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어느 날 후쿠사이의 친한 친구가 그를 찾아와 수탉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수탉을 그려본 적이 없는 후쿠사이는 친구에게 1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1주일 후에 친구가 찾아오자 약속을 미뤘다. 한 달,두 달,6개월…. 그런 식으로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친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후쿠사이에게 화를 냈다. 그 모습을 본 후쿠사이는 말없이 종이와 물감을 가지고 오더니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주었다. 완성된 그림이 얼마나 생동감이 있던지 마치 살아있는 수탉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을 본 친구는 기뻐하기보다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느냐며 따졌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친구를 자신의 화실로 데려갔다. 커다란 화실 사방에는 3년 동안 밤낮으로 연습한 수탉의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타고난 재능은 거듭된 훈련으로 단련된다. 그러므로 작품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딤전 4:7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4:6-10
신자의 삶에 있어서 경건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경건을 신자됨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 경건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특징적인 부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건은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경건을 생각할 때 술마시지 않거나 담배 피우지 않고, 오직 성경을 읽고 예배에 잘 출석하며, 기도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들은 경건의 결과로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외형적인 폼(form)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경건을 바르게 정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건은 이러한 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폼에 맞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내용을 갖추지 않은 폼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드러내어야 할 경건은 무엇이며, 이 경건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일이 왜 중요한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경건의 성경적인 의미, 두 번째로는 경건을 연습해야 할 필요성, 세 번째로는 경건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경건의 의미
디모데전서는 당시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였고, 복음전도자였던 디모데에게 쓴 목회서신입니다. 목회서신이라고 하여서 목회자만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 개인에게 쓴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여기에 "너희와 함께"(meth' hym?n)라는 말이 헬라어에 복수입니다. 이것은 이 편지가 단순히 디모데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읽고 교회를 섬기는 자들은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하며,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편지를 읽을 때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본문 앞의 디모데전서 4:1-5에서는 교회에 있게될 배교에 대하여 지적한 후에 디모데전서 4:6에서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던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으로 가져야 할 여러 덕목들 가운데 하나로 경건을 연습해야 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믿음의 말씀과 디모데가 늘 추구해 왔던 가르침으로 양육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군"은 헬라어 성경에는 선한 봉사자, 또는 사역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인 의미로는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디모데를 말하지만 교회를 섬기는 모든 일군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많은 사람이 디모데가 한평생 믿고 따라온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경건을 연습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경건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면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는 말씀과 대조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헬라어 성경에 있는 대로 문자적으로 바꾸면 불경건한 이야기와 나이많은 부인들의 이야기(graus old woman + eidos tale)를 버리라는 뜻입니다. NIV 성경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을 단적으로 말한다면 세속적인 이야기거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자기를 사랑하고, 육체적인 즐거움을 사랑하고, 옷이나 가구, 사회적인 지위, 외모상으로 크게 보이는 것을 얻는 문제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헛된 우상들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초연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상이 되어, 이것들의 종이 되어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들은 이러한 허탄한 것들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말 성경에 경건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성경에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본문에 있는 것인데, 유세베이아(eu-sebeia, piety)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야고보서에 사용된 트레이스코스(thr?skos, religion)라는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용어는 사실상 같은 뜻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별한다면 전자는 인격적인 변화에 강조점이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외적인 행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유명한 경건주의자인 윌리암 로오(William Law, 1686-1761)는 그의 유명한 책 「경건한 삶을 위하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라고 하는 책에서 경건을 정의하기를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경건의 내용들에 대하여 시간 사용문제, 재물의 사용문제, 기도, 겸손, 순종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27에 보면 경건을 정의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볼 때 경건의 자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아와 과부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라는 적극적인 의미의 경건이며, 또 하나는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소극적인 의미입니다. 보통 세속의 시류에 이끌려가지 않는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 쉬우나 고아와 과부, 즉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의미를 간과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의 참 모습은 세속의 관습에 물들지 아니한 깨끗한 삶의 자태를 유지하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볼 때 우리는 경건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경건은 세상에 속한 헛된 가치나 이야기를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의 삶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경건입니다.
2. 경건에 이르는 연습의 중요성
그런데 바울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연습한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김나조우(gymnaz?)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체나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파생된 독일어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김나지움(Gymnasium)이라는 말인데, 독일에서 김나지움라고 할 때 체력을 단련하는 체육관이라는 뜻도 있지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바울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라고 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경건은 우리가 오랜 시간을 걸쳐 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강조하면서 육체의 연습도 약간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연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연습에 대하여 예를 들면 건강을 증진하기 위하여 체력을 단련하는 일인 헬스, 테니스, 탁구, 농구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력과 상식을 증진하기 위하여 독서하는 훈련, 매일 영어문장이나 단어를 암기하는 일,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 성가대원으로 잘 봉사하기 위하여 발성을 연습하는 일 등도 모두 육체의 연습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연습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규칙적이며 체계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이렇게 훈련할 때 체력의 진보도 있고, 지력의 진보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체의 연습도 절대로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연습도 많은 유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에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육체를 철저하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체력을 증진하는 일이나 지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훈련을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바울은 육체의 연습도 유익이 있지만 경건의 유익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유익이 있다고 하면서 경건을 연습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습해야 할 경건의 덕목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규칙적인 예배생활,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 매일 기도하는 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생활 등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윌리암 로오는 훈련해야 할 경건의 내용에 대하여 시간 사용문제, 재물의 사용문제, 기도, 겸손, 순종 등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외적으로 표현되는 사람에 더 비중을 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행정책임자로 봉사하였던 제리 브릿지스가 지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라는 책에서는 겸손, 자족, 감사, 기쁨, 기룩함, 절제, 성실, 화평, 인내, 온유, 자비와 양선, 사랑 등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인격적인 덕목을 많이 강조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삶의 덕목들이 모두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이러한 일을 훈련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경건은 연습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탄의 무리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면, 또는 성령이 역사하기만 하면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마치 우리 가정에서 많이 사용하는 전자제품에 시작 버튼을 누르면 자동적으로 돌아가듯이 성령을 받으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우리 인간 존재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에 이상한 현상은 성령의 능력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가 초율법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질문하면 성령을 받아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탄의 무리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일이라면 저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없이 보여도 성령받지 않기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건은 계속 반복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경건을 연습한다는 것을 결국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기 위한 반복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반복훈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반복훈련의 중요성에 대하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상담학을 가르치고 있는 제럴드 코리(Gerald Corey) 박사가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치료하면서 여기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연구결과를 그의 책 「카운슬링과 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제」(Theory and Practice of Counseling and Psychotherapy)에 썼습니다. 이 책에서 코리 박사는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진다고 하여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오랜 기간 훈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훈련되지 않으면 아무리 건전한 생각과 좋은 이론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에게 변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 훈련이 얼마나 필요한 대목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건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을 이론적으로 알고 깨닫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삶으로 살아가도록 꾸준히 훈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경건을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훈련하십시오.
3. 경건의 유익
그러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할 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이 말은 원문과 대조해 보면 약간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범사에 유익하니 현세와 내세에 생명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는 것은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접현상이나 정신현상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도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건을 훈련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 약속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면 요즘 아이들이 잘 쓰는 말로 무늬만 신자일 뿐입니다. 진정 나무라면 무늬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나무고 그 속이 나무가 아니라면 이것도 문제입니다. 경건을 연습할 때 신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인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경건을 연습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이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진력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4:10). 경건을 연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훈련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 중심적으로 헌신된 삶을 훈련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계발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소망으로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사의 문제, 즉 삶의 목표를 하나님에게 두고 있느냐, 아니면 자기에게 두고 있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관심사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어린이의 관점에서 어른들에게는 순수함과 아이들에게는 꿈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쌩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라는 책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저자는 어린 왕자가 살던 별 이름을 소혹성 B-162호라고 붙였습니다. 이렇게 숫자로 쓴 이유는 어른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합니다. 만약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어른들은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니?"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를 모으지는 않니?"하는 식으로 불러보는 일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다른 부분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나이는 몇 살이냐?" "형제는 몇 명이냐?"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 등 모두 숫자에 관한 질문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화분이 놓여있고, 지붕 위에는 비둘기가 살고 있는 예쁜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떤 집인지 알아듣지 못하지만 "십만 프랑 짜리 집을 보았어요"하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까요? 사람들이 그들의 관심사가 숫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봉이 얼마냐? 몇 평의 아파트에 사느냐? 회사에서 서열이 몇 번째냐? 사람들이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렇게 관심사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세상에 속한 일에 우선적인 생의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이 목적이 되다보면 관심사가 세상에 속한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체계적이고 규칙적으로 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보다는 항상 뒷전에 밀쳐놓고 자기 유익의 방편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대신에 일과 사람의 노예로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좀더 높은 위치와 이익을 얻기 위하여 가지 않아도 될 술자리에 가기도 하고, 할일없이 책상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믿음의 가족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방식인 경건을 연습하는 일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항상 현실만 보기 때문에 일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허망하고 헛된 이야기에 관심을 두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의 복을 경험해 보시기를 원하십니까? 경건을 연습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훈련하십시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연구한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와 저 세상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통하여 우리 삶이 달라질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과 교훈들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
첫댓글감사합니다 샬롬
감사합니다.
평안 장로님, 존재 목사님 오늘도 함께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