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 사는 욱이입니다. 1주일전까지 반팔로 다녔는데 갑자기 추워지는군요. 지구 멸망이 가까워지고 있나하는 생각도 듭니다.(투말로우를 보고 느닷없이 지껄임)
얼마전에 김용석님에게서 산 "태평양전쟁과 일본군"이라는 책을 잘 읽어보았습니다.(책 잘 받았습니다.)
이 책은 전쟁에 참가하거나 또는 그 시절을 살아본 평론가나 작가가 당대에 명장 또는 명 파일럿, 정치가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은 것을 묶은 것입니다.
그 중에는 "창공의 사무라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애꾸 에이스(독안룡?) 사카이 사부로의 '지휘관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그가 본 '또다른' 야마모토상을 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나름대로 상당히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일본에서 야마모토대장에 대한 평가가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야마모토라는 사나이란 진주만기습을 달성한 명장으로, 개전 당시 고노에수상의 질문에 대해 '앞으로 반년에서 1년은 이길 수 있겠으나 그 다음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유명하지요.
그는 거함거포주의에 빠져 있던 일본해군에서는 드물게 항공기의 능력에 주목하여 진주만을 통해 해전의 새로운 장을 열어 그 이름을 떨친 것은 새삼스레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사관출신의 말단 파일럿, 즉 그런 최상층부의 명령에 따라 최전선에서 직접 사투를 벌려야 했던 사카이 사부로는 '일본 해군의 무능함과 비융통성을 비판했던 그 또한 결국 그런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라고 말합니다.
1930년대 말 일본해군에서는 이른바 '전투기 무용론'이 대세를 잡고 있었고 이 중심에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시기에 전투기 무용론 또는 고속 폭격기 만능론은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 영국, 이탈리아등 대다수 항공기 강국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어쨌든 일본은 빈약한 공업력에다 이런 근시안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자기 스스로의 힘을 스스로 감소시켰다라는 것입니다.
미나모토다소령의 '전투기무용론'에 대해 야마모토가 채택하고 그를 항공참모라는 중책에 기용한 것이 바로 야마모토가 입으로는 항공주병론을 주장했지만 사실 항공기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전투기 조종사가 격감했고 나중에는 전쟁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미군에게 '칠면조 사냥'만을 당하다가 나중에는 '자살특공대'라는 근대전사상 전대미문의 전략까지 짜야 했습니다.
1933년 당시 항공전 훈련중 시바다소령이 '무작정 돌격만 할 것이 아니라 명중률을 높이기 위한 방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 주장한 것에 대해 기술부장이었던 야마모토소장은 '제국 해군은 오로지 육박필중의 정신이 필요하다. 원거리에서 공격하겠다는 발상따위는 언어도단이다'라며 질책하였습니다. 즉, 사무라이정신만을 강조하던 당시 일본 해군에서 그 역시 그런 고정관념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런 사고방식이 결국 미드웨이등으로 나타난 것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또한, 그 고노에수상에 대한 답변도 일견 그의 예지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무책임한 발언에 지나지 않을뿐, 정말로 국운을 걱정하고 일본 해군의 앞날을 걱정하는 명장이었다면 그런 뻔한 미사려구따위보다 할복할 각오로 온몸으로 저지하였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사카이의 '야마모토론'입니다만 사실 제가 보기에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마모토는 스스로 항공기시대를 열기는 했으나 정작 그 자신은 거함거포의 초전함 야마토에 연합함대 사령기를 건채 끝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니미츠처럼 항모에 사령기를 걸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야마모토의 한계인 것입니다.
물론 당시 분위기가 이러이러한데 제아무리 혼자서 합리운운 한다해서 혼자의 힘만으로 그런 사고방식을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함거포주의를 바꾸지 못한 것을 야마모토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사카이 사부로는 그런 사고방식의 희생자중의 하나이며 그런 점에서 적어도 그는 야마모토에게 그 책임을 물을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전투기 무용론'을 제창하여 일본 항공대와 파일럿들에게 자승자박의 줄을 묶었던 미나모토다참모는 정작 그 자신은 끝까지 살아남아 전후에 참의원까지 지낸 것을 사카이는 한탄합니다.
일본 제국군출신에는 그런 인간들이 많습니다. 노구교사건의 장본인이며, 남경학살의 전범중 하나이고, 또한 과달카날에서 무모한 작전을 구상했던 쓰지 마사노부중좌같은 인간도 남들을 그렇게 희생시켰으면서도 자신은 끝까지 살아남아 국회의원까지 지냈죠.
그나마 그런 인간들이 적어도 자위대의 일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측근 출신이나 또는 미화하기 좋아하는 전기 작가가 적은 '야마모토'가 아닌 말단출신 파일럿이 본 '야마모토' 마음에 뭔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댓글 야마모토... 당시 일본군 내에서는 분명 선구자였습니다만 미드웨이 전투 때 항공모함과 전함의 배치를 보면 '한계'는 어쩔수 없었다는...
아참, 그리고 그 책에서 '미나모토다'로 표기된 것은 '겐다 미노루'의 오기입니다. 일본인 인명은 훈독과 음독을 섞어 읽기 때문에 잘못 읽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렇군요. 지적 감사...^^* 겐다 미노루라는 이름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처럼 카페지기님과 채팅중이었는데 갑자기 끊어져 버렸네요..^^ 제가 뭔가 잘 못 누른 듯 합니다. 다음에 또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야마모토는 죽었으니 그나마 최후는 깨끗하네요..육군에선 무다구치나 쓰지마사노부같은인간이 최고 문제였죠.뭐 독립된 공군이 없는것만 보아도 일본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나지요^^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에서도 모리시마 교수는 야마모토와 도죠의 전쟁 수행 능력을 상당히 낮게 평가 하고 있지요.
독립 공군은 그 상대국인 「아메리카 합중국」에도 없었으니 딱히 섬나라만의 한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쓰지 마사노부」야 뭐, 솔직히 거의 "또라이" 수준이었으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일본에 독립된 공군...이 필요했을까요? 미국이야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이 필요했으니 필요했다손 치더라도..
일선 부사관 입장에서 엘리트코스로 군대생활한 장군들 답답한것은 지금도 마잔가지죠 그래도 위아래가함께머리가굳어버린상황에서사부로가 말단 부사관이면서 그런생각을 한것과 야마모토가 고만큼이라도 항공기의 가치를 깨달았다는것이 대단한일이죠
어느책에서 보니깐 야마모토가 전사한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고 나와있더군요. 진주만의 원흉으로 교수형에 처해지는것보다 전사가 더 영예로운것이었다고......
당시 공군 독립은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닌 시대적인 요청이었습니다. 이미 1920~1930년대에 쥬리오 두헤 같은 선각자들이 육해군의 임무와 완벽히 독립된 전략폭격 개념을 제창하면서 공군 독립의 필요성은 불가피해진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