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래도 불효자식인 모양이다.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아들인데도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TV 드라마를 보다가 이따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내 딴에는 어머니 임종을 조용히 준비했다. 대구교구청 담벼락 뒤에 있는 낡은 집을 구입한 이유도 남의 셋방에서 큰일을 치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언제 큰일이 닥칠지 몰라 식량과 땔감도 충분히 장만해 두었다.
어머니는 그날 낮에 당신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떼어 갖고 2~3분 거리에 있는 남산동성당으로 가셨다. 중풍이 든 불편한 몸이었기 때문에 10분 남짓 힘겹게 걸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예수님께서 걸으신 수난의 길을 따라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을 바치셨다. 불편한 다리로 한걸음 한걸음 뒤따른 예수님의 수난길…. 그것이 평생 기도 속에서 사신 어머니의 마지막 기도였다.
어머니는 때마침 성체조배 중이던 프랑스 유 신부님께 총고해(평생 지은 모든 죄를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를 하고 집에 돌아오셔서 저녁식사까지 잘 드셨다. 그리고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교구청에서 뛰어온 이 막내아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참으로 죽음을 잘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으셨던지 그날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성당에 가서 성로신공과 총고해까지 하시고 눈을 감으셨으니 말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고 말씀하셨는데 일흔두해를 정말 고단하고 험하게 살다 가셨다. 옹기장수에게 시집와서 가난을 뼈저리게 겪으시고, 방랑벽이 있는 큰아들을 찾느라 3번씩이나 만주 일대를 헤매신 어머니, 말이 아니라 기도로써 이 아들이 성덕을 갖춘 사제가 되기를 빌으셨던 어머니….
밤늦게 시신을 모신 방에 홀로 남아 신산(辛酸)했던 어머니의 한평생을 더듬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제 고아가 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 나이가 32살이었는데도 마치 어린애가 부모를 잃었을 때 느낄 법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했다.
모든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다 그렇겠지만 이 세상에서 어머니만큼 나를 사랑해준 사람은 없다. 난 고린토 1서 13장 '사랑의 송가'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서 그 완전한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 특히 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다 받아주시고, 어떤 허물과 용서도 다 덮어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다. 그러나 고백컨대,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
효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동과 대구에서 몇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마지막 날 임종을 지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어머니에 대한 정으로 말하자면 형님(김동한) 신부가 더 깊었을 텐데 형님은 그때 군종신부로 나가 있어서 임종조차 지킬 형편이 안됐다.
어떻게 보면 하늘같고 바다같은 어머니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라고 하느님께서 내게 특별히 기회를 허락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교구장 비서로 일하면서 해성병원 원장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서류상 책임자였을뿐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어 1955년 6월 김천본당(현 황금동본당)으로 발령받았다. 김천본당은 역사가 깊은 데다 유치원과 성의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서 무척 바빴다.
그러고 보면 신부된 지 4년밖에 안되고, 본당사목이라고 해봐야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과 김천본당을 합해 3년이 채 안되는데도 그 사이에 온갖 감투를 다 써보았다. 주임신부, 교구장 비서, 병원장, 재경부장, 유치원장, 중고등학교장… 교구참사로도 잠시 일했으니까 그 나이에 안해본 것 없이 다 해본 셈이다.
김천본당에 부임해 자연스럽게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학생들과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한 기억이 새롭다. 성의중고교는 전임 최재선 신부님(현 부산교구 은퇴주교)이 옛날부터 내려오던 교육시설을 중고등학교로 인가받아 기초를 닦은 학교다. 그래서 나는 좋은 전통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젊은이가 되라고 학생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특히 여학교 교사(校舍)가 성당 마당에 있고, 사제관을 교장실로 겸용하는 통에 눈을 뜨고 나면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여학생들이 사방 천지였다. 난 여학생들에게 장난도 곧잘 쳤는데 학생들은 자상한 아빠를 대하듯 나를 따랐다. 어느 날인가 마당에서 여학생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데 수녀님이 "학생들과 장난치면서 노는 교장이 세상에 어디있냐?"며 슬쩍 눈을 흘긴 기억이 난다.
그때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나를 무척 따르고 서로 정이 깊게 들었다. 여학교 제1회 졸업식날, 졸업생 40여명이 집에 돌아갈 생각은 안하고 내내 울기만 하다 결국 사제관에서 잤다. 자기네들끼리 헤어지는 것이 섭섭해서 그랬겠지만 말이다.
요즘도 초노(初老)의 나이에 접어든 1회 졸업생들과 일년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나를 생각해주고 위해주는 그들을 보면 친딸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도 홀몸으로 사는 성직자에게 혈육의 정까지 선물해주시는 것 같다.
제자들 가운데 김윤선이란 학생이 있었다. 인물이 무척 빼어난 데다 여학교 대대장을 맡아 남학생들 사이에서 요즘말로 '인기 짱'이었는데 그 제자가 뭇 남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수녀회에 입회한 얘기가 재미있다.
wckim@pbc.co.kr&id=spe&member_no=10','mailform','width=400,height=510,statusbar=no,scrollbars=yes,toolbar=no'))">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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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