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골로새서, 에베소서
큄멜(Werner Georg Kümmel)이나 메츠거(B. M. Metzger) 같은 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바울의 친서로 취급하고 있지만, 로제(Eduard Lohse)나 맑센(Will Marxsen) 같은 학자들은 바울 후기 서신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윤리의 근거대기와 동기 부여에서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가 논의된다는 점에서 바울의 친서와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구조면에서도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같이 두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골로새서는 1-2장과 3-4장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에베소서 역시 1-3장, 4-6장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일단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적어도 바울의 친서가 아니라 해도 바울의 친서와 다르지 않은 구조와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두 서신에 나타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골로새서
당시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심각하게 이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별히 그들 중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여서 사람들은 그에게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천사 같은 권세들이 살고 있어서 이 존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그같은 주장들은 “헛된 속임수”이며,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일이라고 말해주고 있다(골 2:8).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력하게 하셨으며(골 2:15), 그리스도 안에만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골 1:19)고 말한다. 중재자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지혜와 지식”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골 2:11), 세례 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한 죄의 권세에 복종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강조점을 “이미”(already)에 두고 있다. 골로새 기자는 그리스도가 “이미” 죄의 권세에 대한 통치권을 얻었다고 강조한다. 그 권세는 “이미” 무너졌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 그의 승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골로새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자꾸 이 옛 시대의 권세에 복종하도록 유혹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2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직설법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안에서 행하라”는 명령법적 요청을 하고 있다.
특별히 골로새서 3장 1절은 권고의 서두에 직설법적인 구원 진술이 강조되고 있다. 직설법적 기술인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선언과 동시에 “위의 것을 찾으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때 접속사 “그러므로”(οὖν)는 직설법과 명령법을 결합시켜 준다. 이러한 결합을 보면서 샌더스(J. T. Sanders)는 직설법 안의 명령법은 인위적으로 결합되었다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골로새서에서 신학과 윤리 사이에는 아무런 내면적 일치를 찾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러므로”는 명백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근거가 됨을 말해준다. 여기서 구원의 선언으로서의 직설법은 윤리적 결단을 요청하는 명령법의 근거가 되고 있다.
바울이 1b절에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지상의 공동체가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1c절)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다. 2절에서도 동일하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세상을 버리는 금욕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것”(τὰ ἄνω)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위’에 속한 사람이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선물을 수여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요청을 받는다.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너희가 죽었다”라고 확언하면서, 동시에 5절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만약 옛 본성이 죽었다면 그 지체 역시 죽어야 한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골 3:3)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의무를 수반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옛 본성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성”으로 갈아입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이전에 옛 본성을 가졌던 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구원의 직설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 본성”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법으로도 볼 수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렇게 직설법과 명령법이 통합되어 나타나며, 직설법은 명령법의 근거로서 먼저 제시되어지고 있다.
2. 에베소서
에베소서의 여러 구절에서도 역시 직설법과 명령법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5)라는 직설법적 기술은 곧바로 교회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는 권고의 명령법과 연결된다. 또 앞에서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마찬가지로 에베소서 4장 1절에서는 직설법과 명령법이 “그러므로”(οὖν)로 결합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1절은 이론적인 면에서 보다 실제적인 문제로 전화되고 있는 로마서 12장 1절과 매우 비슷한 구절이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교리적인 부분과 실제적인 부분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미는 교리와 윤리, 신학과 윤리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에베소서 2장 8절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철저히 행위와 관련이 없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자랑할 수 없다(엡 2:9). 그러나 곧바로 10절은 우리가 지음 받은 이유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행함이 철저히 구원에 있어서 배제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행함은 철저히 구원의 열매가 되고 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8절에서는 “너희는 빛의 자녀라”는 선언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권고가 한 구절에 등장한다. 여기서 에베소서 기자는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를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엡 5:8-9).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행동 자체는 그리스도인의 응답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스도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한 사람”(엡 3:17)은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사랑해야 할 윤리적 과제를 가진다(엡 4:2; 5:2). 여기서 그리스도는 행함의 동기(motivation)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예에서는 동기를 주는 관계가 아니라 일치의 관계를 함축한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요구되어지는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이다. 32절에서 에베소서 기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2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