이 원활하지 않는 이즈음 교토 후시미와 오사카성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나왔으니..... 어저께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이 개봉좼는데 예매를 해서 볼까 하다가 예매도 번거롭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복닥거리는 것 보다는 한두달 지나 볼만한 사람들 다 보고 영화관이 한산해지면
편할 때 가서 표를 사서 보려고 하는데 뉴스에 보니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23만장이 팔렸다고 합니다.
누적 관객수 1,761만 명으로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2014년 개봉 '명량' 의 기록을 넘어
설지 관심사인데 '명량' 은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한산은 전세계 99개국에
선판매 됐으며 북미에서 동시 극장 개봉을 확정했다는데 코로나로 누적기록을 깨기 어렵다고
해도.... 기생충과 오겜에 이어 전세계인들에게 다시 멋진 한류붐을 일으킬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2014년에 영화 “명량” 을 보고 너무 실망해서 다시는 이런 영화는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 데,
동아일보 기사에 “‘명량’ 의 신파 걷어내고 해상전투는 더 정밀하게” 란 제목에 국뽕은 적당히
넣고, 명량에서 과도했던 신파와 비장함은 걷어내며 박해일은 절제된 연기로 영화는 세련돼
졌다는 해설에 마음을 바꾼 것으로, 사실 이순신 장군이야 천년에 한번 나올까 하는 명장이시지요?
장군이 없었다면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는 어찌 되었을까 하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니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과 민족을 구한 은인이자 성웅이시니... 장군이 하신 그대로 사실로만 영화
를 만들어도 훌륭한 작품이겠는데... 감독이 욕심을 부려 사실을 과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허위 사실로 여러 장면을 억지로 만들고 주인공이 과잉감정을 보이는등 실망스러웠습니다.
시코쿠섬 오즈성 7만석 영지 다이묘인 도도 다카토라는 1597년 정유재란때 수군으로 침입해
거제도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섬멸하니 후미에 있던 배설의 12척은 전투를 피해
달아나는데...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고 보고 고니시 유키나가등 좌군 5만 6천은 바다를
건너 하동에 상륙해서 명군 양원의 3천과 조선군 이복남의 1천이 지키는 남원성을 함락합니다.
모리와 가또등 우군 6만 4천은 황석산성의 조선군 500명을 몰살하고 좌우군이 합세해 전주를 무혈
점령후 좌군은 전라도로, 우군은 가또 기요마사 2만 4천은 충북으로 구로다와 모리 4만은 충청도
직산 까지 진출해 조선군이 도주한 가운데 음력 9월 7일 명군 파새와 해생의 4천 기병과 대진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수군 12척을 수습했다는 정보를 들은 도도 다카토라 는 330척 왜선을 끌어모아 서진
하니...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대첩(鳴梁大捷) 에서 13척 판옥선을 지닌 이순신 장군에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한 130여척이 넘는 제1진 왜군은 참패하니 31척이 격침되고 후퇴 합니다.
영화 명량에서 과장이 너무 심하거나 허위 사실을 보자면....
1. 경상 우수사 배설이 이순신 장군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것으로 악역으로 나오지만 그는
전투 며칠 전에 병가를 내고 달아나버렸으니 당시 현장에 없었습니다.
2. 배설이 왜군과 짜고 거북선을 불태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거북선 자체가 없었습니다.
3. 왜군이 이순신 장군의 배에 왜군이 올라와 수십분간 처절한 백병전이 이어지고 선창
에서 대포를 갑판으로 올려 쏘아 왜군을 몰살시키는데...... 장군의 배에서 2명의
전사자가 나기는 했으나 왜군이 장군의 배에 오를 정도로 왜선이 맡붙은 적은 없습니다.
4. 장군의 배는 왜군이 올라와 싸우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어민들
이 나룻배를 끌고와 밧줄로 묶어 장군의 배를 끌고 가는데 이 또한 터무니 없는 소리 입니다.
5. 32척 초탐선을 뒤에 세우고 13척 판옥선이 나서니, 유일한 근접 전투는 이순신의 배 한척만 적선
전부를 죽자살자 2시간 가까이 혼자 막는 상황에서.... 12척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모두 뒤쪽에서
머뭇거리자 장군이 초요기를 올려 배를 불러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싶으냐?” 호통을 치니 혼이
반쯤이나 나간 거제 현령 안위 장군이 배를 저어 너무 멀리 앞으로 나갔다가 왜선 3척에 포위됩니다.
왜군은 낫을 걸고 도선하려던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바닷물에 빠지는등 조선군 판옥선에 단 한명도
오르지 못하는데... 왜선은 작고 낮은 수송선인데 조선군 판옥선은 크고 높은 군함으로 파도치는
바다에서 뛰어 오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인데, 이순신은 적선 3척에 포격해 안위의 배를 구합니다.
6. 명량해전이 근접전이 아니라는 이유는 한산해전에서 조선군 사망자는 3명이고, 명량해전에서
사망자는 2명(순천의 김탁, 우수영의 계성) 부상자는 3명(강진현감 이극신, 박영남, 봉학) 이며
조선군의 배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면... 해전은 멀리 떨어져 조선군 대포가 일본군
배를 격침시킨 것이니 일본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인데 비해 조선 대포는 500~1,000미터
이니 300미터 거리에서 포격하면 조선수군은 피해가 전혀 없이 적선을 부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군은 도도 다카토라가 300여척을 거느렸지만 실제로 명량에 출진한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
하는 133척으로 보는데, 명량이 워낙 좁은데다가 파도가 엄청 사나우니 이순신 장군의 큰 배인
판옥선이 13척으로 일렬로 늘어선데 비해...... 왜군 배는 세키부네를 앞세운지라 낮고 작으니
구루지마 마치후사가 지휘하는 38척이 2열로 늘어서 장거리에서 포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드디어 오후 1시경에 물살이 반대로 바뀌어 전황이 조선 수군 측에 엄청 유리해졌고, 일본 배
들은 역류를 맞으며 조선군 대포 포격이 아니래도 근접한 수많은 배들 끼리 서로 엉키고
부딪치며 깨져서 침몰하기 시작했으니.... 패닉과 혼란 상태에 빠진 일본 함대는 후미에
자기측 배들이 늘어선지라 배를 뒤로 돌려서 빠저나가기도 매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명량해전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승리이니.... 왜군은 31척
을 잃고 더 많은 배가 부숴진 가운데 도주했으니, 이순신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그 험한 파도와 풍랑을 격으며 적군과 사투를 벌인 병사들이 점심도 거른채 저녁 때가
넘었으니 조선인들이 기다리는, 원래 출진한 우수영으로 돌아와 밥이라도 먹여야 합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장군은 " 이번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아군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웠다“
라 적었으니 우수영에는 들르지도 못하고 노를 저어 멀리 신안군 당사도에 도착해서도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시 배를 저어 어의도에 가서 비로소 육지에 오릅니다.
다시 북상해 21일 멀리 금강 하구 선유도에 도착해 상륙해서는 장계를 올리는데, 왜군은 아직 200
여척 이상의 배가 남았으니 일부가 진도를 우회해 조선 수군이 포위되면 이미 대포알과 화약도
거진 소진상태로 보이니 전멸을 면하기 어려운지라 승리한 당일 황급히 후퇴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명량해전 조선수군의 대승으로 일본수군은 도망쳤으며 다시는 전라도 바다를 넘보지 못했고 조선 수군
은 제해권을 장악한지라 바다는 안전해졌으며 백성들은 목숨을 구했고, 이 승리로 전세가 바뀌어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섰으며 충청도 직산까지 진출했던 왜군이 명량해전 패배로 후퇴했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후퇴했던 왜군은 당일인 16일 밤에 첩보선을 내보냈으며 다음날인 17일 재진격해 와서
우수영을 점령하고 목포를 거쳐 영광까지 진격하며 조선인을 죽이고 약탈하며 불지르는
아비규환 생지옥을 만들었으며...... 살아남은 조선인들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습니다.
간양록의 저자 전 형조좌랑 "강항" 은 영광에서 일족을 배 2척에 나누어 태우고 바다로
피난했다가 명량해전 대승리 7일 후인 9월 23일 전남북 경계인 영광 앞 바다에서
"이순신을 추격해 북진한 왜군" 선박에 나포되는데, 명량해전에서 대패했다는 도도
다카토라 휘하에 오즈성주 사도(佐渡)의 부하인 노부시치로(信七郞)에게 잡힌 것입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는 전혀 다르게 처음부터 살육과 초토화를 목표로 하고 보이는대로 다 죽여
병사당 코 한되를 바치라고 했으니.... 종군 승려 교넨(慶念) 의 조선일일기 (朝鮮日日記) 에는
“역사상 이처럼 참혹한 전쟁은 없었다. 약탈과 살육 후 이들은 집에 불을 지르니 검붉게
타오르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조선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
“산 사람, 죽은 사람, 어린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귀를 자르고 코를 베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 가 되었다. 귀와 코를 잘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 가 산천을
진동했다. 이들은 조선사람들의 머리, 코, 귀를 대바구니에 담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사냥했다.”
교토에는 도요쿠니 진자와 히데요시의 절인 호코지 앞에 귀무덤 耳塚(이총) 이 있으니 왜장 오오
고우치 히데모토는 귀와 코가 잘린 자가 18만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한일 역사교사 공동
연구팀은 코 수령증(鼻請取狀) 즉 군공증(軍功証) 을 계산한 결과 약 12만명 으로 보고 있습니다.
간양록에 보면 강항은 관리라 수백척이 정박중인 무안항에서 왜군의 심문을 받는데 명나라
두유격이 배 1만척으로 태안에 도착 (아직 중국에서 오지도 않았음!) 했으며 이순신은
군산으로 가서 명군과 만났다고 뻥을 치니..... 낙담한 왜군은 북상을 멈추는데 이후 강항
등 수천명의 조선인들은 무안에서 왜선에 올라 순천을 거쳐서 일본으로 끌려 가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우수영으로 돌아온 것은 9월 16일 명량해전후 후퇴한지 23일이 지난 음력 10월
9일로 왜군이 철수한 이후니.... 장군은 왜적들이 월동을 위해 남해안 28개 왜성으로 물러간
10월 3일 군산 선유도를 출발해 판옥선 13척에 초탐선 32척 그리고 많은 배를 얻어 우수영에
돌아와 이틀을 머물렀는데도..... 성 안팎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화 명량에서 조선 수군을 응원하던 조선 백성들은 전부 학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끌려간
것이라? 이때 전라도 육지는 고니시와 우키다등 5만 6천 왜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니
내륙으로 도망칠수도 없었으며, 개짓는 소리까지도 없는 적막강산인지라 장군은 비통한
심정으로 안편도로 물러나서 왜군이 여수 서쪽에 없음을 보고는 목포 고하도로 가십니다!
그럼 명량해전 대승리 이후 왜군은 두 번 다시 전라도 바다를 넘보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잡아 전라도 바다를 완전히 지배했고 백성들은 모두 안전해 졌다,
조선군은 이 승리로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는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명량해전 패배로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충청도 직산까지 진출한 왜군이 물러갔다는 말도
틀리니..... 왜군 4만이 직산에서 명군 4천 기병과 전투를 벌인 것은 9월 7일로 그날 명군
은 수원으로 후퇴했고, 왜군은 천안으로 물러나서는 주변을 3~4일간 약탈한후 "9월 12일"
남쪽으로 물러갔으며 명량 해전은 "9월 16일" 벌어지는데 선후가 뒤바뀐 거짓 주장 입니다.
정유재란은 왜군 14만, 명군 11만 7천 조선군은 불과 3만 8천이 참전했는데 고니시와
우키다등 좌군 5만 6천이 남원성에 이르자..... 총병 양원은 명군 3천을 동문에
중군 이신방, 남문에 천총 장표, 서문에 천총 생승선을 맡기고 전라 병사 이복남등
조선군 1천명에게는 북문 한곳을 지키게 했는데 왜군은 나흘만에 가볍게 점령합니다.
우군 모리와 가토 6만 4천은 조선군 5백명이 지키는 황석산성을 점령하고 좌군과 만나 북상하니
전주의 명군 진우충 2천이 달아나는지라 공주까지 무혈점령한 후 좌군은 전라도를 점령하려
남하하고.... 가토등 2만 4천으 충북으로 진격하니 충주의 명군 오유방 3천도 달아나는지라
약탈하고는 조령을 넘어 경북으로 남하했으며.... 모리 3만과 구로다 1만은 천안으로 북상합니다.
12만 왜군이 진격할 때 맞선 조선군은 1천 5백으로 그외 충청도에서 소수 병사가 마주쳤다가
대군에 놀라 후퇴했는데.... 권율등 경상도의 조선군은 숨어있었고, 충청도 조선군은 병사의
장계에 따르면 수풀속으로 사라졌으며, 경기남부 병사들도 성에 불을 지르고 모두 도주했으니
명군 양호는 평양에서 달려와 마귀를 시켜 해생과 파새 기병 4천을 직산에 내려 보낸 것입니다.
강항은 시코쿠섬 에히메현 오즈에 있는 도도 다카토라의 영지인 이요국의 오즈성으로 끌려
간후 그후 교토로 이송되어 후시미성에서 다지마 성주 아카마쓰의 스승 후지와라 세이카
에게 성리학 을 가르치니 그 제자 하야시 라잔이 1607년 부터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유학 경전을 시강해 4대 쇼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니..... 주자학이 일본에 전해집니다.
간양록 : “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피눈물로 한줄 한줄 간양록을 적으니 임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조선 과거제도와 춘추석전(釋奠) 의례를 설명하고 유학경서(經書)
를 써 주었으니, 주자(朱子) 의 주석에 따라 훈점(訓点) 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 인 데..... 그 고마움으로 후지와라가 다카다 성주인 아카마쓰
에게 청원해서는 통행 증명서 를 얻어주어 관문들을 무사히 지날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후지와라는 여행 경비를 주고 배를 주선해 사공을 붙여주어 대마도 까지 항로를 인도하게
했으며.... 승려 게이안(慶安) 도 시코쿠 오즈 성주 사도(佐渡) 에게 강항을 풀어줄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으니 1600년 5월 19일 식솔 10명과 선비등 38명과 함께 부산에 도착한
전 형조 좌랑 강항은 한양으로 가서 임금을 뵈오니 선조의 명으로 쓴 책이 간양록 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한산해전" 을 이야기 해야 하는데.... 임진왜란때 통영 경상우수영은
판옥선 50척, 부산 경상좌수영 판옥선 35척, 전라 좌수영은 판옥선 25척, 전라 우수영
판옥선 30~35척 정도로 보는데.... 경상좌수사 박홍은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하고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에 불을 지르고 수군을 해산시키고 혼자 서울로 도주합니다.
박홍은 3년 임기를 마쳤는데 잘한다고 해서 재임용됐으니 왜선(수송선) 700척이 바다를
건너올 때 조총 사거리는 100미터에 불과하니 급한대로 판옥선 10~20척이라도
동원해 300미터쯤 떨어져 포격을 했으면, 왜군의 부산 상륙 자체를 무산시킬수도
있었는데.... 사전에 해전 훈련을 전혀 안한 것인지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한 것입니다.
원균은 원래 전라좌수사에 임용되었으나 옛날에 고과가 좋지 못하다고 파면되고 유극량이 임용
되었으나 그 어미의 출신이 한미하다고 해임되고 3번째로 6계급을 뛰어넘어 임용된게 이순신
인데, 조정에서는 전쟁이 임박하니 원균을 경상 우수사에 재기용하는데..... 전쟁 3개월 전입니다.
원균은 3개월간 본진과 휘하 멀리 떨어진 8관 16포를 순시하다가 전쟁을 맞이했으니 사전 준비
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는데.... 1군 고니시는 4월 13일 부산 영도에 상륙하고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했으며 정탐후 15일 다대포를 공격하니 윤흥신의 다대포진 성이 함락됐습니다.
4월 18일 2군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했고, 19일에는 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가 다대포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김해에 상륙해 침공을 개시했으며 이들을
수송 및 호위한 수군은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등 1만명 입니다.
4월 19일 4군 모리 요시나리가 김해 죽도에 상륙해 구로다와 함께 공격하니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부산진성이나 동래성 처럼 당일 함락(이틀을 버틴 성이 없음!) 됐으며
창원에 있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은 급하게 모은 2백여명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할수 없었습니다.
연려실기술에는 원균이 경상 우수영 병력을 이끌고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서 후퇴했다는데, 선조실록 5월 10일 선전관 민종식이
전선 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원균이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반면에 6월 28일 경상 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경상도 전선의 상황 보고에 따르면, 원균이 군영
을 불태우고 보유 판옥선을 자침시킨후 배 한척 달랑 몰고 도망쳤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올리는데,
원균은 자기 관할지역 서쪽 끝인 남해로 달아나 전라좌수영 이순신에게 6차례나 구원을 요청합니다.
원균이 배를 자침한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면 음력 4월 13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경상우수영
배들은 모두 본영에 집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16포에 두서너척씩 분산되어
있었는데, 그럼 원균이 저 배들을 한 곳에 모아서 불을 질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배가 전투 현장으로 출동하려면 먼저 물이 새지나 않는지 배의 상태가 양호한지 점검해야하며 두번째는
노꾼과 포수등 150여명을 소집해야 하고, 세 번째는 대포가 배에 실려 있어야 하며 네번째는 대포알
과 신기전이며 화약과 화살을 실어야 하고 다섯 번째는 식량과 부식 및 기타 물품을 배에 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16포에 분산되어 있던 판옥선등 배가 출동해 거제 본영에 다함께 모였다면
원균이 전투 준비가 다 된 배를 궂이 불지를 이유는 없으며...... 용기가 있으면 부산
쪽으로 전진할 것이고, 아니면 다대포 맞은편 낙동강 서쪽 가덕진이 함락된 상태니
현 위치를 고수하던가 그도 아니면 순천으로 후퇴해서 전라 좌수영과 합세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원균이 배에 불을 질러 자침시켰다면 분산된 배들이 거제 본영으로 모일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보는게 상식적 입니다. 즉 장부상 배들이 실제로는 없었거나 아니면 수선을
요하는 상태라 출동 불가능이거나, 수군이 100% 상비군 체제로 보기 힘든만큼 승선인원 만큼
미처 소집에 응하지 않았거나 포탄과 화약등 물자들이 부족해 전투태세를 갖출수 없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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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원균이 박홍처럼 겁에질려 전투의욕을 상실하고 도주하면서 물자가 적에게 넘어가면 안되니
파괴했다고 볼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일부는 원균이 직접 자침시켰겠지만, 16곳에 분산된
배들은 원균이 다 자침시킨게 아니라 각 포에 없애라고 명령하니 현장에서 실시한 것으로도 봅니다.
원균은 4월 14일 전라좌수영에 왜군 침공 급보를 띄운 후에, 배를 불지르고 남해로 후퇴
해서는 6차례에 걸쳐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이순신은 자기 관할 구역을
벗어나려면 조정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면서 피란간 조정에 장계를 올려 허락을 구합니다.
무력만 뽐내던 다른 무장과는 달리 이순신은 문신 집안에 첫 무신이라 유학자적 소양이 있었는
데..... “이긴 후에 전투를 시작” 하는 그런 타입 입니다. “손자병법” 에도 전투는 아군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말을 실천한 지적인 무장입니다.
13개월간 전쟁을 준비했지만 완료된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데다가.... 가장 중요한게 적에
대한 "정보" 수집인데, 여섯차례 원균의 구원 요청을 받으면서 그 "서한에서 간접적" 으로
일본 수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니 전라우수영군이 도착하지 않아 망설이는 중에 아끼는
부하 녹도만호 정운이 하도 재촉하는지라 5월 4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으로 출진을 합니다.
저는 7월 8일 한산도 해전이 첫 해전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슨소리? 5월 7일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5월 8일 적진포 해전등 7차례 해전은 뭔데? 그건 해전이 아니라 노략질에
정신이 팔려있던 왜군을 항구 밖에서 접근하니 육지에 올라서 약탈에 열중하다가
혼비백산해서 급히 배에 올라서 허겁지겁 나오는 왜선을 "일방적으로 살육" 한 것 입니다.
일본에서 처음 본격적인 해전은 1184년에 시모노세키 단노우라 壇之浦(단지포) 에서 벌어진 겐페이
(源平) 해전이니, 교토에서 쫃겨난 다이라(平) 씨는 간몬해협 히코시마섬 앞 단노우라에서 500척의
배를 모아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니 추격해온 미나모토(源) 요시쓰네는 700척으로 해전이 벌어집니다.
이때 해전은 서로 가까이 접근하면서 활을 쏘고 근접해 갈쿠리를 던져 결박한후 상대방 배에 올라 창과
칼로 벌이는 육박전인데..... 다이라군은 초반에는 조수가 유리하니 선전했지만 시간이 흘러 조수가
바뀌어 패색이 짙어지자 황태후 외할머니 도루코는 8살인 안토쿠 천황(일왕)을 안고 바다에 투신합니다.
이때 어린 안토쿠 천황(일왕)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외할머니 다이라노 도키코는“ 고통스러운
이승을 하직하고 극락세계로 갑니다. 바다속에 용궁, 아미타불 극락 이 있답니다. 그후 해전이
벌어진 시모노세키 산 중턱에 안토쿠 安德 왕을 기리기 위해 세운게 아카마진구 赤間神宮 입니다.
이후 일본에서는 해전이라고 불릴만 한 전투는 없었는데.... 오닌의 난으로 일본이 200여개의
국가로 갈라져 전투로 날을 지새우던 센고쿠시대에 1570년 이시야마 전투가 벌어집니다.
오사카에 축성된 불교 정토진종 겐뇨의 이시야마 혼간지는 무로마치 막부 쇼군 요시아키의
"반 오다연합" 호소에 응해 궐기하니 네고로지 절의 무장승려 네고로슈와 용병 집단 사이
카슈가 참가했고 또 서부 일본 6개국을 지배하는 히로시마의 모리 가문과 동맹을 맺습니다.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등 산하 무장들을 거느리고 오사카성을 공격하는데 10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바다가 봉쇄되고 노부나가군의 집요하고 끈질긴 공격에 견딜수 없게됩니다.
혼간지는 1580년 4월 오기마치 천황(일왕) 의 칙명을 따르는 형식으로 노부나가 와 화해하고
오사카에서 퇴거하니..... 히데요시가 건축물을 허물고 새로 세운게 오늘날의 오사카성 입니다.
10년간의 이시야마 전쟁에서 해전이 몇차례 벌어지니 1차는 1576년 키즈가와 해전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4월 14일, 아케치 미츠히데 에게 명해 이시야마혼가지를 3방향에서 포위했으나
키즈(木津 오사카 나니와)와 오간(楼岸 오사카 츄오)을 통해 해상에서 물자를 공급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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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측에서 키즈(오사카의 나니와) 를 공격하자 혼간지군은 역으로 1만 이상의
대군으로 오다군을 격퇴하고 텐노지 요새까지 쳐들어오자 위기를 느낀 아케치 미츠히데
(훗날 모반해 노부나가를 죽이게 되는)는 요새에 틀어박혀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동원령을 내렸지만 영내에서 병사들이 빨리 모이지 않자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급한 김에..... 일단 3천명 소수 병력만 동원해서는 요새를 포위한 1만 5천명의
혼간지 군에게 싸움을 걸어 포위를 돌파하고는 아케치군과 합류하여 격퇴전에 나섭니다.
이에 혼간지군은 후퇴하니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를 포위군 대장에 임명하고 이시야마
혼간지를 완전히 포위하자 경제적으로 봉쇄를 당한 혼간지는 모리측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모리 가문은 무라카미 수군 700척을 동원해 물자를 싣고 나타나니.... 이에 노부나가
측은 구키 수군등 300척을 동원했으나 모리측이 화공으로 배를 불태워 대승리를 거둡니다.
2차 키즈가와 해전은 1차 키즈가와 해전에서 패배한후 노부나가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명하여 대포를
장비한 배를 건조할 것을 명하고 한편으로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도 배를 건조할 것을 지시했으니
구키 선단은 오오미나토를 출발하여 오사카를 향해갔는데, 이를 감지한 사이가 측의 선단이 공격을
했으나 구키 쪽이 대포를 사용해 압도해 버리고 7월 17일에는 사카이에 도착하여 항로를 봉쇄 합니다.
같은 해 11월 6일 모리 측에서 600척을 끌고 다시 키즈가와로 나와서는 전에 재미본대로
또 다시 화공을 시도했으나, 구키 요시타카는 상대편 다이묘가 탑승한 군함을 파악한 후,
그 배에 텟코센을 접근시켜 가까이 오면 일제 포격으로 침몰시키고.... 밀착했을 때는
철갑에 부딪혀 배를 파괴하는 전법을 구사해 모리 수군을 몰아내니 제해권을 확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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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원균의 다급한 구원요청을 6번째 받은데다가 녹도 만호 정운이 재촉하는지라 이순신
장군은 전라 우수영군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는 5월 4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으로
출진을 하니.... 한산도 맞은편 당포에서 경상 우수영 원균의 판옥선 4척에 협선 2척과 합류 합니다.
판옥선 28척, 협선 17척의 연합함대는 거제도 남단을 돌아 5월 7일 낮 12시경 거제도 장승포
옆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척을 발견해서는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
포격을 가하였으니..... 도도 다카토라의 배 50척 중에서 26척 격침이라는 큰 전과를 올립니다.
원균의 경상 우수영군도 격침한 26척의 배 중에 5척의 배를 분쇄했으니 연합함대는 일본군
을 4천명이나 죽이는 큰 전과를 세웠는데,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들은 달아났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왜적은 육지(거제도 내륙) 로 달아났는데..... 조선군은 배는
전혀 피해가 없고 전사자나 부상자도 없으니 “대포의 포격전” 이라 완승을 거둔 것입니다.
이어 합포(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적선 5척을 부수고, 다음날 5월 8일 적진포(통영시 광도면)
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우고 2,800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는데.... 두 전투에서 조선수군
피해는 전사자 없이 부상자 1명에 불과합니다. 이후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조선
수군은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며 이순신은 전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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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출진으로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23척에 협선 15척으로 거제를 출발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3척, 협선 2척과 합류해 전진하니, 구루시마 미치유키
의 왜군은 사천에 상륙해서는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는 산위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차 물러나니 비로소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해서는 조선 함대를
쫓아 나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서는 이언량, 이기남의 거북선이 돌격하고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으로 13척을 부수는데 이순신 장군 등 3명이 부상합니다.
6월 2일 당포에 왜군 가메이 고레노리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부두에 매어 있는지라
거북선을 앞세우고 돌격해 기함을 집중 공격해 21척 모두를 격침시켰으며 6월 5일 당항포
로 진입하니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모리 무라하루 왜군이 조총을 사격하자 바다로 유인해
뒤따라 나온 왜선을 포위해 26척을 격침했으며 6월 7일 율포에서 적선 5척을 격침시킵니다.
왜수군은 10,000명으로 도도 다카토라 20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 1500명, 구키 요시타카 1500명,
가토 요시아키 1000명, 구와야마 마사하루 1000명, 호리우치 요지요사 850명, 구루시마 미치후사
700명, 도쿠이 미치토시 700명, 스기와카 덴사부로 500명, 스가이 250명 총 합계 10,000명 입니다.
왜 수군은 1군과 2군은 부산에 3군과 4군은 김해에 나머지 육군 부대 수송선이 부산에 상륙하는
것을 호위 수송한 후, 부산 경상좌수영과 거제 경상우수영이 왜군 함대와 단 한번도 싸우지도
않고 배를 스스로 자침시키고 도주하니 조선 수군이 없어진지라 마음놓고 서쪽으로 진출 합니다.
왜 수군은 조선 수군이 모두 없어졌다고 보고는 방심하게 되니..... 각 부대가 따로 따로
소규모로, 여러 포구에 배를 대고 개별적으로 상륙해서는 약탈과 노략질에 열중
하다가 이순신과 원균의 함대가 나타나 항구를 포위하면, 그때서야 육지에서 포구로
달려 내려와 허겁지겁 배에 올라타고 달아나려다 대부분 격침당했으니 해전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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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피해는 옥포 도도 다카토라 26척, 사천 구루시마 미치유키 13척, 당포 가메이 고리노리
21척, 당항포 모리 무라하루 26척 적진포등 기타 23척이니, 남은 배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30척, 구키 요시타카 30척, 가토 요시아키 20척, 도도 다카토라 20척, 구와야마 마사
하루 20척 기타 30척 정도라고 추측되니 서울에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불려 내려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초전에 조선 수군이 괴멸된 것으로 보고 배를 버리고 육군이 되어 걸어서
서울로 올라갔으니 자신은 1천으로 서울에 주둔하고 부장은 6백으로 용인에 주둔했는데,
전라감사 이광 2만에다가 전라 방어사 곽영 2만,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1만 5천에
경상감사 김수등 5만 6천 남도근왕군이 북상하니 도중에 불어나서 8만명이 용인에 도착합니다.
이광의 지시로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등 2,000명의 정예 군사
들이 함께 6월 5일 왜군을 공격했는데..... 백광언은 적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갔다가 선봉장 이지시 등과 함께 전사하니, 믿었던 맹장들이 어이없이 죽자 조선군의
사기는 떨어지는데 8만 무리 중에 그나마 전투를 아는 병사들이 전부 몰살당한 것 입니다?
다음날인 6월 6일 군사들이 흩어져서 아침 밥을 지어 먹고 있을 때 왜군이 산골짜기
를 따라 기습해 쳐내려오니.... 왜군은 불과 1,600명이건만 겁에 질린 8만이나
되는 조선군은 너나 할것없이 무기도 챙기지 못한채 앞다투어 도주하다가 골짜기
에서 넘어져서 그 위에 사람들이 쌓여 질식사하니 바로 용인전투 (龍仁戰鬪) 입니다.
호성감(湖城監) 이주는 자신이 용인에 도착해서 직접 보니 삼도의 근왕병이 모인 숫자가 거의
8만이라고 말하자 선조는 "8만의 병마(兵馬) 가 무슨 까닭으로 한번에 무너졌느냐" 고
8만 대군의 숫자와 붕괴 모습을 목격한 이주(李柱) 에게 질문하니.... 신익이 여러차례
진을 옮기며 도망치고 백광언· 이지시는 절도를 그르쳤기 때문에 싸움에서 졌다고 말합니다.
사관의 기록인 기재사초에도 "전라도 관찰사 이광, 경상도 관찰사 김수,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이 군사 8만을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였다. 이 때에 충청도와 경상도는 모두
잔패(殘敗) 를 입었으나, 유독 전라도만은 물력(物力) 이 온전하여 병사와 기계와 군대
물자와 짐실은 수레가 40ㆍ50리에 가득 차니 그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용인현(龍仁縣) 10리에 진을 치니 군세가 대단함을 보고 적은 나오지 못했다. 이광이 언덕위 적군 목책
을 무작정 돌격하다가 안개가 끼고 조총 난사에 왜군 4~5천이 나아오자 8만 군대가 다 흩어져버렸다”
라고 적었는데... 궁시(弓矢)ㆍ도창(刀槍)ㆍ양자(糧資)ㆍ기계(器械)ㆍ의복(衣服)ㆍ장식(裝飾)이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니 촌민들이 밤을 틈타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하여 산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8만 대군은 1,600명 적의 칼날에 도륙당하고 계곡에서 아군끼리 압사당했으며 도주해 흩어진후 산속
에서 무수히 굶어죽었고 절반 정도는 고향까지 도주한 것으로 보이며.... 온전히 수습된 부대는 황진
부대와 광주유수 권율의 1천 뿐으로 후일 이치전투에서 왜군과 싸우게 되며, 이광은 파직되어 고문
당한후 유배되었고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쳐 한산도 해전에 불려 내려옵니다.
앞의 7차례 해전이 각 부대 소규모 단위로 포구에 배를 메어놓고 육지에 상륙해 노략질하던 소수
의 왜수군을 조선 수군이 항구에서 포위해 달아나려는 적선을 일방적으로 두드려서 격침한데
비해, 쌍방이 해전을 위해 서로 마주 대진한 첫 번째 정상적(?)인 전투가 바로 한산도 해전입니다.
왜수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 부산으로 밀려나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육군이 되었던 수군 부대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불러내리니..... 오다 노부나가 시절 부터 수군 대장인 구키 요시타카 및
가토 요시아키와 등 3인이 함께 잔존 수군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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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은 음력 7월 6일 전라 좌수영 판옥선 23척, 거북선 2척, 경상 우수영 3척, 전라 우수영
이억기 27척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하는데, 왜군 70여척이 영등포에서 견내량 (見乃粱)
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8일에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는데, 와키자카는 용인전투에서 대승해 기고만장했으니 구키 요시타카
및 가토 요시아키와 함께 출진하라는 히데요시의 명을 어기고 전공을 욕심내 혼자 출진한 것입니다.
7월 8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왜선 73척(대선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척 으로 대선만 치면
조선군 55척 보다 전력이 훨씬 못함) 이 내양(內洋) 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 가
협착한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운지라 아군이 퇴각하면서 유인하니...
왜선들은 조선 수군이 도주한다고 착각하고는 추격해 오는지라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냅니다.
아군이 학익진(鶴翼陣) 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는데 아군 피해는 전사 3명에 부상 10명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을 박살낸 이틀 후인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의 왜선 42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으니... 안택선
셋에 나머지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한지라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나오지 않으니 우리 배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으며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급이고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했습니다.
그 전인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용인 전투에서 8만
조선군을 쳐부수어 영웅이 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월 7일, 구키와 도도 및 가토등의 함대는
필요없다면서 큰소리 치며 (전공을 왜 니네들과 나눠?)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해 조선 수군에게 와키자카 수군과 구키등의 수군이 이틀 사이에 각개 격파된 것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장에 나타난 이순신 함대 23척 중에 해협으로 들여보낸 10척이 전부
인줄 알고 자신들이 작은 배도 섞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숫자에서 크게 앞선다고 여겨
달아나는 조선군을 추격해 한산 큰 바다로 나오니.... 달아나던 이순신의 함대가 돌아서고,
섬 좌우에 숨어있던 이억기와 원균의 함대 까지 포위에 나서니 전멸을 면치 못한 것 입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전투에서 1,600명으로 80,000 명을 무찌른 대승을 한 탓에 조선수군을
얕잡아 봤으니 교만과 오만에 방심이 부른 화라고 할 것인데, 무인도에 상륙해 열흘이나 솔잎
과 미역을 씹으면서 살아남아 널판지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덕도로 귀환했으며... 참담한 패전
을 겪었음에도 모두 정직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했으니, 허세에다가 무공은 부풀리고
패배는 애써 축소했던 당시의 무인 세계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입니다? 참 특이하다는.....
KBS 역사스페셜에도 나왔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4대손인 와키자카 겐지 씨의 말로는 와키자카
는 이 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본국에 돌아와서도 집안 사람들이 한산도 해전이 일어난
날이면 다른 것을 먹지 않고 오직 미역만 먹도록 했으며, 그 전통이 무려 500년이 지난 자신의
대까지 남아 자신도 한산도 대첩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 날' 로 뚜렷이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럼 와키자카가 구키와 가토, 도도등과 연합했으면 이길수 있었을까? 그래도 패했다고
보는건 인프라에서 엄청 달리니 왜선은 작고 낮은 수송선인데 비해... 조선 판옥선은
크고 높은 군함이고 게다가 조총 사거리는 100미터인데 조선군 대포는 500~1,000
미터이며 거북선까지 있고 명장 이순신이 지휘하니 넓은 바다에서 맞붙으면 필패입니다.
왜수군이 이길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투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니 기습이 특기인 이순신이
부산 해전에서 진격하자 도중에 섬과 육지는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지라... 사전에
알게 된 왜선은 전투 자체를 회피하고 달아나다가 부산포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산 언덕
으로 올라가니 가까이 갔다가 정운장군이 전사하니 장군은 그냥 회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도 원균은 조정의 독촉에... 도중이 모두 적진이니 육군과 함께라면 가겠다고
했다가 권율에게 불려가 볼기에 곤장을 얻어맞고는 죽지못해 억지로 진격하니 역시 사전
에 알게된 왜수군은 싸울 듯, 싸울 듯 도망치니... 가덕도 지나 다대포에서 기진맥진한 조선
수군은 돌아오는데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밤에 파도가 작은 칠천량에 들어가 골아떨어집니다.
뒤따라 온 왜수군이 해협 앞뒤를 봉쇄한후 배에 불을 붙여 화공으로 공격하니 좁은 해협
에서 또 밤인지라 배들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모두 불타는데.... 눈치빠른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저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자기 배 12척만을 거느리고 거제도 바깥 바다를
멀리 우회해 도주했으니 훗날 이순신 장군이 저 12척을 인수해 명량해전에 나선 것입니다.
27일 개봉하는 “한산: 용의 출현” 동아일보 보도에는 ‘학익진-거북선 등장 장면 압도적’,
‘감독 사료 + 추론으로 거북선 구현’, ‘박해일 절제된 연기도 위엄 더해’ 를 소제목으로
뽑았는데.... 국내 박스오피스 사상 최고 흥행(1,761만 명 관람) 기록을 세운 영화 ‘명량’
(2014년)의 김한민 감독. 그는 이번에도 한국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짚어냈다.
영화는 8년 전보다 “절제되고 세련돼” 졌다. ‘국뽕’ 은 적당할 만큼만 넣었고, ‘명량’ 에서 과도
하다는 지적이 나온 “신파와 비장함” 을 최대한 걷어냈다. 해상 전투를 구현한 장면은
한층 세밀하고 입체적으로 담겼다. 8년만에 나온 ‘명량’ 후속편, ‘한산: 용의 출현’ 이야기 이다.
압권은 판옥선이 주력인 조선 수군과 안택선이 주력인 왜군이 한산도 앞바다 에서
정면 대결을 펼치는 장면.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21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 감독은 “‘명량’ 때 겪은 시행착오가 이번 영화를 찍는 데 큰 힘이 됐다” 라며
“당시와 달리 물에 배를 띄워 찍지않고 스케이트장에 세트를 만들어 촬영했다”고 했다.
이순신이 거듭 고심하며 그려낸 해상 작전지도 격인 ‘학익진도(鶴翼陣圖)’ 가 실전에서
구현되는 모습은 장관이다. 조선 수군의 전략무기격인 거북선이 등장할 때는 귀를
때리는 웅장한 사운드가 더해지면서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는 용이 출현하는 듯 하다.
거북선 고증을 위해 각종 사료를 섭렵했으니..... “거북선은 2층인지 3층인지, 각이 졌는지 아닌지
자료마다 달라 조사하면 할수록 헷갈리더라” 라며 “각종 사료를 기반으로 한 다음, 실제 전장
에서 어떤 형태의 거북선이 효용성이 높을지를 추론해 가장 적합한 거북선을 탄생시켰다” 고 했다.
화포 등 무기 발사 음향과 긴장감을 더해줄 사운드가 뒤섞여 배우들 대사가 잘 안들릴수 있는
해전 장면에서 "자막" 을 넣는 과감한 선택을 한 점도 눈에 띈다 라적었는데.... 저 기사들을
보면서 나라와 민족의 은인 성웅 이순신을 생각하며 영화 볼 날을 기다립니다. 한두달 지나
볼사람 다 보고 극장이 한산해 질 때에.... 그리고 다시 교토와 오사카로 여행갈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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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리굿
저도 내일쯤 볼까합니다
아? 영화 "한산" 을......
저는 좀 더 한산해진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