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퇴근 후 시원한 캔맥주 한 잔이 절실해지는 계절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사무실 동료가 건네준 달콤한 사과 음료 캔을 따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두 글자, '음료'.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개의 점자다.
점자는 지면 위에 도드라진 점을 손가락으로 만져서 읽는 맹인용 문자, 즉 시각장애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게 한 특수 부호 글자이다. 영어로는 Braille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6점 점자 체계를 고안한 프랑스의 시각장애인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6점 점자체계란, 말 그대로 6개의 점(세로 3점 x 가로 2점)을 사용하여 만든 문자체계를 말한다. 이 6개의 점을 조합하여 64개의 점형을 만들고 각각의 점형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눈이 아닌 손끝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자가 탄생했다.
으레 점자는 만국 공통이겠거니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6개의 점을 사용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묵자(점자의 상대어로 비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일반 글자)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사용하는 점자가 상이하다. 한국어 점자, 영어 점자, 일본어 점자, 프랑스어 점자, 중국어 점자 등등 언어마다 점형이 의미하는 내용과 점자 규정이 다 다르다는 얘기다.
점자는 손끝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사과음료 캔 ▲ 음료라는 점자가 찍혀있다. ⓒ 카타오카아야카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 눈에 들어온 캔 음료 상단에 찍힌 '음료'라는 두 개의 점자. 나는 정안인이기 때문에 점자도 묵자처럼 눈으로 읽는다. 그러므로 점자가 캔 음료 상단의 어디에 찍혀 있든 상관없이 읽을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점자를 읽을 필요가 없다.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캔 겉면에는 음료의 이름을 비롯해 상당히 많은 정보가 묵자로 빼곡히 적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정작 점자가 필요한, 점자를 사용하는 당사자인 시각장애인들은 어떨까. 무심코 검지 손가락을 점자에 갖다댄 순간, 나는 조금 마음이 복잡해졌다.
175mL 용량의 작은 캔 음료인 탓도 있겠지만 손끝이 동그란 테두리에 걸려 점자를 만지기가 어렵다. 모진 세월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어진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손톱이나 겨우 걸칠 수 있을까.
▲ 점자가 찍힌 공간이 비좁아 손가락으로 점자를 만지기 어렵다. ⓒ 카타오카아야카
점자는 손끝으로 읽을 수 있어야 그 의미가 있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회사 혹은 다른 나라 캔 음료에는 점자가 어떻게 찍혀 있을까. 몇 개 안 되지만 아쉬운 대로 우리집 냉장고에 들어 있는 캔 음료를 모두 꺼내 보았다.
죽어가는 소도 일으킬 것만 같은 에너지 드링크와 벨기에산 맥주에는 점자 표기가 없었다.
▲ 에너지드링크와 벨기에산 맥주에는 점자 표기가 없다. ⓒ 카타오카아야카
동료가 건네 준 사과 음료(좌)와 냉장고 구석에 쓸쓸히 잠들어 있는 언제 샀는지 모를 포도 맛 탄산음료(우). 탄산음료든 아니든 모두 '음료'라고 표기되어 있다.
▲ 사과음료 와 포도 탄산음료. 둘 다 음료라고 적혀있다. ⓒ 카타오카아야카
마시면 적당히 기분 좋게 발그레해진다는 일본산 칵테일주에는 묵자로 'おさけです(술입니다)', 점자로 '오사케(술)'라고 적혀 있다. 점자가 찍힌 위치나 방향은 한국 제품과 동일했다.
▲ 일본산 칵테일 주. 묵자와 점자가 모두 표기됐다. 점자가 찍힌 위치, 방향은 한국 제품과 동일하다. ⓒ 카타오카아야카
이쯤 되니 내 머릿속에 점점 더 강하게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 점자를 왜 그 위치에 그 방향으로 찍고 있는 것일까. 캔을 반 바퀴 돌려 보았다. 글자가 뒤집어진다. 그러나 손으로 만지기는 훨씬 수월하다. 글자 방향만 반대로 찍어 준다면 곰 발바닥 같은 우리 아버지의 손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점자는 캔 음료 상단의 그 자리에 그 방향으로 찍어야 한다는 법적 규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모르긴 해도 아마 없을 것이다. 설사 그런 법 조항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법은 개정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로서는 점자를 찍으라고 하니까 별다른 고민 없이 덮어놓고 찍었나 보다 하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왕지사 하는 것, 제대로 하면 좋겠다
시각장애인계에서는 지금처럼 단순히 '음료'라는 표기만으로는 시각장애인이 음료의 종류를 구별할 수 없다며, 점자 표기를 보다 다양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최근 들어 탄산음료 중 '음료'가 아닌 '탄산'으로 표기한 제품도 본 적이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중에 점자를 읽을 수 있는 비율은 약 5.2%에 불과하며 이처럼 특별한 소수를 위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경제 논리를 내세우는 목소리도 있을 것이다.
정확히 얼마의 비용이 추가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점자를 찍는 방향을 바꾸든, 점자표기를 다양하게 늘리든, 모두 제조원가나 생산관리 비용이 얼마간 늘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다만 그저 귀찮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경제적 논리를 앞세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장애인 인권이 어떻고 하는 거창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지금도 이왕지사 다수의 기업에서 비용과 수고를 들여 점자를 찍고 있는 거라면, 그 목적을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점의 높이를 조절한다든지 점자 방향을 뒤집어 본다든지 하는 작은 시도를 거듭 쌓아 나갔으면 좋겠다.
엄청난 비용을 들이지 않더라도 기계의 압력이나 위치를 조금만 손봐도 할 수 있는 일들. 우리 사회의 배려의 온도를 높이는 것은 이렇게 작은 관심과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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