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臥薪嘗膽
섶 위에서 잠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딤>의 비유.
춘추시대 월왕 勾踐과 취리에서 싸워 크게 패한 吳王 합려(闔閭)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임종때 합려는 태자인 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遺命을 남겼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며(臥薪) 그 고통을 참고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밖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하였다. “而忘越人之殺而父耶”
이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선제 공격을 하였으나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구천은 오나라 재상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부차왕에게는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나중에 용서를 받아 고국에 돌아오자 구천은 곁에다 쓸개를 매달아 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산의 치욕을 상기했다. 회계의 치욕으로부터 12년이 지나 재상 범려(范閭)의 도움을 받아 은밀하게 훈련한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가 마침내 오왕 부차를 굴복시켰다.
<제 9화> 效顰 = 西施矉目
效 : 본받을 효 顰 : 눈살 찌푸릴 빈
<주견 없이 무조건 남을 흉내냄.>
西施는 월나라에서 땔나무를 해다 파는 미천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월나라 재상 범려의 눈에 띄어 픽업되고 월왕 구천이 불우하던 시정에 3년간의 교양과 훈련 과정을 거쳐 오왕 夫差에게 美人計로 바쳐졌다.
西施는 속앓이 병이 있어서 아플 때는 가슴을 움켜쥐고 얼굴을 짱그렸다. 그럴 때마다 부차가 안타까워 어쩔줄 몰라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마을의 추녀 동시(東施)는 동네 방네 다니며 남자만 보면 상오를 찌프렸다. 보다 못해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은 두문불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남부여대하고 이웃 마을로 이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현보의 다음 시조를 ‘효빈가’라고 하는 것도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모방했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歸去來 귀거래하되 말뿐이요, 갈 이 없네.
田園이 將蕪하니 아니 가고 엇젤고.
草堂에 淸風明月이 나명들명 기다리나니.
첫댓글 선생님께서 올려주시는 글들 모두가 제가 평소에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을 일깨워 주심을 느낍니다. 선생님께서는 제목을 閑居雜話라 하셨지만 저희들에게 고금을 통털어 가르침을 주시는 글의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좀 지나친 겸양인듯 합니다. 바꾸어 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싸랑하는 선상니임~ 閑居雜話중 춘추시대 말고요오 . 박통, 전통, 노통...등등 우덜 갈키시던 시절의 秘話나 에피소드위주의 이야기 즉 色骨雜話를 연재 해주심 안되나요~~ㅎㅎㅎ(죄송...워낙 샘님을 사랑해서리...)
제 8화는 가르침을 받았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네요.. 스승님의 글 하나 하나가 삼십년이라는 세월을 지우고 다시 배움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 기다리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