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럼]
[문 화]
영화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이 무슨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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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지하철을 타면 작은 문고본 잡지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당시 내가 즐겨 보던 잡지는 리더스 다이제스트(RD)였다. 지금은 발행이 중단됐지만 7080들에겐 추억의 잡지다. 어느 날 RD에 이런 글이 적힌 걸 봤다.
‘세상을 바꾸려는 진보주의자들은 비행기를 만들고, 안전한 세상을 바라는 보수주의자들은 낙하산을 발명한다. 세상은 비행기만 만드는 사람들만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낙하산을 고안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비행기 산업도 발전한다.’ 30년도 더 전에 본 잡지의 글귀를 요즘 자꾸 곱씹어보게 된다. 그만큼 정치가 험악해져서다. 험악한 건 정치뿐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험악하다. 정치와 무관한, 대학 때 이념서적과도 무관한, 그런 사람들까지 온통 뒤섞여 ‘진영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니라고 답하는 사람들을 위해 증거를 대겠다.
영화 국제시장이 오늘(4일) 관객 700만명을 돌파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은 윤제균이다. 근데 윤 감독은 요즘 인터뷰 기피증이 생겼다고 한다. 이유는 영화를 두고 '느닷없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붙어서다. 1960,70년대를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사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흥행영화를 보려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난 그러질 못하다) 얘기를 그렸다는 국제시장이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난데없이 ‘국제시장=보수의 영화’란 꼬리표가 달렸다. 추석이나 설 때면 TV로 재방되는 코메디영화 ‘두사부일체’를 감독하고, 달동네 철거민들의 얘기인 ‘1번가의 기적’을 감독한 윤 감독은 억울해하지만 이미 논쟁은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이런 ‘낙인찍기’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세월호 사건이 그랬다. 안전에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불감증, 압축성장시대의 그늘, 생명보다 물질이 앞선 세태 등이 응축돼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자성으로 승화될 줄 알았던 이 사건이 정치 프리즘을 거치면서 보수-진보 패싸움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재발 방지를 위한 교훈과 말 그대로 국가 개조 프로젝트는 간 데 없고, 진영 싸움의 파편만 남아 있다. 이 패싸움의 승자가 누군가. 노무현이 집권하면 진보가, 박근혜가 집권하면 보수가 승자 행세를 하는 이 싸움엔 진짜 승자가 없다.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패자로 전락시킨다.
2015년 정치는 진영싸움의 폐해를 알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영싸움의 달콤한 과실에 유혹당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이 앞장서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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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의 일이다. 프랑스 방문을 마친 노무현 대통령은 예고없이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들이 있는 자이툰부대를 방문했다. 야당 국회의원 시절 해외파병이 미국의 전쟁을 돕는 행위라며 반대해온 대통령이었기에 파병부대 방문은 의외의 결정이었다. 노 대통령은 나중에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선택하는 사람이더라. 매 순간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리다. 대통령을 잘 하려다보니 나는 찍어준 사람들과 반대의 결정을 내려야할 게 너무 많았다. 가슴 아팠지만 그게 대통령이란 자리더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진보진영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이 결심한 게 대표적인 예다.
청와대 사람들에게 귀동냥을 해보면 박근혜 대통령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책 결정과 선택을 할 때 ‘이건 새누리당 지지층들을 위한 거니 꼭 해야 하고, 이건 나를 안 찍은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자들의 숙원사업이니 안해도 되겠다’고 판단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지지자들과 한 약속을 더 큰 국가 이익이나 미래를 위해 깨뜨려야 하는 경우가 많아 고민하는 시간들이 더 많다고 한다. 누리과정 예산이 그랬고, 대학 등록금 공약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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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싸움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오피니언 리더층에선 그래서 ‘진보의 아젠다’로 분류되는 통일문제에서 박 대통령이 결실을 내는 게 대한민국의 앞날을 위해 중요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요즘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해부하고 분석하는 기획기사를 쓸 때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눈치 챘겠지만 <선진국 정치, 미국 사례>를 쓰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미국의 정치에선 본받을 게 없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뒤 미국 사회는 한국 사회 못지않은 진영싸움의 늪에 빠져 있다. 공화당은 오바마 대통령이 하는 일이라면 쌍심지를 켜고 반대한다. 지난해 개원한 113회 미 의회는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이라는 최종 성안 절차까지 마친 법안이 상반기(1~6월) 15건에 불과했다. 1947년 이래 최저였던 2013년 상반기의 23건보다 낮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셈이다. 그래서 ‘거부정치’라는 뜻의 비토크라시(Vetocracy)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미국의 석학은 그래서 “미국의 위기는 정치에서 올 수 있다. 양 극단의 싸움을 중지하지 않는한 미국의 미래는 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진영싸움의 특징은 하방경직성이 강하다. 상대방을 비판하면 할수록 수위가 더 올라가면 올라가지,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진짜 원수가 돼버린다. 지금 일부 국회의원들이 그런 수위까지 갔다. 새누리당 김 아무개의원의 발언, 새정치연합 김 아무개의원의 발언만 뜨면 네티즌들이 둘로 갈려 온라인 패싸움을 벌인다. 의원들도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 정치인들이 “내 부고기사만 빼고는 나쁜 기사라도 신문에 나는 게 좋다”고 했지만 이젠 옛날 얘기다. 세상이 달라졌다. 인터넷시대에 ‘오명(汚名)’은 시대를 초월해, 공간을 초월해 전파된다. 2015년 1월에 한 발언이 할아버지가 된 2065년 1월에까지 손자들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해 보라. 두렵지 않은가.
박승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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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을 때 한쪽 눈을 감아보자. 입체감이 없고, 거리감이 없어 비틀거리게 된다. 왼쪽 오른 쪽, 두 개의 눈으로 봐야 제대로 걸을 수 있다. 2015년 정치가 못하면 우리가 먼저 하자. 지나간 시절의 향수를 돌아볼 수 있도록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이 무슨 죄인가. 보수니 진보니, 좌니 우니 하는 정체불명의 카테고리로 사람을 엮어 패거리 싸움을 하지 말자. 제~발!
맑고 아름다운 클래식 1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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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