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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아시다시피 작금의 세태는 언론을 믿느니 일베를 믿고 뉴스를 보기보다 우리 아가페목장과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점입니다. 이니스프리를 애용하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이니스프리 = 이니's free =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디테일에 신경쓰는 저인지라 이런 사소한 것도 꼭 설명해 드립니다. 이니스프리 회사 의문의 1패;;;;)
이러한 깨어 있으신 분들이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불철주야不撤晝夜 주야장천晝夜長川 걱정하고 계시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적화통일>입니다.
한반도의 모든 바다와 하천에 적조가 끼는 것만큼이나 소름끼치는 것이 이 적화통일인데 의미인즉슨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대한민국이 조선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인민을 위하지도 않는 공화국을 가장한 왕국을 참칭한 반국가 조직폭력집단에게 패망하여 정복당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67년 전에 괴수 김일성에 의해 한번 시도되었다가 피똥을 싸고 실패한 후 지금까지 북괴는 호시탐탐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며 그것을 해내기 위해 온갖 술수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한 나라가 공산주의와 자유진영으로 갈리어 각축을 벌이다가 통일된 예는 여기저기 있는데 유럽에서는 동독과 서독이 대립하다가 자유진영의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여 통일을 이루었고 중동에서는 예멘이 남에멘과 북예멘으로 나뉘어 대립하다 북예멘이 남예멘 공산정권을 무력으로 개발살 내고 통일을 이룬 바 있습니다. (부럽다....)
아시아에서는 자유진영의 승률이 영 시큰둥하여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정권을 타이완으로 축출하여 적화통일....은 아니지만 대륙의 공산화를 이루었으며 베트남도 월맹과 월남으로 갈려 혈전을 벌이다가 1975년에 북베트남에 의해 적화통일 된 바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례들 중에서 특히 마지막, 베트남의 사례가 4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국민들을 바짝 긴장시키는 예화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언뜻 보기에 당시의 남북 베트남의 상황과 현재 남북한의 상황이 굉장히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얼핏 봐서 우리나라 정부는 당시 월남 정부와 비슷하게 부정부패를 하는 것 같고, 국군도 당시 월남군처럼 장비는 번지르르한데 왠지 군기가 없고 해이하고 미군만 없으면 허약할 것 같고, 국민들도 당시 월남 국민들처럼 안보관과 국가관이 박약하고 종북세력들과 좌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깽판을 부리고....
월남 패망 당시 월남 주재 한국 대사관의 공사로 근무하다 미처 탈출하지 못해 북베트남군에 체포되어 5년 간 형무소 생활을 하신 이대용 장군도 당시의 상황을 빗대어 우리나라를 걱정하는 말씀을 하시기도 한 지라 더더욱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2017년의 우리 대한민국은 과연 1975년의 남베트남과 비교하였을 때 그때보다 더 건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지난번에도 본 탐정이 <대한민국은 멸망하지 않는다>를 쓴 적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나라 내부로만 시각을 둔 견해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안심하신 분들도 이 베트남 적화의 예화를 보시고 또 한번 걱정스러워 하실 수도 있는데 이번에는 본 탐정이 베트남 적화통일의 역사를 짚어보며 작금 우리나라와의 정세와 대조하여 적화통일의 가능성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역사에 대해 먼저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베트남이라고 하면 <공산진영의 월맹과 자유진영의 월남으로 갈려져 싸우다 적화통일 당한 나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엿장수 마음대로 째고 자르고 할 수 없는 것이 한 나라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베트남은 원래 짬짬이 중국의 침략과 압제를 받으며 그에 대한 저항과 독립을 거듭하며 명맥을 이어오던 작지만 깡다구 있는 단단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던 중 근대에 들어서서 베트남은 왕위 다툼에 빠지게 되고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있던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구엔 왕조가 집권하였습니다. 이때까지는 프랑스와 어느 정도 우호 관계였으나 구엔 왕조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선교사를 처형하는 등 강경 모드로 나오자 프랑스가 크리스천 보호를 구실로 개입하여 마침내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정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도 병인양요에서 졌으면 베트남 꼴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본국이 독일에게 패망하여 식민지를 관리할 겨를이 없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연합체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독립동맹, 줄여서 <베트민>,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월맹>입니다. (흔히 월맹과 월남이라 할 때 그 월맹이 맞습니다.)
1941년에 수립된 월맹은 당시 지하 독립운동가로 명망이 높았던 <구엔 타트 탄>을 지도자로 옹립하였는데 이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호치민>이지요.
(1929년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호치민.(맨 윗줄 오른쪽의 나비넥타이 맨 남자) 맨 앞줄 가운데에서 옆 사람 어깨에 팔 올리고 있는 나비넥타이가 그 유명한 남로당 수괴 박헌영, 둘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입니다. 한 마디로 이 학교는 세계 빨갱이 두목 직무연수원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1945년 3월에 일본군의 베트남 침공으로 프랑스군이 축출되자 당시 베트남 황제 바오다이는 일본에 붙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그해 8월에 일본이 패망하자 마침내 월맹은 총공세에 돌입하여 8월 23일에 수도 하노이를 함락, 황제로부터 국새와 왕검王劍을 넘겨받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옛 식민지를 되찾고자 돌아온 프랑스는 호치민의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1946년, 프랑스와 월맹 간의 1차 월남전이 발발하게 되지요.
호치민에게 정권을 이양한 전황제 바오다이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의 최고 고문으로 임명되었다가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1949년에 귀국하여 남부 베트남의 코친차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괴뢰정권인 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원수가 되었는데 1954년에 자신이 임명한 총리인 고 딘 디엠에게 축출되어 다시 프랑스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프랑스와 월맹의 전쟁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대패로 월맹군의 승리로 끝나고 마침내 프랑스의 식민통치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겼다고는 하지만 1946년에서 1954년까지의 전쟁에서 프랑스군 17만명, 월맹군 51만명이 죽는 엄청난 피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프랑스는 강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떠났는데 협정 내용인즉슨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하여 북베트남은 호치민의 월맹이 통치하고 남베트남은 바오다이 정부가 다스리며 2년 후인 1956년에 총선거로 통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화협정이 맺어지고 얼마 되지도 않아 바오다이 정부가 무너지고 고 딘 디엠이 집권하였고 1955년에 고 딘 디엠 대통령은 총선거 약속을 파기하고 독자적인 베트남 공화국 정부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월맹>과 <월남>, 일명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분단된 사연이었습니다. 딱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의 상황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는 절대로 안 될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이 총선거를 거부하고 자신들끼리 괴뢰정권을 세운 것이지만 베트남의 경우는 오히려 국가의 정통성이 공산정권인 월맹에 있고 월남 정부가 총선거를 거부하는 상황입니다. 애초에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부터 독립전쟁을 벌이며 싸운 이들이 호치민을 비롯한 월맹이었으며 1945년에 수도 하노이를 탈환하고 황제로부터 정권을 정식으로 이양받았기에 호치민과 월맹 정권이 베트남 민중들에게는 정통성 있는 정부였고 프랑스군이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여 억지로 17도선을 그어 놓고 수립한 남베트남 정권은 민중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외세의 괴뢰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이걸 우리나라에 비유해 보면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한 후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치권을 장악하여 다스리는데 이남 지역은 조선총독부와 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친일 괴뢰정권이 다스리는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게다가 2년 후에 남북이 총선거를 하여 국가를 통일시키려 하는데 그 괴뢰정권이 총선거를 거부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해 버린 것이지요. 과연 이런 경우에 민심이 어느 쪽을 향하겠습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확고한 정통성을 지닌 우리 대한민국 정부를 월남 정부에 비교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심각한 모욕입니다..)
제가 이 길고 긴 얘기를 서두에 늘어놓는 이유는 이러한 배경을 미리 아셔야 더 상황을 정확하게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당시의 베트남 국민들에게 월맹과 월남의 대결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립이 아닌 민족 독립세력과 외세의 앞잡이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비단 정권만이 아닌 군 또한 그러한데 남베트남군, 일명 월남군은 1949년에 프랑스군이 베트남인으로 편성된 부대를 육성하면서 창건되어 1952년에 베트남인 참모총장이 임명되었고 1954년에는 30만 대군에 이르렀으나 정권 자체가 괴뢰정권으로 인식되니 월남군 또한 민중들에게는 식민군대에 불과했고 군대의 기강도 바닥을 쳐서 프랑스군을 도와 월맹군과 싸우러 나가서는 중대 단위로 투항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군은 근본부터가 대한제국 국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을 계승한 확고한 정통성을 가진 군대입니다. 월남군과 비교한다는 것은 정말 국군에 대한 모독입니다.)
국가의 정통성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민들에게 있어 내 조국이라는 인식과 국가에 대한 소속감,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마음을 심어주는 근본이 바로 <정통성>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아무리 우리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고 정치판이나 관료들이 하는 짓이 미워도 비판은 하고 더러 욕은 할지언정 우리나라가 망해버리기를 바라는 경우는 종북세력이 아니고서야 정말 없는데 이 당시 남베트남 국민들은 아예 남베트남이 자신들의 나라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정통성도 없는 외세의 앞잡이였고 없어져야 마땅한 괴뢰정권이라 여겼지요. 이것이 남베트남 국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이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우리 국민들은 6ㆍ25 전쟁이 벌어지자 개전 당시 10만의 군대가 70만 대군으로 증강될 정도로 앞다투어 군에 지원하고 중고등학생들까지 총을 들고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북괴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남베트남 국민들은 공산군이 침공해 와도 유유자적 하다가 그대로 패망당하는 결과를 빚어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1954년에 프랑스를 격파하고 호쾌한 승리를 거둔 후 오매불망 2년 후에 있을 총선거를 기다리며 목을 쭉 빼고 있던 북베트남의 뒷목을 후려치는 통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고 딘 디엠 대통령의 총선거 거부 및 단독정부 수립이었습니다. (공산당도 통수를 맞을 때가 있다...)
월남 대통령 고 딘 디엠은 괴뢰정권으로 여겨지던 월남 정부에서 그나마 내세울 만한 위인이었습니다. 본래 황제 정권 시절의 관료였으나 프랑스 식민정권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망명 생활을 하다가 바오다이 황제에 의해 총리로 기용된 인물로 독신의 청렴한 관료이자 강직한 독립운동가로 월맹에서도 명망이 높아 호치민도 고 딘 디엠에게 총선거로 남북이 통일되면 통일된 베트남 공화국의 수상이 되어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단순히 친미 괴뢰 독재자로만 알려져 있기도 한 고 딘 디엠의 의외의 진면목입니다. 사실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양쪽에서 다 인기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당대에 좌우를 막론하고 명망이 높았습니다. 그 일례로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이 먼저 <조선인민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자신들의 정권을 수립하고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을 때에 그 정권의 주석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옹립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 시점에 박헌영의 위상은 김일성 따위는 비교도 되지 못할 넘사벽의 명성이었는데 그런 박헌영조차 이승만 대통령을 자신이 수립한 정권의 주석으로 앉히려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거절하였고 뒤이어 미군정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은 해체당합니다.)
고 딘 디엠 대통령이 총선거를 거부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이미 언급했듯이 총선거를 하면 호치민과 월맹 정권이 압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고 딘 디엠은 총선거를 파기하고 부정선거를 저질러 자신의 남베트남 정권을 수립한 후 북베트남과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인 통치를 해 나갑니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안정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립 당시의 선천적 정통성이 없다면 정권을 수립한 이후 국민들을 등 따숩고 배부르게 하여 <후천적 정통성>이라도 얻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면에 있어서도 고 딘 디엠은 그다지 별무신통하여 토지개혁과 갖가지 사회개혁, 경제 정책에서 실패가 잦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부정선거는 물론 반대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에 이르러 정치범으로 형무소에 갇힌 사람이 2만명이 넘을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독신이었으나 동생인 고 딘 누와 기타 척족들이 그야말로 남베트남을 들어먹었고 그 부정부패와 족벌 경영은 과거 중국 국민당 정권의 장개석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국민들 90%가 불교 신자인데 고 딘 디엠 본인이 가톨릭 신자라고 불교 신자들을 차별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등용해 버린 것은 애교로 봐줄 만한 상황....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구한말의 민씨 척족들에 비길 만한데 그나마 이쪽은 민비가 일본 손에 죽는 바람에 신의 한수로 묻힌 바가 큽니다. 평생 깽판을 치고 마지막에 죽을 자리를 잘 만나 그 모든 악행이 파묻힌, 참으로 운수대통의 여걸이 바로 흔히 명성황후라 불리는 민비입니다.)
가뜩이나 정통성도 없는 정권이 부정부패에 강압통치를 하니 이건 뭐 울고 싶은 놈 쌍싸대기 날리는 각이라 도처에서 고 딘 디엠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의 출사표가 줄을 이었고 마침내 1960년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들이 그 유명한 <베트콩>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보수 우파에서 얘기하는 월남전 관련 언급에서는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의 월남군은 베트콩 및 공산군과 용감하게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고는 합니다만... 본 탐정 생각으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월맹의 결성부터 적화통일까지 모두 분석한 월남전 연구서에도 고 딘 디엠 정권 시절의 부분을 보면 베트콩 및 월맹군과 전투를 벌인 사례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저는 처음에는 이 당시의 월남군이 잘 싸워서 모두 물리쳤기에 이 시기에 전쟁이 없이 조용했나 싶었더니 좀 더 연구해 보았을 때 이 시점은 아직 베트콩과 월맹군이 모두 본격적인 전쟁 없이 내실을 다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남베트남이 내전에 돌입하고 월맹군이 지원하여 싸움이 벌어진 것은 고 딘 디엠 정권 말기 및 고 딘 디엠이 죽고 남베트남이 혼란에 빠진 1963년 어간부터였습니다.)
국민들은 촛불시위를 방불케 하는 반정부 데모를 벌이고 승려들이 분신자살을 하는데 영부인이라는 양반은 <중놈 하나 바베큐 된 게 뭐 그리 대단하냐>는 참으로 기절초풍할 개드립을 쳐 대니 이건 뭐 죽여달라고 목을 내미는 꼴입니다.
우리네 박 대통령이 실각하여 저 고초를 당하게 된 근본이 최순실 여사의 딸 정유라의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탓해>라는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면 영부인 쩐 레수 언의 중놈 바베큐 드립은 정말 해서는 안 될 망언이자 개소리였습니다.
(가만! 고 딘 디엠이 독신인데 무슨 영부인이냐고? 고 딘 디엠은 동생인 고 딘 누의 부인, 즉 자신의 제수를 공식 석상에서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대리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미국에서도 더 이상 고 딘 디엠 정권을 두고 볼 수가 없게 되었고 마침내 1963년, 두옹 반 민 장군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군인들이 미국의 묵인 및 협조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고 딘 디엠 형제를 죽임으로써 9년간의 고 딘 디엠 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미 1960년에 쿠데타 미수 사건이 벌어지고 1962년에는 공군 조종사들이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등 정세가 불안하여 언제 쿠데타가 일어나도 이상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으면 뭔가 정세가 안정되어야 하는데 상황은 오히려 더욱 개판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두옹 반 민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얼마 되지도 않아 구엔 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두옹 반 민 장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며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구엔 칸 장군이 양보하여 민정 이양을 하려 하자 가톨릭 극우파 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으며 미국의 민정 요구로 후옹을 수상으로 한 민정이 수립되었으나 한달 반 만에 극우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뒤집고 다음 날 다시 역 쿠데타가 벌어지고 다시 람 반 팟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1일 만에 역 쿠데타가 벌어졌고 판 각 수 수반을 중심으로 한 민정이 수립되었다가 다시 쿠데타로 뒤집히고 그 와중에 중부 월남의 수비를 맡은 1군단장 구엔 찬 티 장군이 자신의 보직해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는 등 정말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1965년에 구엔 반 티우 대통령과 구엔 카오 키 수상의 연립정권이 수립되면서 표면적으로 다소 안정됩니다.)
이러는 사이에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북베트남은 월맹 공산정권이 확고히 주도권을 잡고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여 반대파를 싹쓸이 숙청(!!!)하고 1당 독재체제로 판을 잘 깔아 두었습니다. 북베트남이 본격적으로 베트콩을 도와 남베트남으로 출병하는 것이 1964년부터이기에 이 시점까지는 내실을 잘 다져 둔 것이었지요.
베트콩은 고 딘 디엠이 죽자 본격적으로 월남군과의 내전에 돌입하였고 1963년, 업 박 전투에서 베트콩 중대가 월남군 연대를 쳐부수고 승리하여 위세를 떨쳤고 고 딘 디엠 사후 1년 만인 1964년에 수도 사이공 전방의 동호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1개 사단급을 전멸시키는 압승을 거두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와중에도 사이공에서는 월남군이 자기네들끼리 총질을 하며 쿠데타에 여념이 없었으니 별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베트남 전쟁은 1964년, 최대 1965년 어간에는 베트콩의 승리로 종전을 맺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하던 미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고 통킹만 사건 등을 이유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여 숨이 끊어져 가는 월남 정권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준 셈이었습니다.
1965년, 처음으로 미 지상군이 파병되었고 <이아들랑 계곡 전투>에서 해럴드 무어 중령이 이끄는 미 공수대대가 월맹군과 베트콩 연대를 전멸시키며 월남전의 첫 미군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습니다.(이 전투를 영화화한 작품이 <위 워 솔저스>입니다.)
처음 맞닥뜨린 미군과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세로 괴멸시켜 사기를 꺾고자 했더니 미군 1개 대대에게 월맹군의 1개 연대가 전멸 당했고 월맹군과 베트콩이 주춤한 사이 우리나라도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으로 청룡부대와 맹호부대를 비롯한 5만명의 최정예 부대를 파병하여 월남을 도와 월맹군 및 베트콩과 혈전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월남전은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1967년에 이르면 월남군 72만명과 미군 51만명, 국군 5만명이 월맹군 및 베트콩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전투는 미군과 국군이 거의 전담했고 월남군은 사이공 정권의 눈치를 보며 정치에 침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공군력, 헬리콥터, 장갑차 등 우수한 기계화부대의 기동전술에 월맹군과 베트콩은 전면전에서 맥을 못 추고 판판이 깨져나갔으며 국군의 깡다구와 투혼에 정글과 산악에서도 월맹군과 베트콩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습니다.
흔히 월맹군과 베트콩이 정글에서 매복하여 기습하는 것에는 국군과 미군이 고전했을 것이라 생각들 하는데 시가전이든 정글전이든 산악전이든 고지전이든 월맹군과 베트콩은 연전 연패를 면치 못했고 미군과 국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월남전 통틀어 미군 전사자가 5만 8천명, 국군 전사자가 5천명이 되지 않는데 월맹군과 베트콩의 전사자가 110만명에 이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짜빈동 전투> 같은 경우에는 월맹군이 일부러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국군을 격파하여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국군 1개 중대가 지키는 곳을 월맹 정규군 2개 연대로 기습을 가했으나 국군의 <중대전술기지>의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했고 월맹군 2개 연대가 국군 1개 중대에게 박살이 나서 퇴각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40 대 1의 우세에도 참패한 이 전투 이후 월맹은 한국군과의 교전을 최대한 회피하라는 지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 전투 이외에도 모든 전투에서 월맹군과 국군의 전사자 비율은 최소 15 대 1이었습니다.)
(짜빈동 전투를 소개한 신문기사. 당시 월맹군 2개 연대, 베트콩 1개 대대로 4,500명에 이르는 병력이었고 아군은 해병대 1개 중대였는데 정말 40 대 1의 열세에서 승리한 기적의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군과 미군이 연전 연승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이길지언정 전쟁은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과거 6ㆍ25 전쟁에서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을 맞았던 트라우마로 인해 미국 측이 17도선 이북의 북베트남 본진을 공격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폭격하는 것은 허용되었는데 지상군의 북진은 금지되었고 그러다 보니 월맹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호치민 루트>를 타고 얼마든지 남베트남으로 넘어와 침공할 수가 있는데 이쪽에서는 넘어온 놈들을 치는 것만 되고 정작 그 본진은 건드리지 못하게 되어 계속해서 꼬리만 자르고 있는 각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인해 모든 전투는 남베트남 안에서 벌어졌고 국군과 미군이 지키고 있는 구역으로 침투해 오는 베트콩과 월맹군을 찾아 격멸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아시다시피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와 타락은 더해가고 월남군은 조국 방위는 팽개친 채 정치권의 향배에만 귀를 기울이며 월남 국민들도 이노무 나라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이니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주객이 전도된 것이며 미군과 국군에게 있어서 참으로 기운 빠지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러던 차에 월맹은 전세를 뒤집을 회심의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1968년의 구정 공세였습니다.
월남의 구정, 일명 <테트>는 우리나라의 추석과 설을 합친 것과 같은 중요한 명절인데 이 시기가 되면 월남과 월맹은 약속이나 한 듯 연휴 기간이 끝날 때까지 휴전을 하곤 했습니다. 이 해에도 구정이 되자 월남은 당연히(!!!) 휴전이라 생각하고 경계태세를 해제하고 부어라 마셔라 하였는데 이 기회를 틈타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1968년 당시 남베트남의 세력 판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황토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남베트남 정부의 지배력이 미치는 곳인데 수도 사이공 주변 및 미군과 국군이 담당하던 해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월맹군 및 베트콩의 손에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4년에 수도 사이공 전방까지 치고 들어온 것을 간신히 몰아내고 이후 4년 동안 미군과 국군이 남의 나라 전쟁을 자기 나라 전쟁인 것 마냥 죽을 액을 떼는 셈치고 싸웠는데도 저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니네 나라 누가 지키니...)
결론부터 얘기하면 구정 공세는 베트콩의 대패로 막을 내렸는데 가세하기로 했던 월맹군의 공세가 너무 늦게 진행되어 월맹군이 합세하기도 전에 베트콩이 미군과 국군의 파상 공세로 모조리 섬멸당한 것입니다. 이때 베트콩은 전사자만 4만명, 포로 6천명에 이르는 압도적인 참패를 당했고 부상자 등을 합치면 1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대부분의 주요 지도자들과 간부진들이 궤멸되어 더 이상 제대로 조직적인 전투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베트콩은 월맹군 7만명을 빌려다가 겨우 재편성을 했고 월맹군 장교들과 월맹 공산당원들이 파견되어 베트콩을 지휘하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베트콩은 순수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아닌 월맹군이 옷만 바꿔 입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날짜 착오가 아니라 과거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폴란드 독립군의 봉기를 돕겠다고 약속해 놓고 독일군에게 폴란드군이 전멸당할 때까지 방치한 후 뒤늦게 진입하여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지친 독일군을 손쉽게 쓸어버리고 폴란드를 집어삼킨 것과 같은 악랄한 꼼수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월맹의 입장에서는 종전 이후에 베트콩이 남베트남을 장악하고 자신들에게 대드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베트콩을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군사적으로는 미군과 국군, 월남군의 승리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완패였는데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한 전쟁이 전혀 승리가 아니었으며 수도 사이공이 전쟁터가 되고 미 대사관이 공격당하고 참혹한 전쟁의 모습이 특종에 눈이 먼 기레기들에 의해 여과 없이 전세계에 보도되자 미국의 여론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결국 반전 여론은 어느 때보다 크게 솟았고 전쟁을 치르는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미군은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전황의 타개를 위해 월남군을 주력으로 하여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내로 진격하여 호치민 루트를 타격하였으나 여기에서도 월남군의 졸전으로 월맹군에 대패하고 더욱 더 비난만 뒤집어 썼을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미국은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하고 북베트남을 무자비하게 폭격하여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후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 넷이서 강화협정을 맺었으니 이것이 바로 1973년의 파리 강화조약입니다. 여기에서 미군과 국군의 철수가 결정되고 현재의 전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 월남과 월맹의 전쟁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미군의 잔혹한 폭격으로 반병신이 된 월맹이 질질 끌려나와 협상에 임하였고 월남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서약을 하였으며 월맹 외무차관 하 반 라우 및 150명의 공산당 주요 간부들을 사이공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정말 외형상으로는 월맹의 항복이나 마찬가지였고 미군과 국군은 뿌듯한 승리감을 느끼며 베트남을 떠나 <개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평화가 아닌 진정한 전쟁의 서막임은 양측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미군과 국군이 떠나고 자신들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만 했던 월남군은 휴전 후 1년 만에 벌어진 푸옥롱 성 전투에서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던 2개 군단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졌고 마침내 월맹은 때가 되었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1973년 휴전 당시의 남베트남 판도입니다. 1968년 당시의 판도에서 휴전 때까지 5년 동안 미군과 국군이 피를 말리도록 싸우고 싸워 간신히 저 정도의 영역을 월남 정부 통치지역으로 확보하였습니다. 어떤 자료에서는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보시면 17도선에서 중부월남까지 일자로 그 모든 영역이 베트콩의 세력권에 있기에 월맹군은 말 그대로 밀고 내려오기만 하면 순식간에 중부월남 고원지대를 돌파하여 수도 사이공 부근까지 육박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1975년, 월맹군은 적화통일을 위한 최종 공세에 돌입했습니다. 전쟁의 서막은 중부 월남의 반메투오트였는데 17도선이 저 북쪽인데 어떻게 중부지역에서 개막전이 터지냐 하겠지만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그 지역이 베트콩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당시 중부 월남을 담당하던 1군단장 고 쾅 트룽 장군은 월남 최고의 명장으로 졸전을 거듭하던 월남군과 정치에만 눈이 먼 똥별들과 달리 단연 두각을 드러내던 인재였습니다. 미국은 그를 차기 월남 대통령 감으로도 점찍어 놓고 있었는데 이제 그의 무운이 다할 때가 되었습니다.(-.-;;;)
(남베트남 최고의 명장 고 쾅 트룽 장군. 판판이 깨지고 산산이 무너지던 월남군에서 거의 유일하게 월맹군과 맞서 승전보를 올리던 월남의 희망과 같은 용장이었습니다. 이 분은 패망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피자 가게를 하시다가 2007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뒤집힌 흐름은 장군 한 명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로 17도선, 아래로 반메투오트에서 앞뒤로 포위당한 상황에서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장교들은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망치며 피난민들이 거리에 넘쳐나 부대의 기동을 가로막는 등 총체적인 난장판이었습니다.
게다가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우기가 오기 전에 중부 월남을 담당하던 군대를 사이공 일대로 빼내어 수도 사이공 주변을 철통 방어하고 우기로 월맹군의 진격이 둔화되어 전선이 소강상태가 되면 반격한다는 결정을 내려 가뜩이나 전투하랴 혼란 수습하랴 정신없는 1군단에 철수 명령을 내리니 이는 의도는 좋았건만 현장의 입장에서는 자살행위였습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부대는 개판이 되고 고 쾅 트룽 장군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은 바다로 철수하고 남겨진 병력들은 자기 가족들만 챙겨 도망가거나 무장강도로 돌변하여 약탈을 하는 등 카오스 상태가 되어 그렇게 남베트남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부 고원지대는 월맹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1군단의 패퇴는 월남 전역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고 전국에서 피난민들의 물결이 거리와 도로를 가득 메웠습니다. 곳곳에서 월남군은 패퇴하여 밀리거나 항복하였는데 반메투오트와 중부 고원지대가 떨어지고 다낭이 함락될 때 월남군 포로가 10만명에 이르렀으며 포장도 뜯지 않은 10억 달러 상당의 미국 지원 물자와 수백대의 전투기와 막대한 물자들이 노획당했습니다. 차량들이 그대로 노획되고 월남군 포로들이 월맹군 철모를 쓰고 편입되어 운전병, 무전병, 전투병으로 합류하였으며 점령한 월남군의 공군기지에서 접수한 전투기로 북베트남 조종사들이 사이공을 폭격하기도 했습니다.
수도 사이공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쑤안록>에서 월남군의 B급 부대였던 18사단이 월맹군 참모총장 반 티엔 둥 장군이 이끄는 4만명의 군대를 5천명으로 막아섰습니다. 이 18사단을 지휘하던 장군은 <레 민 다오> 준장인데 반나절이면 쓸려나갈 것 같던 이 쑤안록 전투를 5천 대 4만의 열세를 딛고 12일을 버텨내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남베트남 최후의 명장 레 민 다오 장군. 남베트남판 황산벌 전투였던 쑤안록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겨진 용장이었습니다. 이 분은 쑤안록에서 철수한 후 사이공 외곽의 비엔호아 공군기지 방어전을 지휘하다 결국 포로로 잡혀 17년 간 전범 수용소에 수감된 후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월남전 관련 행사에 참여하신 레 민 다오 장군. 당시의 18사단 군복을 입고..)
쑤안록 전투에서 반 티엔 둥의 월맹군은 4만명으로 5천명을 상대하여 전사자만 6천명에 이르고 탱크 37대를 잃는 참패를 당하고 12일 동안 틀어 막히는 고전을 합니다. 이는 월남군의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결사적인 항전에도 이미 역사의 흐름은 자명한 것이었으며 마침내 남침 44일 만에 남베트남 44개 성이 모두 떨어지고 수도 사이공은 함락되었습니다. 떼강도로 변한 군인들의 약탈과 총질에 학을 뗀 시민들은 월맹군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고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도망가고 후임으로는 두옹 반 민 장군, 12년 전 1963년에 고 딘 디엠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그 인물이 마지막 월남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취임 9일 만에 월맹군은 사이공에 입성하여 대통령 궁에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걸었습니다.
(공산 월맹의 국기, 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와 동일)
(베트콩을 중심으로 한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국기)
(남베트남 대통령 궁의 정문을 쳐부수고 들이닥치는 월맹군의 탱크 사진입니다. 유명한 사진인데 잘 보시면 탱크에 걸린 깃발이 월맹의 깃발이 아닌 베트콩의 임시혁명정부 깃발입니다. 월맹으로써는 월남 민중들의 자발적인 저항이 괴뢰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면을 세워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절주절 길게 설명했지만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아는 남베트남 적화통일의 실상입니다. 물론 여기서 좀 더 후일담을 얘기하자면 사이공이 떨어진 시점부터 베트콩 사단급 부대들이 임시혁명정부와는 어떤 협의도 없이 해산되고 어느 순간 임시혁명정부의 군대가 월맹군과 통합되는 등 뭔가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 전역을 물샐틈없이 봉쇄하고 통제하는 상황에서 이미 저항할 능력은 있을 리 없었고 결국 1976년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어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월맹에 흡수되고 1977년에는 공식적으로 베트콩과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해산되며 1979년까지 토사구팽으로 베트콩 및 종북세력들이 숙청되었습니다...... 라고 생각들을 많이 하시는데.
엄밀히 따지면 저 말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흔히 <배반당한 베트남 혁명>을 쓴 임시혁명정부 법무장관 튠 뉴탄의 증언과 <베트남 수용소>를 쓴 좌파 학생운동 지도자 도안 반 토아이의 증언 등을 토대로 적화통일 후 종북세력 및 베트콩들이 대거 숙청당했다고 언급되며 재교육 수용소로 인해 수백만명의 남베트남 국민들이 학살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한 내막이 있습니다.
본 탐정은 사실은 사실로 봅니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 지배적인 기조에 의해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실은 사실로 바로 아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배반당한 베트남 혁명>이란 책에서도 튠 뉴탄은 적화 이후의 숙청을 일컬어 <눈물의 숙청>이라고 하지 <피의 숙청>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동지 대접을 하면서 정작 모든 투쟁과 혁명의 기록에서 오로지 월맹 공산당의 업적만을 기록하고 그간 있었던 베트콩과 남베트남 혁명가들의 공로와 위업은 마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스리슬쩍 삭제해 버린 것에 대해 튠 뉴탄은 뒷목을 잡았던 것이지 대놓고 잡아들여 죽이고 패고 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 베트콩 및 임시혁명정부의 입장에서 월맹 공산당을 보는 시각은 <아니, 기껏 도왔더니 우릴 토사구팽하네? 이런 나쁜 놈들...>이 아니라 <니들끼리 다 해 처먹어라. 이 XX들아!>라고 보시면 됩니다.)
튠 뉴탄이 반 티엔 둥에게 <우리 임시혁명정부의 군대는 모두 어디에 있소? 그 유명한 베트콩 1, 5, 7, 9사단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오?>라고 묻자 반 티엔 둥이 <군대는 이미 통합되었소.>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유명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시점에서 베트콩 군대는 이미 베트콩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구정 공세 이후에 베트콩은 이미 조직력이 거덜나고 월맹군을 옷을 바꿔 입히고 투입하여 빈 자리를 메꾸고 있었기에 전쟁이 끝났으니 그 월맹군들이 다시 원래의 직책과 부대로 복귀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렇게 월맹군들이 우루루 빠져나간 후 남은 순수 베트콩 병력들은 중대 단위로 엮어 월맹군에 편입시킨 것이지요.
베트콩의 중하급 일선 간부들도 이 시점에서는 대부분이 월맹군 장교들과 월맹 공산당 간부들이었고 당연하게도 전쟁이 끝났으니 다시 원래 자리로 복귀했을 뿐이었습니다.
피의 숙청이 당연지사였던 타국의 공산정권의 사례에 비하면 월맹 공산당의 <눈물의 숙청>은 정말 양반 중에 양반이고 신사 중의 신사였습니다. 월남 구정권과 베트콩 내부의 민족주의자, 비공산계열 인사들을 포함하여 숙청된 인원은 6만 5천명, 최대로 잡아도 10만명에 불과하며 이는 소련, 중국, 캄보디아, 쿠바 등의 공산화 사례에 비교하면 정말 피를 적게 흘린 것이었습니다.
(흔히 공산 월맹의 재교육 수용소 모습이라며 수용소 사진들이 올라와 있는데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의 킬링필드 모습인 경우가 많습니다.)
월맹군과 쿵짝이 되어 적화통일을 이루는데 공을 세운 베트콩과 임시혁명정부의 수뇌부는 통일된 베트남에서도 큼직한 감투를 얻어 쓰고 천수를 누렸으며 그나마 세월이 흐른 후에는 통일 당시에 <눈물의 숙청>으로 지워졌던 공로들마저 다시 재평가되고 인정받아 현재 베트남 역사에서 베트콩은 <남베트남 해방군>으로 호칭되며 <북베트남 인민군 (월맹군)>의 연합조직으로 베트남 적화통일에 공을 세운 이들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참고)
* 임시혁명정부 각료들의 이후
주석 구엔 후 토 (1910~1996년 사망), 86세
수상 휸 탄 팟 (1913~1989년 사망), 76세
부수상 풍 반 충 (1909~1987년 사망), 78세
법무장관 구엔 티 빈 (1927~ 생존), 현 90세
국방장관 트란 남 트룽 (1912~2009년 사망), 97세
교육장관 루 후 푸옥 (1921~1989년 사망), 68세
보건장관 두옹 취 호아 (1930~2006년 사망), 76세
총사령관 트란 반 트라 (1918~1996년 사망), 78세
(시간 관계상 다 확인하지는 못하고 베트콩의 지도자 구엔 후 토와 베트콩 군대의 총사령관 트란 반 트라에 대해서만 확인했는데 구엔 후 토는 적화통일 후 베트남 부주석 및 주석 권한대행에 올랐고 트란 반 트라는 국방차관까지 올랐습니다. 만약 임시혁명정부가 숙청되었다면 베트콩의 구심점 제거를 위해 지도자인 구엔 후 토와 군권을 쥔 트란 반 트라의 처형 내지 암살은 당연한 수순이었겠으나 실상은....)
더군다나 그 당대에도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것도 아닌 것이 1977년에 베트콩과 임시혁명정부가 공식 해산된 후 이들은 모두 <베트남 조국전선>으로 재편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베트남 최대의 정치조직으로 베트남 공산당마저 이들과 합병되었고(!!!) 현재에도 베트남 국회 500석 중 496석을 차지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조직입니다.
(베트남 조국전선의 로고. 이들은 자신들의 전신이 베트콩과 임시혁명정부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적화통일 후 토사구팽 당한 종북세력이라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요?
또한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월맹 공산당은 국가적 정통성과 더불어 그나마 민중을 조금이라도 생각한 쪽이었습니다. 흔히 월남을 우리나라에, 월맹을 북괴에 비유하지만 만약 이 이야기를 월맹 공산당이 듣는다면 매우 기분 나빠 할 것입니다. 월맹 공산당 지도자들인 호치민, 팜 반 동, 보 구엔 지압 등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비유한다면 베트남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모욕이나 다름없는 소리입니다.
월맹 공산당은 단순히 적화통일을 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쥐자는 생각으로 그 기나긴 전쟁을 한 것이 아닌, 공산주의만이 인민들을 먹여 살리고 번영케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통일을 하고 제대로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해보니 국민들은 도탄에 빠지고 날이 갈수록 나라는 빈곤해지고 굶주리며 답이 안 나오는 가난으로 거렁뱅이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월맹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선택한 것은 자신들이 금과옥조로 지켜 온 이념과 체제를 과감히 선회하여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개혁 개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명 <도이모이 정책>입니다.)
적화통일 후 불과 11년 만인 1986년에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었고 6년 후인 1992년에 우리나라와 수교, 3년 후인 1995년에 미국과 수교를 맺었으며 과감하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여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정책을 펼친 결과 현재 베트남의 일상 모습은 과거 자신들이 적화통일로 패망시켰던 그 남베트남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의 생활과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평생 추구해 오고 피를 흘려 관철시켰던 그 이념과 제도를 내팽개쳐 버리고 자신들과 그렇게 피가 터지도록 싸웠던 한국과 미국에 손을 벌려 도움을 요청한 것이 우리가 말하는 적화통일의 주역 월맹 공산당이었습니다. 국민의 삶을 위해 이념과 제도와 자존심마저 내려놓은 이들의 선택은 북괴의 3대 돼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한 수였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김정일은 300만명의 인민이 굶어 죽음에도 <고난의 행군>을 운운하며 자신의 권력을 위해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정통성이 있던 정권이 정통성 없고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고 통일을 했으며 자신들 이념대로 통치를 해보니 국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하여 그 이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념과 반대되는 제도와 룰을 받아들이고 한때 적이었던 나라들에까지 손을 벌려 도움을 청해 국민들을 먹여살렸으니 국민들이 이런 정권을 더 신뢰하고 지지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이런 월맹이 공산주의를 신봉했다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일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단순하게 <월맹 = 북한>으로 단정짓는 것은 굉장한 실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디 <월남 = 한국>은 적절한 비유인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 국가적 정통성과 국민들의 소속감 차원에서 이미 우리나라는 월남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부정부패가 심하다고는 하나 이는 우리나라 내부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그런 착시효과가 있을 뿐 돈만 주면 핵시설 설계도도 훔쳐다 주는 북한에 비하면 매우 청렴한 수준입니다.
우리 군 또한 미군을 등에 업고 요행수로 간신히 붙여먹는 그런 괴뢰군 따위가 아닌 6ㆍ25 전쟁 때부터 치열한 혈전으로 나라를 지켜낸 강군이며 아시아에서는 적수가 없는, 세계적으로도 수위권 안에 드는 우수한 군대입니다. 비싼 장비를 믿고 정신은 썩어빠진 그런 당나라 군대도 아니요, 장비만큼이나 정신적 대비태세도 당시의 월남군과 비교할 수 없이 튼튼한 군대입니다.
(요즘 것들은 군기가 빠졌다니 하는 소리를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박동혁 병장과 연평도 포격전에서 전사한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 영전에 가서 한번 해보시라...)
당시의 남베트남은 정부는 부정부패, 군대는 휘청휘청, 국민은 나몰라라 하는 총체적인 부실이었는데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 국민복지는 팽개치고 정권다툼에만 몰두하는 집권층과 무사안일과 부패만을 일삼는 공무원들과, 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외면하고 정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군대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며 허랑방탕한 국민이라는 네박자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그게 더 불공평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아무리 정권다툼에 골몰해도 국가 안보를 중시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정치세력들이 건재해 있고, 공무원들이 아무리 철밥통에 복지부동이라 해도 할일은 하고 있으며, 변방의 군인들은 북괴군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칠 새라 눈에 불을 켜고 있고, 국민들은 아무리 좌파 우파로 나뉘어 옥신각신 하고 있어도 김정은이 미사일을 쏘거나 핵실험을 하면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김정은 개XX>를 외치고 있으니 1975년의 남베트남이 대한민국 절반만 닮았어도 지금쯤 동남아시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히려 위에 언급한 네박자는 우리나라가 아닌 북괴에 적용하면 거의 맞아떨어집니다.
경제발전과 국민복지 따위는 아예 건국 당시부터 관심이 없던 북괴 정권, 연설하는데 졸았다고 인민무력부장을 처형하고 집권 5년 만에 100명의 장령(장군)을 처형한 김정은에게 과연 국가 안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전선에서 싸우는 것과 정치에 관심을 가질 계제도 없이 하루 밥 세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군사훈련은커녕 각종 토목공사와 노역에 끌려 나가 삽질 곡괭이질에 여념이 없는 북괴군 병사들과 어떻게 하면 김정은에게 잘 보여 목숨 부지할까만 관심 있는 장령들, 달러만 쥐어주면 <동무~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손을 비비는 북한의 당, 정 간부들, 먹고 사는 문제에 하루 해가 넘어가고 월남의 보트 피플처럼 수천 수만명씩 북한을 탈출하는 인민들..
(오히려 우리나라보다는 북한이 패망 당시의 남베트남과 더욱 잘 들어맞는다고 보는 것이 정답입니다.)
굉장히 이채롭게 여겨지시겠지만 군대 또한 당시의 월남군을 국군보다는 북괴군에 비교하는 것이 더욱 일맥상통합니다.
당시 월남군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양도한 최신식 군사장비들을 대거 보유하여 일시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월남군의 총병력은 110만명, 탱크 600대와 장갑차 1,200대, 항공기 1,270대, 헬리콥터 500대 등의 강력한 전력이었고 이에 맞서 월맹군의 총병력은 100만명, 탱크ㆍ장갑차 600대, 항공기 342대 등의 상대적으로 빈약한 전력이었습니다.
(대개 이 당시의 월남 공군력이 세계 4위라고도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헬리콥터까지 포함한 <전체 항공기 보유 대수>가 세계 4위라는 의미이죠.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 공중전의 주력인 제트 전투기가 중요한데 월남 공군의 항공기 대부분이 수송기와 대지 공격용 공격기, 폭격기, 건쉽 내지 헬리콥터였습니다. 제트 전투기는 휴전 당시까지 F-5A 전투기 19대(!!) 뿐이었으며 휴전하면서 미군의 장비들을 넘겨받은 후에야 F-5A 전투기 160대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도 공군력 세계 4위는 택도 없었지요.)
이렇게 보면 월남군이 압도적으로 강해 보이지만 숫자에 속으시면 심히 골룸합니다. 꽃 군인이다 유령 군인이다 해서 병적부에 이름만 올려놓고 장성들이 운영하는 사기업이나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는 병사들이 10만명에 이르렀으며 병사 부모가 지휘관에게 뇌물을 써서 아들을 귀가시키고 지휘관은 서류를 허위로 써서 그 병사가 근무 중인 것으로 속여 그 병사 앞으로 나온 군수품을 빼돌려 팔아먹는 비리는 애교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앞에 제시한 월남군 110만명은 정규군 58만명과 지방군 52만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주력이 정규군 58만명입니다. 패망 후에 월남 정규군을 월맹군에 편입시키려고 보니 58만명 중에 실제 근무하고 있는 병력은 23만명 뿐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니 문서상 110만 대군이라 한들 실제로 전선에 투입되어 근무하고 있는 병력은 50만명이 될지, 30만명이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현재 북괴군이 말이 120만 대군이라 하나 영양실조로 전투가 안 되는 40만명을 빼고, 추가로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하면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이 농담 안 하고 절반도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 한번 산술적으로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현재 북괴군의 총병력은 128만명, 해군과 공군을 제외하면 육군 112만명이 남침 가능 병력이며 이 중에 실제로 남침에 투입될 병력을 산출해 보면 우선 영양실조로 전투는커녕 훈련도 불가능한 <영실동무> 40만명을 빼면 72만명,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과 후방치안을 담당하는 후방군단 24만명을 빼면 48만명, 평양방어병력 8만명을 빼면 40만명, 김정은 친위대인 호위사령부를 빼면 30만명입니다. 결국 북괴군 128만명 중 휴전선 이남으로 남침이 가능한 병력은 단 30만명, 설령 평양 수비대와 김정은 친위대를 빼고 다 집어넣는다 해도 54만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육군 병력 50만명으로 충분히 호각지세이며 병력의 질을 고려하면 오히려 남침하는 북괴군이 방어하는 국군보다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는 상황입니다. 병력과 무기의 질이 대등하다 해도 수비하는 쪽이 공격하는 쪽보다 3 대 1 이상의 우세를 보유하는 것은 손자병법 이래 전술의 기본인데 병력과 무기가 모두 열세한데다 쪽수마저 비등비등하다면 북괴군의 남침은 그야말로 앉아서 죽느니 다 같이 몰려나가서 죽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 희대의 뻘짓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쿠데타가 빈발하고 단결이 부재했던 월남군의 모습 또한 국군보다는 북괴군과 더욱 닮아 있는데 적어도 우리 군은 1961년 박정희 장군에 의한 5ㆍ16 군사혁명과 이후 1979년 전두환 장군에 의한 12ㆍ12 군사정변 외에 아군 간의 무력다툼이 없음에 비해 북괴군은 1955년 강동정치학원 유격대 숙청,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의한 연안파ㆍ소련파 계열 군부 숙청, 1967년 갑산파 숙청에 따른 군부 숙청, 1976년 민족보위상 김창봉ㆍ총정치국장 허봉학 등 빨치산파 계열 군부 숙청, 1992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사건으로 소련 유학파 장교들 대거 숙청, 1996년 함경북도 주둔 북괴군 6군단의 반란, 북괴군 조종사들의 김정일 관저 폭격 시도 적발 등 어마어마한 내부적인 분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종사들의 김정일 관저 폭격 시도는 마치 월남 공군 조종사가 대통령 궁을 폭격하고 북베트남으로 넘어간 것을 연상케 합니다. 참고로 그 조종사는 원래 월맹군에 포섭된 첩자였습니다.)
병력만이 아니라 장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은 전투기와 헬리콥터 등의 최신 장비들을 월남에 대거 양도하면서 그 장비들을 운용하고 유지할 예산은 단 한 푼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미국을 탓할 것이 아닌데 그 비싼 무기들을 한 푼도 안 받고 거저 넘겨줬는데 무기들을 굴릴 돈까지 내놓으라는 것은 털도 안 뽑고 날로 먹자는 소리이며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뜯어 불 피우고 깃털 뽑아 글씨 쓰는 실로 호구 중에 상 호구 취급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런 무기들을 공여받았으면 무기를 운용할 예산은 월남 본인들이 국방예산을 잘 편성하여 투입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정도 머리조차 월남 정부는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귀중한 최신 장비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철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는데 여기에는 뼈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월맹군 및 베트콩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3년 이래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과 원조 아래 전쟁을 치르며 미군의 전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하다 보니 자신들이 미국이 아닌 베트남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한 개 분대의 베트콩을 상대하는 데도 포병과 전투기로 폭격을 하고 헬리콥터로 이동하여 전과를 확인하는 식의 전투를 했으며 산악지역 기동은 헬리콥터 없으면 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식의 전투는 천조국인 미국 정도나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동안은 미국의 마구 퍼다 주는 지원을 받으며 해왔으나 미국이 철수하고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는 언감생심이었던 것입니다.
진작 자신들의 실정과 지형에 맞는 전략 전술을 개발했어야 하는 것을 미국의 지원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결과 <원숭이 꽃신>처럼 되어 그 지원이 끊기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투기와 헬리콥터와 탱크, 장갑차, 대포들은 연료와 부품의 부족으로 수리와 보충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탄약조차 고갈되어 전투를 할 때 포탄을 한 발 한 발 세어가며 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례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을 때 월남군의 포대가 전투 한 번에 포탄 100발을 쏘던 것이 미군 철수 후에는 포탄 3발도 겨우 사격하게 되었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전투기 몇 대, 헬리콥터 몇 대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1975년 패망 당시 월남군은 변변히 장비조차 가동시키지 못한 채 멸망했던 것입니다.
(육군 장비의 45%, 해군 함정의 70%, 공군 항공기의 65%가 사용 불가 상태이며 나머지 장비들도 연료와 부품, 탄약 부족으로 제대로 가동이 될지 의심스러운 것이 북괴군의 현 상황입니다. 패망 당시의 월남군과 너무도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 그렇다면 당시의 월맹군은 어떻게 보유한 장비들을 잘 굴렸는지 궁금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진작부터 없이 사는 데 익숙하여 거기에 맞는 전략전술을 발전시켰고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마찬가지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월남군보다 적은 수량의 장비이지만 착실하게 가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월맹군의 모습은 오히려 우리 국군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과연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도 우리가 월남의 적화통일을 단지 <종북세력>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월남의 패망을 종북세력 탓이라고만 한다면 앞에서 언급된 월남 정부와 군과 국민들의 그 모든 실정과 실수는 모조리 무죄가 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월남의 패망에서 우리가 반드시 새겨야만 할 교훈은 <종북세력을 척결하자>는 것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으로서 내 나라, 내 조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애국심과 안보관, 국가관을 견지해야 하며, 또한 정치인들이 실정을 하거나 부패하는지 잘 감시하여 표로 심판하고 관료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주민소환으로 축출하여 새로운 인물을 앉히고 우리 군을 사랑하고 존중하여 그들이 사기충천하여 국방의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야만 내 나라를 붉은 역도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2년 전 1975년 4월 9일, 쑤안록 전투에 출전했던 월남 18사단의 5천여 병사들은 이미 월맹 공산군이 17도선을 넘어 나라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켰고 수도 사이공이 함락 직전에 이르러 나라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앞에 있던 모든 아군들이 장군과 장교들은 도망치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멸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눈앞에는 공산군의 참모총장이 직접 지휘하는 4만명의 최정예 부대가 달려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쑤안록 전투에 참전한 남베트남 18사단의 소년병)
그러나 그들은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고,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5천명으로 4만명에게 돌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려 12일을 막아내며 승리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때 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지금처럼 나라 망한다고 땅을 치고 한숨만 쉬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대한민국은 42년 전의 월남이 아닙니다.
결코 무너지지도 패망하지도 적화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라 망한다고 땅을 치고 한숨을 쉬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걱정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내뱉는 그 한숨과 좌절과 절망이 우리 조국을 무너뜨리는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집필자 : 계시탐정
첫댓글 귀한정보 감사합니다
긴 장문에 글을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귀한 글 옴겨 가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우리가 잘알지못하는 베트남의 전쟁사까지 잘알고 작금의 조국의현실에 절망하는 많은사람들을 곀려하고 다잡아주는 계시탐정님의 귀중한 글에 감사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