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3년 한국양궁 제42회
세계선수권대회서 15년째 우승 달성
한국이 ‘양궁 초강국’의 위력을 다시 떨쳤
다. 한국은 21일(한국시각)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막을 내린 제42회 세계
선수권 남녀 단체전서 동반 우승,개인전
을 포함해 모두 금메달 셋, 은 둘, 동 하나
를 따내며 1989년 이후 내리 8번 종합
1위 자리를 지켰다.
이 대회는 2년마다 치러진다.4개 전종목
우승을 휩쓸었던 1997년 대회의 ‘신화
재현’에는 실패했으나 역대 세 번째로 좋
은 성적을 내 기대에 부응했다. 세계신기
록 2개, 대회신기록 12개를 세워 메달 경
쟁에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풍성한 수
확을 했으며, 내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출전권(국가별 최대 3장) 역시 모두 확보
했다.
윤미진(20), 이현정(20·이상 경희대),
박성현(20), 박미경(21·이상 전북도청)
으로 이뤄진 여자팀은 이날 결승서 일본
을 252대233(270점 만점)으로 가볍게
물리쳐 정상에 섰다. 지난 대회서 3위에
머물며 상처받았던 자존심을 되찾았다.
2000시드니올림픽 2관왕 윤미진은 전
날 개인전 우승에 이어 단체전 금메달까
지 걸어 2관왕에 올랐다.박경모(28·인
천계양구청)와 장용호(27·예천군청),
최영광(18·선인고), 임동현(17·충북체
고)이 나선 남자팀도 결승서 스웨덴을
238대234로 따돌리고 시상대 맨 위에
섰다.
특히 개인전서 유일하게 입상(2위)한 임
동현은 인도와 벌인 4강전서 4발을 10점
에 꽂아 역전승(242대238)에 앞장섰다.
한국이 남녀 단체전서 나란히 1위를 하기
는 1997대회 이후 6년 만이다. 남자 단
체전 3위는 이탈리아, 여자 3위는 우크라
이나가 차지했다.
▶2011년 미국, 애틀랜티스 호가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였다
▶2008년 보스니아 인종학살의 주범,
라도반 카르지치 13년만에 체포
▶2005년 중국, 위안화 2.1% 전격 절상
▶2005년 중국 위안화 21% 절상
▶2004년 1995년 노벨의학상
루이스 교수 사망
▶2004년 미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
제리 골드스미스 사망
▶2003년 7월 21일 한희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서 첫승
2003년 7월 21일, 프로골퍼 한희원 선수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첫발을 내디딘 지 3년, 66개 대회 만에 첫 승을 올렸다. 미국 뉴욕주 뉴로셸의 와이카길골프장에서 끝난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한희원은 이븐파(버디4, 보기2, 더블보기1)를 치며 최종합계 11언더파 273타를 기록, 전날 자신과 공동 선두였던 메그 말론(미국)을 2위(9언더파)로 밀어내고 애타게 기다렸던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이 순간을 맞보기 까지 한희원의 골프 인생은 ‘사서 고생’ 그 자체였다. 상당한 재력가 집안 태생인 그녀는 9세 때부터 골프를 시작, 1993년 15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가대표에 선발됐고, 1996년 세계여자아마추어팀선수권에서 한국을 사상 첫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화려한 시작을 뒤로 하고 박세리, 김미현 등 선배들이 미국으로 진출한 것과 달리 일본으로 향했다. 1999년 일본무대에 데뷔한 한희원은 2차례 우승하면서 그해 신인왕에 올랐지만, 그녀는 곧 또다시 ‘가시밭길’을 택했다. 이듬해 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에 응시해 공동 27위로 ‘컨디셔널 시드’를 얻어 2001년 미국에서 ‘신인’으로 새 출발을 한 것이다. LPGA투어 생활은 힘들었다. ‘먼데이 퀸(Monday Queen)’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힘든 강행군을 계속하다 결국 아버지 한영관씨와 함께 부녀가 바이러스 장염까지 걸려 한때 병원신세까지 져야 했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면서 풀시드를 따낸 2002년에는 2위를 3차례나 차지하며 7번이나 ‘톱10’에 오르기도 했다. 이해에도 18개 대회에서 5차례 ‘톱 10’에 오르는 상승세를 보였다.
▶1998년 미국 최초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 사망
셰퍼드 [Shepard, Jr., Alan B(artlett), 1923.11.18~1998.7.21]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가 1998년 7월 21일 캘리포니아의 병원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조종사 출신인 셰퍼드는 지난 1961년 5월 5일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주선 '프리덤7'을 타고 15분간의 우주유영을 하는 등 역사적인 우주비행을 수행했다. 셰퍼드의 우주비행은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보다 23일 뒤진 것이었으나 불충분한 상황 속에서 미국 우주개척의 첫 장을 용감히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971년 1월 31일에도 아폴로14호 사령관으로 달 탐사에 나서 달을 밟은 5번째 인류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는 9시간의 달 탐사 도중 달 위에서 인류 최초로 골프를 치기도 했다. 1974년 항공우주국과 해군에서 은퇴한 그는 기업체의 대표로 활동하며 각종 사회활동을 펼치다 말년에 백혈병을 앓아왔다.
미국이 최초로 선발한 7명의 우주비행사 중 한 명이었던 그는 1979년 명예훈장을 받는 등 미국 우주 개척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97년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에 이회창 대표 선출
▶1996년 서울소년분류심사원
소년원생 150명 탈주
▶1994년 토니 블레어,
영국 제1야당인 노동당 당수로 당선
▶1993년 우리나라 위성방송 전송방식
`디지털`로 결정
▶1983년 택시 시간거리 병산제, 운전
사 기록전산화, 전자미터 설치 등 교통
안전기본계획을 확정
▶1983년 중국, 상해 등 외국인에 개방
▶1981년 유엔안보리, 이스라엘 및 팔
레스타인에 48시간내 전투행위 중지결
의안 채택
▶1980년 비타르 전 시리아 수상
파리서 피살
▶1979년 카터 주한미군
철수 계획 수정
▶1978년 낙동강 연안 종합개발 착수
▶1977년 이집트-리비아,
국경지대서 군사충돌
▶1970년 제3차 한미국방장관 회담
▶1969년 미국 국무성,
대 중국 완화정책 발표
▶1968년 미국 현대무용 혁신가
세인트 데니스 사망
▶1964년 싱가포르서 중국인과
말레이지아인의 유혈충돌사건 발생
▶1961년 미국 유인로케트
발사 성공(제2호)
▶1960년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세계 첫 여성 총리로 선출
▶1959년 세계최초 미국 원자력상선
사반나호 진수
▶1958년 대구 부정투표사건 고발
▶1956년 정부, 재일교포 북송에
국제적십자사에 항의
▶1954년 제네바 협정 조인
ㆍ베트남 전쟁 씨앗 된 ‘남북 분단’
디엔비엔푸는 하노이시로부터 300㎞가량 서쪽에 있는 험준한 산악도시로 라오스와 베트남 북부를 잇는 교통요충지다. 프랑스와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간에 벌어진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 막바지 프랑스군이 베트민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세계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됐다.
도로를 장악한 프랑스군에 맞서 베트민 군대는 빛조차 통과하기 힘든 정글을 통해 중포 200문과 다연발 로켓포를 인력과 조랑말의 힘으로 운반하는 대역사를 감행했다. 또 밤마다 민간인 보급부대들이 희미한 기름등잔 불빛만으로 끝없는 대열을 이루며 정글을 통해 베트민에게 식량을 날랐다. 한사람이 짊어진 식량 중 10분의 1만이 전달될 정도로 여건이 악전고투였지만 보급로를 차단당한 베트민에겐 결정적인 힘이 됐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전선이 뚫리자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1954년 5월7일까지 5000명이 전사, 1만명이 항복하는 대패를 당했다. 이 전투로 8년에 걸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막을 내렸고, 1954년 7월21일 제네바 협정이 조인됐다. 영국과 소련, 중국 등이 승인한 이 협정의 핵심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남북으로 일시 분단시키는 것이었다. 영토의 절반을 남쪽 정부에 넘기도록 한 데다 북베트남을 비합법 정부로 격하시킨 이 협정은 베트남의 5분의 4를 장악한 베트민으로서는 대단히 불공평한 것이었다. 그나마 2년 뒤 재통일을 위해 남베트남에서 실시키로 한 국민투표마저 끝내 무산됐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고딘디엠을 수반으로 하는 친미정권을 세웠지만, 그가 1963년 정적에게 살해된 이후 18개월 동안 8개의 정권이 명멸하는 정정불안이 지속됐다. 미국은 마침내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겠다며 직접 전쟁에 개입,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65~1975년)의 막을 열었다. 이 전쟁은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가져왔고, 국제적으로 반전운동 확산의 계기가 됐다. 베트남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지도자 호찌민은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은 1973년 1월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치욕 속에 미군을 철수시켰다. 2년 뒤인 1975년 4월30일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졌고, 1976년 7월2일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됐다.
제네바 회담에 참가한 북베트남 대표
후안 반 돈(앞줄 오른쪽).
▶1951년 당인리발전소 5000kw
발전 시작
▶1949년 이스라엘-시리아 휴전협정
조인, 19개월 전쟁 종식
▶1944년 미군, 괌도 상륙
▶1941년 일본-프랑스,
인도방위협정 체결
▶1941년 독일 최초로 모스크바 공습
▶1932년 영국제국 경제회의, 영국연방
내의 특혜관세제도 채택(블록경제 형성)
▶1932년 캐나다 오타와서 대영제국
경제회의 개막
▶1908년 영국,
포클랜드제도 보호령 선언.
▶1899년헤밍웨이 출생
어니스트 헤밍웨이
“독보적인 문체와 스타일로 현대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다”
- 1957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헤밍웨이는 의사 아버지와 성악가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할 것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헤밍웨이가 나중에 그러했듯이 그의 아버지도 수렵과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종교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나중에 그의 개인적인 삶과 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수습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 때 운전병으로 참전하였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20년대의 파리에는 많은 미국 작가들이 와있었다. 헤밍웨이는 1921년 파리 특파원으로 가서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과 같은 미국 작가들, 제임스 조이스 등 거물급 작가들과 친분을 쌓고 작가로서 인정을 받으며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특파원 신분으로 유럽 각지를 다니며 취재 활동과 전쟁 보도를 하였으며, 그의 간결하고 독특한 이른 바 ‘헤밍웨이 문체’는 이러한 기자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이혼과 재혼을 거친 후 1928년 파리를 떠난 그는 미국 플로리다 주의 가장 아래 쪽 키웨스트에 자리를 잡는다. 이후 12년간 이곳에 살면서 [무기여 잘 있거라]를 비롯한 대표작을 완성한다. 헤밍웨이는 키웨스트에 살면서 바다낚시에 몰두했다. 이런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이자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인과 바다]의 바탕이 되었다. 1928년 말에는 아버지의 권총 자살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헤밍웨이 집안은 유독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많아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 동생, 누이, 그리고, 헤밍웨이 자신도 나중에 35구경 엽총으로 자살하였다. 헤밍웨이는 쿠바의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완성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노인과 바다는 ‘라이프’ 잡지에 연재물로 시작되었고,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그 동안 성공작의 가뭄과 혹평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그것은 커다란 성과였고, 그 결과 헤밍웨이는 1953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간결하고 독특한 ‘헤밍웨이 문체’는 문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최고의 위치에 올랐을 때, 그는 더 이상 작품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 우울증에 시달리며 술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쿠바를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과대망상증과 우울증은 더욱 심각해졌다. 여러 차례 전기충격요법을 받았으며, 두 번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결국, 1961년 7월 21일 퇴원 후 집에 와 있던 헤밍웨이는 장총을 입에 물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헤밍웨이는 많은 일화를 남긴 작가이다. 그가 죽은 후 살아 생전에 보여줬던 그의 과장과 허풍에, 그리고 그의 양극적인 면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고, 심지어 유족들과의 소송 분쟁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와 평가로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가 남긴 가치와 업적이 폄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남긴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처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1952년 초판본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의 타자기
`노인과 바다`의 저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 1885년 청ㆍ일軍 `텐진조약`따라 철병
▶ 1831년 벨기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1816년 세계 최초의 통신사인 `로이터 통신사`의 창설자 로이터 출생 http://www.reuters.com/
▶ 1792년 스코틀랜드 시인 번즈 사망
▶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함대 대해전
https://youtu.be/ZcolkegyuGg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