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교수품 50주년 맞는 윤공희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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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공희 대주교는 "지난 삶을 돌이키면 반성할 일이 많은데 축하를 받아 쑥스럽고 죄송하다"고 했다. |
사제수품 금경축(50주년)도 드문 일인데 윤공희 대주교는 올해 주교수품 금경축을 맞았다. 만 38세로 초대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윤 대주교는 수원교구 초석을 다졌고 10년 뒤인 1973년 광주대교구장에 임명, 격동의 시대를 광주시민과 함께 겪으며 27년간 광주대교구를 이끌었다. 많은 이들이 윤 대주교를 한없이 온화하면서도 또 언제나 강직했던 '아버지'로 기억한다.
이젠 푸근한 미소를 띤 백발의 '할아버지'가 됐지만 꼿꼿했던 기품은 여전하다. 광주대교구는 22일 오전 10시 30분 임동주교좌성당에서 윤 대주교 주교수품 50주년 기념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축하식을 마련한다. 31일 오후 7시 광주가톨릭대 평생교육원에선 '윤공희 대주교 성성 50주년 초청음악회'가 열린다.
기념행사에 앞서 윤 대주교를 만나 소회를 들었다.
윤 대주교는 광주대교구에서 자신의 주교수품 5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것에 "안 그래도 큰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젊은 나이에 주교가 됐고 지금껏 살다 보니 주교로 50년을 살아온 것일 뿐이라며 "반성할 일이 많은데 축하를 받는다니 쑥스럽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리고선 고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를 꺼냈다. "삶을 돌이켜보니 김수환 추기경님이 더 존경스러워졌어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신 그 삶을 우리 사제들이 배워야 합니다. 사제는 그렇게 살아야지요. 전 그런 점에서 잘못 살았어요. 많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자꾸 반성하게 됩니다. 그저 하느님 자비를 비는 수밖에요. 저는 그렇게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후배 신부님들은 어려움이 있는 신자와 되도록 가까이 지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50년 전 교황대사를 통해 주교 임명 소식을 전해들은 1963년 10월 9일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에겐 엄청난 사건이었다. 윤 대주교는 "사제품을 받을 땐 드디어 꿈을 이룬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넘쳐있었지만, 주교품을 받을 땐 내가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알기에 걱정이 앞섰다"고 회고했다.
주교로 지낸 50년간 세상은 많이 변했다. 아니 변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달라졌다. 그사이 경제성장 바람을 타고 교회도 훌쩍 성장했다. 초대 수원교구장에 임명됐을 때 수원교구에 본당은 24개, 신부는 28명이었다. 광주대교구장에 착좌했을 땐 사제 대다수가 아일랜드 골롬반회 외국인 선교사였고 한국 신부는 10명도 채 안 됐었다. 교구 재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신자들 형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과 같은 교회 모습이 놀랍고 한편으론 감격스럽다"고 했다. 사제와 수도자, 신자 모두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할 성장이었기에 고맙다고 했다.
"지난 3일 수원교구 설립 50주년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넘치는 영적 활기에 감탄했습니다. 제가 처음 10년 있었는데, 그 이후 교구장 주교님들께서 교구를 잘 이끄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10년 사목하고 빠져나오길 잘했지요(웃음). 저는 그렇게까지 교구를 발전시킬 수 없었을 겁니다. 또 광주대교구엔 저까지 대주교가 세 명, 보좌주교까지 주교가 네 명 아닙니까. 특별한 일입니다. 광주는 아픈 역사를 지녔지만 그만큼 하느님께서 더 큰 은총을 내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픈 역사'를 이야기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5ㆍ18 민주화 운동 시절을 떠올리면 "혈압이 올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게 된다"고 했다. 선하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졌다. 기억을 더듬으니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다. 윤 대주교는 "군부에 시민들이 짓밟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교구 사제들이 감옥에 잡혀가던 그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남동성당에서 사제단과 시국미사를 봉헌하려고 계획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가 모여있는 성당을 군인들이 포위하더라고요. 신부님들은 분노했고, 신자들은 여차하면 군인과 맞설 태세였죠. 이러다 더 큰 일 나겠다 싶어 사제단 반대를 무릅쓰고 미사를 포기했어요. 교구장이 미사를 못하겠다니 신부들도 따라야겠지만 그 때 다들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몰라요. 주교관으로 돌아와서야 후회가 되더라고요. 그 이후론 어떤 방식으로든 신부님들과 함께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물론 광주대교구장을 지내며 아픈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과 함께 웃으며 정을 나눈 즐거운 기억이 더 많다. 섬이 많은 지역 특성상 흑산도, 진도, 홍도 등 섬에 사는 신자들을 만나던 때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다. 윤 대주교는 "몇 시간씩 배를 타면서 뱃멀미에 고생하고 심한 풍랑에 위험한 고비를 넘긴 적도 많았지만 신자들과 해수욕하고 낚시하고, 또 항구 근처에서 산낙지 먹으며 배를 기다리는 주교 생활을 누가 또 했겠느냐"며 크게 웃었다.
2000년 광주대교구장직을 내려놓은 그는 전남 남평 광주가톨릭대 근처 주교관에서 지내고 있다. 은퇴 이후 그는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며 미사와 성무일도, 묵상과 기도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체중 관리를 위해 신학교 교정을 산책하거나 실내용 자전거를 타는 것이 운동이라면 운동이다. TV는 잘 안 보지만 평화신문은 꼭 챙겨본다고 한 그는 "신문을 통해 교회 여러 소식을 접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교회 모습에 위로를 받는다"고 말했다.
"한국 교회는 주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황청과 세계 교회도 성장하는 우리 한국 교회를 주목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신자들과 우리 사제, 수도자도 복음전파에 더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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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공희 대주교 약력
△1924년 11월 8일 평남 진남포 출생
△1949년 덕원신학교 신학과 수료
△1950년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성신교정) 졸업, 사제수품
△1950년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본당 보좌
△1951년 UN 포로수용소 종군 신부
△1954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1954~56년 서울 성신중고 교사
△196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 졸업, 신학박사
△1963년 주교 수품, 초대 수원교구장 착좌
△1967~68년 겸)서울대교구장 서리
△1970~75년 주교회의 부의장
△1973년 제7대 광주대교구장 착좌
△1975~81년 주교회의 의장
△1975~88년 주교회의 정평위 위원장
△2000년 광주대교구장 은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