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소고
‘인간은 습관의 노예다’라고 누군가 갈파하였지만 과연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이 습관의 틀에 맞추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듯하다. 아침 눈뜨고 일어나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습관에서 싹이 터 무수한 일상의 가지를 드리우지 않는 것이 없다. 아니 또 잠자는 습관도 있지 않은가. 이 버릇도 하나의 습관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 나대로 버릇에 대하여 정의를 내려 본다면 반복되는 행동의 축적에 의하여 별다른 사고 없이 움직여지는 직감적이고 규칙적인 행동으로써 본능보다는 다소 상질의 요소는 다분히 가지고 있으나 좋은 뜻은 아닌 듯하다. 예를 들어 손버릇이 나쁘다 등등으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규칙적인 산책이나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조깅처럼 유명인의 훌륭한 습관이나 버릇은 인구에 회자되나 버릇의 도가 지나쳐 광적인 벽으로 변하게 되면 주벽, 도벽, 도박벽 등의 형태로 겨우 일간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게 된대서야 세인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의 경우 출근 시간에도 지각, 약속 시간에도 지각, 늦추어진 출근 시간에도 또 지각,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하직할 때 지각을 할 수 있다면 염라대왕의 수명록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련만 결국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정해진 시간을 살다 제 명에 맞추어 갈 뿐이다.
버릇도 엄연히 시대 조류에 편승하여 그 태깔이 변천되어지는 듯하다. 우리들 소싯적엔 어른들께서 허세를 부리고 싶거나 어색한 자리를 무마하기 위하여 더러 헛기침 삼아 ‘에헴’을 연발하는 고색창연한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 나이만 해도 예전의 그 어른들 나이를 넘었지만 그런 버릇은 없어지고, 누가 머리 위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뉴스에 자주 나오니까 이것도 따라하는 꼴불견이 아닌가. 또 바삐 출근하다가 미처 뽑지 못한 헤어클립을 하고 나온 걸 보고 젊은 애들이 따라 하는 모습이란. 이런 좋지 않는 유행도 버릇으로 될까 두렵다.
각설하고 나의 버릇은 어떠한가? 초등학교 시절인 50년대. 통학 거리는 대충 집에서 반시간이 넘게 걸어가야 한다. 사람들 거의 다니지 않는 공장 뒷길을 자그마한 돌멩이를 축구 공 차듯이 차고 오갔는데. 어느 날 조금 세게 차버린 돌이 앞서 걸으시던 할머니 발뒤꿈치에 적중하고 말았다. ‘고얀 놈’이란 불호령에 쫓겨 오던 길을 거꾸로 도망친 뒤부터 그 버릇이 냉큼 없어져버렸다. 9년의 하숙 생활을 마치고 결혼 후에도 양치한 뒤 칫솔을 곧잘 뒷 호주머니에 꽂고 나오는 버릇이 있었다. 신혼 때에는 시간이 바쁘다 보면 칫솔을 꽂은 채 병원에 나와 이를 본 동료들이 나를 놀리곤 하였으니 이제는 이 버릇도 사라졌다.
물론 나에게도 좋은 버릇은 있다. 그것은 잠버릇이다. 단 몇 분의 여유라도 있을라치면 시공을 초월하여 꿈나라를 헤맬 수 있다. 신혼여행길이라고 제 버릇을 개주나요? 부산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지금은 해운대 센텀시티로 바뀐 수영비행장에서 제주공항까지라야 비행시간이 몇 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어도 옆에 앉혀둔 신부를 아랑곳 않고 나 혼자 달콤한 꿈나라를 헤매고야 말았으니…. 두고두고 처에게 구박받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잠버릇의 진가는 장거리를 여행할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본가가 대구이고 처가가 부산인지라 남보다 장거리 여행의 횟수가 잦은 편. 바빴던 직장 사정으로 당일치기나, 겨우 하룻밤을 자고 오는 까닭에 차 안은 으레 나의 침실이 되어 주기 십상이다. 그 숱한 여행을 통해 얻은 결론은 장거리 여행엔 지금은 없어진 ‘개 그린 고속버스’, 즉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가장 편안한 운송 수단이라는 것이다. 앞뒤 좌석의 넓은 간격, 채색된 창이 주는 정신적 안정감, 그것만이라도 침실 분위기는 만족할 수준이 아니겠는가?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보다 배 밑 깊숙이 깔리는 엔진 소리와 적당하게 흔들리는 차체의 롤링은 최면 효과를 배가시켜 준다. 왕복 10시간 정도 잠속에 빠져 버스를 타고 나면 그 동안 진도가 밀려 있던 잠들이 뿌리째 뽑혀 나간다. 최근에 도입된 우등고속버스도 이와 비슷하겠지. 허나 이도 KTX와 SRT로 시간이 단축되었고, 더 아쉬운 건 내가 찾아가서 만나 뵐 양가 부모님이 더 이상 이 세상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나의 출퇴근 때 타고 가는 지하철 3호선의 노인석을 이용하다 보면 아침부터 꾸벅꾸벅 조는 노인네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나일 수도 있다. 대개 잠이 쏟아지는 경우는 내리기 두세 정류장 전. 내가 내려야 할 충무로 역을 지나 을지로 3가역에서 내려 다시 충무로로 돌아온 적도 여러 번이다. 하긴 바쁠 일 없는 출근길이고, 또 남들보다 일찍 나오니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이 좋은(?) 잠버릇 때문에 몹시 혼난 적이 한 번 있었다. 군 입대 후 훈련이 끝나 며칠간 휴가를 얻었을 때 서울 시청 부근에서 친구들이 무사 귀환 턱을 낸 적이 있었다. 2차, 3차까지 마신 뒤 삼선교 집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긴 하였는데 이게 웬 소리인가? ‘장교님, 장교님 종점이니 그만 주무시고 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빡 잠이 든 사이 내가 내려야 할 곳을 한참이나 지나 우이동 버스 종점까지 와버린 것이다. 시계는 열두 시 15분 전. 집 부근까지 겨우 택시를 타고 와 내려 걷고 뛰고 하여 돈암동 검문소까지는 왔다. 그 시절이 장, 사병 불문하고 통금 위반 특별 단속기간이라 위반자는 육군 회보에도 올릴 때. 그나마 검문소장인 육군 중사의 배려로 헌병들의 도움을 받아 집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 그러게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이 아닌가. 공자님 말씀에 중용지덕이 최선이라 하였으니 아무리 좋은 버릇이라도 과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유효하다.
마지막으로 나의 자랑할 만한 습관은 식사 습관이다. 이는 경산 토호의 막내인 아버님과 역시 부잣집 셋째 딸인 어머니 모두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철저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군 훈련 시절의 삼군 사관학교 장교 후보생 식당, 대학병원의 교수 식당, 잠시 나간 중앙보훈병원의 직원 식당은 자유 배식이므로 먹을 만큼만 가져오면 된다. 그러니 밥이나 반찬을 남길 이유가 없고 밥 한 톨 국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먹은 좋은 버릇도 있다. 특히 간이 짠 장아찌는 조금 갖고 와 먹다가 양이 적으면 또 가져다 먹으면 되니까. 이는 나 스스로는 잘 가지 않지만 결혼식 뷔페 음식도 가져온 건 맛이 있으나 없으나 가리지 않고 접시를 비운다. 심지어 회사 회식 때에도 음식 남기는 다른 이 들에게는 별 잔소리는 하지 않으나 나는 술과 안주를 남기질 않는다.
위의 글은 수석회 수필집 제52권에 실린 저의 글입니다.
첫댓글 우리나라 체면문화에서는,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 먹을 때는, 밥을 싹싹 비우지 말고, 한 숫갈을 남기라고 했었습니다. 소위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고 합디다. 다 비우면, 대접하는 사람이 모자라게 대접한 것으로 느낄까봐 그렇다고 합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