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에서 격렬한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생중계됐다. 각자의 국익을 건 양자회담에서 이런 모습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수면 아래인 듯한 상황을 그대로 보는 것은 드물어 역사적인 사건이 됐다. 특히 최고통수권자가 얼굴을 붉히며 목청껏 손가락질을 하는 장면은 트럼프의 국정철학인 '미국 우선주의'가 단순한 구호가 아님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로 느껴졌다. 설마 했던 사람들에게 미국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약속을 수없이 어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안보를 해야 한다는 젤렌스키의 거듭된 요청을 트럼프는 묵살했다. 트럼프는 누가 침략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계속되는 전쟁에서 미국이 받을 피해 또는 얻는 이익이 중요한 기준이다. 러시아의 침략은 정당화되지 않으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상식과 선악의 구분은 트럼프에게는 의미가 없다. 자비 없는 미국 우선주의다.
트럼프 2기는 러시아·중국·유럽연합(EU) 같은 강대국과의 관계 정립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앞길을 방해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번 말싸움이 잘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백악관에 들어가는 각국 지도자들은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른다. 미국의 이익 추구를 지연시키는 듯한 태도는 트럼프와 존 D. 밴스 부통령의 맹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표현처럼 손에 카드가 없는 젤렌스키는 약소국의 안타까움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힘의 논리로 세상을 보는 트럼프에게는 옳고 그른 것보다 권력의 크기가 절대적인 변수다.
젤렌스키 측의 실패도 있다. 달라진 미국에 대한 현실 인식이 부족했던 데다 트럼프와 밴스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갖는 선입견을 간과했다. 트럼프는 2019년 젤렌스키에 대해 바이든 당시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의 비리 혐의를 조사해달라고 요구해 군사지원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트럼프 탄핵을 촉발한 중심에 젤렌스키가 있었다. 밴스는 "우크라이나에 무슨 일이 있어도 관심은 없다"고 공개 발언을 할 정도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냉담했다. 또 미 대선 열기가 고조되던 지난해 9월 젤렌스키가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주를 방문한 것을 두고 미국 정치에 개입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시절 백악관 방문의 공식처럼 된 추종 기술도 발휘되지 않았다. 미국의 천문학적 전쟁비용 지원에 적극적인 감사의 표시가 없었다며 밴스는 무례하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그동안 젤렌스키가 세계를 돌며 평화의 사자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받았던 접대와는 달랐다. 미국 우선주의다.
젤렌스키는 백악관에 들어간 날 아침 린지 그램 상원의원 등 공화 민주 양당 소속 상원의원들을 숙소에서 만났다. 그램은 공화당 내 대표적인 우크라이나 지원론자다. 그램은 젤렌스키에게 먹이를 물지 말라고 조언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해야 할 일, 즉 광물협정 서명을 마치고 신속히 나와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광물협정을 통해 그동안 미국이 쏟아부은 전쟁비용을 회수하고 첨단기술 발전에 필요한 희토류 등 자원을 확보해 납세자의 돈이 쏟아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는 트럼프의 강력한 의지에 대해 힌트를 줬지만 젤렌스키는 자존심을 지켰다.
놀랄 것도 없이 아직도 트럼프가 의도한 대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 백악관을 나와 런던으로 간 젤렌스키는 나흘 만에 백기를 들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과하고 트럼프에게 서한을 보내 광물협정 서명과 휴전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젤렌스키가 원했던 안보 방안이 추가되지 않은 채 광물협정 서명이 이뤄지면 트럼프가 승기를 잡게 된다. 잠시 유예했던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25% 관세도 시행에 들어갔다. 대만 TSMC는 미국에 1000억달러(약 15조엔)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대만에 대한 방어 의지 질문이 나올 때마다 애매한 태도를 보이던 트럼프는 투자 약속 뒤에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재앙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공짜는 없다는 트럼프의 거래적 외교다. 트럼프는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한국에 군사지원을 하지만 한국의 관세는 평균보다 4배 높다고 저격했다.
트럼프를 상대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무력한 나라에 가혹한 대응을 하는 트럼프를 상대하려면 경제적 힘을 더 높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은 대통령 탄핵 사태로 정치와 정책이 표류하면서 그 반대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