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인생이란
고난이나 평화의 시기를
겸손과 인내로 자신을 낮추는 삶인가
자만, 오만과 불손, 경솔, 안하무인으로
자신을 높이는 삶이냐
행운의 여신-선택의 여신, 운명은
언제나 같은 편만은 아니다.
어떠한 태도로 인생 삶, 여행을
살아가느냐 선택의 문제이다.
배우고 읽혀서
문제점을 인식 자각 실행 못하고
문제점이 반복되는 삶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경험, 과거 없는 적자지심(赤子之心,
죄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깨끗한 마음)
인생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허물과 장, 단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정말 싫다.
본래 세상의 시비선악은
상대적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사람의 삶에
누를 끼치는지의 여부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 도리가 떠오른다.
最小限 道理(최소한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나게 한다.
조선시대 4대~ 악녀, 요녀 이야기
조선시대 후궁이라 하면
흔히 궁중 암투를 벌이는
요녀(妖女)나 악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장녹수, 김개시(김가히), 장희빈 등이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왕비는 고위 집안,
후궁은 한미한 출신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렇지 않다.
후궁은 정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간택 후궁'과
궁녀나 외부인(기생, 여종 등)이
승은(국왕과 동침)을 입고
후궁이 된 '비간택 후궁'으로 나뉜다.
간택 후궁은
왕비나 세자빈을 뽑을 때처럼
선발기구를 설치하고
금혼령을 내려서
정식으로 선발했다.
그러나 대체로 후궁은
비상식적인 악녀로
묘사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문종 때
현덕왕후는 후궁 출신으로
왕비까지 된 현숙한 여인으로
칭송받았다.
또한 일부 후궁이
정치적이거나 간악한 성품이
부각된 이유는
남성 중심적 사관(史觀)의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 27명의 국왕은
평균 4~6명의 후궁을
맞이했다고 한다.
태종은 19명의 후궁을 두었다.
일명 조선시대에 악명을 떨쳐서
유명했던 악녀들, 후궁 등이 있다.
장녹수,
문정왕후와 정난정,
김개시,
귀인 조씨와
효명옹주,
숙종의 희빈 장씨(장옥정) 등이
유명하다.
간간히 성종의 폐비 윤씨,
영, 정조의 정순왕후 김씨 등도
포함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며
근래 들어서는
고종의 명성황후와
그녀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휘두른 무녀 진령군 등이
포함되는 경향이 있다.
악녀, 요녀의 공통점은
겸손, 겸양의 미덕이란
찾아볼 수가 없고
왕 혹은 왕실의 편애를 받아
오만불손, 안하무인 태도로
권세를 휘두르다
후기에 결국 탄핵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폐비 윤씨?---성종때
신구 정치적 대립에 따라
인수대비와 성종의 후궁들에 의하여
사약을 받고 죽은
연산군의 생모로서
왕비가 된 후
후궁들에 대한 질투와 불손 등
부덕한 행실로 인하여
임사홍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폐비 됨
장녹수張綠水 (? ~ 1506년)?---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의 교태와 아양에 푹 빠졌다.
국고를 기울여
사랑하는 여인에게 집과 재물,
전답과 노비를 아낌없이 하사했다.
장녹수의 능수능란한 치마폭에서
젊은 왕은 거침없이 폭정으로 치달았다.
장녹수는
문의 현령을 지낸
장한필의 서녀로 태어났다.
양반의 딸이지만
어머니가 천첩(賤妾)이라
여종 신세를 면치 못했다.
게다가 집안이 가난해
팔려 가듯 여러 번 시집가야 했다.
기구한 팔자가 바뀐 것은
제안대군의 종을
남편으로 맞고
아들을 낳은 뒤였다.
그 집의 여종이 되자
노래와 춤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하늘이 선물한 재능이 빛을 발했다.
제안대군 이현은
조선 8대 왕 예종의 원자였다.
1469년
예종이 요절했을 때
원자는 고작 4세였다.
즉위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
9대 왕은 사촌 형
성종에게 넘어갔다.
임금 자리를 놓친
왕자의 인생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살아 남으려면
왕좌에 무관심한 척
연기를 해야 했다.
제안대군은 음악에 심취했다.
종들에게 노래와
연주를 시키고 즐겼다.
장녹수는 노래 솜씨가 출중했다.
제안대군을 통하여
장녹수는 연산군의 애첩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난정鄭蘭貞 (? ~ 1565년)?---
명종 문정왕후의 남동생 간신
윤원형의 애첩
김개시(金介屎)-김개똥-김가히?---
광해군의 궁녀, 여인이다.
광해군의 여인 ‘가히’는
광해군의 비선실세로
후궁이 될 수도 있었으나
본인의 뜻에 따라
상궁으로 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몽필을 빠뜨릴수 없다.
선조시대 세자 광해군을 돕는다.
인조반정세력에 포섭되었으나
반정세력에 의하여 처형당했다.
귀인 조씨(인조의 후궁)와
딸 효명옹주?–--
소현세자 부부 등
무고한 수 많은 사람을
모함하거나
자작극, 조작, 날조하여
누명을 씨워 죽이거나
피해를 입힌 대표적인 악녀로
자살을 명받고
관련자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효명옹주는
불만과 자만, 오만, 불손한
생활태도 등으로
인하여 유배 등 외롭고 쓸쓸한
생을 마감한다.
희빈 장씨(장옥정, 張玉貞,
1659년 ~ 1701년)?---
장희빈은 위의 2명과 다르게
역사적 왜곡이거나
평가가 사뭇 다른 요소가 있다.
인현왕후 폐비사건 등
숙종의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설 등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비로서
46년간 국모 지위를 누리며
권력을 탐하는 불나방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1805(순조 5)년
정순왕후 경주 김씨는
61살에 세상을 떠난다.
정순왕후는
당파 대립과 권력투쟁으로
정조의 개혁정치를 후퇴시키고
천주교도 박해를 빌미로
정적을 숙청하는 등
정조 개혁정치의 반동세력으로
역할을 했다는 평가와 함께
악녀, 요녀로 선정되는 경향도 있다.
명성왕후와 무당, 무녀 진령군?---
명성황후-민비-민자영은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역사왜곡 미화된 주인공으로
고종시대 권력을 사유화한
세도정치와 사치스러운
요녀였는가,
아니면 인민, 백성을 위한
진정성 있는 지성미를 갖춘
지혜로운 황후였는가?
결국 국권을 농락하도록
왕비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무녀 진령군도 자살한다.
사뭇 다른 견해가 많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인조의 딸 효명옹주
대조적 삶 이야기?
고모할머니와
조카손녀 관계로
비슷한 운명의 극적인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갈린다.
정명공주는
세력다툼에 과한
불평불만보다는
평생 인내와 겸손한
삶의 태도로 천수를 누린다.
효명옹주는
오만과 안하무인에다
불평불만으로
타인을 저주와누명으로 덧씨우는
표덕스러운 삶의 영향으로
말년의 고독과 외로움 쓸쓸한 삶
비참한 여생을 마감한다.
궁녀(宮女)이야기?
궁녀의 정의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이다.
나인[內人]들과
그 아래 하역(下役)을 맡은,
무수리[水賜], 각심이(방아이),
방자(房子), 의녀(醫女),
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범주에 든다.
그러나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의 궁녀는 다음과 같다.
① 무수리: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②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비번 날 사는 개인 집인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 식모, 침모 등의 총칭이다.
③ 손님: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다.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④ 의녀: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한다.
고종때 서양의사(西洋醫師)가
궁중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의녀 제도는 없어졌다.
⑤ 나인: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다.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또는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본궁의 궁녀들은
별궁나인을 ‘궁것’이라고 경멸했다.
본궁의 경우,
왕을 비롯해 모두 독립 세대로 영위되며
왕과 왕비와 왕대비 등은
같은 규모의 궁녀를 갖는다.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다.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 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즉, 제조상궁(提調尙宮)으로
큰방상궁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그리고 일명 지밀상궁으로도 불리는
대령상궁(待令尙宮)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했다.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 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다.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와서
상궁들이 두세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 수방은
중인 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 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세,
침방, 수방이 6∼13세,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이들이 왕의 자녀를 낳게 되면
종2품 숙의(淑儀) 이상으로 봉해져서
독립 세대를 영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궁녀의 보수는
고정적으로 지급되고 있었으나
식생활은 궁중에서 해결되었으므로,
이러한 보수는
친가 부모, 형제들에게
보탬이 되었다고한다.
상궁들은 고등관 대우를 받았다.
제조 상궁쯤이면
장관급의 대우를 받았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
(단,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젊은 궁녀가 헛되이 왕권의 그늘에서
늙어 가는 부당성을
국가에서 인정한 증거이다.
결국 이러한 궁녀 제도는
절대군주국가 시기의 희생물이자
신분제 노예제도 등의 산
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배체제의 유산 아래
사회적약자 우리 민중은
법, 제도로 착취-편취 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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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요녀, 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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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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