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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린왕자의 들꽃사랑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그린리버
일요일 아침 또 나서게 되었다. 올레길을 나서기로 작정 하다보니 일요일 아침의 여유를 조금 더 부려보는 호강을 떨쳐 버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서귀포로 향하였다.
일찍 서두르다보니 행사시간 보다 2시간 여가 남아 있길래 올레길 가기 전 아침을 든든이 해두어야 하길래 근처 시장 식당을 두리번 거리다 시레국을 한다하여 배속을 채우려 식당안을 들어가 나는 시래국 대신 고등어 조림을 시켰지만 나의 선택은 탁월하지가 못했다.(원래 작정했던걸 먹을걸...) 고등어 조림도 아니고 매운탕도 아니게 국물이 찌게 수준이었고 게다가 주 재료인 고등어는 통조림 고등어 였다. 주인장께 뭐라 하려다 중년을 넘기고 칠십을 바라보는 주방장과 서빙맨이어서 미래의 나를 보는것 같아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나와 7코스 시작점인 외돌개를 향하였다.
내가 걸어 들어갔던 길이 이중섭 거리였다. 거리는 화가의 거리답게 예술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듯하다. 길가의 벽면에는 화랑의 전시작품처럼 전시회 안내판과 大鄕의 작품이 걸려있어 그것들을 보느라 거리를 두리번 거리며 고갯마루길을 내려오는데 옛날 명동길의 소극장길을 걸어가듯 문화예술공간같은 크고 작은 갤러리들이 들어서있는 비슷한 상가를 지나는데 왼쪽편에 거리의 분위기와 다르게 제주의 전통 초가집이 정랑이 쳐진 마당 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혹시...
그렇다. 화가 이중섭이 1년 여 피난길 가족과 잠시 머물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일본인 아내와 자식들이 일본으로 떠나버려 홀로 남아 가족을 그리며 작품활동을 했던 大鄕의 살던 집이었다.
한번은 꼭 오고 싶었는데 지난 주 6코스를 얼렁뚱땅 걸었던 탓에 이 거리를 지나지 못했었는데 7코스 가는 길에 덤으로 얻은 것같아 기분이 매우 좋다.
집안엔 황구가 자신의 자리를 잡아 앉아있다 大鄕의 주거지 봉사나온 봉사자들이 마당에 먼지 날리지 말라고 아침 출근 후 마당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시간이 나면 한번 들려보려했지만 7코스 올레길 걷기 행사가 코 앞이라 나중 시간을 내어 들러보기로 하여 대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7코스 출발점인 외돌개로 향하였다.
택시를 잡아타고 10여분을 달려가니 외돌개 주차장이 보인다. 길가엔 어디 남국에나 왔있는듯이 키 자람을 자랑하듯 야자수 수십그루가 나를 위해 도열해 있는듯 하였다. 날씨는 따뜻하고 視界 역시 좋아 서귀포의 해안을 바라보며 걷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올레길 걷기를 시작할 때 찍는 스탬프가 종류별로 있었다. 나중 올레길 완주를 인정받기 위한 답사 확인 도장인듯하다. 나 역시 아직 페스포드를 구입못해 나중 페스포드를 구입하면 오려 붙이려 A4용지 한장 빌려 고무인 도장 '쾅'하니 눌러박았다.(그날 처음 알았음) 이 도장은 출발점과 끝나는 지점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 반드시 찍어야하는 확인 도장이니 올레길 완주를 계획하고 있다면 반드시 확인 도장을 찍어두어야 할것이다.
7코스의 자원봉사자 이경자씨!
그녀는 '아카자봉' 동문으로써 올레길 일일 봉사를 위해 나와 올레길 걷기 행사 전 안내를 하고있다.
참고로 '아카자봉'이란 아카데미 자원봉사자로서 올레길 아카데미반에서 교육을 받은 동문들이 길 안내를 위하여 봉사하는 모임이다. 이 올레길 걷기가 매일 실시할 수있는 일이 가능한것은 이 봉사자들이 각자의 봉사일을 정하여 정해진 코스에 나와 올레길을 탐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길라잡이 봉사를 하기 때문이 라는것을 그날 역시 알게 되었다.
7코스 출발 전 그날의 분위기를 잡아보기 위하여 길건너 주차장에서 서귀포 해안을 배경으로 한컷 찍어 보았다. 저 멀리 섶섬이 보이고 그 앞에 삼각 뿔탑 모양의 세연교가 희미하게 새섬으로 연결되있는 모습이 보인다. "준비, 땅!"소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올레꾼들이 아름다운 서귀포 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을 내 딛었다.
7코스에는 어떤 풍경들이 펼쳐질까? 사람들 각자는 앞으로 펼쳐질 7코스의 비경을 기대하며 힘차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외돌개와 월평리까지 14.7Km.
오늘날 처럼 몇백미터 집 앞에있는 할인매장을 가면서도 자가용을 끌고 나가던 현대인들이 어느 누가 걸어가라해서 걷는 길도 아닌데 집 앞 장보러 가는 길 수 백배이상 걸리는 길을 그들은 일요일 아침 자발적으로 그 길을걷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찾아 나서는 길일가? 이런 질문을 하는 나 역시 무슨 이유로....
역광이 조금 비켜난 곳에서 아까의 세연교를 바라보니 뚜렷한 자태를 드러내고있었다.
지난 주엔 저 다리를 건너 새섬으로 들어갔었는데...
이제 올레길 두번 째날을 맞아 서귀포를 뒤로하여 점점 동쪽으로 나 있는 올레길을 나는 걸어가고 있다. 어느날에 이 제주 한바퀴를 다 돌아 다시 이 서귀포 해안에 돌아 올지 모르지만 그렇게 서두르지는 않으리라.
올레길은 어느 누가 재촉하여 걷는길이 아니요, 나 자신을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고 또, 덤으로 제주를 알아가는 길이기에 쉬어가멍 놀멍놀멍 걸어가는 길이니까.
외돌개가 보이기 전 해안가 풍경인듯 싶다. 좀더 세밀하게 지역설명을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걸어가며 길라잡이의 설명듣고, 주위 풍광 찍어가며 일행을 쫓다보니 수첩에다 기록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뭉퉁그려가며 이야기를 꺼내감을 이해 하였음 한다.
내가 맨 처음 이 외돌개를 본 기억은 1972년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였을 것이다. 그것도 비오는 어느 봄날 지나는 관광버스 안에서 선생님인지, 가이드인지 "저것이 외돌개다" 하여 지나는 버스안에서 훌쩍 보고 지난 기억 밖엔 없다. 사실 지난 몇 십년 까지만 하여도 제주의 관광은 보는 관광 밖엔 없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만장굴, 성산 일출봉, 비자림, 용두암 그리고 천지연과 정방폭포, 서쪽 해안가에 있는 삼방산 등등... 그저 유명 관광지라하여 한번 쑤욱 들러보고 그것들 배경으로 사진 한방 찰칵 찍으면 "나 어느 때 어디 갔다 왔네"하는 그것 뿐이 었는데 지금의 제주관광은 확연히 달라졌다. 관광지앞에 안내 설명문이 친절하게 붙어있고 나름 신경쓰는 가이드는 제법 관광지에 대한 안내를 하는것 같다.
나 역시 여태 외돌개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으니 제주의 관광지가 이처럼 변해있음에 격세지감을 안 느낄 수가 없었다.
외돌개!
이 역시 한라산이 폭발하며 분출된 용암지대에 파도의 침식작용에 의해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바위 형상을 하고있는 모습을 후대사람들이 외돌개라 명명하였는데 일명 장군바위라고도 부른다.
또, 장군바위라 명명한다면 여느 명승지와 같이 이 외돌개에 깃든 이야기가 있을터 나는 그날 올래길을 걸으며 처음 그 내력을 알게 된것이다.
고려말 몽고 대제국이 쇠퇴하던 시절 고려의 최영장군은 수백 척의 배를 몰고 제주의 서귀포로 들어왔었다.
당시 탐라에는 원나라 황실의 말을 방목해 목장에서 말을 치고 있었는데 그때에 원나라에서 파견되어 말을 치는 사람들을 목호라 하였다. 그 숫자는 1700여명 정도 였었는데 이들은 100여년동안 제주에 살면서 제주인들과 화합하여 살아가던 중 원의 세퇴와 함께 중국대륙에 새로 등장한 명의 요구에 의해 제주마 2,000필을 요구에 이 목호들이 쿠빌라이가 방목한 말을 어찌 적국에 내줄수있느냐며 반발하자 명의 눈치를 보던 고려 조정은 탐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전함 314척, 군사 25,000여명을 이끌고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 이들이 고려군에 좇기어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범섬으로 도망갔을 때 이 외돌개에 커다란 장군 갑옷을 입히어 이 목호들의 간담을 서늘캐 했었다고 전하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어이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다 찌그러져가는 원의 졸개들 1,700명을 소탕하기 위하여 그 수많은 전함과 군사를 파견한것과 그들의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하여 외돌개를 덮을 수있는 커다란 갑옷을 제작했다 라는 말에 얼마나 고려의 기개가 당시에 미약했는가를 미루어 짐작 할 수가 있었다.
지난 주 이 외돌개에대하여 이야기를 잠시 나누며 올래길을 걷던 다른이가 덧 붙인다.
"그래서 이곳 제주에는 최영장군 사당이 없다 합디다. 그것은 제주 사람들이 100여년 동안 이 몽골인들과 결혼하고 애기 낳고 잘 어우러져 살고 있어서 이제 그들도 어엿한 제주인이요,사위이며,아버지인데 어느날 이 고려군들이 몽골인들을 잡아 죽이니 최영장군을 그리 좋게 안본 것이지요."
꼬불꼬불 해안가를 지나고 산길을 걸어가며 새봄이 찾아 온 서귀포 길을 걸으며 어떻게 이렇게 풍광 좋은 곳에 다니기 편하게 길들을 놓을 수있을까 하여 곁에서 걷던 봉사자에게 물어보았다.
"이 올레길은 어떻게 조성 되었나요? 이처럼 데크길,시멘트 포장길을 올레 사무국에서 닦아 놓았나요? 자금이 만만치 않을텐데요?"
"물론 아니죠, 시나 도에서 만들어 놓은 길을 올래길로 개척하여 우리는 그 길가에 올래길 표시 리본을 달고, 이정표를 만들어 세워 놓아 올레길로 이용하고 있어요."
올래길을 두차례 걷다보니 올래꾼들은 데크길, 화산송이를 갈아놓은길, 시멘트길, 차들이 다니는 아스팔트길을 이용하며 걷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이 데크길을 언제 만들어 놓았는지 군데군데 나무판자가 부러져 있어서 그날 올레길을 걷는 중 인부들이 이 데크를 걷어내어 널찍한 돌판을 깔아 놓으려 준비하고 있음에 나는 생각해보았다.
"오랜 시간을 걷는 올레꾼들을 위해 돌판 대신 쿠션 좋은 화산송이를 깔면 비용도 덜 들고 분위기에 어울릴텐데 어떻게 돌판을 깔 생각을 하였는지...."
오랜 숲길을 벗어나자 올래길 봉사자 이경자씨가 "7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돔배낭 길을 방금 벗어났어요"라고 말함에 나는 그녀를 탓해본다.
"아니, 길 들어서기 전에 말씀 좀 해주시지 다 지난 다음 얘기하셔서 우리는 그저 앞만 보고 걸어왔잖아요"
돔배낭이란 제주의 토속음식중에 돔배고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돔배고기란 도마 위에 삶은 돼지 고기를 설컹설컹 썰어놓아 신김치를 싸먹는 제주도식 보쌈고기다. 그 도마를 만드는 나무라 했는데 우리가 걸어온 숲길에선 도마를 만들 수 있는 크기의 나무는 볼 수가 없었던것 같은데 이곳에 나는 나무로 도마를 만들었다니옛날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많았던 곳이 아닌가 생각 되어진다.
또 다시 펼쳐진 바닷가! 저 멀리 강정 포구가 펼쳐진다.
가만... 강정포구라 하면 몇해 전부터 군사항 기지가 생긴다며 이슈화가 되었던 곳이 아닌가? 그곳은 해군기지가 완성되어 개항된 지금 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오늘에야 나는 그 강정마을을 가보게 된 것이다. 강정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길가에 심어진 백년초이다. 꼭 선인장처럼 생겼다. 이 백년초는 위병에는 특효약이라하여 이를 가공하여 많은 먹을거리로 만들어 공항면세점에서 파는것을 본 적이 있다. 열매가 붉으스름하게 가시가달린 잎새위에 맺혀있다.
법환포구에서 바라본 범섬인것 같다. 때마침 범섬에 낚시꾼들을 데려다 주고 오는 보트인지 시원한 바닷바람을 날리며 흰물살을 가르고 포구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아마도 사람이 살지않는 무인도여서 꽤 씨알굵은 우럭이나 어랭이를 낚을 수는 있을것이다. 그들은 낚은 고기 내장 긁어내어 바닷물에 휘이 저어 비닐 벗겨내어 붉은초장에 싱싱한 바닷고기 한점 소주잔과 더불어 봄을 향해가는 따스함을 맛보고 있을것이다.
2002년 "대~~한 민국"을 외쳤던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이 모습이 마을을 들어서니 지나는 올레길의 지척에 있었다. 파랗게 펼쳐진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며 6월의 함성을 내질렀던 경기장은 이제 그날의 영광을 다시 느끼려는듯 세계인들을 불러모을 그날이 언제일까를 고대하는건 아닌지...
조금씩 조금씩 강정 군사항기지가 눈앞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커다랗게 둘러쳐진 방파제!
그 방파제안에는 잠수함이 몇척, 이지스함이 몇대나 정박해 있을까? 대양해군을 꿈 꾼다며 강정마을사람들을 내편, 네편 양편으로 나뉘게 했던 군사항 건설, 그것은 보상받은이와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낳게 하였고 구럼비의 비극을 낳게했던 곳이다. 3월 하순의 중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적당한 햇살과 바닷바람이 우리 올레꾼들의 마음을 한껏 상쾌하게 맞아주는듯 하였지만 강정마을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그러하지만은 못했다.
이경자씨가 안내하는 올래길이 어딘지 부르조아틱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과거에는 풍림콘도라 하였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바뀌어 켄싱턴 리조트라 한다. 이처럼 7코스의 올레길은 이 리조트 경내로 이어지고 있었다. 에메랄드빛깔의 풀장이 놓여있고 그 주변으로 역시 남극의 심벌 야자수가 심어져 있었다. 어떻게 올레길이 개인 사유지 안으로 이어 질 수가 있을까?하여 이경자씨에게 물어봤더니 이곳 리조트에서는 올래길 초창기 때부터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는 올레길과 함께하는 업체로써 경내에 올래길 중간 스탬프를 찍는 바닷가 우체국이 이 리조트 안에 있고 올레꾼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곳이라 전한다.
역시 이제는 사업을 하더라도 지역발전에 일조하며 사업을 펼쳐나가는게 대세인듯싶다. 커다란 울타리를 쳐놓아 어렸을 적 읽었던 키다리 아저씨 집에 몰래 엿보던 동네 꼬마모습을 보는게 아니라 이처럼 언제든 이웃 올레꾼들을 위하여 개방해 놓은 모습을 보며 어찌보면 올레꾼들에게 커다란 광고효과를 보고 있는것은 아닌지 여겨졌다. 그렇지만 참 고무적인 일이다.
업체측에서 제공한 바닷가 우체국!
먼 길을 걸어온 올레꾼들에게 잠시 쉬어가게 만들어놓은 원두막이 참으로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 옆 계단을 오르기 전 좌측으로 자그마한 상자는 역시 스탬프를 찍기위한 고무인 보관장소이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늦은 점심 시간이 되자 봉사자 이경자씨가 우리들 앞에 나선다.
"이제 잠시후 마을로 걸어나가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매콤한 해물짬뽕을 드시겠어요? 한식부페를 드시겠어요?"라며 메뉴를 고르란다.
거의 네시간을 쉬지 않고 걸어 왔으니 모두들 배가 고팠으리라. 해물짬뽕이 우세다.
가끔씩 먹어보는 메뉴이지만 오늘은 무엇을 먹어보나 머릿속 그것들 벌써 내입안 들어온것을 그려보니 벌써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래도 이럴땐 매콤한 해물짬뽕이 제맛이겠지?
우리는 허기를 달래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부지런히 해물짬뽕집을 향하여 발길을 다시 놀려 나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