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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0년 12월 13일 화요공부방 -솔성요론 6~9조
□ 참석하신 부처님들 (40명)
남(20명) : 김제원 교무님, 박원진 간사님, 유원경 교무님
김정원, 박경식, 손명균, 윤효근, 이진우, 박윤호, 김명성, 이현도, 최도종, 유도솔, 오환칠,
김호겸, 이기홍, 최원식, 조인각, 이정민, 김수현
여(20명) : 이제선, 서혜원, 김혜향, 박명진, 이진원, 류원심, 이윤진, 설인성, 신천숙, 이진성, 오진숙,
최우현, 이지현, 나인명, 김성경, 문혜은, 권상은, 최성양, 류종훈, 최시원
□ 강연자: 대용광로 1-1단 유원심
□ 화요작은 음악회
- 보리상자와 나무젓가락의 공연
□ 김제원 교무님 설법
ㅇ 솔성요론의 구성
지난 주에는 솔성요론 1조부터 5조까지 공부했는데,
1, 2조는 믿음에 대한 내용이고
3,4,5조는 배움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람은 배움을 통해서 진급하기 때문에 안다 하는 것을 놓고 한량없이 배워야 한다. 그리고 주색낭유하지 말고, 그 시간에 알뜰하게 진리를 연구하는 시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솔성, 성품을 거느려 쓰는 것에 있어서 출발지로서 기폭제가 된다는 것이다.
지난 주에 1조를 강조했다.
1조를 상당히 강조한 이유를 아시겠는가?
이것을 떠난 사람은 원불교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또한, 배움에 대하여 적극적이지 않으며,원불교를 떠나 어둠에 가리고, 묶이고 빠져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오신 분들은 참나를 알고 공부하겠다는 사람일 것이다.
주식을 하여 돈을 벌려면, 그것을 잘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듯이, 내 인생을 잘살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여야 내 인생이 헛된 투자가 아닌 알뜰한 투자가 될 것이다.
오늘은 6,7,8,9조이다.
6조는 주착의 문제, 7조는 공경심과 욕심 처리 문제, 8조와 9조는 개인의 적공 문제이다.
8조는 자기가 자기를 가르쳐라, 그리고 9조는 잘못된 일이 있을 때 밖보다는 내부로 에너지를 쏟아서 깨우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10조부터는 대타적인 문제로 들어간다.(대인관계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솔성요론은 자기를 점검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래서 솔성요론, 계문에 들어와서는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많으실 것이다.
아까 원심 교우님께서 잘 강연해 주셨다.
6.한편에 착하지 아니할 것이요.
착은 주착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주착심”은 정신수양에도 나온다.
주착심 앞에 들어가는 것은 분별성이다.
주착심이란: 머물러서 고착되어 있다는 것
원심교우가 남자친구와 동생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착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해 주셨다. 그러기 쉽지 않다.
주착심을 가지면, 어떤 사물에 대한 판단을 할 때, 고착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착심이란, 분별성의 반복에 의하여 온다.
분별하는 것은 아는 것인데 하나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 호겸이가 근무를 마치고 오느라 늦었다.
- 정신 : “아 호겸이구나”그냥 아는것
- 분별 : 호겸이가 늦었네
- 주착 : 호겸이가 또 늦었네, 맨날 늦는 사람이구나
주착심에 걸리면 나중에 호겸이만 보면 “늘 늦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별성은 희노애락 애오욕에 대한 판단이다.
주착에 걸린 사람의 경우
한편에 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광활한 천지, 텅빈 마음 세상을 안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좁아진다.
전체를 볼 줄 모르고 한쪽에만 매여있다고 할수있다
신앙도 한편에 착하면 전체신앙을 하지 못하고 부분신앙, 미신신앙을 하게 되어 있다.
수행도 한편에 착하면, 하나의 체험이 있으면 그것에 매이게 된다.
그래서 선종이 최고다, 교종이 최고다, 율종이 최고다 하는 것이다.
이것도 한편에 착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공,원,정 이 두루 갖추어져 있는 것이
본래의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에 주착한다.
교당에 와서도 나는 기도만 좋다, 공부만 좋다 하는 것도 주착이다.
주착하면 막힌다.
정신으로 보면, 주착하여 정신이 툭 터져야 하는데 좁아져 버린다.
연구로 보면, 밝게 알아야 하는데 가려서 어두워져 버린다.
취사로 보면, 밝고 훈훈하게 나와야 하는데 삿되게 흘러가 버린다.
주착을 함으로서 어두워 가려져 버린다
착을 놓아 버리면 툭 틔어 버린다.
편착을 놓으면 막힘이 없기 때문에 툭 터져 객관화 할 수 있다.
대인간의 관계도, 자신의 생각도, 신앙도, 두루 다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의두요목에는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은 것”이 나온다.
짝한 것이 교만한 것이다.
나는 착한 사람이 좋다, 나는 예쁜 사람이 좋다 하는 것도 착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나쁜 사람을 미워하고 예쁘지 않은 사람을 무시한다.
짝하지 않는것.. (상대심,비교심)
주착한 사람의 특징은 아주 민감하다.
예를 들어 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상당히 민감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
몸무게, 학력, 미모, 재력 애기를 하면 민감한 사람이 있다, 주착하여 있기 때문에..
ㅇ 잘못되는 순서
편착하면 가린다, 가려서 어두워지고, 어두워져서 끌리며, 끌려서 글러진다.
이것이 정산종사 법문에 나온 말이다.
편착이란, 광활한 세상에 어느 하나에 묶여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글러져 버린다.
그래서 한편에 집착하는 문제에만 해결해도 “평상심”에 다다른다. 집착하면 평상심에 머무를 수가 없고 이것하면 이것, 저것하면 저것에 끌리어 살게 된다.
주착하는 사람들은 만법과 더불어 짝을 잘한다. 온갖 주위를 의식하다가 에너지를 다 빼앗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나’로 살아야지 ‘무엇 하나에 묶인 나’로 살아야겠느냐
사람이 죽으면 제일먼저 착을 따라가고 그 다음에 업을 따라간다.
착심이 이만큼 무서운 것이다
보통사람은.. 재물,명예에 착한다.
예전에 어떤 영감이 죽으면서 곳간에 착한다. 그러면 죽자마자 곳간에 쥐로 태어나 자기가 벌어놓은 쌀 먹고 산다.
그래서 막착이거라 한다.
착을 놓아버리고, 떠나라!
사실 보통 중생은 거의 착으로 산다. 착의 인생이다.
재물에 착하고, 명예에 착하고, 돈에 착한다.
우리가 객관성을 얼마나 유지하기 힘든지 우리주위에서 보라.
친 불친, 원근친소에 끌리지 말라는 얘기를 누구나 하지만, 사실 잘 되지 않는다. 병원에서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진료가 가능하다.
한편에 착하지 말라는 것은 분별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마음을 낼 적에 분별성, 주착심으로 내지 말고 무분별성,무주착심(大자리)으로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근원적 차이이다.
다른 사람은 주착을 하고도 주착한지를 모르고, 그 주착심에 헤매어 산다.
원불교 공부한 사람은 자기가 주착한지 안다.
그러나 성리를 안 사람은 내 마음은 원래 걸리고 막힘이 없는,
우주와 함께한ㅡ, 천지영기아심정의 마음이다.
본래 성품에 걸리고 막힘이 있겠느냐 이것이 본래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 선을 하고 염불을 한다.
이것을 무시선법에는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고 한다.
이것이 핵심이며, 우리의 천연지성, 응용무념의 공부이다.
마음은 챙길수록 챙겨지는 것이 무념이다.
그러나 안 챙기면 안 챙길 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은 주착의 세계이다.
죽어서도 주착 때문에 육도세계를 자유하지 못하고 악도의 길로 찾아간다.
순간순간 주하지 않은 마음, 빈 마음,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공부인 것이다.
한편에 주착하고 있는 순간에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면 좋은데 그렇게 아니된다.
법회, 아침좌선, 교전봉독 등이 자신을 객관화 사키는 시간이다.
주착의 세계에 빠지면 충고를 잘 듣지 않게 된다.
사업하는 사람이 망하는 지름길이 주착이다. 자기의 사업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장단점을 분석해 주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멀리하게 되고, 자기를 좋다 좋다 하는 사람만 관심있게 된다.
ㅇ 주착의 세계에 대해서 질문하세요!
Q. 착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착하게 되는데 해결방법은?
A. 착하지 말아야지, 하고 알서도 안되는 것은 마음의 힘이 부족해서이다.=수양의 부족이다.
그래서 수양력(힘)을 쌓으라. 수양력= 안정을 얻고자 하는 힘
망념을 놓고 진성, 오롯한 성품을 기르는 힘을 단련하라.
집착하는 마음을 놓고 텅빈 마음을 회복하라.
이것이 기도요 염불 좌선이요 동정간에 멈추는 것이다. 그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
비워야 채워진다. 그릇이 꽉 차 있으면 안된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주착이 자신인줄 안다.
나는 무엇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착이고,
내가 착하다 하는 생각도 착이다.
예시) 어느 간호사가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수간호사의 차별에 화가 나 안 좋은 마음이 났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 마음을 보다가 “아, 내가 이런 마음이 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무명을 걷어냈다고 한다 (내가 착하다는 착각:주착심)
어떤 영가는 죽어서도 세수만 하는 영가도 있다. 보통 영가들은 죽어서도 죽은 줄을 모른다. 그래서 경종을 치면서 알려주는 것이다.
Q. 박윤호..
A. 우리의 본래 마음은 거울과 같다. 주착심은 거울에 늦은 사람을 파버려야 한다.
그 때가 그 때이다. 10번 속았더라도 11번째 믿어야 함. 그때 그때 새로운 마음이다.
응무소주 : 응할 때 주한바가 없어야 한다.
그때 그때 다르다. 이것이 유무자리요 대 자리다. 그 때 그때 텅 비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신앙해야 한다. 그런데 나도 잘 되지 않는다 “ 저 사람 또 못하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일 처리는,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불공을 위해서는 바꿀 수도 있지만, 내 마음에서는 비워놓아야 한다.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내 자신도 변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변할 수 있다.
7.모든 사물을 접응할 때에 공경심을 놓지 말고/ 탐한 욕심이 나거든 사자같이 무서워 할 것이요.
ㅇ 공경심이란?
공경심이란 무엇인가?
인도품에서는 경외심(공경하고 두려워함)에 관한 내용을 말씀하셨다.
아주 작은 성냥에 대한 경외심을 놓아서 훔치다 걸렸을 경우, 반드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냥 하나라도 두려워하여야 한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상이 많은 사람일 수록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경외심을 잃기 쉽다.
(수자상,인상,아상...)
그런데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무시하더라.
이것이 원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처처불상 신앙이다.
다른 사람을 무시했다가 당한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윤광일 교수님이 “기계에도 식이 있다” 하셨다. 함부로 하면 묘하게 모든 것이 반응한다.
여름에 땀흘리고 옷을 그냥 두면 다음 여름에 삭아서 다시 입기 어렵다.
차도 문을 쾅쾅 닫으면 오래 쓰지 못한다.
교만한 사람은 함부로 한다.
자기에게 사랑을 준 주위 인연도 함부로 하고, 소중한 것을 함부로 한다.
대종사님이 부처님이 어디있느냐 하셨냐면 모든 만물이 부처님이다 (죄복의 권능이 있다)
자기가 사장이라 한 사람을 마음대로 해고하면, 그 사람이 노동부에 신고하면 골치아파진다. 어떤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으며, 무시할 사람이 있겠는가.
ㅇ 탐한 욕심이 나거든 사자와 같이 무서워하라
사자와 같이... 무서워하라..
얼마나 무서운가.
원심교우가 처음에 왔을 때는 육신도 마음도 학원 운영도 병자였다. 그러나 원불교 1년 다니면서 차차 좋아지고 있다. 학원 운영은 경영학에서 해결하고 육신은 병원다니면 해결되는데 왜 원심교우는 교당에 와서 해결하였는가? 그 문제가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질났을 때 어떻게 그 마음을 조절할 것인가?
평소에 단련이 없으면 멈추기 힘들다.
그러나 서원이 있는 사람과 신심이 있는 사람(대종사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과에 대한 믿음, 신앙이 있는 사람은 멈출 수 있다
8.일일시시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것이요.
ㅇ 일일시시 = 무시무처 = 언제어디서나 = 날마다 날마다
ㅇ 자기가 자기를 가르쳐라 : 원불교의 매력이다.
오늘 아침에 좌선을 하는데 그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여 버렸다.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가 보았는데 그러지 아니하여 내가 가르쳤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친다고 하나, 결국 그 스승은,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좌선을 가르쳐 주었다.
입정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실제 좌선을 할 때는 내가 나를 가르치는 것이다. “망념이 들었구나” 하고 알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연조만 쌓여서 내가 원불교 얼마 다녔네 좌선을 몇 시간 했네 하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적공이 없으면 실질이 없다.
아까 염불과 좌선 하였는데, 자기가 자기를 가르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람이 다르다.
그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다.
대산종사님은 사업은 실적있게 하라, 그리고 공부는 귀신도 모르게 해라 하셨다.
(자신에게 가르치는적공)-> 철저한 유념 - 방심이 아닌 “실질적인 공부”
이것에 의해 실질적으로 원불교 법위가 향상이 된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려 하는구나.
내가 지금 신용을 어기려 하는 구나..
하고 계속적으로 참 자기와의 철저한, 충분한 대화, 만남이 이루어져야한다.
보통사람은 참 자기가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끌려다닌다.
내가 오늘 공부방에 가기 싫으면,
계속해서 참 자기와 거짓 자기가 싸워서 가르쳐 이겨야 한다.
법이 마를 가르쳐야지 마가 법을 가르치면 되겠느냐!!
여러분 화요공부방 올 ?? 자동으로 오는가?
철저한 유념이다. 마음을 잡고 잡고 잡아서 능심으로 저절로 되기까지 해 버려야 한다.
그래서 종법사님은 하고 하고 또 하고 절로 될 때까지, 알고 알고 또 알아서 앎이 없을 때까지 하라 하는 법문이 있다
그런데 싸움 자체도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데! 문제가 된다!
쳐다보는 마음. 이것이 멈추는 마음이요, 마음공부의 첫걸음 이다.
법당에 오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마음이 소홀하게 된다.
선진님 중에 김남천 선진님이 있다.
김남천 선진님은 일하다가 “네 이놈!” 하시고 또 길을 걷다가도 느닷없이 “네 이놈” 하셨다 한다.
자기 마음에 아닌 마음이 날 때마다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에 바빠야 한다.
무관사에 동하지 말라는 것이 이것이다.
특신급 때 자기를 보는 것에 바빠야 하는데, 다른 무관사에 마음을 ?壺畸綬? 자기가 자기를 볼 시간이 없다.
내가 전에 은행에 가서 보고 희망을 가진 적이 있다.
돈을 착착 세어서, 자신있게 내놓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지?”
그것을 보고, 희망을 얻었다. 나도 내 마음을 반복해서 계속 챙기다 보면 절로 될 것이다.
교당에 왔을 때 법신불 일원상이나 나를 보고 자신이 없는 사람은,
교당에 잘 나오지 않거나 자기가 맡은 일로 불공할 때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자기 인생에게 자신이 없다.
내부의 스승!! 자력신앙(불교,원불교 의 매력이다) “자력있는 사람”
-> 언제나 환영받는 사람이 된다.
꼭 누가 시켜서야만 일이 되겠는가~!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생각이 있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나도(교무님) 가르치면서 대조하고 또 대조한다.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그것을 머리가 터질 때까지 해 보아야 한다.
하루잡고 계~속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체크해봐라.
얼마나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 마음이 얼마나 기기묘묘한 마음인가!
그런데 그 마음이 그러한 마음인 줄도 모르고 주위만 인식하면서 살면,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 자기를 가르치게 된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들으려 하면 그것은 또 듣기 싫다 한다. 그럴 때 스승에 대한, 타력에 대한, 강자에 대한 신심이 필요하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힘이 점점 커진다.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면 다른사람이 충고해 주는데,
충고가 끊어져 버린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충고를 해주는 사람은 그래도 그사람에게 애정이 있어서 이다.
충고 자체가 없다는 것은 “저 사람에게 말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스스로 다 가르치는가? 결국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믿음과 배울려는 마음이 있으면.. 비록, 쓰지만 병이 낫기 때문에 먹는다.
책을 보면 우리는 상당히 자극을 받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충고해 줌을 느껴서 내가 나를 가르치는 것이다.
Q. 참 마음과 가짜 마음을 어떻게 가르치고 구별하는가?
A. 쉽게 표현하면, “양심이 비양심을 가르친다, 정신이 육신을 가르친다, 도심이 인심을 가르친다, 법의 마음이 마의 마음을 가르친다” 하면 될 것이다.
교당내왕시주의사항 : 타력
상시응용주의사항 : 자력(이것이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상시응용주의사항이 약한 사람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
자네 마음을 보라. 좌선을 할 때 “아 마음을 챙겨야지” 하더라도 어느새 뽀르르 마음이 나가서 논다. 그러다가 노는 마음을 지켜보는 내가 있다.
내가 법회를 보는 것 자체만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빠져버렸다는 것은 마음을 놓았다는 것이다.
9.무슨 일이든지 잘못된 일이 있고 모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가 자기를 살필 것이요.
8,9조는 철저한 자기적공이다.
잘못된 일이 있거든... 자기를 봐라.
아까 원심교우가 동생과 둘이 있는데 동생도 문제가 있지만 자기도 문제가 있다.
부모가 볼 때는 둘 다 잘못했는데 그 둘은 서로 상대가 잘못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자기가 잘못한 부분에 있어서 철저히 자기 것을 확인해라 하는 것이다.
범부는 사은의 은혜를 모르고 원망에 기초를 깔고 있다.->가려져 있고 어둡다
사은의 은혜에 기초를 둔 사람은->밝다
그래서 접근 자체가 ..
내가 저 사람은 중생이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하고 판단하게 되는 근거가 있다.
ㅇ 중 생 : 현실적 판단
ㅇ 지혜있는 사람 : 현실적 판단 + 진리적 판단
- 중생 : 현실적 가치판단만을 하는 사람은 중생이다. - 빚의 길
-> 결국 실패하게 된다. (사은의 빚을 갚지 않고...)
- 지혜가 있는 사람 : 진리적인 판단과 현실적 판단을 동시에 한다. 그 순간만 보지 않고 멀리까지 본다. -보은의 길
-> 결국 성공한다.
카페, 공부방 등 모든 것들이 사은의 은혜로 뭉쳐 있는 것인데 은혜를 알지 못하고 보은하지 않는다면 빚만 늘어나는 것이다.
교무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주느라 “잘한다 잘한다” 하지만, 사실 빚이다.
세상의 일은 너무나 많다. 대학원이 돌아가는 것, 학교가 돌아가는 것, 지금 공부방을 하는 것, 그리고 까페 관리도 엄청난 사은의 은혜가 뭉쳐져서 된 것이다.
원망을 하느냐 안하냐는 인과이다.
자기가 사은의 은혜에 대한 인을 엄청나게 입었는데도, 그 과가 보은의 과가 없으면 빚만 는다.
잘못된 일이 있을 때 잘 보라. 내가 수능점수가 얼마라고 하면, 거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걸쳐있는가. 한번 보라.
그 은혜를 모르고 원망하는 것은 자기 욕심이다.
그것이 자기 과욕이라.
원망은 정말로 객관적 판단이 안 된 것이다.
어릴 수록 원망을 잘 한다.
□ 질문과 답변
Q.
A. 원망심이 나는 것은-.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원망하기 쉽지만,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 사람이 특이해서 모든 사람에게 그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만을 괴롭힌다면 관계성 속에서 나에게도 원인이 있다. 그것을 먼저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가 나를(내안) 살펴보는 것은 쉽지않고, 싫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고.. 어렵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쉽지만 내 안을 바라보라 하니 얼마나 하기 싫겠는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것의 어려움
나는 어떤 일에 80%이상의 에너지를 쏟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내가 40% 면 10%를 쏟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의 프로테이지가 잘 맞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 문제를 모르는 사람은 그 문제를 계속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객관적 판단이 들어가면 원망한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해고당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잘했던 것만 생각하게 된다. 잘못한 것은 적게 생각한다(수용하지 못함).
왜?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짤리고, 어떤 사람은 붙잡을까?
자기가 자기를 객관화시키고 은혜를 나툰 사람은 잡힌다.
그러나 객관화시키지 못한 사람은 잡지 않는다.
나는 회사에서 필요한 존재인가? 평소 은혜가 되는 존재였을까?
어디에서나 필요한 존재가 되어라! 환영받는 존재가 되어라!!!
첫댓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디서나 환영받는 자력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