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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임 경기명창 이야기
동아일보
2014-03-08
“어머니 마음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너무 늦었나봐요”
김영임은 ‘나눔의 집’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흉상 앞에서 일제의 만행을 빗대
‘불의 행사 몹쓸 마음
흉참하기 극심하다
구렁이 뱀 금수되
몇 겁인들 벗을쏘냐’
회심곡 한 구절을 낮게 읊조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경
기소리 ‘국민명창’ 김영임(61)이 ‘회심곡’을 처음 부른 건 스물한 살(1974년) 때였다.
이창배 스승(1916∼1983)으로부터 두 달 동안 배운 뒤, 전깃불을 끄고
촛불 하나만 켠 채 녹음을 했다.
녹음실 밖에선 다들 울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애간장이 다 녹아내렸다.
어린 나이에 어쩌면 저렇게도 절절하게 부를 수 있을까.
그 후 40년 동안 김영임은 계속해서 회심곡을 불렀다.
그리고 이제야 회심곡을 좀 부를 줄 안다고 느낀다.
어릴 적 첫 회심곡은 요즘 들어보면 창피하고 부끄럽다.
회심곡은 서산대사(1520∼1604)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었다는 불교가사.
짧은 인생, 부모에게 효도하고 좋은 일 많이 해야 극락에 간다는 내용이다.
‘옛 노인의 말 들으니
저승길이 멀다더니
오늘 내가 당하여는
대문 밖이 저승이다
친구 벗이 많다 하나
어느 친구 대신 가며
일가친척 많다더니
어느 친척 등장(等狀)하랴.
듣다보면 가슴이 뜨끔뜨끔하다.
다 부르려면 한 시간도 넘게 걸린다.
“내가 자식(1녀1남)을 낳아 키워 보고, 나이 예순이 넘어 손녀까지 보게 되니 비로소 어머니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내 결혼 때 온 집안이 반대했었다. 엄마는 곱게 키운 딸을 노총각 장남에게 어떻게 보내느냐며 망연자실했었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회심곡 중 ‘쓰디쓴 것은 어머님이 잡수시고…’구절을 부를 때면 눈물이 절로 난다. 회심곡을 부를 때마다 ‘과연 난 어떻게 살았나’하며 많은 반성을 한다. 늘 불효하고 잘못한 것만 떠오른다. 내가 ‘김영임 소리 효 대공연’을 올해까지 22년째(전국순회, 한해 20여회) 해오고 있는데, 공연할 때마다 나도 울고, 객석의 어르신들도 울고, 온통 눈물바다가 된다. 어느 분은 ‘우리 어머니가 회심곡 듣다가 돌아가셨다’고 흐느끼고, 어느 아버님은 ‘난 불효자식’이라며 손수건이 흥건할 정도로 엉엉 우신다. 우리엄마는 내 딸이 두 살 때 그러니까 3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하지 못해 늘 가슴이 아프다. 한동안 죄책감 때문에 ‘회심곡은 불러서 뭣하나’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문득문득 심순덕 시인의 시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나도 우리엄마가 슈퍼우먼인 줄 알았다. 막상 내가 나이 먹어보니 엄마도 눈물 많고 연약한 한 여자였더라.”
김영임은 수시로 어르신 자선공연을 펼친다. 노인의 날은 말할 것 없고, 음성·가평꽃동네나 서울 종로 탑골공원도 찾는다. 외손녀 100일 잔치를 가평꽃동네 분들과 떡을 나누며 하기도 했다. 그것은 어르신들한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어서다. 김영임은 지금까지 한눈을 팔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살림 잘한다’ ‘착하다’ ‘효녀다’라고 칭찬해 주는데, 아무리 힘들고 주저앉고 싶어도 반듯하게 살아야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어르신은 그의 어머니요 아버지다.
그도 이제 점점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어르신들을 자주 가서 뵈어야 한다.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다행히 남편 이상해 씨(69)는 봉사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김영임이 독감이 와서 목이 아픈데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억지로 끌고 갈 정도다.
“몇 년 전 일본군 위안부로 피해를 겪은 할머님들을 세종문화회관 공연에 초대해서 모신 적이 있었다. 그때 그분들에게 언젠가 찾아뵙겠다고 말했는데 그게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았었다. 그러다가 지난달 드디어 그 약속을 지켰다.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찾아가 그분들을 뵌 것이다. 그분들은 나를 며느리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하나같이 애국자셨다. 그 연세에도 ‘독도를 뺏기면 안 된다’며 나라걱정부터 하셨다.”
경기소리는 맑고, 청아하고, 서정적이고, 심플하다. 판소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한마디로 김영임이 판소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꾸로 판소리하는 분이 경기소리 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가 가끔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것은 한번 흉내 내보는 거라고 보면 된다. 그의 목소리는 맑은 소리 밑에 허스키한 소리가 깔려있어 호소력이 짙다. 김영임은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국악동요를 널리 가르쳐주는 게 꿈이다. 아이들에게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이 과연 통할까. 영 생뚱맞다. ‘늴리리야 니나노∼’정도나 좀 이해할까. 새로운 국악동요가 많이 만들어지고, 사라진 옛것들도 되살려 내야 한다.
“40대 초반 안면마비로 몇 달 동안 방안에만 처박혀 지낸 적이 있었다. 눈도 안 감기고, 귀에선 뻥뻥 뚫린 소리가 들리고, 음식 씹는 것도 이상하고…. 그런데도 누구하나 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남편, 시어머니 등 남의 탓을 많이 했다. 친정엄마라면 ‘걱정마라, 금방 나을 거다 하며 토닥토닥 해주셨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지금 보면 모두 내 탓이었는데…. 회복 후엔 일중독에 빠졌고 우울증까지 겹쳤다. 닥치는 대로 스케줄을 잡았다. 일주일에 4, 5번씩 지방공연을 다녔다. 그러다가 쓰러졌다. 대수술을 받고서야 이젠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영임은 2003년 화관문화훈장을, 남편 이상해 씨도 2005년 똑같은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보기 드문 훈장부부다. 이상해 씨는 ‘겁부터 덜컥 난다. 이젠 부부가 말다툼도 못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지만 그만큼 두 사람은 ‘남에게 베푸는 삶’에 익숙하다.
“남편은 천하의 효자임에는 분명하다. 그는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이 다른 것도 잘하고, 잘 풀린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다. 아흔셋 어머님을 35년째 모시고 있다. 시어머님은 이와 귀도 튼튼하고 돋보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정정하시다. 하지만 남편은 지금도 커피 타서 앞에 갖다줘야 하고,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밥을 차려줘야 한다. 가끔 속으로 ‘저 인간을 그냥…’하다가도 내가 그렇게 배웠고, 그도 그렇게 버릇이 들어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요즘은 설거지도 해주고, 내 공연 때 토막극으로 잠깐씩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본인이 늘 ‘상전벽해’라는 말에서 ‘상해’라는 예명을 따왔다는데, 진짜 그대로 됐다. 이젠 제발 오래 살라고만 빌 뿐이다. 4년 전 위암 수술을 했는데 담배도 끊고, 그 좋아하던 술도 조금씩밖에 못한다. 다음 세상에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만나야겠지만, 남녀관계로만 보면 미안하지만 ‘절대사절’이다.”
▼ “이혼서류 들고 법원 아닌 경찰서 간 적도… 이젠 남편 오래 살라고 빌 뿐” ▼
개그맨 이상해 씨와의 부부인연
‘꽃신부’ 김영임과 ‘노총각 개그맨’ 이상해의 결혼식. 오른쪽은 고 이주일 씨. 김영임 명창 제공1979년 5월, 꽃다운 나이 스물여섯. 김영임은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 ‘개그맨 이상해 씨와 사귄다’는 소문이 장안에 쫙 퍼진 것이다. 당시 김영임은 뭐가 뭔지 세상물정 모르던 숙맥이었다. 그때까지 결혼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온통 정신은 소리공부에만 빠져 가사 외우기에도 하루가 바빴다. 어느 기자는 ‘모처럼 명창이 나왔는데, 왜 하필 그런 사람하고 만나느냐’며 극구 말릴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이상해 씨는 대마초흡연 혐의로 활동금지 중이었고, 노름이다 뭐다 그쪽에도 한가락 걸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장남(5남매)에다가 서른넷 노총각이었다.
기자회견 초반엔 그럭저럭 수월했다. ‘어떻게 만났느냐’는 물음에 개그맨 한무 씨(69)가 하도 만나보라고 해서 (무서워서) 큰조카를 데리고 나갔는데, 다짜고짜 첫마디가 ‘저랑 결혼 좀 해주시겠어요?’하더라고 했다. 다들 웃었다(이상해는 2년 동안이나 김영임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기자가 ‘과연 결혼은 할 거냐’고 다그쳤다. 그 순간 김영임은 덜컥 겁이 났다. 엉겁결에 ‘결혼할 건데요!’라고 대답했다. 곧 ‘언제할 거냐?’로 이어졌다. ‘11월에…’라고 자연스럽게 받았다.
“아마도 그때 내가 이것저것 계산하고 나갔다면 ‘결혼은 안 한다’고 했을 것이다. 정말 이상해 씨(본명 최영근)에게 처음부터 관심조차 없었다. 나이도 여덟이나 위여서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게다가 난 코미디프로 자체를 싫어했다. 그런데도 날 지긋지긋하게 죽자 살자 쫓아다녔다. 내가 가는 곳마다 그가 나타났다. 한번은 내가 하도 안 만나주니까 택시로 납치소동까지 벌였다. 우리 집 앞에 택시를 세워두고 기다렸다가, 내가 저녁에 돌아오자 억지로 태우려고 했던 것이다. 또 한번은 다른 연예인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 양수리 수상스키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온갖 묘기를 부리며 수상스키를 타고 있었다. 내가 눈이 동그래져서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주위 남자들이 입을 맞춘 듯 ‘이상해!’라고 대답했다. 뭔가 서로 사전에 각본을 짠 것 같았다. 결국 그 끈질김에 내가 넘어갔다. 그 후 종종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맏며느리 김영임은 시집에서 ‘복덩이’였다. 결혼 한 달 만에 이상해 씨의 활동금지가 풀린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남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남편 이상해는 요즘의 유재석 만큼이나 잘나갔다. 별 뜰 때 나가, 별 보면서 들어왔다. 어쩌다가 시간이 나서 집에 있을 때도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다.
김영임은 자리보전하고 있었던 시외할머니와 시부모 그리고 시누이 2명 등 어른들과 거의 온종일 복작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결혼 전 남편은 ‘분가해서 살자’고 하더니 결혼 후엔 ‘부모님 모셔야 된다’고 말을 바꿨다. 그래서 시부모님이 계시는 동네에 신혼집을 샀다. 같은 동네였기에, 날마다 맏며느리로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에 앞장서야만 했다.
남편집안은 북한 사람들이라 만두, 냉면, 빈대떡을 좋아했다. 토요일이면 20여 명의 대가족이 장남 이상해의 집에 모여 엄청 먹어댔다. 그걸 웬만한 남자보다 손이 큰 김영임이 시원스럽게 척척 해냈다.
“이상해 씨가 나를 ‘공주처럼 떠받들고 살겠다’더니 다 거짓말이더라. 결혼 전에는 처가에도 그렇게 잘하더니 그것도 아니더라. 자기네 식구 판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ㅎㅎㅎ. 난 6남매의 막내딸로 귀염 받고 자라서 그런지, 남편한테 사랑받고 싶고, 우리 식구만 단출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은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팬들이 ‘당신 들어가고, 부인 내보내라’고 한다며 언짢아했다. 결국 하루가 멀다 하고 줄기차게 부부싸움을 했다. 이혼서류를 들고 가정법원이 아닌 경찰서로 찾아간 적도 있었다. 진짜 이혼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일종의 시위였지만…. 난 단 한번도 생일을 찾아먹은 적이 없다. 난 시부모, 시누이, 시댁 조카 생일까지 챙기는데, 그 누구도 내 생일은 챙겨주지 않았다. 남편은 나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커녕 아예 모르고 넘어갔다. 한번은 열 받아서 달력에 굵게 동그라미를 쳐놓고 호텔 뷔페에 일방적으로 예약을 해버렸다. 그러고는 남편 후배 개그맨 최병서 씨(56) 등을 불러 조촐한 자축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뒤늦게 달려온 남편한테 크게 혼났다. ‘젊은 게 환갑잔치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난 잘 안 우는데 그땐 속상해서 울었다. 최병서 씨가 ‘형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남편한테 대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부턴 그런 거 안 한다. 이젠 그런 축하잔치를 받아도 닭살 돋을 것 같다. 워낙 습관이 돼놓아서…. ㅋㅋㅋ”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김영임 약력
▽1953년 서울 출생
▽이창배 선생에게 경기소리, 경기12잡가 사사(1970∼1983)
▽묵계월 선생에게 경기소리, 경기12잡가 사사(1984∼현재)
▽중앙대 국악과 교수
▽이화여대 국악과 출강
▽한국국악협회 이사
▼수상 ▽민속경연대회 장원(1973) ▽KBS국악대상 민요부문 신인상(1982) ▽KBS국악대상 대상(1995)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1997, 2004) ▽문화의 날 국민화관훈장 수훈 및 대통령상(2003) ▽대한민국국회 국악대상(2009) ▽세종나눔봉사 국방장관상(2011) ▽우리것 보존 범민족문화진흥협회 대한민국명인대상(2012) ▽자랑스런 한국인대상(2013)
▼활동경력 ▽백남준의 ‘바이바이 키플링’ 출연(1986) ▽뉴욕 카네기홀 아라리공연(1998) ▽‘김영임 소리 효’ 전국순회공연(1999∼현재) ▽세종문화회관(6일 12회) 회심곡 공연(2001) ▽국립국악원 12잡가 완창발표(2005)
▼현재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외래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보조자
▽(사)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소민 김영임소리전수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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