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전주이씨(全州李氏) 양녕대군파 추성수후 장전 종가 은둔한 왕족 품격 지킨 장전이씨 가문 신라 사공 이한을 시조로 모셔 전주에서 삼척-함흥 이주해 부흥 왕세자 양녕 후손 추성수 담양 은거 을사오적 암살 시도 위정척사 계승 종가 안채 전남 담양 창평에는 ‘장전이씨 집성촌’이 있다. 자칫 본관이 장전인 이씨의 세거지로 오인할 수 있으나 사실 장전마을의 전주이씨 가문을 지칭한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담양 창평의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추성수후 후손들을 ‘장전이씨’로 부르고 있다. 국권침탈에 맞서 왕족의 후손으로 품격을 지키며 향촌사회에 은둔해 학덕과 효행을 계승하고 있는 양녕대군파 추성수후 장전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본다. ◇전주 떠나 동북 변방 문벌로 전주이씨는 신라 사공 벼슬을 한 이한을 시조로 모신다. 3세인 이천상은 복야를 지냈는데, 천문지리 연구로 중국에 유학해 이치를 깨달은 후 귀향했다. 완산부(전북 전주) 기린산 왕자봉에 묘자리를 잡고(조경단이 있는 시조 묘역) 후세 자손이 왕이 나올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6세 이긍휴는 중국에 가서 문과급제하고 예천태수를 지내고 귀국해 다시 중국의 관사제에 가서 객사했다. 중국조정에 호소해도 시신을 찾지 못하는 부인의 꿈에 육금부처가 현몽해 항주 탁산을 알려줘 천자의 명으로 귀향, 선산에 장례 지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17세 이양무의 아들 이안사(?~1274, 목왕 추존)는 지방관의 횡포를 피해 혈족·외족 170여 호를 이끌고 전주 교동에서 삼척으로 이주했다. 수년 후 동북면 덕원(원산)으로 이주한 그는 국방 요충지인 고원 방어를 책임지며 고려 의주병마사가 됐다가, 원의 세력에 밀려 쌍성총관부 관할인 개원로(길림,요녕,함흥 영역)에 투항한 후 선단을 이끌고 항로를 오가며 경작하던 두만강 하류 오동평야로 이주했다. 여진족을 통치하는 원나라의 행정관(다루가치)을 담당해 가문은 동북면 지방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왕권강화 격변기 비운 왕세자 양녕 그의 손자 이춘(도왕 추존)은 영업전(세속토지)을 기반으로 대농장을 경영하며 함흥에서 고려인을 규합해 사병을 키울 수 있는 세력을 갖춰 가문으로 일으켰다. 21세 이자춘(1315~1360, 환왕 추증)은 완풍대군 이원계와 태조 이성계(1335~1408)를 낳았다. 이자춘은 공민왕에게 시소부윤을 제수받고 동북면 14주와 함주(함흥) 이북 땅 회복에 공을 세우고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로 동북면에 세력을 구축했다. 24세 이제(1394~1462, 양녕대군)는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으로 왕세자에 책봉돼 14년간 제왕수업을 받고 1년간 대리청정했다. 그는 시와 서예에 능했으나 타고난 무인기질과 자유분방 행적으로 인해 동생 이도(충녕대군)에게 세자를 양보하고 주유천하했다. 권력을 멀리하고 살아남아 왕실종친 역할을 하면서 노년을 보냈고, 시호는 강정이다. 그가 양녕대군파를 열었다. ◇은둔해 후진 양성한 추성수 이서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 이애(?~?)의 넷째아들 이사성(?~?)은 이산부정에 봉해졌고 세자익위사 송평(?~?)의 둘째딸 홍주송씨와 혼인했다. 이사성의 셋째아들 이서(1484~?)는 풍채가 당당하고 한양 종학서에서 공부해 한시와 서예에 뛰어났다. 중종 때 ‘이찬(이서의 형)이 이과와 함께 견성군 이돈을 추대해 역모를 꾀한다’는 노영손의 무고 사건에 연루됐고 명양현(전남 담양 창평과 대덕)으로 유배돼 정속(노비로 삼음)됐다. 14년만에 무고가 밝혀져 유배에서 풀렸으나 왕족으로서의 영화를 마다하고 유배지인 담양 대곡에 은거해 학문과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마감하고 추성수에 봉해졌다. ‘낙지가’(몽한각 시비) 등이 수록된 문집 몽한영고를 남겼다. 그는 ‘과거 보지 말고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라’는 유언을 후손에게 남겼다. 유훈을 지키던 후손들은 양영대군 14대손부터 과거에 응시했다고 한다. ◇일제에 항거하고 박사 배출 양영대군 12세인 이형정(1682~1752)은 담양 대덕에서 창평 장전마을로 이주해 장전종가를 열었다. 14세인 이휘로(?~?)의 당호로 명명된 종택은 전남민속문화재 제41호(장전이씨 고택)로 지정됐다. 17세 이준선(1820~?)이 문과급제 했다. 17세 이최선(1825~1883)은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한 성리학자로서 증광시에 합격하고 병인양요에 의병을 모아 상경했다. 그는 위정척사사상을 담은 석전집을 남겼다. 그의 손자 이광수(1873~1953)는 대한제국 때 차비관을 지내고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이완용 등 5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왜군에게 잡혀 진도에 유배됐고 3·1운동에도 양한묵과 함께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비날론을 발명한 21세 이승기(1905~1996) 공학박사를 비롯해 이정기, 이한기, 이방기 등 12명의 박사를 배출한 종가는 선조의 학덕 계승에 힘쓰고 있다. /서정현 기자 sjh@namdonews.com 남도일보 입력 2021.06.24 18:36 몽한각과 이서의 시비. 몽한각(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54호)은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제실이고, 시비에는 추성수 이서의 ‘낙지가’ 시를 새겼다. / 담양군 사진제공 매오당 사랑채 종가 뒤주. 안채 마당에 사방 한칸 크기의 건물이다. 사랑채 정원의 와송. 안채 마당 정원. 뒤주와 사랑채 후면이 보인다.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출처] 담양 전주이씨(全州李氏) 양녕대군파 추성수후 장전 종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