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청에서나 열만한 문화교실을 절에서 앞다투어 연 적이 있었습니다.
신자들을 모은다는 방편으로 서예 다도 꽃꽂이 뭐 요가 명상같은 교실을 열었고 좀 더 나간 곳은 사주나 주역, 풍수같은 것들까지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절에서 뭘 배웁니까라고 누가 물으면 뭐라고 답합니까? 거창하게 뭐 깨달음 같은 되도 않은 소리 말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확한 대답이 뭡니까.
부처님 말씀을 배운다고요?! 그거 배워서 어디에 써먹습니까?! 써 먹을 데가 없어요. 복 없는 범부는 그거 백 번 들어도 가슴에 들어가지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술의 폐해를 아무리 들어도 일어서면 바로 술집으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막연한 대답 말고요.
제대로 된 절에 가면 반드시 3학을 배웁니다. 소승의 8정도와 대승의 6바라밀을 요약한 것이 이 3학입니다. 대소승 모두 동일합니다. 바로 계정혜입니다.
戒학은 자신의 행동거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세간의 행동거지는 학교에서 배우고 한 수 더 세련된 출세간의 행동거지는 절에서 배웁니다.
행동에 의해 인과가 만들어집니다. 그 인과에 의해 현재의 내가 어떤 상태에 있고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검증받는 곳이 절입니다.
나의 복이 어느 정도인지 왜 내가 힘들게 사는지 인생의 정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 항상 내 주제를 살피고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면 어디서든 백전백패입니다. 절에 있는 복덕의 저울에 자신을 올려놓고 경전의 눈금으로 자신의 점수를 매깁니다. 거기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定학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입니다. 식물도 뿌리가 뜨면 죽습니다. 마음도 들뜨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배웁니다.
마음이 산만하고 정서가 불안하면 큰일 납니다. 사리분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성난 사람을 보면 마음부터 먼저 가라앉히라고 하지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제멋대로 방임하면 못할 소리 안 할 소리를 내뱉고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내면에서 분탕치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나 간경, 그리고 염불이나 참선 같은 수행이 그 방법입니다. 이런 수행을 하게 되면 원망과 분노, 탐욕과 성냄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를 잘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慧학을 배웁니다. 혜는 지혜인데 범부에게는 직관력입니다. 이 직관력이 있어야 시행착오와 과오범실이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양 헛일만 하다가 인생을 다 허비해 버리고 맙니다.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진리도 이 직관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그냥 귀에 머무는 이론일 뿐 온전히 자기 것이 되지 못합니다.
3학에 의해 복이 생깁니다. 그래야 부처님말씀이 가슴에 들어갑니다. 그전에는 천하없어도 불교에 믿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3학은 사람으로서 꼭 수학해야 하는 필수교과가 됩니다. 이것을 배우지 않고 산다는 것은 자동차 면허증 없이 도로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무면허로 자동차를 운전하면 그 끝이 어디겠습니까. 이 삼학을 배우지않고 사는 인생의 끝은 어디겠습니까. 그거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절에 왜 갑니까 라고 물으면 3학을 배우러 간다고 답해야 합니다. 3학은 오로지 절에서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야 합니다.
출처 : 대승기신론 해동소 전문 도량 원효센터 5부 법회에서 공파스님 법문 |
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