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현해탄을 건넌 사랑
김영덕: 하아아, 푸우우, 부르르……
미스리: 왠 한숨을 그렇게 체신머리없이 쉬세요?
과격소녀: 난 알지롱. 입 잘못놀렸다가 광호 오빠 팬들한테 혼나서 그런거죠?
김영덕: 그렇단다. 미스리, 광호 생일이 언젠가?
미스리: 8월 1일이든가……
김영덕: 그때 소극장 하나 빌려놓으라구. 왜 있잖아, 풍선같은거 잔뜩 매달아놓고…… 딴따라 애들이 팬들 모아놓고 쇼하는거.
미스리: 예산이 좀 많이 필요하겠네요?
김영덕: '사랑의 성금'모아서 소극장만 준비해. 풍선, 고깔모자, 폭죽같은건 김영덕팬클럽 애들 풀어서 패밀리 레스토랑같은데서 몇 개씩 슬쩍해오라구 하구. 음, 케잌은 초코파이로 대체하면 완벽하겠구먼.
미스리: 예, 선생님. 근데 얘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애에요?
김영덕: 응, 일명 과격소녀라구 민철이 광팬인데…… 이번 인터뷰에 참석시켜주지 않으면 청담대교에서 뛰어내린다구해서 할 수 없이 그냥 데려왔어.
미스리: 청담대교? 나두 딴따라 뒷조사하러 그동네 몇번 갔었는데…… 혹시 나 못봤니?
과격소녀: 당근빠따루 알지. 린다김 선글라스에 무전기들구 빨빨 돌아다녔었죠? 차태현 오빠 셔츠 찢어놨던 그 언니.
김영덕: 얘야, 선글라스가 아니라 나이방이란다.
과격소녀: 나이방이 뭐에요?
김영덕: 원래는 라이방(Ray ban)인데 난 그냥 나이방이라고 부르곤 하지.
과격소녀: 그러고보니 할아버지도 이 언니처럼 무식하게 큰거 쓰고 있네? 치, 노땅은 못말린다니깐.
김영덕: 뭘 모르는구먼. 요샌 이런게 유행이야. 일명 '김정일나이방'이라구두 한단다.
과격소녀: 김정일과 린다김이라…… 정말 '생쑈'의 천재들만 모인 '환상의 복식조'군요, 두분은.
인권: 언제까지 잡담만 늘어놓을 거에요? 인터뷰 안해요?
김영덕: 오우, 쏘리쏘리. 미스리, 카메라 세팅 다 됐나?
미스리: 예, 선생님. 인권 오빠, 시작하세요.
민철아, 잘 지내고 있니? 제수씨도 잘 있구? 아, 난 요즘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단다. 팀 성적도 나쁘구, 경기에 자주 나가지도 못하구.
너 1군 데뷔전하구 얼마전에 완봉하는거 비디오로 녹화해서 봤어. 참 멋지고 늠름한 모습이더구나. 방망이 쥐고 타석에 들어서서는 쬐께 얼빵한 자세를 선보인 것도 나름대로 귀여웠구, 후훗. 처음 야쿠르트전에서 말이야, 바운드 큰 투수 땅볼로 기똥찬 진루타 만들어냈었지? 어정쩡하게 다리 구부리고 치는게 꼭 양준혁씨같더라. 히히, 니가 마쓰이처럼 머리통이 컸으면 더 비슷하게 보였을텐데.
그런데 너 프레쉬하게 홀쭉해졌더라. 마구잡이 뱃살들은 다 어디로 간거니? 그렇게 내가 살빼라구 꼬집을 땐 말 안듣더니…… 미워! 어쨌든 삼진 잡은 후 손등으로 코밑한번 쓱 닦고, 모자챙 만져서 송진가루 묻히기쇼나 홈럼성 타구 맞구난 다음 화들짝 몸을 틀면서 앙탈부리기쇼 등등 너의 동작 하나하나가 나에겐 이뻐보일 뿐이었어. 응, 과격소녀가 특히 땀에 젖은 옆머리가 대빵 섹시했다고 전해달래.
옛날 생각이 난다, 민철아. 초딩때부터 8년간 함께 지내다, 내가 1년먼저 졸업해 한양대로 가는 바람에 우린 눈물을 머금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잖니. 95년 내가 한화로 입단하면서 다시 만나게 됐지만 팀 에이스로 우뚝선 너와 계약금 1800만원짜리 나…… 하지만 세상이 우리의 사랑에 감동한 것일까? 상국이 형이 잠깐 한눈파는 사이, 우린 4월 30일과 5월 5일 바테리를 이루어 연속으로 완투승을 일구어냈어. 특히 어린이날엔 데뷔 첫홈런, 쓰리런포를 날려 널 기쁘게하기도 했구.
5월 10일, 전날 용덕이 형이 완봉을 했으니 오늘도 완봉을 하자며 맹세를 하고 우린 그라운드에 섰지(아니, 난 앉았지). 정말 니 공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받아냈고, 또 사랑의 온기로 정성스럽게 닦아 던져주고…… 오, 9회말 마지막 타자 최훈재씨를 삼진으로 보낸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서로를 향해 걸어갔어. 넌 내 목을 부등켜안아주었고 말야. 그런데 그때 뭐라고 속삭였던거니? 3루쪽, 완봉승에 도취된 팬들의 함성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거든. 혹시…… 사.랑.해?
그러나, 역시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질투하고 있었었나봐. 6월 30일 집에서 보람찬 체력훈련을 하던 너는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갑자기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는데…… 아, 골절로 판명이 나버렸잖니. 그때 소파를 잘못 짚어서 그랬다고 했었나?
김영덕: 소파는 무슨 놈의 소파. 그게 말이 되남?
인권: 네? 그럼 왜 부러진거에요?
김영덕: 6월 29일 대 쌍방울전, 민철이가 등판했다가 어이없이 역전패 당했었잖아. 관중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민철이 차 가로막고 막 난리 부르스를 춰 댔지. 그래서 민철이가 그중에서 제일 쇼하는 놈을 골라 조수석에 태우고는 '어디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달랬다구. 근데도 이 놈은 게속 쌍소리를 해대고, 결국 꼭지가 돈 민철이가 라이트 스트레이트, 빠샤! 싸대기를 맞췄냐구? 아니. 그랬으면 경찰서가서 잠깐 망신당하고 끝났을텐데, 얘는 엉뚱하게 차 앞뒷문사이 쇠기둥을 맞추버리고 말았어. 이 0.5초동안의 실수에 알다시피 한화도 같이 주저앉은 셈이지. 이게 사건의 진상이야.
과격소녀: 이상한 할아버지네? 새삼스럽게 그딴 옛날얘기는 왜 끄집어내는 거에요?
인권: 미스리, 이거 편집해줘.
김영덕: 니가 감독이냐? 사내가 뭐 그런 실수할 수도 있고, 교훈삼아 그런 짓 안했으면 된거지 뭘 자꾸 숨기려고만 들어? 잉?
인권: 알았으니까 그만 나불거리세요. 너무 가슴이 아프니까 그런거 아녜욧! 정말 저 우는거 보고싶으세요?
아…… 97년 5월 23일, 그 찬란했던 밤이 불현듯 떠오른다. 우리가 노히트노런을 일궈냈던 그 밤 말이야. 한편으론 악몽의 밤이기도 했지. 그놈의 육시럴 패스트볼 때문에 퍼펙트가 날라가버렸잖니. 그때 내가 보문산 꼭대기에 올라가 목매려고 했던거 너두 알지? 하지만, 아…… 하지만, 나의 상큼한 투수리드덕분에 노히트노런을 이룰 수 있었다는 너의 그 사랑스런 한마디에 난 밧줄을 내던지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단다. 정말 너의 손을 꼭 붙잡고 대전역 광장으로 달려가서 지고지순한 우리의 사랑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싶은 심정이었어.
우리처럼 초딩때부터 사랑을 나눠온 사이는 아니지만, 얼마전에 진우형과 또 노히트노런 했었어. 알지? 유승안 코치님 이후 두번째로 노히트노런 전문 포수로 화려하게 등극한거야!
김영덕: 어이, 인권! 97년 얘기 끄낸 김에 그 얘기도 해야지. 6월 27일 대 삼성전……
인권: 역시 듣던대로 심술궂은 노인네군요.
과격소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
김영덕: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끝내기 타격방해'가 탄생한 날이지. 6:6 동점, 9회말 1사 만루, 투수는 대성이였어. 볼카운트 원 앤드 원에서 경배가 헛스윙을 했는데, 글쎄 인권이가 미트로 방망이를 건드린거야. 8회말 6:5에서 2루 악송구로 동점을 허용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모자라,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환타지쇼로 짜자장…… 대미를 장식한거지 뭐. 패스트볼로 퍼펙트 깬 사건과 함께 97년 10대 해프닝으로 선정됐었다지, 아마?
인권: 정말 너무해!
미스리: 하하하, 자료를 보니 97년엔 '전광판 사건'도 유명하네요.
과격소녀: 전광판?
미스리: 응, 광주구장에서 김창희가 김접희가 됐었구, 또 쌍방울이 원방울이 됐었대. 방울 하나가 없어져서 역전패 당했다는데…… 어머, 너무 야하당. 더 웃기는건 대구구장인데 최익성이 쥐익성? 꺄르르.…..
과격소녀: 정말 황당했겠네요. 그래서 익성오빠가 서울팀으로 갔남?
김영덕: 자, 그만들 나불거리고…… 인권아, 게속하렴.
아, 도꾜돔에서의 완봉…… 하필이면 그날 찬호팩이 완투승하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선 상대적으로 좀 시들했지만, 난 너무나 기뻤어! 그동안 니가 일본에서 얼마나 설움을 많이 겪었니. '갈베스 보험'이라고 나불거리지를 않나, 비온다고 등판을 취소시키질 않나…… 우유부단한 나가시마 때문에 니가 겪은 그 고통들을 열거하자면 정말 끝이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시련은 끝났어. 이제 넌 진정한 '쿄진'의 영웅으로 우뚝 서게될테니까. 근데 말이야, 니가 좀더 잘나가게 되면 니 캐릭터 상품도 만들어질지 모르는데…… 내가 하나 생각해둔게 있거든. 들어볼래? 음…… 왜 너 경기할 때 마우스피스 끼는거 좋아했었잖아. 그 마우스피스를 캐릭터 상품으로 파는거 어때? 기똥차지? 진짜 끼고 있었던 것처럼 수돗물좀 묻혀놓구. 그럼 야한 일본 언니들이 벌떼처럼 몰려오지 않을까? 히히, 여기 과격소녀는 10만엔이라도 당장 사겠대.
요즘 신문을 보니 나가시마가 재미삼아 널 셋업맨내지 마무리로 써볼려구 하는 것 같더라. 아잉, 속상해라. 음, 영덕 할아버지 생각은 어때요?
김영덕: 감독이 하라면 해야지 별 수 있어? 요미우리 투수진 사정이 우리나라 롯데하구 좀 비슷하잖아. 또 워낙 타격쪽은 문제가 있으니까.
인권: 민철이가 공이 무섭다고 외쳤을 땐 정말 저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줄 알았어요.
과격소녀: 안돼요! 민철 오빠는 선발로 뛰어야 해요! 흥, 나가시마 인형도 만들어야겠군!
김영덕: 인형이라니?
과격소녀: 영화같은데서 못보셨어요? 인형 만들어서 바늘로 콕콕 찌르면 상대방이 가슴 움켜쥐고 막 아으, 하면서 발버둥치는거 말이에요. 갈베스 장난하다 2군으로 쫓겨난거, 메이 빈볼던져서 징계먹은거 다 제 작품이라구요.
미스리: 그럼 성민 오빠는?
과격소녀: 차마, 성민 오빠까진…… 잠깐 진실 언니 생각하다 삐끗했나봐.
김영덕: 얘야, 인형가지고 그런 장난치는건 나쁜 짓이란다. 나쁜 짓 하면……
미스리: 선생님, 설교는 나중에 하시고…… 인권 오빠, 시간 없으니까 이제 마무리 해주세요!
마무리? 나야 뭐 우리 민철이가 꿋꿋하게, 게속 활약해주길 바랄 뿐이지. 스피드가 좀 안나오는 것 같던데…… 너무 제구력에 신경써서 그러니? 아무튼 스스로 잘 헤쳐나갈거라 믿는다.
그리구 말야, 너 나중에 다시 우리나라로 올거지? 돈많은 과격소녀야 상관없겠지만, 일본 놀러가려면 비행기값도 만만치 않잖니. 제수씨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도 먹어봐야 하는데. 또 명예롭게 한화에서 은퇴해야 될거야, 너. 과격소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제2의 도꾜 독가스 쇼가 펼쳐질지 누가 알아? 우리 다시한번 바테리로 뭉쳐보자꾸나.
음, 멋지게 일본말로 인사를 해야되는데 영덕 할아버지처럼 일본말에 능통하지 못하니…... 사바나 심현섭이가 주문 나불거릴 때 꼭 '자메이카' 집어넣듯이, 나두 꼭 '나까소네' 집어넣는 스타일이거덩, 히히. 그래두 한마디 정도는 할줄 알어. 아, 나의 사랑 민철아…… 사요나라, 사요나라……
김영덕: 자, 오늘도 사고없이 무사히 끝났군. 인권이, 노래 들을래?
인권: 전람회의 '취중진담' 틀어주세요.
미스리: 어? 나 차태현의 FM 인기가요 녹음해놓은거 들어야 돼!
김영덕: XX, 차타구 오면서 게속 들었는데 또 들어? 집어치구 돗자리나 빨리 깔아!
과격소녀: 이제 뭐 할건데요?
김영덕: 음, 마작이 좋을까, 고스돕이 좋을까?
인권: 락카룸에 담요있는데 가져올 테니까 고스돕이나 치죠, 뭐.
김영덕: 그래. 한 두어시간 치다 스로뜨 한번 땡기러 가자구. 고조 오연수 오마니 동무래 코쟁이 놈들 돈 싸그리 긁었다는데……
이후 우리는 취중진담을 흥얼거리며, 열라게 고스돕을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다음에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