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면 그때가 좋았다[삶의 재발견/김범석]
출처 동아일보 :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30209/117819335/1
암 말기에서 임종기로 넘어갈 때 환자 상태가 안 좋아서 입원하게 되면 가족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좋았어요. 그때는 3주에 한 번씩 항암주사 맞으면서 통원 치료하고 어머니가 일상생활을 그럭저럭 다 하셨어요. 그때는 그때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입원하게 되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그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는 살면서 ‘그때가 좋았다’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결이 다를 수는 있지만 아이 키우는 일도 그렇다. 나는 초등학생, 고등학생 아이가 있는데, 그보다 어린아이를 둔 젊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이 키우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아이가 집에서 이러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다, 큰애가 둘째를 때렸다, 온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등. 나는 이미 겪어 본 일이어서 담담하게 듣는다. “응, 그래. 미운 일곱 살?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 있으면 중2병이 올 거야. 더 키워 봐. 지금이 좋은 때야. 밉긴, 얼마나 예뻐. 지금 아이 사진 많이 찍어놔. 금방 큰다. 곧 알게 돼.”
예전에 내가 그 처지일 때에도 어른들은 나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지만 귀담아듣지 못했다. 아무리 남의 애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지금이 좋은 때라니. 그때는 몰랐다. 그런데 내가 막상 그 시기를 지나고 나니, 지금은 내가 젊은 부모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 키워 봐, 그때가 좋은 때야, 금방 지나가, 곧 알게 돼.
우리는 이번 생이 처음이라 늘 지금이 버겁다. 만일 인생을 한 세 번쯤 살아봐서 자녀 키우는 일도 몇 번 해보고, 대학도 몇 번 보내 보고, 결혼도 몇 번 시켜보고, 암에도 몇 번 걸려보고, 암에 걸려서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는 일도 몇 번 겪어 보면,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은 처음이고, 지금 이 순간도 늘 처음이다. 처음은 늘 낯설고 버겁다.
그래서일까? 임종기가 다가오며 보호자가 ‘그때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나는 꼭 말해준다.
“나중에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가 좋았다’며 오늘 이 순간을 그리워할 때가 또 올 거예요. ‘그때는 그래도 어머니 살아 계셨는데’ 하면서요.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잘 보냅시다.”
그렇다. 아무리 지금이 힘들어도 지나고 나서 보면 그때가 좋았다. 힘들면 힘들어서 좋았고, 안 힘들면 안 힘들어서 좋았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사실 모든 날이 좋았다.
그 ‘그때’가 지금이다.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빛명상
마음의 고향 초광력
간밤에 제법 서늘한 산 기운이 들어와 문을 닫았다가 활짝 열어 젖뜨리니, 탁 트인 하늘과 푸른 숲이 가득 밀려들어 왔다. 상큼한 기운이 온몸 가득히 스며들었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숲을 바라보며 ‘참 좋구나’ 하고 생각한다.
역시 자연 속에 인간의 기쁨이 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아끼고 예뻐해 주고, 빈 비닐봉지 하나 정성 들여 줍고 버리지 않을 때, 자연도 우리에게, 과학이나 현대 문명이 주지 못하는 신선하고 상쾌한 기운을 보내 주는 것이다. 턱을 괴고 자연의 조화를 생각하고, 전설의 이야기 같은 초광력의 사연들을 음미해 본다.
땅강아지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렸다가 왕거미에게 물리고는 몸부림쳐 구사일생으로 거미줄 올가미를 벗어난다. 그러고는 겨우 정신을 차려 괴물나무(한여름에 까만 열매가 열리는 토종 풀)에까지 기어가더니 괴물 열매를 아작아작 씹고 그 잎을 갈아 (왕거미에게 물린 자리가 배 부분이었던지) 배에 바르고는, 조금 전 고통 같은 것은 언제였느냐는 듯이 팽팽 날아다닌다.
조그마한 미물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약초가 되는 풀을 스스로 찾아가는데,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는 인간이 우주 절대의 힘이 있는 것을 평소에 깨닫지 못하고 삶의 위기에 와서야 육체를 구하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 짝이 없다. 최고 위치의 지도층에 있다는 분이나 어느 종교의 성직자도 막상 파산을 당하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면, 평소 미신이니 사이비니 하며 손가락질하던 무속 행위나 민간요법도 마다않고 달려드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죽음이 무엇이기에…..
자동차를 5년에서 10년 정도 타면, 부품들이 낡아 자주 고장을 일으키다가 결국 서 버린다. 우린 그 차를 폐차라 하여 폐기한다. 우리의 육체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 육체의 수명이 적어도 1백 년은 되어야 할 텐데, 요즈음은 언제 어떤 불행이 올지 모른다.
가스 폭발 사고, 백화점 붕괴, 다리 붕괴, 교통사고 등등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들이 일어나며, 죽음은 시시때때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만 있다면 아무도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죽음이란 육체에서 생명이 떠난 상태, 다시 말해서 심장의 호흡이 멎었을 때를 말한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그 호흡은 어디로 갔을까? 전구가 나간 것과 같을까? 그 전구의 전기는 그러면 어디로 갔단 말이며, 그 호흡이던 생명은 무엇이던가? 그 전기는 무엇이던가?
아무리 훌륭한 육체라도 호흡이 없으면 시체라 불리며, 우리 곁에서 없어지게 된다. 아무리 밝은 전구라도 니크롬선이 나가면 버려진다. 육체 안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호흡, 생명, 마음, 생각, 혼이 떠났을 때, 우리는 ‘돌아가셨다’라고 품위 있게 표현한다.
‘죽었다’와 ‘돌아가셨다’라는 두 표현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돌아가셨다고 할 때는 무엇이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 어떤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흔히 좋은 곳에 가라고 하며, 명복을 빈다. 죽은 사람인데, 누가 좋은 곳을 찾아가고, 누가 명복을 받는단 말인가? 육체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또 다른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이 공존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은 어떤 완성을 위해 잠깐 육체를 빌려 입은 것이라 생각한다. 육체를 통하여 세상에 살면서 완성이란 목표에 도달하여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해탈, 깨침 또는 영육의 분리를 하게 되어, 영혼이 삶의 심판을 거쳐 영원한 행복의 세계 혹은 지옥에 가거나 악령이 되거나 윤회가 되어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것도 아니면 저승이나 영의 세계로 들어가 새로운 공부를 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되어 한 생명이 만들어질 때, 2차원의 동물 세계에서는 여기서 그쳐 본능에 따라 산다. 그러나 사람은 그 순간 우주의 마음에서 나온, 우주의 마음과 닮은 인자가 하나 더 결합 되어 생각이나 이성, 마음이 별도로 형성된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육체에 우주로부터 받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으며, 육체가 주인이 되느냐 마음이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갈라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마음과 육체가 공존하고 있다.
과학이 육체를 아주 미세한 DNA까지 분해했다고 하지만, 마음과 생명(종교에서의 ‘영혼’과 같은 말)의 근원은 찾을 수 없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 최첨단 의료 장비로도 마음을 볼 수 없으니 처방을 할 수 없다. 처방이 안 되니 죽을 수밖에.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힘도, 돈도, 빽도,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권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힘 초광력은 육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어서 과학이나 의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또한 길흉화복을 주는 신앙도 아니므로 종교와도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초광력을 우리의 육체 안 어딘가에 있는 마음을 다루는 21세기의 신학문이라 하면 조금 근접했다고나 할까?
즉 초광력은 우리의 마음을 맑게 정화하여 올바른 삶을 지향하고 행복한 가정, 기쁨이 넘치는 건강한 사회, 온 인류가 공존 공영하는 평화로운 21세기를 추구한다. 더 나아가서 마음과 육신이 분리될 때 즉, 죽음이 임박했을 때, 한 점 두려움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원래의 온 곳,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게끔 깨쳐 준다.
그 과정에서 초광력은 삶의 애환을 풀어 주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이끌어 주며, 지금까지 어떤 분도 이 세상에서 감히 행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이적들을 나타낸다. 21세기 우주 과학 시대를 앞둔 지금 세상에서 전설 같은 체험들을 겪게 하고, 때로는 ‘빛(VIIT)’까지 느끼고 볼 수 있게 해준다. 아마도 그것은 우주의 절대적인 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 힘은 바로 사랑, 자비, 선을 화합시키는 우주의 인정,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출처 :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
1996. 07. 10. 1판 1쇄 P 40-43 중
깨우침을 주시는 빛글 < 마음의 고향 초광력 >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좋았다.. 저도 생각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힘들었던 순간도 빛과 함께 하며 돌아보니 다르게 보입니다.
빛과 함께 새롭게 살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우주의인정 마음에 고향 초광력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