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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날에 띄우는 편지.
幸福한 삶 粱南石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군 군, 스승 사, 아비 부, 한 일, 몸체
임금님과 스승님과 아버지는 한 몸과 같다.
하여 그림자도 밟아서는 아니 되니라,
매년 5월 15일은 교권 존중과 스승 공경의 사회적 풍토를 조성 교원의 사기진작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하여 지정된 법정기념일인 스승의 날이 됩니다.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는 뜻으로 만든 날이 스승의 날입니다만 우리는 입만 벌리면 교육을 말하고 부르짖는 가운데 선생은 있지만 스승이 없다라고 들 말합니다. 여기서 스승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뜻만이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도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은 참 스승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흥 하려면 그 어떤 기관이나 분야보다 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나 인류학자들 사이에 현재까지 끝없는 논쟁에 결론 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랜세월 맹자의 성선설이 우세하였다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순자(荀子)의 성악설이 우세하다 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성선설이란 인간은 본래부터 때가 묻지 않은 깨끗한 존재였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변에 환경이나 주어진 여건 때문에 온갖 때가 묻어 거짓말과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성악설은 인간은 본래부터 악한 존재였으나 인류가 진화하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 보니 약자는 늘 강자에게 짓밟히며 맹목적 복종하며 사는 것을 보호하고 서로가 공생 공존 하기 위하여 규칙과 규율, 규범을 만들면서 강제로 이러이러한 짓이나 일은 해서는 안 된다는 반복적 학습 효과와 규율을 어기게 되면 처벌이 따르기 때문에, 대부분에 사람들은 선하게 살아가도록 인위적으로 강제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인류학자들이 성악설에 근거를 두는 바탕은 무채색의 순백에 화선지 같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부터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가장 먼저 거짓말을 배우고 시기와 질투 상대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는 등 몰래 훔치거나 빼앗아 오는 것 등을 근거로 성악설을 주장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런 아이를 사회 규범이라는 테두리 속에 알맞게 성장하도록 아이의 의사는 무시하고 이것은 착한 일이며 저런 일은 나쁜 일이니 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주입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늘 엄마 곁에서 어리광만 부리던 아이가 말을 깨우치고 숫자 개념을 알게 될 정도로 성장해 처음으로 엄마 품을 떠나 세상 밖으로 첫발을 내딛는 곳이 학교라는 곳입니다.
엄마 품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아이는 들뜬 마음보다는 두려움 속에서 같은 또래의 많은 친구도 알게 되며 질서가 뭔지, 규칙이 뭔지, 아이의 눈높이에서 보기에는 전혀 낯설고 생소한 것들을 반강제적으로 주입하는 첫 관문이며 때만 쓰면 모든 것을 다 해주던 엄마·아빠와는 달리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아이 측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것이 안 된다는 것들뿐. 그래서 아이가 적응하기가 무척이나 힘든 시기이기도 합니다.
과거처럼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가정에서 철저히 배운 아이가 별로 없기에 규율과 규칙을 따라가야 하는 아이에게는 낯설고 힘든 시기라는 것입니다.
엄마의 과잉보호에 치맛자락 휘날리는 극성스러운 엄마를 둔 아이에게 초등 시절에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아이의 장래를 생각할 때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고자 하는 글을 올립니다. 과거에는 君師父一體(군사부일체)라며 선생님과 부모님은 동격으로서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가정에서 가르쳤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학생에게 체벌하였다고 학부모는 말할 것 없고 학생들까지 체벌 중에 즉시 손 폰으로 112에 신고 폭행당했다는 언론 보도 심심치 않게 접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국민 윤리와 충효 사상을 주지시켜 주어야 하며 아이가 흥미와 관심을 보이는 분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올바른 가치관과 아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아이 특유의 철학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여주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학교라는 곳이 과거처럼 지식과 윤리·도덕 예의범절을 깨우쳐 주는 곳이 아닌 아이가 타고난 특성은 무시하고 단순한 암기와 천편일률적인 주입식 지식과 무조건 무비판적인 순위를 매기는 줄 세우기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적만 잘 나오는 아이가 칭찬받는 현실에 가정이나 학교 사회가 모두 공범 되어 하나같이 아이들만 버릇없다며 남의 자식들만 탓하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커가는 아이에게 아무리 바른길로 인도 한다 해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요령과 잔꾀는 스스로 터득하게 되어있는데도 코흘리개 적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요령과 잔꾀부터 가르치는 것이 작금에 현실 교육 풍토입니다.
이 나라의 장래를 모두가 공범 되어 어두운 터널 속으로 밀어 넣고서 남의 자식 탓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이 나라가 희망 있는 미래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기관과 언론 종사자 법조 기관에 몸담은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공명 공평 정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 속에 일원으로 더불어 살아가기에는 조금은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을 바른 사회인으로 길러내는 곳이 교육기관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올바른 가치관과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진실과 정의는 반드시 거짓을 이긴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곳이 바로 교육기관의 역할일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사는 깨끗하여야 하며 교사가 존경받지 못한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은 교사 스스로가 백 년 지기를 길러낸다는 투철한 사명 의식 속에 헌신할 때만 존경받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일부 몰지각한 교사가 있어 본연에 임무는 망각하고 다 같은 월급쟁이라며 품위 없는 행동에 촌지 아닌 뇌물을 바라고 돈 몇 푼에 성적을 조작하고 문제지를 유출하는 한심한 작태를 벌이는 일부 교사로 인해 교육자란 사명 의식 속에 묵묵히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교사까지 매도시키는 한심한 교사가 있습니다.
또 한편 교육 사업을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며 명함을 내미는 학원 이사장들 하나같이 사욕에 불타 재단 전입금은 액수를 거론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작은 액수를 내놓고 해마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등록금 인상에 국고까지 받아 놓고서 실력 있는 인재와 현대식 교육에 투자는 등한시하고 족벌 가문에 일원을 학원 곳곳에 포진시켜 국고와 등록금 빼돌려 사유재산 늘리기와 방만한 운영으로 날마다 학원 내 분규만 일삼으며 모두 학생과 일부 교사들 탓으로 돌리며 공권력으로 무력화시켜 주기만 기다리는 한심한 작태가 현실이 아닙니까?!
힘없고 억울한 사람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으며 하소연할 곳이 언론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에 횡포와 비리를 파헤쳐 억울한 희생자가 없도록 두 눈 부릅뜨고 어둡고 탁한 구린내 나는 곳을 낱낱이 파헤쳐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 할 곳이 언론의 바른 역할입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재벌과 권력이 결탁한 무늬만 언론 매체에 기레기들이 판치는 현실 족벌과 재벌 소수 집권층에 대변지라고밖에 볼 수 없는 사이비 언론이 판치는 세상은 결코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법관은 억울한 국민이 마지막 기댈 곳입니다. 청렴결백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관도 뇌물에 양심을 팔아먹는 판결 앞에 그저 힘과 권력에 밀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제약 없이 기댈 곳은 언론이지만 그것도 안 될 땐 마지막 희망은 솔로몬 같은 지혜를 가진 법관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건만 有權無罪 無權有罪,有錢無罪,無錢有罪(유권무죄,무권유죄,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썩어버린 법원도 믿을 곳은 못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온갖 불법과 탈법이 난무하는 세상, 헌법 위에 때 법이 통하는 세상, 법을 무력화시키는 괴변으로 목소리 큰 집단 또는 권력과 재물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한없이 너그럽고 관대해져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듣지 못한 척,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공권력 앞에 꼬박꼬박 법을 지키며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때리면 맞고 밟으면 짓밟히고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며 무지렁이 처럼 살아가는 서민들만 불쌍한 세상이 언제나 바로 설까요.
졸부 근성 가진 자들의 폭식증인지, 거식증인지, 천민자본주의 사상에 찌든 노예가 되어 돈과 권력이 결탁, 온갖 투기와 뇌물로 한몫 거머쥐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작자들을 바라본 서민들은 허무 주위에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빈곤감이나 박탈감에 희망을 잃어가는 현실은 올바른 교육철학이 없었기에 빚어진 결과일 것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부족한 글 갈무리하고자 합니다.? 2008년 5월에.
추신 : 교육은 국가의 존립을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학생, 선생님, 학부모, 사회가 혼연일체가 되어 관심과 책임을 느끼고 다듬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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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념일 중 하나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날. 매년 양력 5월 15일로 이날은 겨레의 스승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탄신에서 따왔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전국 온 백성에게 가르침을 주어 존경받는 것처럼 스승이 세종대왕처럼 존경받는 시대가 왔으면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음력(명나라 대통력) 1397년 4월 10일은 양력 율리우스력으로 1397년 5월 7일 월요일이고, 이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1397년 5월 15일 월요일이라서 그날이 스승의 날로 지정된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스승의 날이 처음부터 5월 15일이었던 건 아니었고, 원래는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강경 여자고등학교(現 강경고등학교)에서 청소년적십자(RCY) 단원들이 세계 적십자의 날(적십자 창립자 앙리 뒤낭의 생일에서 유래)인 5월 8일을 맞아 자신의 스승을 찾아간 것이 시초였다. 이것이 날짜상 어버이날과 겹치기에, 일주일 후이자 대한민국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 탄신일로 미뤄 오늘날까지 기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교육부가 스승의 날 행사를 주관하고 있으며 매년 모범 교사들에 대한 표창장 수여 등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5월이면 대부분의 정규 교과 과정에서 1학기 중간고사 직후 시점이라 학급 담임이나 교과 담임의 은혜까지 느끼기엔 좀 어려운 면이 있긴 하다는 지적도 하고 있으나, 이는 어린이~청소년층의 지적 감각 능력을 과소평가한 이야기에 가깝다. 최소 4시간에서 최대 12시간까지 서로 얼굴 맞대고 살아가는 학교에서 2달이면 각 교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가 내려지기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 다만, 일각에서는 스승의 날을 매 학년을 끝마치는 2월로 옮기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과 같이 불확실성 시대에는 인류와 겨레의 참 스승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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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스승의 날 유래
스승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스승의 어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무당을 나타내는 무격에서 유래한다는 설과 중을 나타내는 사승에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옛날 무당을 나타내는 말로 '무격(巫覡)'이란 말이 있다. 여기에서 무(巫)는 여자무당을, 격(覡)은 남자무당을 말한다. 그런데 옛 문헌을 보면 무(巫)를 스승 무라고 하고 격(覡)을 화랑이 격이라 되어 있다. 결국 스승이란 여자 무당을 말하는 것이다. 여자 무당은 고대사회의 모계사회에서 대단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남자 무당인 화랑이 격의 화랑은 신라시대의 화랑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스승은 원래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15세기의 문헌 〈월인석보〉에는 스승이 나오는데, 법(法) 치닌 스승이오 ㅣ호닌 제자(弟子)이라고 하였다.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불교의 중을 스승(師)'이라고 기록하였다. 옛날에는 중을 존경해서 부를 때 사승(師僧) 혹은 사(師)님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이다.
〈동언교략(東言巧略)〉에 보면 사(師)의 중국 발음이 스란 점으로 미루어 사승(師承)이 스승의 어원이라 했다. 이 사승이 변해서 스승이 되었고, 사(師)님이 스님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스승은 중을 높여 부르는 사승(師僧)에서 온 말이다.
이율곡의 〈학교모범(學校模範)〉에는 스승을 쳐다볼 때 목 위에서 봐서 안 되고, 선생 앞에서는 개를 꾸짖어서도 안 되고, 웃는 일이 있더라도 이빨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스승과 겸상할 때는 7푼만 먹고 배부르게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성균관 학칙(學則)에는 길에서 스승을 만나거든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길 왼쪽에 서 있어야 하고, 말을 타고 가거든 몸을 엎드려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고려 때에는 선생이란 말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었다. 조선조 중엽 때 문헌인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보면 당시 선비들이 술 마시며 글 짓는 문주회(文酒會)에서 벼슬이 높거나 낮건 간에 서로 선생이라 호칭을 하였다. 비록 벼슬이 높은 귀인일지라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대인이라 부르는 것이 고려 때부터의 법도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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