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최근 들어 이른바 동물 권리에 관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동물 권리’라는 용어는 단순하게 말해서 동물 그 자체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몇 권의 독서는 이러한 출판 경향에 힘입어 근래에 다시 개정판이 나온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의 범례적인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어쭙잖은 느낌만을 간직한 채 흐지부지 되고 만다.
여전히 동물 권리, 동물 해방이라는 타이틀은 모든 논의가 인간의 담론의 권역 내부에 머물고 있으며, 고통, 충격, 경련이라는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과 차이는 죽음 앞에 존재의 허약함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묶이는 것 같다.
때문에 연민의 절실함은 일종의 매혹적인 안도감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이는 동물이라는 미지의 영역이 암흑 속에 너무 깊이 은폐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동물이라는 절대적인 타자에 대한 이해 부족이 도대체 얼마나 모호함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개인적으로 지금 앞에 놓여있는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는 앞의 교착 상태로부터 비록 작지만 출구를 만들어 주고 주제적으로는 학문적인 외관에 격리되어 있었을지 몰라도 미지의 영역에 대한 개괄적인 개척정신만은 높이 사줘야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리다 조차, “동물은 존재자에 대해서 보다 적은 관계를, 보다 적은 접근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철학적 질문 이래, 윅스퀼 만큼 풍부한 도해와 사례를 가지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의 마디들을 파고들지 못했다.
이 책의 요점은 인간과 동물에 있어 기존의 익숙한 ‘다름’을 ‘낯선’ 다름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연구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왔던 근본적인 오류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동일성’ 다음에 ‘차이’라는 단어가 따라 나와야 한다는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동일성이고 어떤 차이일까?
윅스퀼은 인간과 동물은 강함, 약함, 많음, 적음이라는 힘 또는 양 등의 바로미터로 측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환경세계들의 연구를 파고들면 들수록, 거리에 객관적 현실성을 부여할 수 없는 그런 요소들이 작용하는 것을 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객관적 현실성’이라는 인간의 척도가 재도입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독자는 윅스퀼이 얼마 못가서 말하는 ‘주체적 현실’ 또는 ‘주관적 현실’이라는 개념 아래로 묶이는 존재들의 환경세계의 토대에서 인간과 동물은 각자 다른 환경세계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먹잇감을 노리는 노상강도 진드기 이야기로 시작해서 끊임없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다양한 그들의 환경세계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동물들을 대하는 방식에 교정이 필요하다는 느낌보다는 다소 조롱조이기는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의 낭만주의자로서 동물 애호가들에게 이 책은 작은 잔혹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반려’라는 젠체하는 인간의 자화자찬과 같은 이 앙증맞은 단어가 물신화될 때 그들이 놓치는 건 다름 아닌 인간의 환경세계가 자연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윅스퀼의 말을 빌면 “대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로지 인공적인 대상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뿌리 채 뽑아 이식한 공원의 나무들과 꽃들, 이러한 것들을 자연의 종합으로부터 뽑아내어 인간적 대상들로 만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인간과 동물이라는 담론의 영역에서 좀 더 신뢰할 만한 작은 참조점을 제공한다. 이 지점에서 다시금 인간과 동물에 관한 질문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요즘 동물에게 슬슬 관심이 생기는 찰나였는데......우선 책부터-
K님. 뒤늦게 책 소개글을 보았습니다. 감사 ^^ 이 책이 "후기 자본주의의 낭만주의자로서 동물애호가들에게 작은 잔혹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K님의 생각에 작은 감탄과 더불어 적극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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