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삼척동자]

감기인가 해서 동네 내과에 진찰을 받고 약을 먹었는데도 차도가 없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2주일, 약을 안 먹으면 보름이면 낫는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지만

막상 몸이 아프게 되면 병원신세를 안질 수도 없다.

요즘은 신종 플루로 너나없이 조심을 하는 때라서 일단은 병원을 찾아 진찰을 받아야 안심이 된다.

의사들은 대개 증상에 대한  처방을 하고 2~3일치 약을 준 다음 다시 오라고 말한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으면 환자들은 주위에 제 병을 자랑하며 다른 용한 병원이 없는지를 묻곤 한다.

이번 감기도 그런 셈이어서 나와 똑 같은 증세로 먼저 감기를 앓았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요즘 감기는 내과로 가는 게 아니라 이비인후과로 가야 한단다.

특히 코가 막히는 감기증상은 내과보다는 이비인후과 소관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효험을 봤다며 소개한 유명 이비인후과는 압구정동에 있다고 했다.

난 병원의 위치와 가는 교통편까지 상세히 파악한 다음 그 이비인후과를 가보기로 했다.

12시 점심약속이 있었으므로 가는 시간과 되돌아오는 시간 그리고 진료시간을 감안해서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내려서 지정된 출구로 나가서 다시 200미터 쯤 내려가면 오른 쪽으로 빨간 3층 상가 건물이 있고

누구누구 이비인후과라는 간판이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친구가 말한 비슷한 건물이 하나 있기는 있는데 그 이비인후과 간판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길 치매라도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가르쳐준 길도 못 찾는 일이 생기다니... 아래 위 이 골목 저 골목을 헤집으면서 예의 이비인후과 간판을 찾았지만 아무데도 그 이비인후과 간판은 없었다.

시간은 자꾸 지체되어 가는데 병원을 못 찾아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까 서로가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 쪽에서는 내가 엉뚱한 곳을 헤매는 줄 알고 내 위치를 되묻고 난 그가 길을 잘못 가르쳐 준 줄 알고 자꾸만 현장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통화를 하면서도 눈길은 연신 건물들 간판을 훑고 지나간다.

그 순간 상가 건물  중간 지점에 뚜껑이 벗겨진 채 속창만 보이는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끊고 건물 중앙 현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현관 벽면에 안내판이 있었고 바로 2층에 그 이비인후과 이름이 보였다.

병원을 찾았다는 안도감도 잠간, 하필 간판 뚜껑을 떼어 놓은 것에 대한 원망감이 드는 것이었다.

벌써 건물을 찾는데 만 20여 분을 지체해 버려서 낭패감 마저 들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접수계의 여직원에게 병원 간판을 볼 수 없어서 찾는데 애를 먹었다는 말을 넌지시 그러나 누구라도 들으란 듯이

다소 큰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녀는 건물 외벽 물청소 때문에 그런 거라고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사과는커녕 일말의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난 'A4용지에라도 이비인후과 표시를 해 놓았으면 좋았을 거 아니냐'고 그런 말을 하는 내 자신이 겸연쩍어 하며 어렵게 말을 건넸는데 그런 내게 그녀는 태연한 어투로 '잠간인데요 뭘!' 이라고 일축했다.

2_30초도 안 걸리는 지극히 기계적인 진료가 끝나고 병원 문과 복도 하나를 사이로 마주한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받았다. 약사가 약을 건네면서 '이 약에는 항생제가 처방 되어 있으니 술은 절대 드시지 마시고 우유와 약을 함께 드셔도  안 됩니다.'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왕 간판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네 간판은 갈수록 커지고 색깔은 요란해지는 듯 하다.

남보다 크게, 더 눈에 잘 띄게 원색적인 색깔을 써야 좋은 걸로 인식되고 있다.

유명하다는 음식점을 찾다보면 고만고만한 음식점들이  너도나도 '원조'라는  판에 박은 간판들을 내걸어 놓았다.

건물 하나 벽면에  빼곡히 간판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어지럽기조차 하다.

그러니 도시가 질서감이 없고 오히려 찾고자 하는 간판이 어디 붙어 있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거기다가 웬 돌출 간판은 그렇게 많은지 태풍이라도 부는 날엔 간판이 떨어질까 위태롭기도 하다.

도시마다 간판을 내거는 기준이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워낙 간판이 많다보니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서울도 구청에 따라서는 쾌적한 도시환경을 만든다며 간판 단속을 철저히 할 뿐만 아니라 그 규격이나 심지어는 글꼴까지 통일을 시키는 바람에 오히려 이북의 도시에서 보이는 듯한 딱딱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네 간판은 바뀔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간판은 우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가게 간판뿐 만아니라 각종 상품의 제품 브랜드도 딱딱한 고딕체 보다는 붓으로 개성 있게 써 내린 글씨가 많다.

전문적인 서예가의 작품도 없지 않겠지만 수대를  내려오면서 처음 창업한 선대가 서투른 글씨로 써 내걸었던

그대로의 글씨인체 간판이 걸려 있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물론 글씨 고유의 예술성이 그 나라 글자마다 다를 수는 있다 해도 우리처럼 무조건 크고 빨갛고 파랗고 노란 원색 글씨만을 고집하는 경우는 없는 듯하다.

외국에 가더라도 물론 나라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처럼 간판이 건물을 압도하는, 그래서 건물이 간판에

파묻힌 그런 도시는 보기 힘들다. 한국의 그런 현상 자체가 또 다른 볼거리고 특색이라면 달리 할 말이 없지만

이제는 간판도 양보다는 질을 추구할 때가 아닌가 한다. 

보다 예술성을 가미한 개성 있는 간판들이 내걸렸으면 한다.

크지는 않더라도 건물의 주소가 질서 있게 나타나 있고 눈높이에서 어디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간판들이 도시를 보다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의 인식이 보다 유연해지고 다원화된 사회가 되어야 획일적인 큰 간판 원색 위주의 간판 물결을 탈피 할 수 있을 것이다. 간판도 주인 입장이 아니라 고객의 입장에서 봐서 즐거움을 줄 수 있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병원 간판 찾는 이야기가 거창한 간판 론으로 비약하고 말았다.

나이아가라 갔을 때 옆으로 넘어진 것처럼 보이는 건물에 킹콩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그런 간판을 보았었다.

랜드 마크로서의 건물도 기발한 아이디어지만 거기에 어울리는 간판이 인상적이었다.

또 엘에이의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애꾸눈 해적을 소재로 한 코믹한 간판을 보았을 때 그냥 보고 지나치는 간판이 아니라 카메라에 담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간판은 어떤가? 그리고 엄마의 젖가슴을 연상하게 한다는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의 간판도 눈길을 끄는 간판 중의 하나다.

알프스의 관문 샤모니 거리의 한적한 산골 분위기에 어울리는 작은 간판들 그러나 그곳이 무슨 가게인지 금방 알 수 있는 간판들, 고흐가 마지막 예술 혼을 불살랐던 파리 북 쪽의 오베르 거리의 한적한 거리의 카페임을 알리는 간판들이 뇌리를 스친다.

A4 용지의 임시 알림 안내문이라도 붙여 달라고 애걸하는 주제에 아름답고 이상적인 간판을 꿈꾸는 이런 생각은 아직호사롭고 치기어린 푸념에 불과한 것인가?  

[삼척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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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山居士]

역시 안산의 글심은 대단하이. 잘 읽고 가네 .수일내로 한번 만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