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목요일
엷은 쌀뜨물을 풀어 놓은 듯, 금방이라도 눈발이라도 흩뿌리기라도 할 듯한 날씨다.
신참으로 참가해서 함께 산행을 하려니 모든 행동이 서먹서먹하고 어색하고 어늘하다.
가까운 친구도 함께 한다니 그 놈이나 말상대 삼아 산행에 나설 셈이다.
오서산(烏捿山)! 억새가 만개를 할 때나, 김장철이 다가 올 무렵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수 차례 오르던 곳이기도 하다.
해발790m, 높이야 별거 아니지만, 주위에 고만고만하게 키높이를 견줄만 한 산이
없으므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르다 광천I.C를 들어서면 맞으편으로 시야를
일시에 끌어당길만하게 걸진 덩치가 행선지를 묻고 나선다.
간간이 눈에 띄는 오서산으로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핸들을 작동하면
머지않아 들머리인 상담리 주차장에 닿을 수 있다.
홍성군 광천읍과 보령군,청양군등 3개군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오서산의 산길은
주로 광천읍의 상담리를 들머리로 하여 보령의 성연리에서 산행을 마치는 일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성연리를 들머리로 진행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상담마을 입구에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는 주차장에는 대형관광버스 두어대와
자가용들이 평일인데도 제법 들어차 있다. 평일이라고 해서 산행에 나서는 것이
별 흉이 될 일은 아니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하도 경제가 거덜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니 별거 아닌 것도 유심히 보게되고 또한 눈치를 뵈게 행동거지가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포장길로 들어서서 마을 우측 뒷편
계곡으로 향하는 길을 따르면 산 중턱에 아담하게 자라잡은 정암사에 이르고,
절 옆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이어가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주차장의 번잡스런 풍경에 비하면 조용하기만 한 마을, 동네 강아지도 허구한날
입산객들의 행동거지가 눈에 익숙한지 짖는 주특기를 잃어버렸는지
꼬랑지만 뱅글뱅글 돌리며 입산객들의 눈치만 살핀다. 채마밭에는 수확하다 만
배추와 무우가 군데군데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다 지쳐서 널부러져 있고,
앙상한 감나무 꼭대기에는 말라버린 서너개의 홍시감이 까치의 처분을 기다릴 뿐,
바람의 도움을 받아 처분하긴 애저녁에 그른 모습이다.
며칠전에 폭설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폭설이 쏟아졌다고 해서 아이젠과 스패츠
그리고 동절기 쟈켓등의 여벌 옷가지를 배낭아래칸에 잔뜩 담아 왔으니
배낭의 몸집이 빵빵하다.
짧은 가을에 대한 아쉬움을 접어 버리고, 백설이 만산에 소복히 쌓여있을 흰눈을
상상한 것이 헛물을 들이킨 꼴이다. 이삼일 사이에 수북하게 쌓인 눈이 그새
모두 녹아 버린 것이다. 임도는 호젓하게 山客을 정암사 앞으로 끌어들인다.
이층누각아래를 지나면 정암사 경내로 들어선다. 대웅전의 앞쪽 문은 문짝위에
비닐을 친 모습이 바늘구멍으로 황소같은 바람이라도 들어왔던 모양이다.
딸랑 딸랑! 오롯히 이파리를 떨군체 동면에 들어간 나무들의 대꾸가 없어서인지
심심했을 바람이 괜스리 풍경을 짐짓 건드려 본다.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 스님들도 앞으로 두어 달은 되어야 동안거를 끝낼 것이고,
월동에 들어간 초목들은 춘삼월이나 돼야 노릇노릇 새순을 앞세우고 동면에서
깨어나 눈을 비빌 것이다.
중생들에게 깨우침을 일으킬 저음의 범종이 이층누각위에서 금새라도 울려퍼질듯
폭풍전야의 고요를 연출한다. 이층누각앞에서 우측으로 진행을 하면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이 되며 입산객들에게 인내력과 끈기를 시험한다.
코가 바닥에 닿을 듯 경사가 급박하던 구간에는 어느사이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아
시험수준을 하향조정해 놓은 느낌이다. 겨울산의 패자(覇者)인 소나무의 초록색이
유난히 짙어 보인다. 휘~잉! 깊은 잠에 빠진 여늬 나무의 반응에 시큰둥 했던 바람이
소나무를 만나서야 기분이 살아난 모양이다.광천읍내가 자그마한 소꼽놀이
미니어쳐같고, 농한기의 넓은 들판이 미동도 하지않은 채 적막만 감돈다.
먹물을 지긋이 머금은 명주솜 같았던 구름을 비집고 나온 햇님이 정오의 바다에
은빛가루를 뿌리기 시작한다.
넓은 바위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아래 몸을 부린다. 물이나 한잔 마시고
숨이나 고를 참이다. 가을 이면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주능선이 얼핏얼핏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거세고 억센 바닷바람에 억새꽃은 그리 오래 맺혀있질
못하고 흩어져 날아갔을 것이다. 덩치는 그리 크지도 않고 아담한 소나무와
바위들이 능선 길을 수놓는다. 해발610m의 능선삼거리, 우측으로 난 산길은
고도를 낮추어 가다 아차산을 솟구쳐 놓고 그 지맥을 광천읍쪽으로 향하다가
가라앉는 능선이다. 당골이나 옹암리에서 아차산을 경유하는 산행을 시도 할
요량이라면 2시간 정도는 산행시간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물한모금 마실정도의 산길을 걷다보면 우측으로 보령시 성연리와 연결이 되는
삼거리를 지난다. 키가 큰 수목이 군데군데 소나무를 제 하고는 별반 없으므로
해가 지는 서해바다 조망에 거칠 것이 없다. 처녀바위가 있는 능선이 만나는 삼거리,
정자가 세워져 있는 755m봉이 이제는 지척이다.
오서정(烏捿亭), 해발755m의 봉우리에 세워 놓은 정자의 이름이다.
천정 한켠에는 서산대사의 오언한시가 거무스름한 직사각형 현판에 흰샛 페인트로
정성스럽게 씌어 있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 눈 내린 들판을 가려면 모름지기 어지러이 가지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는 내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되느니라!"
조선후기에 태어나 85세로 입적하기까지 크나큰 업적을 남기신 서산대사는
유명한 사명대사의 스승이기도 하고 무예의 달인이기도 해서 누란의 위기에 빠진
겨레를 구하기 위하여 제자인 사명대사와 함께 승병을 조직 왜적에 대항하여
구국운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한 선각자이기도 하고 민족의 영웅이기도 한 분이다.
위의 한시는 민족의 지도자 백범김구선생이 애송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최근에는 광고카피에도 자주 애용이 되고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보령과 광천의 넓은 뜰,그리고 가물가물 서해안의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서북한풍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꽃잎을 바람에 모두 실려보낸 억새의 모습이 안쓰럽다.거무스름하게 먹물을 머금었던
구름은 이내 흩어지는 하얀 새털로 변하더니 이윽고 서북풍에 꽁지를 감춘 모양이다.
고만고만한 봉우리 두어개너머 정상이 바라다 보인다. 작으마하게 내려다 보이는
보령의 성연리 저수지의 작은 덩치에 넓고 푸른 하늘색이 가득 담겼다.
이왕이면 정자에서 호사스러운 점심을 해결하고 싶은데 한기가 가득한 서북풍의
위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상에 이르는 주능선에 2개의 공터인 헬기장 중의
한 곳을 이용하는 수 밖에 없다. 정상을 오른 후에 다시 들머리인 상담리로 하산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니 그런 도중에 중식을 해결하기로 한다.
한 길이 넘는 거대한 빗돌이 세워져 있는 정상, 해발790,7m!
충남의 최고봉인 옥천의 서대산 다음으로 높은 곳이며, 금북정맥의 최고봉이기도
하다.삼국사기에는 오서악(烏西岳)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당시에는 명산대천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누어 국가차원의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백제때는 오산(烏山)으로 불리며 대사(大祀)격에 해당되었고, 통일신라에 와서는
중사(中祀)의 위치에 있었으며 이후 백제부흥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고 한다.
항우의 오추마를 닮은 담가라에 올라 침입한 신라군을 호령하는 계백의 사자후가,
조국 백제를 재건하기 위하여 부여융을 옹위하고,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우는
흑치상지의 분전이 눈에 선하고, 울부짖으며 고국을 떠나서 타관객지 당나라에서
적국을 위하여 수많은 공적을 이룬 장군의 피끓는 사자후가 귀에 울리는 듯 하다.
정상에서 맞은 편으로 나 있는 산길은 성연리로의 향하는 하산길이다.
이제 예정되어있는 산길은 오던 길을 되짚어 가야 한다. 오서정 직전에 우측으로
주능선까지 넓은 임도가 올라 와 있다.
극성스럽진 않아도 옷속을 파고드는 바람의 한기(寒氣)가 식사를 하기에는 인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주능선을 벗어난 임도에는 바람이 저 만큼이나 비켜 나 있다.
여러 배낭에서 끄집어낸 도시락이 다양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까마귀 산"으로
비하되면서 영산의 의미는 상당히 퇴색됐지만 오서산이 단군조선에서부터 백제로
이어지는 동안 신령스러운 기운이 넘치는 산으로 받들어 진 것은 풍수지리적으로는
물론 그 정기와 위용이 "태양안에는 세발달린 까마귀인 삼족오(三足烏)가 살고,
신의 사자로서 천상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역활을 한다."는 우리 민족의
태양숭배사상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보이던 푸른 색이 어느새 추워 보이는 파아란 창공에 까마귀 한마리가
오찬을 즐기는 무리들의 상공을 배회한다. 주로 집단으로 서식을 하는 편인데
홀로 나선 것을 보면 저 놈도 어지간히 허기가 졌던 모양이다.
처녀바위능선을 타고 하산하려 했으나, 임도를 따라 광천읍내와 주위풍광을 즐기면서
유유자적의 산길을 따르는 것도 시도해볼만 할 것도 같다.
그늘이 길어질수록 날머리는 가까워 질 것이다. 그러나 거무스름한 그늘이 있는데로
키를 늘여보았자 산문을 나서면 그늘은 태양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산행에 들인 시간과 휴식,점심시간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4시간이 채 안된다.
산행후의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한다.
연말이고 하니 뒷풀이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일 게다.
세수대야 크기의 소쿠리에 석화가 가득 담겨 나온다. 가스 불위에 철망을 얹고 그위에
석화를 올려놓으면 뜨거워진 석화가 뜨거운 열을 받아서 "펑" 소리를 내며
입이 쩌억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벌어진 껍데기속의 굴을 초장에 찍어 먹는데 그 맛이 고소하다.
맨입으로 굴을 초장에 찍어 먹기만 하면 몇 첨이나 먹을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항마는
소주가 제 격이다. 그리고 산 낙지를 숭덩숭덩 칼질을 해 놓으면 잘려진 낙지발들이
오물조물 꼼지락 거린다.하얀소금에 들기름을 섞은 쏘스를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
입안에서 낙지발에 달린 빨판이 입안을 점잖게 두질 않는다.
거기에도 역시 소주가 제 격이다. 오서산은 해맞이뿐이 아니고 해넘이도 즐길 수 있는
호서의 진산인 동시에 영산(靈山)이다.
붉은 빛을 듬뿍안고 있는 태양이 하얀 달에게 어두운 밤을 맡기려 한다.
촛불이 꺼지려는 순간에 용을 한차례 펴면,그 순간 더 밝은 빛을 발하는 법이다.
붉은 빛이 바닷물에 흠뻑 물들어 간다. 태양이 하루 소임에 미련이 꽤나 남았나 보다.
끈적끈적한 붉은 핏빛 물감을 출렁이는 바닷물위로 걸지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