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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춤의 근원
춤을 춘다는 것은 서양에서는 생명력의 충일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tanha를 어원으로 하는 dance라고도 부르지만 춤(舞)은 본디 우주와 세상이 함께해오고 인간과 함께 해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밝은 하늘에 햇살이 종일 춤추고 부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춤추고 물결이 하염없이 춤추고 원시시대부터 피워온 불길 따라 하늘로 연기가 춤추며 올라가고 고기 굽는 냄새에 뱃속 창자가 춤추고 봄이면 세상가득 꽃향기가 춤추는 세상에서 천지신명의 알맹이로 깨어난 우리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자연히 춤을 추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현대문명사회이든지 원시사회이든지 춤이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심지어 파충류와 조류 및 포유류의 생활을 살펴보면 각종 구애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춤의 기원에 대해선 인간의 본능에 내재되어있다는 본능설과 춤추는 자연현상과 동물등의 모양을 모방했다는 모방설이 있으나 춤은 소리,빛,냄새등 파동으로 세상에 무한히 강림하는 우주의 본모습이며 신령한 생명력의 본능이고 천지자연을 모방하는 생명원리의 모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쿠르트 작스(Curt Sachs)도 <세계 춤의 역사>서문에서 춤춘다는 것은“보다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뿐”이라하고 삶을 한 차원 승화시키는 고양된(higher level) 삶이라하였듯이 춤(舞)은 대자연의 실체인 파동에 맞추어 더불어 파동하며 생명의 기운을 승화시키는 신령한 몸짓으로 천지인의 조화와 질서를 받아들이며 사랑을 여는 신명파동입니다. 하여 쿠르트 작스는 그의 책 서문의 첫머리에“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을 알리요”라는 옛 잠언을 인용하였던 것이며 사람이 춤을 추어야만 인생의 맛과 멋, 그리고 의미와 깊이를 얻는다하였던 것입니다. 춤은 그만큼 삶의 끝없는 도정(道程)이고 또 사람 사는 도리를 아는 것이며 사랑과 행복으로 강림하는 천지신명을 접신하는 길이었던 겁니다.
2.우리 역사에서의 춤
구석기시대를 지나며 도구와 불의 사용 및 언어를 사용하여 모여사는 사회를 형성하고 기원전 1만여년 전의 빙하기를 피했던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우리 겨레는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기르는 법을 터득하면서 먹고사는 고단한 현실로부터 여유가 생기면서 하늘과 땅과 생명에 고마움을 표하는 무천, 천군, 영고, 동맹등의 체천의식으로 천지인의 신바람을 춤으로 표현하였고 한겨레의 신맞이 춤은 무당문화와 신앙문화를 이루어 사회구성원을 소통시키고 화합하는 제정일치의 고대문명을 이루며 고대문화의 시원을 형성하였습니다.
신화처럼 아득한 상고시대 천부인이라 불리는 소리가 춤추는 방울, 빛이 춤추는 거울, 힘이 춤추는 칼은 신명나는 천지인의 신물로 오늘날까지 무속의식 및 각종 민속의식과 종교의식의 춤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웃나라들에게 음주가무를 유달리 즐기고 누리는 민족으로 일컬어져온 우리겨레는 천부적으로 흥이 많고 춤을 즐겨 삶의 어느장소,어떤때,어떠한 사람들과 어울려서도 가무를 즐겨왔고 "움직인다" 라는 말 대신 "춤춘다 "라고 말하는등 언어와 정서의 깊숙한 곳에서도 춤에 대한 표현과 사랑이 깊게 배어있는 춤의 민족이라 할 만합니다. 이러한 무(舞)는 무(巫)문화와 무(武)문화의 뿌리가 되어 세상살이에서 천지신명을 섬기고 지키는 각종 기예의 생민사랑의 줄기를 이뤄 사람이 하늘이고(人乃天), 땅이며(地靈은 人傑), 신명(神命)을 받아 태어난 신(神)적 존재로 자각하는 인본주의의 생명나무(生命樹)정신을 형성하였습니다.
천지신명의 조화로 깨어난 역사시대 이전의 이런 원시종합예술인 무(舞)는 인류역사에있어서 정치 ,종교,예술,철학,학문등 각종문화를 발원시킨 휴머니즘의 호수였다 할 수 있습니다.
3.우리 겨레의 전통춤을 둘러보며
(1) 맞이굿 춤과 터벌임 춤.
한해가 시작되는 정초나 농경의 일손을 잠시 놓은 5월이나 시월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흘 낮밤을 무리지어 음주가무했다는 옛 기록에서 우리는 도도히 흘러넘치는 집단 신명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맞이굿은 무당굿춤으로 가서는 맨 첫머리에 신을 모시는 청신맞이, 또는 부정거리로서, 또 각종 민속놀이나 탈춤, 풍물에서는 길놀이, 고사 등으로 잔존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러한 대목은 초입의 길닦음, 터울림이기도 하고 첫 말문 열음이기도 합니다.
특히 탈춤에서는 벽사(抗邪)의 의식춤이라고 해서 탈춤 첫머리에 꼭 들어가는 대목이 있습니다. 벽사 의식이란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예축(豫祝)의 의례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놀이를 놀 판을 정갈히 하여 부정탄 것을 거두어 말끔히 씻어내는 판씻음으로 놀이판을 엽니다. 그런데 이런 대목을 흔히는 중심부를 이끌어내는 도입부 정도의 몫으로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인 마당을 매개로 하여 거기에 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의 문제, 신의 문제, 우주의 문제, 온갖 문명사적 문제가 동시에 초청되는 첫 대면의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의 자리를 토대로 해서 마을과 자연과 신과 우주와 역사와 사회가 동시에 초청, 결합되는 춤으로, 천지신명에게 놀이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고하면서 유동하는 공생 에너지를 교류하고 교감하는 통과의례 대목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본행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술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우주의 생명과 교통하는 그 첫머리가 있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신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 은연중에 예시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기에 중심행사는 이러한 우주적 생명력 위에 품어져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바로 이 맞이굿춤 이야말로 온갖 춤의 생명력을 품고 있는 포태(胞胎), 곧 춤의 씨앗을 기르고 낳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렇게하여 신, 자연, 우주 역사가 하나된 우주적 일체성 위에 인간의 삶을 얹어가며 사회적 영성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우주의 생명질서가 교감하는 바로 그 공간이야말로 세속적인 땅이면서 또한 거룩한 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당은 성속(聖俗)이 넘나드는 성긴 틈입니다.
(2) 죽음맞이춤.
춤출 수 없는 죽음을, 춤출 수 없게 하는 죽임을 맞이하는 춤이므로 참으로 역설적인 춤입니다. 이런 춤의 하나로 봉산탈춤의 목중춤 중 첫머리에 나오는 첫목춤을 들 수 있습니다.
봉산탈춤의 목중춤은 파계승 놀이이며 오입쟁이 춤으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육체적 활력을 구가하는 춤입니다. 이 파계승의 춤은 형식 도덕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겠지만 정신세계의 고답성보다는 원초적인 육체성을 강조하는 춤이기도 합니다.
또 이 첫목중춤은 3전3복(三顚三覆)이라 하여 세번 엎어지고 세번 뒤집고 하는 요동치는 몸놀림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남녀간의 성적 결합을 묘사하는 듯한 그런 형상이기도 합니다. 양성의 교합이야말로 생명인 대지와 더불어 교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생명력의 산출,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서 풍농, 풍어를 비는 유감주술로서 다산성(多産性)을 통한 삶의 윤택함을 예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 볼것은 멍석말이, 덕석말이로서의 뜻입니다. 이 춤은 억울하게 멍석말이로 죽어가는 명다리의 춤이라는 것이지요. 사회적 연루에 의해 멍석말이를 당해 죽어가는 과정을 엮어내고, 또 죽고 죽어 죽음으로 가서는 거기서 되살아나오는 그런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처음에는 멍석말이로 죽어가는 몸짓처럼 파괴적일 정도로 격렬한 근육춤의 동작으로 대지를 뒹굴고 다닙니다. 바닥을 기면서, 엎어졌다, 뒤집어졌다하는 복무와 전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윽고 몸을 추스려 근경(近景)을 살피며 3진3퇴(三進三退)하면서 땅을 딛고 일어선 선춤(立舞)으로 진행되고, 나중에는 땅의 세계에서 떨쳐나와 허공을 가르며 높이 뛰어오르는 도약의 춤으로 나아갑니다. 이러한 춤사위와 일련의 과정을 보아서도 이 춤은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는 반생명의 생명화의 춤인 것입니다. 이 춤은 우리춤에서 달리 견줄 데 없이 활달하고 춤폭이 크고 동작선이 장쾌합니다.
(3) 병신춤.
한국 민중은 모여 놀다가 신명이 극점에 오르면 놀던 사람 중 한두 사람은 꼭 병신춤 같은 것을 춥니다. 추는 사람도 구경꾼도 이를 보고 더욱 흥겨움에 젖어듭니다.
이는 결코 신체불구자를 흉내 내어 모멸하기 위해 추는 춤이 아닙니다. 춤출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춤출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춤이기에 육체 해방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육체 해방의 춤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육체 해방의 감흥을 감염시켜 숨어있는 잠재된 신명을 스스로 돋우어내게 합니다. 병신춤은 제대로 춤출 수 없는 춤이기에 제대로 춤출 수 있는 정상의 몸, 정상의 사회가 될 때까지 추어져야 될 가없는 해방 기운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옭매인 몸이 풀려나가 정상의 몸짓을 되찾게 하고 이윽고 매인 데 없이 활기차게 뛰는 춤으로 엮어진 병신춤의 구성방식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리고 탈춤의 많은 부분은 병신춤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탈춤은 사회적 비정상을 척결하려는 민중적 염원이 누대를 통해 적층되어 있습니다. 탈춤은 단순한 의미의 계급 갈등을 넘어선 생명 회복의 문화적 전복입니다.
또 이 춤은 그늘진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원한 맺힌 어둠의 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춤은 그늘진 곳에서 밝은 곳으로 옮겨가는 신명의 춤입니다. 어디에도 풀길 없이 맺힌 원한과 절절한 비통함의 속 그늘을 남김없이 끌어내 능청스럽게, 또 청승맞게, 그러면서 구성지고 푸지게 웃기는 해학의 춤입니다. 보는 이는 웃다웃다 마침내 자기도 모르게 눈물도 어릴 법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늘진 속에서의 신명이야말로 역동적인 신명일 뿐만 아니라 숨어 그늘진 끝에 밖으로 차단된 신명에 불지르는, 집단 공유의 민중적 신명입니다. 그리하여 이윽고 누구나 더불어 춤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춤은 사람과 사람이 화해하고 친교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춤입니다.
(4) 살풀이춤.
살을 푼다는 것은 액땜이고, 액을 풀어헤쳐 탈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추고 있는 살풀이춤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만 본래의 살풀이춤은 삶을 옭매고 못살게 구는 살을 꼭 짚어낸 후 거기에 대결하고 쟁투하면서 그것을 퇴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풀이춤은 죽임인 살을 되죽이면서 획득하는 되살림의 춤입니다. 못살게 구는 적의 정체를 밝히고 이와 싸워 물리치는 역동적인 신명의 춤인 것입니다.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역신이 아내를 범접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죽음과 같은 심적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지 잘 알아차린 처용은 춤으로써, 노래로써 해결하여 역신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 동원된 춤과 노래야말로, 역신을 감화시킨, 공격적 유화의 위력적인 가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중에 처용화상을 내걸어 온갖 잡귀, 잡액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위력적인 존재로까지 나아간 처용의 춤이야말로 살풀이춤의 한 전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투적 현실인식을 통한 싸움의 춤이며 나아가 후덕한 마음씀씀이 속의 화해와 나눔의 춤입니다.
무속춤에서 보여지는 살풀이춤도 살의 정체를 밝혀 액을 물리치는 춤이어서, 자신의 문제를 딴 데 의탁해서 떠넘기는 비주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살풀이의 풀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분풀이나 정서해소가 아니라 어려운 삶의 과제를 풀어내 물리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싶습니다. 생명을 저해하고 있는 죽임의 세력인 살을 물리치는 살풀이춤이야말로 대립하고 있는 것 사이의 다툼을 상보적인 관계로 재정립시키면서 죽음조차도 불러 풀고 먹이는 지극한 생명공경의 춤입니다.
(5) 그 외의 전통춤
우리나라에는 화랑창무에서부터 궁중의 검기무, 그리고 상여 앞에서 추는 휘쟁이의 춤이라든지 기생방에서의 검무, 무당춤의 칼춤 등이 있습니다.
그 외 원효대사의 무애무라는 춤과 노동현장에서의 일춤, 제각기 생긴대로 마구잡이로 추는 보릿대춤, 도굿대춤의 타고난 어쩌지 못할 신명이 있고 온갖 여성적인 것의 생생력(生生力)을 품고 도는 강강술래는 생명질서의 근원으로 회귀하고 거기서 다시 풀려나오는 우주운행의 춤입니다. 그리고 궁중춤의 대표격으로 춘앵전(春鶯傳)이 있습니다. 봄날 우짖는 새소리에 유감하여 화사한 정경을 그려내는 진귀한 웃음의 춤입니다. 사방 여섯자의 화문석 위에서 조그맣게 나고 들며 추는 이 춤은 가장 작은 그릇으로 가장 큰 것을 담아내는 무한생명의 우주질서를 그려내는 춤입니다. 그리고 생사고락의 온갖 세속 번뇌를 한개 별빛에 모으는 법열(法悅)의 승무가 있습니다.우리 전통문화 곳곳에서 무수히 많은 춤의 형식이 있지만 각 정치집단의 통치적 방편으로 만들어진 국가주도의 정재춤과 의식춤등및 외래종교의 의식춤들보다는 우리 민중속에 도도히 흘러온 민속춤에서 우리 겨레의 근원적 생각과 정서가 깃든 천지신명의 신바람이 살아숨쉬는 춤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4. 맺으며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 겨레의 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춤속에 깃들어있는 신명과 생명존중의 사랑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은 우주 생명력과 교합된 상태로 확대된 자아입니다. 말하자면 우주 생명이 인간내부에 지펴들어 자기안에 우주가 확대되어 나오는 영성적인 것이며 이러한 신명은 우리의 샤마니즘적 전통에서 얘기하듯 신이 나고 들고 오르고 내리고 지펴 바람나는 접신체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주질서가 나고 드는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의 동학주문과도 통합니다. 자신이 한울님의 담지자임을 스스로 깨닫는 이마다 신명의 주체자 신명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춤추는 사람의 신명은 일과 놀이, 그리고 창작과 향수의 전일적 통일체로서 모든 생명을 포태하는 출산적 정취(mood)가 고조된 인간적 미의식의 모체입니다. 우리 춤의 형식원리이자 유형적 특징인 맺고 풂, 어르고 닮, 발디딤새로서의 비정비팔(比丁比八), 춤동작선으로서 3진3퇴, 3전3복, 사방치기, 연풍대 그리고 춤 리듬의 내재 원리로서의 3분박(分拍), 대삼소삼(大三小三) 등은 바로 우주 생명기운의 운행원리이자 영성적인 것이 빚어내는 무궁한 시공간성인 천지인의 자각이기도 합니다. 신바람을 타고 신기가 올라 추는 신명(神命)난 사람의 춤은 진선미라는 아름다움의 본성에 귀의한 것이며 신이 강림한 신성합일이고 이런 춤이야말로 천지인 삼신의 강림,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춤을 헤아려보면 심장박동을 기본박자로 하는 여타 민족의 춤과는 달리 자연호흡의 주기에 따른 박자이기에 사람의 희로애락만 담는 다른민족의 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우리 한겨레의 춤은 봄에 생명을 움트게하는 기지개(氣之開)의 원리로 풀어지는 무형식의 춤사위와 여유롭게 곡선과 직선및 움직임과 고요와 정열을 무한히 담아내고 천지신명의 조화까지 담아내는 다양한 춤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무예에 있어서도 춤추는것이라 할수있는 동선들과 몸짓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폭력적인 여타의 무예와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생태계에서 살펴보면 변종이 가장 다양한 지역이 원산지이듯이 우리 겨레의 춤(舞)이 인류문화사에 있어서 춤의 원산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절로듭니다 .
첫댓글 학교에서 전 학년이 우리의 춤을 즐기고 배우면 좋을 텐데요....
우리의 천지인기지개인 우리춤이 좀더 우리의 사랑을 받아 아름답게 다듬어지면 그런날이 올겁니다. 전 겨우 건강의 목적으로만 다듬어 천지인춤을 매만지고있지만요...호흡의 리듬으로 천지신명을 받아 소주천 대주천의 자동간편수련행공으로 보급하고픔 바램이 있습니다.^!^*
헉 소주천은 약탕관에서 약이 끓어익을대 한줄기 수중기가 피어나듯이 독맥을 타고오르는것이라 했는데 춤사위에서 소주천 대주천이 된다고 하시니 놀랍습니다. 도시인님이 말씀하시는 소주천 대주천은 원기가 막힘없이 흐르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大周遷과 大周天은 수련 과정에서 살펴보면 엄청 다른 것입니다.
밥하는데 가마솥에서 물맞추고 불때고 뜸들이며 하나하나 손수 해야하는 전통적으로 하는 방법과 전기밥솥에서 메뉴얼따라 간편하게 자동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것같이 기수련도 인체의 자동조절장치가 자연발현되게 할수있는게 생명순환의 도입니다. 본디 열려있는 길입니다. 춤이란 생명의 파동으로 끓어오르고 휘돌아가는 순환을 담고있는 몸짓안에 호흡순환(氣),혈액순환(精),신경순환(神)의 天地人융화의 도를 담으면 소주천,대주천의 실현이 가능합니다. 물론 숨차지않고 피곤하지않고 신경부담스럽지않게하는 천지인합일의 숨길로 다 통하게 해야 하지만 전통적수련법인 좌선,와선,입선의 방법과 같은 행선의 한방법이 춤입니다.^!^*
도시인님이 춤에 대하여 이렇게 갚은 사고를 가지신지 미처 몰랐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과찬에 주춤주춤 뒷머리 긁적이며...부족한 제 소양으로 말미암아 우리 겨레의 찬란했던 몸짓과 맘짓이 아름답게 세상에 발현될길에 멈춤의 훼방이 되지않을까 걱정스러워도 세상살이의 모든 행동거지를 흐르는 물결처럼 유순하고 조화로운 춤으로 승화시켰던 선얼님들의 몸짓 한구석을 붙잡아봤습니다.^!^*
우리의 것 우리의 민속이 이리도 훌륭한데
개독교인들의 우리 한국무용을 훼손하는것을 보면
피가 끓습니다
그릇이작은이는 제 속좁은데 들어갈것만 고집하는법입니다. 간장종지같은이는 애간장만태우고 살며 간장이나 담아야 제격이니 속상해마시고 상을 품는이는 간장종지하나쯤은 걍 놔두셔도되어여...그릇이 쩔든말든 그들이 그릇되었건 말건 놔두고 보는 맘이 하늘맘일겝니다. 인정많으신 보디삿트와님^!^*
춤의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천지신명께 비는것이 춤이었던것 같습니다..말로도 문자로도 나타낼수없는 영혼의 울림 그울림으로 하늘과 소통한 것이겠죠!...
그렇습니다.둥근이님^^ 소리로 춤추는 음의 파동, 빛으로 춤추는 전파,냄새로 춤추는 향기의 파동등 하늘의 본질은 춤추는 파동으로 무한히 열려있기에 하늘과 접신함이 신명의 파동인 춤이겠지요. 사람의 시작도 부단히 춤추는 정자꼬리의 파동으로...세포내에선 DNA염색체가 염기서열의 춤을 추며 유전자전달의 생명춤을 춰 세포생성이 되잖아요...춤추는 기쁨이 항시 함께하실 둥근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