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라는 장편소설이 지난해 초 미국에서 출간됐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원작이 발표된 지 200년 만에 등장한 이 소설에서 주목할 것은 여자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변신이다.
무도회장에서 청년 다아시와 우아하게 춤을 추던 엘리자베스가 동양 무술을 연마하더니 좀비(zombie)를
때려눕히는 여전사로 맹활약한다.
19세기 영국 상류사회 남녀의 사랑과 결혼을 그린 달콤한 로맨스 소설이 좀비가 등장하는 액션 소설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작품은 지난 크리스마스 때 선물용으로 다시 제작됐는데,
엘리자베스가 치마를 걷어올리고 옆차기로 좀비의 머리를 박살 내자 곁에 서 있던 다른 좀비가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르는
삽화를 추가했다. 소설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70만부나 팔려나갔다.
그러자 고전(古典)을 명예의 전당에 오른 골프선수쯤으로 여겨 온 평단이 발끈했다.
"B급 장르 소설의 싸구려 상상력" "고전을 훼손한 통속"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런 비판에는 독자들이 이 작품의 출현을 반긴 이유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 엘리자베스가 좀비 잡는
여전사로 변신한 이면에는 여성을 "도와줘요, 뽀빠이" "구해줘요, 타잔"이나 외치는 약자 내지 보호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남녀평등 시대의 가치가 투영돼 있다.
고전을 문학의 성소(聖所)에 모셔두기에는 21세기 사회가 너무나 변했다.
실제로 고전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거나 다시 쓰려는 시도가 서구 문학계에서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펭귄 출판사의 미국 자회사인 버클리북스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0년대에 발표한 SF 문학의 고전 '아이, 로봇(I, Robot)'의
후속작을 준비 중이라고 최근 밝혔다. 미키 주커 라이헤르트(Reichert)라는 판타지 작가가 쓸 이 작품은 전문직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늘어나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인물 설정에 변화를 주었다. 아시모프의 원작에서 로봇 심리학자로 활약한
여 주인공 수전 캘빈 박사는 새 소설에서 로봇 심리학자이면서 또 의대에 들어가 인턴 과정을 마친 최고의 엘리트 여성으로
더욱 위상이 높아졌다.
아동서 부문에서도 시대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2006년 영국에서 출간된 '피터 팬 인 스칼렛(Peter Pan in Scarlet)'은 원작 '피터 팬'에서 고아들의 어머니로
그려졌던 웬디를 사회활동에 열성적인 현대여성으로 재해석했고, 원작이 발표될 당시에는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던
인종차별적 요소를 없앴다.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옹호해 온 고전동화들도 시대에 맞게 고쳐 써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5년에 결혼한 커플 열 쌍 중 한 쌍이던 재혼(再婚) 비율이 2007년에는 네 쌍 중 한 쌍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콩쥐 팥쥐' '신데렐라' 같은 동화는 배 아파 낳지 않은 아이에게 훌륭한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현대의
선량한 재혼 여성들에게 좌절만 안길 뿐이다.
고전은 세계문학전집이라는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작가의 창작과 독자의 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목록을 갱신하는
현재진행형의 문학 현상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고전들도 발표 당시에는 독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낯선 새 책이었지 않은가.
(출처:조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