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덕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041-330-2557) 수덕사(041-337-6565)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 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 (王 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 (帝 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 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 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 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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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 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 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 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 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주요문화재: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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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입장료 : 개인 - 어른 2,000원 / 중,고등학생 1,5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 어른 2,000원 / 중,고등학생 1,200원 / 어린이 800원 (30명 이상)
이용시설
박물관 240평 규모 - 역사관 / 일반불교 미술관 / 경허,만공 기념관 / 중앙홀 전시대 / 불화관/ 비조관
도로안내
서울 - 경부고속도로 - 천안I·C - 국도21호선(35㎞) - 예산 - 국도 45호선(22㎞) - 지방도622호선(5㎞) - 수덕사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서해대교 - 당진I·C - 국도32호선(15㎞) - 합덕 - 지 방도622·609호선(16㎞) - 덕산 - 국도45호선(2㎞)·지방도622호선(5㎞) - 수덕사
대전 - 유성 - 국도32호선(81㎞) - 예산 - 국도45호선(23㎞) - 지방도622호선(5㎞) - 수덕사
현지교통
예산터미널 - 수덕사(06:25-19:15, 12회/일, 1시간 소요)
정보제공자 : 340-920 덕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041-330-2557)
충남 예산 덕숭총림은 만공 선사가 기틀다진 선불교 본가 (한겨레 신문)
▲ 하안거를 마치고 정혜사를 떠나기 전 덕숭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선승들.
충남 예산 덕숭산은 조선시대 사실상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선을 되살려 근대 선의 첫새벽인 경허 선사
의 가풍을 잇는 곳이다. 수덕사의 산내 말사인 정혜사는 덕숭산 정상 부근에 있는데, 경허의 제자인 혜
월 선사와 만공 선사가 머물면서 납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혜월이 51살에 부산 쪽으로 내려간 뒤 만공이 선원의 기틀을 다졌다. 옛부터 ‘사자의 포효에 백수의 뇌
가 파열되며, 사자굴에 다른 짐승은 살 수 없다’고 했다. 만공의 문하엔 새끼 사자들이 몰려들었다. 보월,
금봉, 고봉, 벽초, 혜암, 전강, 금오, 춘성, 원담, 숭산 등 비구 선사와 법희, 일엽, 만성 등 비구니 선사 등
훗날 한국불교의 선을 일으켜세운 기라성 같은 법기들이었다. 따라서 신의 근본도량인 뜻의 선지종찰로
추앙된다. 또 덕숭산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었던 영산회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만공은 선승들을 발심시키는 데 천재적인 기지를 발휘하곤 했다. 당시 내로라 하는 선지식 다섯 명에게
견성을 인가받은 전강선사에게 “네 깨달음은 저 불목하니(절 머슴)보다 못하다”고 단칼에 내리쳐버렸
다. 이 말에 분심이 격발된 전강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처절한 정진 끝에 사자후를 토했다. 또 우리나
라 최초의 여류시인인 김일엽이 처음 절을 방문했다가 밤에 화장실에 다녀와 자기 방을 못 찾아 여러 방
문을 두드리자 다음날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 여성이 남자 생각이 나 밤에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렸
다”고 공개망신을 주었다. 만공은 그런데도 일엽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그 자리에서 출가를 허용했다.
일부러 망신을 주어 그릇을 실험했다는 것이다.
덕숭가풍을 잇는 설정 스님은 “이제 좀 더 중생 구제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활발한 선풍이 덕숭산
에서 어떻게 세상 속으로 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