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양력으로 생일날이라고(각종 증명서에는 틀림없이 오늘로 기재가 되어 있지만 나는 언제나 음력 생일날을 내 생일이라고 한다) 시집 가서 따로 살고 있는 딸들에게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화가 왔다.
우리집에서는 내가 어릴때 생일날이 되면 흰 쌀밥을 고봉(밥그릇 위에 산과 같이 쌓아서 푼 밥을 고봉밥이라고 불렀다)으로 퍼주고 반드시 미역국을 끓여 주고, 반찬도 다른날 보다는 조금 푸짐하게 차려 주었고, 점심에는 명이 길라고 국수를 먹였다.
그리고 넘어지지 말라고 수수팥단쥐를 만들어 주었다.
어리기 때문에 산 같이 쌓여진 고봉밥을 전부 먹을수는 없고 함부로 퍼 먹다가는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왼손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바쳐 가면서 밥그릇의 맨위에서 부터 조심조심 파 먹는 거였다.
어릴때 부터 욕심만은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의 놀부 욕심인지라 조심조심 먹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많은 밥을 미역국에 말아서 퍼먹다가 반도 못먹고 남기기가 일수였다.
어른들이나 누이들은 그 많은 밥을 모두 말으면 틀림없이 남길텐데 누가 먹으라고 그러는거냐고 하면서 먹을 만큼만 국에 말으라고 하지만 내 욕심대로 전부 말아서는 반도 못먹고 남기곤 하는거였다.
그리고 점심때가 되면 어머니가 손으로 밀가루를 밀어서 칼국수를 만들어 주셨다.
우리집의 칼국수는 이천에서는 조금 유명해서 옛날 군사혁명을 한 박정희소장께서 이천에 들렸을때 그분이 좋아하는 것이 손으로 민 칼국수라고 해서 뽑혀 가셔서 만들어 드린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조금 해보면 이렇다.
1960년대 초 군사혁명에 성공하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시던 박정희소장께서
어느해였는지 한글날 세종대왕의 능이 있는 여주로 가시다가 이천에 들린 일이 있다.
그때 이천 차부(지금은 뻐스 터미널이라고 한다)의 식당에 점심때 사복을 입은 사람이 들어와서 앉으니까 주인 아주머니가 물컵을 가져다 놓으면서 “어어 이분 박정희 닮았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내가 박정희와 닮았소?”하고 물으니까 그 아주머니가 “아주 똑 같아요”라고 했다고 한다.그랬더니 그분이”닮은 사람도 있겠지요”하더란다.
그때 어떤 남자가 입에 손을 대고 아뭇소리 말라는 신호를 하면서 그 아주머니를 슬며시 잡아 끌어서 따라 갔더니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것이며, 오늘 있었던 일을 함부로 퍼트리지 말라고 하더란다.
그때에서야 그 아주머니도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 생각을 하고 자기 가게 주위를 살펴보니 젊고 건장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서서 식당에 들어오려고하는 소님들을 막고 있었고 식당의 주방에도 두어명 들어와 있더라고 했다.
이러구러 그 식당에서 점심을 끝낸 그분은 식당을 나가면서 “맛있게 잘 먹었소”하고 깍듯하게 인사를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후 세종대왕릉에 참배를 끝낸후에 다시 이천에 들려서 저녁을 이천에서 이천의 기관장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어머니가 불려간 것이다.
그때 이천의 기관장들이 최고 권력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대접을 할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을 할때에 그분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손으로 만든 칼국수라는걸 알고 어머니에게 오셔서 만들어 달라고 해서 어머니가 재료랑, 홍두깨랑,
국수칼을 가지고 가셨지만 재료는 우리집의 재료를 쓰지 않고 저쪽에서 준비한 재료를 써서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이천에 사시던 선친의 친구분들은 심심하고 칼국수 생각이나면 우리집으로 몰려오시곤 했었다.
지금 같이 전화가 있으면 지금부터 몇명이 칼국수 먹으러 갈테니 준비라하고 미리 연락이라도 할텐데 그 시절에는 그런게 있을리가 없을 때이고, 또 가게라도 가까이 있으면 재료를 사다가 준비를 하겠지만 이천까지 10리 길을 가야하는 촌에서 불시에 들이닥친 손님 접대를 하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나 하는걸 이해할만하다.
그래도 울타리에서 딴 애호박등을 고명으로 해서 칼국수를 만들어서 집에서 만든 막걸리와 함께 대령을하면 모두들 좋아하면서 드시곤 했었다.
이제는 그 칼국수를 즐기시며 사랑에서 마작들을 하시던 선친을 비롯한 선친의 친구분들도 한분없이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버리셨고, 허둥지둥 하시며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도 훨씬 전에 세상을 버리셔서 완전히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김면장댁표 칼국수”가 생각이 나서 또 한번 옛날 생각을 끄적여 본다.
2014.02.06(양력생일날)
첫댓글 집집마다 차이는 좀 있어도 다들 음석 몇 개씩은 자신있게 맹그는 재주가 있었는디 인자 그런 재주들도 잘 안 써 묵응깨 맛도 이저삐리고 살더만요.
그래도 아직 각시가 맹그라 주는 칼국시나 수제비나 오만가지 음석들을 다 챙기 묵고 상깨 나가 복이 많은 놈이라고 해야것지다 이~!
오늘도 각시가 맹근 만두로 맛나개 한잔 걸칬그만요... ^^
요사이 같이 TV 와 동영상이 없었던 시절에는 신문에 나오는 사진만으로만 얼굴을 알아봤을껀데.
이천식당 여주인이 눈쌀미가 아주 좋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