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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점사
1989년 어느 날이었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니 나도 모르겠구나.”
사내는 바윗덩이에 주저앉았다. 그런 뒤 짙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담배를 잘근 씹었다. 사내는 불을 붙여 한 모금 빨더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버섯처럼 창백해 보였지만 그의 뾰족한 코는 딸기코보다 더 붉었다.
“좋은 방법이 없는 건가요?” 소년이 물었다.
“병원에서도 포기했다는데 나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겠니. 더군다나 결핵은 잘 먹어야 낫는 병인데. 영양 섭취도 못하면서 약만 먹어 봐야 속만 쓰릴 테지.”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사내는 또다시 담배를 잘근 씹으며 깊숙이 빨아들였다. 먼 산에서 영감을 받은 듯 소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사내는 초라한 소년의 모습을 보며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소년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저런 몰골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 먼 산 중간쯤에 있는 돌밭 보이지?” 사내가 큰 산을 가리켰다. 그 산은 자욱한 새벽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네.” 소년이 작은 눈을 깜박였다.
“저 돌밭에 가면 칠점사란 뱀이 살아. 옛날엔 폐병에 걸리면 뱀을 푹 고아서 먹였는데 효능이 좋았어. 그중에서도 칠점사가 으뜸이지.”
“칠점사를 다려 먹이면 엄마가 나을까요? 예전처럼 밭에 나가셔서 콩이나 녹두를 수확할 수 있을까요? 물이 빠지면 낙지나 조개를 잡으러 개펄에 나가실 수 있을까요?” 소년의 눈동자엔 윤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바닷물에서 갓 건져낸 새까만 자갈처럼.
“모르겠다.”
사내는 담배꽁초를 땅바닥에 버린 후 헐렁한 검정 고무신으로 뭉갰다.
사내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소년에게 줬다.
“닭이라도 삶아 드려라.”
“고맙습니다.” 소년이 공손히 두 손으로 지폐를 받았다.
“이건 노파심에서 말해 두는 건데 칠점사에게 물리면 죽는다. 독사 중에서도 가장 독이 세거든. 물리고 일곱 걸음도 못 가서 죽는다고 해서 칠보사라고도 하지. 저곳엔 엄청 큰놈이 살아. 몇 년 전 동백나무를 캐러 간 청년이 그놈에게 물려 죽었지. 행여나 잡을 생각 마라. 그냥 논이나 밭, 아니면 보릿대를 쌓아 둔 곳이나 묘지 풀밭을 뒤지면 화사나 물뱀 따위는 잡을 수 있을 거야. 그것을 잡아서 다려 먹이렴.”
사내는 기지개를 펴면서 하품을 했다. 소년은 이른 새벽부터 깨워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깍듯이 인사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의 여동생은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소년의 어머니는 방바닥에 피를 토해냈다. 여동생이 새벽부터 마당에 나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듣기 싫은 탓이었다. 소년은 수돗가에서 걸레를 빨아 어머니가 뱉어 놓은 피를 닦아냈고, 얇은 입술을 닦고 닦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굶주린 흡혈귀와 흡사했다. 그녀의 쑥 들어간 두 눈은 거의 얼굴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는 쉴 새 없이 기침을 해댔다. 기침을 멈추면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 소리는 소년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뜨겁게 했다.
소년이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엄마 살릴 거야.”
어머니는 대답 대신 계속 콜록거렸다. 소년은 흐트러진 어머니의 회색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고, 베개를 받쳐 주었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어머니의 야윈 얼굴과 거미다리 같은 팔과 다리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무겁고 더러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소년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 자신의 볼에 비볐으며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신에게 난생 처음으로 기도했다. 그러고는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소년은 물기를 머금은 돌담에 손을 얹었다. 새벽안개가 걷히자 해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잿빛 바다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점차 변해갔다. 바다는 곧 파란 하늘을 닮을 터였다. 소년은 깊은 시름에 잠겨 선창을 보고 있었다. 선창 주위에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와 낚시꾼이 바삐 움직였다. 바다를 가르며 달려가는 통통배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풍에 바다 냄새가 실려와 소년의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이 살고 있는 섬은 꽤 컸다. 다리가 놓여 도시와 연결되어 있었고, 자동차로 삼십 분을 달리면 도시의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섬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비탈진 밭에 콩이나 서숙, 참깨나 기장, 고구마 따위를 재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본업은 바다에 나가 그물이나 통발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어부였다. 그는 취미 삼아 염소 다섯 마리를 키웠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만큼이나 술을 끔찍이 좋아했다. 삼 년 전 해질 무렵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절벽으로 도망간 염소를 잡으려다 자신을 잡고 말았다. 그는 절벽에서 떨어졌고 그 이튿날 죽었다. 소년은 붉게 타오르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장남이니까 가족을 잘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소년은 그 때 밀려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한번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며 나중에 커서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정직과 신용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소년은 아버지를 생각하자 그 때처럼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가장으로서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울어선 안 되었다. 소년은 두툼한 아랫입술을 짧고 곧은 윗니로 깨물었다.
“오빠.”
여동생이 자신의 오빠를 불렀다. 소년이 뒤돌아 여동생을 쳐다봤다.
“고양이 그렸네. 정말 잘 그렸다.” 소년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흙바닥에 그려진 고양이는 개를 닮았고 코는 돼지를 닮았다. 다리는 닭다리를 그려 놓은 것처럼 형편없었다.
여동생은 히죽 웃었다. 그림을 왼팔로 가리고, 오른손으로 지웠다.
“예쁘게 잘 그렸는데 왜 지워?”
“동네 사람들이 우릴 싫어해.”
소년은 여동생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방문으로 돌렸다.
“엄마가 들으시면 어떡하려고 그래.”
“우린 어디로 가는 거야?” 여동생이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났다.
“우린 아무데도 안 가.” 소년이 여동생의 사각턱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동생의 턱은 양쪽 턱에 벽돌 한 장씩 덧붙여 놓은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진짜?”
“그래.”
“치킨 먹고 싶다.” 여동생이 실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여동생은 다리를 벌리고 배를 내밀고 있었다. 너절한 분홍색 티셔츠엔 김칫국물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이 돈으로 엄마 닭 삶아 드려.” 소년이 돈을 내밀었다. 여동생이 돈을 낚아챘다.
“나는 치킨 먹고 싶단 말이야.”
“백숙도 맛있어. 한 시간은 삶아야 돼.” 소년이 여동생의 볼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오빤 어디 갈 건데?”
“엄마 약 구하러.”
소년은 마지막 남은 삼천 원에서 이천 원을 버스비 하라며 여동생에게 줬다. 소년은 창고에서 아버지가 쓰던 가방을 들고 나왔다. 소년은 마당 구석에 있던 양파 망을 바닥에 부었다. 양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밑이 터진 양파 망을, 소년은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물병도 챙겼다. 그런 뒤 소년은 정류장까지 뛰어갔다. 그 곳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십오 분 후 버스를 탔다. 소년은 면 소재지에서 내렸다. 보건소 건너편에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다. 칠점사가 득실거리는 곳이라는 것을…… 소년은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소년은 몇 년 전 친구들과 풍뎅이 잡으러 갔다가 어른 팔뚝보다 큰 독사를 보고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 곳은 바위와 참나무가 있는 곳이었다. 소년의 걸음걸이는 조급한 마음에 빨라졌다. 소년은 끝나면 학교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어차피 학교에 가도 아이들은 자신을 슬슬 피하기만 할 것이라고 소년은 투덜댔다. 아무래도 가장이다보니 어머니를 지켜 주는 것이 옳은 선택일거라 판단했다. 소년은 비포장도로를 걸으면서 문답식으로 계속 지껄였다. 두려움이 밀려왔다기보다 소년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태양이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신발을 내려다봤다. 지저분한 노란색 운동화는 황갈색에 가까웠다. 운동화는 낡아빠져서 새끼발가락이 불쑥 나올 것만 같았다. 소년은 왼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구부렸다. 그런 다음 운동화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소년은 어깨에 걸친 가방끈을 아래로 힘껏 잡아당기며 일어섰다. 그런 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소년은 비포장도로를 벗어나 도랑을 건너 논길로 접어들었다. 초록빛 벼들이 산들바람에 살랑거렸다. 소년은 개구리가 울어대는 소리와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산을 향해 걸었다. 소년은 잠시 멈춰 서서 신발을 벗어 흙과 자갈을 털어냈다. 운동화 밑창이 너덜거렸다. 소년은 아버지의 장화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소년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지름길로 가기 위해 계곡을 가로질러 밭둑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 밭은 잡초가 우거졌지만 밭 언저리에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었다. 잡초가 발길에 짓밟혀져 있었다. 누렇게 말라 죽은 잡초들은 약간씩 바람에 따라 움직였다. 소년은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달렸다. 낮은 돌담을 소년은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훌쩍 뛰어넘었다. 소년 앞에 두 개의 묘가 버티고 있었다. 묘를 둘러싼 낮은 돌담 근처에는 소귀나무의 푸른 잎들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이 났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찢긴 구름 사이로 빛을 뿜어대는 태양을 바라봤다. 이내 태양은 잿빛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소년은 묘 사이를 통과했다. 소년은 관목을 헤집고 들어갔다. 참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숲을 지나자 소나무 숲이 나왔다. 바닥에 솔잎의 시체들이 물기를 머금고 시커멓게 썩어 있었다. 그 곳에서 소년은 죽어서 깃털만 남은 산비둘기를 보았다. 소년은 헉헉대며 쉬지 않고 비탈길을 올라갔다. 소나무 숲이 끝나는 지점에 가시밭이 소년의 앞을 가로 막았다. 소년은 근처에 버려진 나뭇가지를 주워 무릎에 대고 부러뜨렸다. 소년은 가시나무와 덩굴을 나뭇가지로 후려쳤다. 놀란 새들이 울면서 골짜기로 날아갔다. 청회색과 어두운 갈색이 뒤섞인 걸로 보아 직박구리가 틀림없었다. 울음소리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소년은 가시밭을 비집고 들어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곧 등에서도 땀이 흘러 나와 더러운 옷에 스며들었다. 옷에서 풍기는 쉰내가 소년의 코를 찔렀다. 땀 냄새를 맡고 모기들이 달려들었다. 가시까지 들러붙어 온몸이 미칠 듯이 가려웠다. 소년은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소년은 무릎에 손을 얹고, 거친 숨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잠시 쉬었다. 그런 후 또 전진했다. 손등으로 땀을 훔쳐낸 소년은 험준한 비탈길을 네발 달린 짐승처럼 기어서 올라갔다. 곧이어 소년은 환호했다. 소년은 오솔길을 찾아냈다.
돌밭 아래 참나무가 심어져 있는 바위에 도착했지만 예전에 보았던 독사는 없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돌밭에 이르렀을 때 태양은 구름에서 벗어나 열기를 내뿜었다. 소년은 돌밭에서 작은 독사를 발견했으나 놓쳤다. 소년은 아쉬워하며 자책했다. 벌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소년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준비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허기가 졌다. 소년은 덜 익은 으름 열매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그리곤 돌밭 주변의 풀을 헤치며 두 시간을 샅샅이 뒤졌지만 칠점사는 볼 수 없었다. 소년은 태양을 피해 그늘로 숨었다. 소년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잠시 쉬었다. 양말과 운동화에서 심한 고린내가 났다. 소년은 물을 꺼내 마셨다. 병이 완치된 어머니를 상상하자 소년은 힘이 불끈 솟았다. 소년은 양말과 신발을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은 도끼눈을 하고서 돌밭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칠점사를 잡을 차례야.
소년은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기 시작했다
놈을 생각하니 가슴이 방망이질 쳐.
나도 마찬가지야. 너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래.
할 수 있어?
그래.
나는 잡을 수 있다.
소년은 긍정적인 언어를 내뱉었다.
발자국 소리를 내면 안 돼.
천천히.
천천히.
겁먹지 마. 아무리 큰 독사도 널 해치지 못해. 네가 잡을 거야. 제일 큰 놈을 잡아서 엄마 병을 완치하는 거야.
조심해.
빨리 잡고 싶어. 병이 나은 엄마를 보고 싶어.
천천히 걸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소년은 불규칙하게 박혀 있는 돌들을 밟고 지나갔다.
넘어져서는 안 돼. 넘어져서 손을 땅에 짚으면 칠점사에게 손을 물리게 돼.
그럼 즉사하는 거야?
그래. 천천히.
조심조심.
잘하고 있지?
그래. 너는 오늘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큰 독사를 잡는 날이야.
후
있을 거야.
엄청나게 큰 독사가 살고 있다고 그랬어.
몇 년 전에 어떤 형이 동백나무를 캐러 왔다가 그놈에게 물려 죽었대. 약초를 깨러 간 할머니가 그놈을 봤대.
뱀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했어. 독사 머리통이 어린아이 머리보다 더 크다고 했어.
아냐. 부풀려진 거야. 진실은 귀로 듣는 게 아니야.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거지. 그리고 진실은 가슴에 남고, 거짓은 기억에 남아. 겁먹지 마. 너는 용기 있는 소년이야. 칠점사는 너를 무서워 해. 따라해 봐.
칠점사는 너를 무서워 해.
소년은 다시 중얼거렸다.
침착해.
놈이 어디에선가 보고 있을 거야.
그 때 스륵! 스르륵! 소리가 났다.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한 소년은 도마뱀이 풀잎을 밟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휴. 간 떨어질 뻔 했어. 소년이 새우 눈을 치켜뜨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소년은 모양이 불규칙한 돌을 조심스럽게 밟고 지나갔다.
천천히 가. 속도를 늦춰. 지금 네 발자국 소리는 탱크 지나가는 소리야.
살금살금?
좋아. 그거야. 그렇게만 해.
잘하고 있지?
그래.
태양은 구름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구름은 잿빛에서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뱀처럼 꿈틀거렸다. 갑자기 공기가 서늘해졌지만 오색딱따구리는 변함없이 참나무를 쪼아대고 있었다. 돌밭 주변에는 여러 가지 약초와 함께 침엽수와 활엽수가 뒤섞여 있었다. 소년이 두릅나무 옆을 지날 때 스스륵 소리가 났다. 소년은 희끄무레한 작은 칠점사를 발견했다. 소년은 왼발로 칠점사를 밟았다. 소년의 다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후들거렸다. 소년은 덜덜거리는 손으로 칠점사를 잡아서 양파 망에 집어넣었다. 이 분 뒤 운 좋게도 소년은 중간 크기의 칠점사 한 마리를 더 잡았다. 그리고 돌밭 중턱에 이르렀을 때 소년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거대한 뭔가가 소년 앞에 버티고 있었다. 처음에는 괴이한 돌인 줄 알았다. 놈의 머리통이 어린아이 주먹 보다 더 컸다. 소년의 심장은 멈춰 버릴 것 같았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아마도 먼저 손쉽게 잡은 독사 탓이리라.
회색 빛깔에 검은 반점. 놈은 윤기가 없고 텁텁해 보였다. 몸통 길이가 짧아서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놈은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귀찮았는지 돌 틈으로 천천히 기어들어 갔다. 소년은 놈의 꼬리를 잡아 당겼지만 이미 몸통 절반이 틈으로 들어간 상태여서 끌려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꼬리 윗부분을 밟고 돌을 걷어냈다.
놈의 삼각형 머리통이 튀어나왔다. 두 번째 돌을 치우자 맥주병 크기의 몸통이 드러났다. 놈은 소년을 향해 입질을 해댔다. 꼬리를 밟고 있던 소년의 다리가 희열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고장 난 세탁기처럼 덜덜거렸다. 족히 1kg은 돼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놈의 삼각형 머리통은 열 살 난 사내아이 주먹보다 컸다. 몸통은 짧았고 굵었다. 껍질은 거북이 등딱지보다 딱딱해 보였다. 괴물 같았다. 놈은 또다시 돌 틈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다. 소년은 놈의 등을 밟았다.
놈은 고개를 틀어 소년의 신발을 콱 씹었다. 헤진 신발을 뚫고 소년의 발가락에 칠점사의 독니가 파고들었다.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전류가 소년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소년은 괴성을 질렀다. 그 괴성은 숲 속에 울려 퍼졌고 메아리로 되돌아 왔다. 피가 입으로 터져 나오는 듯한 울림이었다. 분노에 찬 소년은 놈의, 목을 꽉 잡았다. 칠점사 몸에서 매운 고춧가루 냄새가 확 풍겼다. 소년은 놈을 양파 망에 담으려 했다. 목을 잡힌 칠점사는 몸통을 배배꼬면서 소년의 팔을 휘감았다. 놈은 독니를 세우고 머리를 뒤틀었다. 손바닥에 묻은 땀 때문에 하마터면 놈을 놓칠 뻔했다. 소년은 왼손으로 꼬리를 잡아 풀었다. 소년은 가방에 달린 지퍼를 열어 양파를 담는 붉은 망을 끄집어냈다. 그런 다음 소년은 양파만 매듭을 이빨로 물어 왼손으로 풀었다. 소년은 그 괴물 같은 놈을 양파 망에 꼬리부터 천천히 집어넣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소년이 호흡을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소년이 손을 놓자 칠점사는 양파 망으로 쏙 들어갔다. 소년은 양파 망 아가리를 되게 묶었다. 그러고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칠점사에게 물리면 일곱 걸음도 못 가서 죽어! 소년이 갑자기 악을 빽 질렀다.
소년은 미친 듯이 혼자 지껄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흥분 하지 마! 죽지 않을 거야!
난 죽을 거야!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걱정하지 마!
이 상황에서 너는 걱정이 안 돼?
침착해. 걱정하지 말래도.
난 죽을 거야!
내 말 똑똑히 들어! 칠점사에게 물리고 나서 일곱 걸음도 못 가서 죽는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내 피는 석고처럼 굳어질 거야!
아니야. 그런 생각하지 말라니깐! 소년이 울부짖었다.
소년은 미친놈처럼 지껄이며 신발과 양말을 벗어 독과 피를 짜냈고, 허리띠를 풀어 허벅지에 묶었다. 소년은 가방을 꿀단지처럼 안았다. 소년은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돌밭을 단숨에 뛰어내려와 산길에 이르렀다. 소년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비탈길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비탈길은 오십 미터 전방에 박혀 있는 바위 뒤로 구부러져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은 폭주족처럼 질주했다. 소년은 가슴에 안았던 가방을 어깨에 걸머졌다. 소년이 바위 근처 커브길에 당도했을 때 오른발이 소나무 뿌리에 걸려 거꾸러졌다. 날카로운 가시가 광대뼈를 할퀴고 지나갔다. 소년은 악을 지르며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사냥꾼에 쫓기는 짐승처럼 전력 질주했다. 소년이 평지에 다다르자 또렷했던 시야는 이내 밀가루처럼 하얗고 탁한 세상으로 변했다. 긴장이 풀린 탓이리라. 소년의 호흡은 더욱 가파졌고, 온몸은 다시 한 번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광대뼈에 난 상처에 땀이 들어가 쓰라렸다. 그제야 소년은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독이 전신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차를 향해 살려, 달라고 외쳤지만 과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는 멈추지 않았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찬란한 태양이 소년에게 쏟아졌다. 주위를 살피던 소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소년은 백옥 같은 돌덩이가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백색으로 변한 세상을 헤집고 허겁지겁 면소재지로 뛰어갔다.
소년은 읍내 파출소로 들어가 살려 달라고 절규했다. 서류를 작성하던 젊은 경찰관이 흘끗 곁눈질했다.
소년이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독사에게 물렸어요!”
경찰관이 말했다.
“독사에게 물렸으면 병원으로 가세요.” 건방지고 권위적인 말투였다.
“병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왼쪽으로 돌아가세요.”
경찰관은 의자를 반 바퀴 돌린 다음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볼펜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앞이 보이지 않아요. 제발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세요!”
소년이 소리쳤다.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니까 도와 줄 수 없어요. 게다가 소장님과 동료 경찰관이 자리를 비워서 파출소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글쎄 우리 소관이 아니라니까, 학생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경찰관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일어섰다. 경찰관의 피가 목에서 얼굴로 퍼져 나갔다.
소년은 경찰서에서 나와 더듬거리며 은행으로 들어갔다. 돈을 세고 있는 은행 여직원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독사에게 물렸어요. 도와주세요!”
“옆 건물이 보건소에요.” 여직원이 어깨를 움츠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바로 옆 건물이 보건소라니까요.” 여직원은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힌 다음 고개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는 여전히 돈을 세고 있었다. 시선은 이미 빠르게 움직이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에 가 있었다.
소년은 보건소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독사에 물렸다고 소리치자 간호사로 보이는 한 아줌마가 뱃살을 출렁거리며 황급히 뛰어나왔다. 그녀가 입고 있던 흰 가운은 곧 찢어질 것 같았다.
“언제 물렸어요?”
“삼십 분 전쯤에요.”
“조금 기다려요.”
아줌마는 핸드백을 챙기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는 보건소 문을 걸어 잠갔다. 보건소 앞을 지나치던 빨간색 승용차가 손을 흔드는 아줌마를 보고 멈춰 섰다. 아줌마는 운전자에게 독사에 물려서 종합병원으로 이송해야 하는데 도와 달라고 말했다. 운전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미 아줌마는 뒷문을 연 뒤였다. 아줌마는 소년을 뒷자리에 태우고 자신은 앞자리에 앉았다. 소년의 몸은 더욱 뜨거워졌다. 털구멍마다 땀이 솟구쳤다. 독은 몸 전체로 퍼져서 심장을 단단히 죄고 있었다. 소년은 헐떡였다. 혀는 부풀어 올라 입 안에 가득 들어찬 느낌이었다. 게다가 본드를 입 안에 부어넣은 것처럼 끈적였다. 소년의 눈알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눈꺼풀을 찢고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스피커에서는 밥 딜런의 ‘노킹 온 해븐스 도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승용차는 급출발했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시속 100km로 내달렸다. 소년은 오늘 산에서 먹은 으름 열매를 게워냈다. 이십 분 후 종합병원에 도착한 소년은 응급실 침대로 옮겨졌다. 자신의 가족을 돌보던 몇몇 사람들이 소년이 왜 그러냐며 간호사에게 물어왔다. 간호사가 독사에게 물렸다고 말하자 모두들 혀를 찼다.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아줌마는 자신의 일이 끝난 것 같다며 돌아가려 했다. 간호사가 보호자는 어디 있는지 묻자 그녀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간호사는 해독제가 있어야 소년을 살릴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아줌마는 집 전화번호는 소년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아줌마는 보건소 문을 잠그고 와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지만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책임을 완수한 셈이었다. 응급실은 비교적 한산했지만 소독 냄새는 강렬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소년이 어떤 조치도 받지 못하고 한 시간 동안이나 방치되었다는 사실이다. 과장이 소년에게 다가와 물었다.
“집 전화번호가 뭐야?”
소년은 혀가 퉁퉁 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년의 혀는 트랙터 바퀴에 깔린 뱀의 혓바닥처럼 입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과장은 소년의 볼을 때리며 외쳤다.
“보호자 전화번호를 말하라고! 학생, 보호자가 해독제를 약국에서 가져오지 않으면 죽는단 말이야!”
잠시 후 인턴들이 몰려와 소년을 에워쌌다. 소년은 가방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있었다.
과장이 말하기 시작했다.
“니들 맹독성 독사에게 물린 사람 못 봤지. 맹독성 독사에게 물리면 이처럼 혀가 부어 앞으로 삐져나오거나, 안으로 말려들어 가게 돼. 혀가 안으로 말려들어 가면 기도가 막혀 죽게 된단 말이야. 물린 자국은 다행히 혈관을 피해 갔어. 어휴, 발 퉁퉁 부은 것 좀 봐. 혈관에 독이 주입되었다면 그 자리에서 사망했을 거야. 독은 피를 응고시키기 때문에 심장으로 보내지는 피는 굳어 버려. 심장으로 새로운 피를 전달하지 못해 멈춰 버리지. 이 환자가 겪는 호흡 곤란은 그런 이유에서야. 뭣들 하는 거야! 기록들 하지 않고! 그리고 한 번씩 만져 봐.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인턴들은 돌아가면서 소년의 팽창된 눈과 두 배로 두꺼워진 혀를 만졌다. 또한 퉁퉁 부어 오른 발을 만져 보았다.
과장은 소년에게 가방을 빼앗으려 했다. 소년이 힘없이 움켜쥐자 과장은 강압적으로 가방을 낚아챘다. 그는 가방에 달린 지퍼를 열어서 벌렸다. 야릇한 냄새에 손사래를 쳤다. 과장이 얼굴을 디밀어 가방 안을 보려했을 때 괴물 같은 칠점사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과장의 매부리코를 향해 입질을 했다. 놀란 과장이 소리치며 가방을 내던졌다. 허름한 카키색 가방은 바닥에 뒹굴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과장과 인턴들은 당황했다. 가방에서는 나머지 칠점사가 빠져나와 기어 다녔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응급실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 인턴이 뒷걸음질 치다 칠점사 꼬리를 밟았다. 중간 크기의 칠점사가 그녀의 무다리를 콱 깨물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괴성이 응급실에 울려 퍼졌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듯한 울부짖음이었다. 독사에게 물린 인턴은 공교롭게도 병원 원장의 딸이었다. 그야말로 응급실은 아비규환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교통사고로 갈비뼈와 어깨뼈, 무릎 연골이 파열된 대학생이 다리를 질질 끌고 응급실에서 빠져 나갔다. 숨을 헐떡거리며 누워 있던 한 노인이 벌떡 일어나 산소 호흡기마저 던져 버렸다. 청소부가 침대 밑으로 들어가려는 거대한 칠점사를 대걸레로 끌어냈다. 칠점사는 꼬리를 털며 입질을 해댔다. 청소부는 대걸레로 칠점사를 때려죽였다. 칠점사의 머리통은 타이어에 깔린 짐승처럼 바닥에 짓이겨졌다. 눈이 터지고 혀가 잘려 나갔다. 오돌토돌하고 윤기가 없는 거죽을 뚫고 구더기 기어 나오듯 살점이 밖으로 밀려나왔다. 너덜거리는 창자는 피를 잔뜩 머금고 벌레처럼 몸통과 함께 꿈틀거렸다. 꼬리는 반쯤 잘려 나갔다. 청소부는 칠점사를 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청소부는 구석으로 숨은 나머지 칠점사도 찾아내 때려죽였다. 간호사가 달려와 원장 딸의 허벅지를 끈으로 동여맸다. 그리고 물린 자국을 열십자로 그어 피와 뒤엉킨 독을 빼냈다. 그러고 나서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원장은 약국에 전화를 걸어 해독제를 당장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해독제는 5분 만에 응급실에 도착했다. 원장 딸의 혈액 검사가 끝나자 링거액과 함께 해독제가 주입되었다. 해독제가 원장 딸의 몸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호흡은 차츰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소년은 그녀의 옆 침대에 뒤집힌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원장이 응급실로 달려 내려왔다. 원장 뒤에는 의사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아가, 괜찮니?”
원장이 딸의 손을 꼭 붙잡으며 물었다.
“네.” 그녀가 몸을 버겁게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마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이 애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원장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알아요.”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볼에 돋아난 여드름들 위로 흘러내렸다. 원장도 안경을 벗더니 체크무늬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사랑한다. 애야. 넌 이 병원보다 더 소중한 존재야.”
그 말에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 버렸다. 원장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원장은 안경을 똑바로 썼다. 그의 시선은 혀를 내밀고 시멘트처럼 굳어 가고 있는 소년에게 향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소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빵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저 환자는 왜 저래요?”
원장이 간호사에게 물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원장은 간호사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어보았다. 원장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치마만 두르면 아래위를 훑어보는 버릇이 있었다. 간호사는 상당히 키가 컸다. 몸매는 우아했고 행동과 말씨엔 기품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추녀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녀에게서는 라일락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원장이 코를 벌름거리며 손등으로 콧등을 문질렀다.
“원장님, 보호자가 없더라도 해독제를 약국에서 구입해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간호사가 말했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병원을 운영한다면 병원은 며칠 못 가서 적자로 돌아설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오래 버티지 못해. 알아들어요? 지금 신축 병원 공사비로 인해 받는 자금 압박으로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란 말이오.”
“그럼, 저 소년은……”
간호사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원장의 눈치를 살폈다.
“곧 보호자가 올 테죠. 소식이 없으면 전화를 걸어 해독제를 구입해 오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해요.”
간호사는 ‘소년의 혀가 굳어서 전화번호를 캐묻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려 했으나 입을 꼭 다물었다. 어차피 돌아오는 것은 질타일 게 뻔했다.
“원장님, 정형외과 회진 시간입니다.”
뒤에 있던 의사가 말했다.
원장은 다이아가 박힌 명품 시계를 매만지며 시간을 체크했다. 원장은 보호자에게 전화를 걸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나갔다. 의사들이 원장의 뒤를 추종자처럼 따라 나갔다. 콩알만한 원장은 의사들의 뒷모습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간호사는 멍하니 그들이 응급실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 뒤 한숨을 내쉬었다. 원장의 딸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간호사는 소년 곁으로 다가갔다. 자신의 박봉으로 소년을 구해 주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용기를 낸다 한들 소년을 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고작 십육만 원 때문에 생명을 잃다니 슬픔보다는 씁쓸함이 앞섰다. 간호사는 애처로운 듯 소년을 바라보며 소년의 가냘픈 새가슴을 어루만졌다. 소년의 피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게 굳어갔다. 혈액은 더 이상 심장 박동에 힘을 실어 주지 못했다. 심장은 천천히 죽어갔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소년의 정신은 또렷해졌다. 소년은 상상했다. 소년의 정신은 병원을 떠나 어느덧 자신의 집에 와 있었다. 집에는 누렁이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돌담에 손을 얹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을 찾아보았다. 그러면서도 담쟁이넝쿨을 쓰다듬었다. 소년은 해안가로 뛰어 내려갔다. 물이 빠진 바다는 끝을 알 수 없는 개펄로 변해 있었다. 석양은 숯덩이처럼 검게 탔고, 하늘은 백색에 가까웠다. 개펄은 핏빛이었다. 소년의 시야에 비치는 산과 섬들은 회색이었다. 그러나 그 이외에 모든 사물들의 색채는 과거의 기억과 동일했다. 소년이 개펄의 가장자리에 다다르자 망둥이들이 펄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게들이 바삐 움직이고, 고동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갯지렁이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어 바깥세상을 둘러보았다. 다리가 긴 바닷새들이 펄 위를 오가며 먹이를 찾아 헤맸다. 소년은 두 팔을 벌리고 개펄에서 풍기는 정겨운 냄새를 흠뻑 들이마셨다. 누군가 등을 툭 쳤다. 소년이 돌아봤다. 아버지였다. 소년의 여동생이 아버지 어깨 위에서 입을 막고 까르르 웃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조개를 잡고 있는 자신의 아내를 불렀다. 대답이 없자 그들은 두 손을 공처럼 모으고 입으로 가져다 댄 다음 목청껏 여보, 혹은 엄마하고 외쳤다. 소년의 어머니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고무 함지박을 질질 끌고 개펄에서 나왔다. 어머니의 옷과 고무신에는 개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흙은 핏덩어리처럼 보였다. 소년은 본래 개흙이 붉은색인지 기억을 더듬었다. 아버지는 한 잔 하겠다며 기어이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두 병을 사 왔다. 소년은 어머니가 잡은 낙지와 조개들을 양동이에다 들이부었다. 낙지 한 마리가 양동이를 타고 넘어오자 소년은 낙지 다리를 잡아 빙빙 돌렸다. 아버지는 소년의 손에 들려 있던 낙지를 집어 통째로 입 안에 털어 놓곤 사각턱을 움직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을 보며 눈을 흘겼다. 아버지는 고생했다며 어머니 어깨를 안고 걸었다. 여동생이 질펀한 어머니 손을 잡으려 했다. 소년은 잠시 가족들의 뒷모습을 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가족은 꽤 멀어져 갔다. 소년은 조개와 낙지가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서 가족을 뒤쫓아 갔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죄여왔다.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쥐고서 완력을 가하는 것처럼, 소년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소년은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가족과의 거리는 점차 멀어져만 갔다. 소년의 가족은 뿌옇게 변하더니 이내 안개 속에 묻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