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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여행 이야기
제목을 아르헨티나 여행 이야기로 붙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파타고니아 지방을 포함한다. 파타고니아 지방의 명칭은 국경과 관련이 없다.
자료에 의하면, 파타고니아는 남위 40도 부근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 이남 지역을 가리킨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양국에 걸쳐 있다. 이 지방은 가장 큰 건조지대로서 덤불로 뒤덮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파타고니아라는 말은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했던 원주민을 가리키는 파타곤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파타고니아 지방을 여행할 때,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넘나든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아르헨티나 여행을 하게 된다. 칠레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왔기에 아르헨티나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아르헨티나는 남한의 28배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남극과 남부도서를 제외하고도 그렇다. 인구는 4,076만 명이다.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 스페인어와 발음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백인이 95%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92%다. 우리나라보다 12시간 늦다.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다. 화폐는 아르헨티나 페소를 쓰고 있다. 1달러에 16페소다. 1페소는 대략 우리나라 70 -80원에 해당한다.
아르헨티나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칠레 푸에르토 몬뜨 → 아르헨티나 바릴로체(2) → 칼라파테(2) → 칠레 푸에르토 나탈레스(2) → 아르헨티나 우스아이아(2) → 부에노스아이레스(2) → 푸에르토 이과수(1)
위에서 보듯, 파타고니아 지방에서의 여정은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넘나들게 된다. 그러다가 아르헨티나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파타고니아 지방인 바릴로체, 칼라파테, 우스아이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푸에르토 이과수를 더하면, 아르헨티나 여정은 9박 10일이 된다. 이번에 여행한 5개국 중 가장 많이 체류한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다.
- 큼직한 소고기 스테이크를 맛보다 -
1월 20일(금), 19일차
우리는 오후 5시 지나 아르헨티나 바릴로체로 왔다. 아침 8시에 푸에르토 몬뜨에서 출발했으니 버스로 9시간 걸린 셈이다. 일단 아르헨티나 페소화가 필요했다. 급한 대로 터미널에 있는 가게에서 일부 환전을 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왔다. 우리가 탄 젊은 택시 기사는 흥이 많은 듯 탱고 음악 리듬에 맞춰 손짓을 해가며 운전을 했다. 그리고 우리를 내려 주고는 보기 드물게 악수까지 했다.
숙소는 프레미에르 호텔이었다. 심바는 모인 자리에서 오늘 한턱을 내겠다고 했다. 다만 식사 시간이 8시부터여서 기다려 오늘 식사를 할 것인가, 내일 식사를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했다. 나는 좀 기다리더라도 오늘 먹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이 의견이 다수의 의견이 되면서 오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는 짐을 풀고 시간 여유가 있어 산책부터 했다. 호텔에서 조금만 내려가니 넓은 호수가 있었다. 호수 저편에는 설산들이 이어져 있었다. 풍경이 시원했다. 가로수 우거진 산책로가 있었다. 그리고 저편에 지붕이 뾰족 솟은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우리가 호텔을 찾는 데 좋은 표지가 되었다. 우리는 교회까지 가 본 뒤 숙소로 돌아왔다.
약속 시간이 되어 심바와 같이 식당으로 갔다. 고깃집으로 유명한 듯 8시 개시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음식점 앞에 서있었다. 우리는 예약한 자리에 앉았다. 심바는 소고기 스테이크를 미디엄으로 시켰다. 1인당 500g의 소고기였다. 심바는 고기는 자기가 살 테니 와인 값, 음료수 값은 내달라고 했다.
나는 스테이크는 먹어 봤지만, 이렇게 500g이나 되는 소고기는 처음 먹어본다. 그래서 한 번 칼질을 하다가 이것도 기념이 되겠다 싶어 사진을 찍었다. 고기는 질기지도 않고 맛있었다. 그러나 내가 소화하기에는 분량이 많았다. 그래서 일부는 다른 분께 드렸다. 식사 후 심바가 말을 바꾸어 와인 값도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팀은 심바 부담을 생각해서 500페소를 건네주었다. 다들 유쾌한 기분으로 공짜 소고기 파티를 즐겼다.
식사를 하고나서 옷가게에서 환전을 했다. 나보다 앞서 환전한 아가씨들이 잔돈을 다 챙겨 가는 바람에 나는 큰돈으로만 환전을 받았다. 잔돈도 달라고 했으나 대답은 싸늘하게 ‘노’였다. 우리는 환전한 후, 숙소에 돌아가 쉬었다.
- 바릴로체의 절경, 세로 캄파나리오 -
1월 21일(토), 20일차
오늘 아침은 굶었다. 특별히 내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간 잘 먹고 잘 잤다. 잘 적응하고 있다. 다만 어제 쇠고기를 먹었기 때문인지 하나도 시장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나는 침실에서 장부 정리를 했다. 그간 20일 동안 돌아다니면서 돈 쓴 것이 많았다. 또 환전도 여러 차례 했다. 또 회비를 갹출하기 전에 내 돈을 쓴 것도 있었다. 남다가 모자라다가 반복했다. 이것을 귀국하기 전 결산하려면 힘들 것 같았다. 중간 점검을 할 겸 장부 정리를 했다. 매우 복잡할 것 같았는데 한 시간 정리하니 얼추 되었다. 쉬는 시간을 잘 활용한 것 같아 좋았다.
오늘은 자유 일정이다. 우리는 로비에 나와 갈 곳을 상의했다. 먼저 캄파나리오 언덕에 가기로 했다. 스페인어로 세로 캄파나리오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가느냐였다. 교장이 프런트에 가서 직원에게 거기에 가는 택시비와 버스비 차이를 물었다. 넷이 타도 버스비가 훨씬 절약이 된다는 계산이 섰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이번에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야 했다. 책자에는 모레노 거리와 롤렌도 거리가 만나는 곳에서 20번 버스를 타라는 것이었다. 정류장에서 부부 팀을 만났다. 사모님이 책자에서 보았다며 버스를 타려면 교통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책자를 확인하니 그리 써있었다. 그래서 카드 파는 가게를 찾아 카드를 샀다. 그런데 문제는 충전을 해야 쓸 수 있는데 여기는 충전기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가게에 가서 충전할 수 있는지를 물으러 다녔다. 그런데 현금을 가지고도 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버스비는 20페소라고 했다. 그래서 도로 그 가게에 가서 카드를 반납하고 돌아왔다. 참 쉽지가 않았다.
오늘 주말이라 승객들로 버스 안이 혼잡했다. 이미 아줌마 팀도 타고 있었다. 나는 잔돈이 없어 100페소를 기사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기사도 잔돈이 없다며 20페소를 안 주는 것이 아닌가.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다.
한참을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나는 ‘세로 캄파나리오’라는 입간판을 보았다. 그러나 망설였다. 그것이 호텔명인지 리프트 타는 곳인지 분간이 아직 안 섰다. 그 정류장에서는 손님 일부만 내렸다. 그 다음 정류장에서는 사람이 많이 내렸다. 그래서 기사에게 물었다. 리프트 타는 곳을. 기사는 전 정류장이라며 손짓을 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러나 부부 팀과 아줌마 팀은 다른 곳에서 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지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500미터를 되돌아 걸어왔다.
리프트 요금은 비쌌고 시니어 할인도 없었다.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기분이 상쾌했다. 관광하는 기분이 났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경관은 절경, 그것이었다. 우선 전망대 위치가 탁월했다. 이곳은 앞뒤 모두가 호수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이렇게 호수가 넓고 설산으로 둘러싸여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곳을 본 적이 없었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사진을 찍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전망대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했다. 나닥(?), 내 앞에 선 할머니가 점원에게 그것을 주문했다. 그 빵을 지켜보던 박동문님이 그것을 시키자고 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가리키니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알아들었는데 지금은 그 정확한 이름을 잊어버렸다. 먹어보니 빵에 쑥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런데 쑥 냄새는 나지 않았다. 특이한 빵이었다. 먹는 데 거부감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 빵과 박동문님이 아침 뷔페 식당에서 가져온 과일로 점심을 때웠다.
식사 후 우리는 전망대 반대 방향으로 가서 조망하였다. 전망대 쪽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훌륭한 전망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다가 아줌마 팀이 여기에 온 것을 보았다. 역시 그 팀이 위치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후문에 의하면 아줌마 팀은 택시 타고 되돌아왔다고 했다. 부부 팀은 걸어서 돌아오다가 그만 숙소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고 했다. 이곳을 단지 스키 타는 리프트로 알았다고 했다. 그게 아닌데.
우리는 한동안 사진을 찍고 전망대 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자 한국을 잘 안다는 듯이 태권도 시늉을 했다. 그리고 떠나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무초 구스토’라고 말했다. 무척 반갑다는 뜻이다. 나 역시 배운 대로 ‘엔깐따도’라고 응대했다. 그 사람이 내가 잘 응대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의자가 있는 다른 전망대로 가서 쉬었다. 하드가 먹고 싶다고 해서 사왔다. 관광지라 무척 비쌌다. 이곳 역시 전망대라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거기서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리프트를 타고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갈 때에도 버스를 탔다. 내가 조현종님께 버스요금을 내라고 드렸다. 그런데 님은 기사에게 요금을 주지 않았다. 다른 승객들은 카드를 찍고 탑승하기에 기사도 우리가 카드를 찍은 것으로 아는 것 같았다.
시가지에 다 왔다. 하차할 정류장을 찾아야 했다. 공원 찾아갈 때 경황이 없는 가운데에서 탑승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떠난 것이었다. 아무래도 하차할 지점을 지나친 것 같아 서둘러 하차했다. 조현종님은 버스요금을 기사에게 주지 않고 도로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 돈을 기사에게 주지 않고 내렸다. 우리가 앞서 갈 때도 기사에게서 잔돈을 못 받지 않았는가. 나의 소심한 복수심(?)의 표현이었다.
호텔을 찾기 위해 나는 먼저 호숫가로 내려갔다.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살폈다. 역시 교회가 표지였다. 우리가 정류장을 지나친 것이었다. 그로써 호텔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조현종님이 나에게 파타고니아박물관에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둘이 나섰다. 아까 지나쳐서 내린 곳이었다. 조현종님은 아까 내렸을 때 가보고 싶었는데 내가 앞장서서 호텔을 찾아가는 바람에 못 봐 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오늘 토요일이어서 박물관 문은 이미 닫은 상태였다. 건물 외관만 찍었다.
주변에 노점상이 서있었다. 나는 조금 둘러보다가 도중에 쉴자리를 찾아 쉬었다. 조현종님은 한동안 더 둘러보다가 돌아왔다.
저녁은 일식집과 중식집 중 한 곳을 가려고 했다. 일식집은 멀고 중식 집은 호텔 건너편에 있었다. 마침 심바가 있었기에 같이 중식집에 가자고 했다. 볶음밥을 주문해 먹었다. 여기는 단일 품목이라 우리나라처럼 수프는 주지 않았다. 돈을 내고 주문해야 한다. 그 대신 고량주와 맥주를 시켜 마셨다.
식후에 바릴로체에서 유명하다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갔다. 주문해서 먹는 가게다. 아이스크림이 무척 달았다. 큰 것을 시켜서인지 다 먹으니 배불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아이스크림보다 맛있다고는 못하겠다. 다음에는 초콜릿 가게에 가서 이 역시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초콜릿을 선물용으로 샀다. 달러로 계산했다.
- 저녁을 직접 지어 먹다 -
1월 22일(일), 21일차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7시에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오늘은 엘 칼리파테로 간다. 9시 40분에 비행기에 탑승해서 11시 25분에 도착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로스 도스 피노스 호텔에 도착했다.
이 숙소는 다른 곳과 달리 주방 시설과 식당이 있었다. 천막 치고 야영하는 곳까지 있었다. 말이 호텔이지 종합 합숙소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먼저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주변에 ‘스시바’라는 교포가 운영하는 일식 집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모처럼 점심은 일식으로 하자고 했다. 호텔 측으로부터 일식 집 위치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일본 식당이라고 해도 몰랐다. 급기야 관광안내소까지 가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주소를 모르면 찾아 줄 수 없다고 했다. 찾으면 길이 있다고 정확히 스시바 위치를 알려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일식 식당이 두 군데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찾고자 하는 식당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스페인어로 한참 설명하여서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스시바를 찾았다. 우리가 못 찾았던 이유는 호텔 측에서 스시바 집 방향을 반대로 알려 주어서였다. 그리고 뒤돌아 생각하니 스시바 위치를 알려준 사람의 말이 정확했다. 내가 확실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면 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다.
스시바 주인은 일본인 남편과 결혼한 한국인 교포였다. 우리는 스시를 사먹었다. 식사 도중에 심바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심바가 내일 우리가 할 투어를 이 여인에게 위탁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저러나 스시는 비싸므로 식비는 비싸게 치러야 했다. 식당 측에 내일 도시락 준비를 부탁하려다가 포기했다. 그 대신 호텔에 주방 시설이 있는 만큼 우리가 직접 저녁을 해 지어 먹기로 했다. 그래서 쌀에 대해서 문의했다. 식당 주인은 친절하게 슈퍼에서 어떤 쌀을 구입해야 하는지 메모해 주었다.
식사 후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부부 팀과 의기투합해서 같이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같이 슈퍼에 가서 돼지고기, 상추, 계란 등을 사고 내일 점심으로 먹을 시리얼, 과일 등을 구입했다. 비용은 비례로 분담하기로 했다. 밥은 박동문님이 전문가 솜씨를 뽐내며 짓기 시작했다. 부부 팀도 삼겹살을 굽고 계란 프라이를 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그 사이 나와 조현종님은 다시 슈퍼에 가서 맥주와 콜라를 사가지고 왔다. 저녁은 모처럼 삼겹살과 상추, 고추장과 밥으로 포식했다. 그리고 내일 점심 도시락도 쌌다. 아줌마 팀의 큰언니가 우리에게 된장국 수프를 두 개 주었다. 내일 점심 국으로 먹기 위해 보온병을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내일은 남극을 제외한 가장 큰 빙하가 있는 칼라페테 국립공원으로 간다. 거기서 배를 타고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 가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미니트레킹을 하는 투어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투어에서 교장 나이가 70세를 넘었다는 이유로 불허되었다. 교장은 우리 일행과 떨어져 트레킹을 신청하지 않은 아가씨들과 함께 투어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트레킹을 하지 않고 배에 승선해서 빙하를 보며 유람하는 투어였다. 교장은 누구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분이신데 나이를 이유로 트레킹에서 제외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못내 서운하신지 그 말을 자주 했다.
- 빙하 체험을 하다 -
1월 23일(월), 22일차
교장과 아가씨는 우리보다 먼저 7시에 투어를 떠났다. 떠나는 모습을 배웅했다. 여기서는 아침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제 준비한 시리얼과 과일로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가지고 8시에 투어에 나섰다. 차량이 와서 외국인과 합승하여 투어에 나섰다.
간밤에 비도 왔고 아침에도 비가 내렸다. 혹시 몰라 우비는 준비했지만 오늘 투어가 약간 걱정이 되었다.
버스 속에서 가이드에게 국립공원 입장료 330페소를 냈다. 어제 투어비로 2,400페소를 냈었다. 가이드는 스페인어와 영어로 번갈아 안내했다. 점차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차창 밖을 보니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다. 이쪽 호수에서 저쪽 언덕에 걸치는 큰 무지개였다. 다만, 눈으로 보는 것과 달리 차창으로 찍으니 무지개 색깔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아쉬웠다. 걱정하던 것과 달리 날은 차차 개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호수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고 점차 빙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갈수록 빙하는 가까워졌다. 길이 50km, 폭 5km를 자랑하는 모레노 빙하다.
가이드는 우리를 빙하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의 전망대로 안내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하더니 우리에게 1시 반까지 돌아오라고 했다.
우리는 전망대 길을 따라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나는 가이드에게 지금이 런치 타임이냐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했다. 여기 주변에서 식사하라고 가리켰다. 우리는 전망대 위에 있는 벤치로 와 어제 싼 도시락을 먹었다. 맨밥에 멸치에 고추장을 찍어 먹는 초라한 식사였다. 다행히 보온병에 된장 수프를 풀어서 반찬 대신으로 먹었다. 그것도 한 끼 반찬이 되었다. 1시 반이 되어 버스에 승차하자 이번에는 가이드가 인사하고 내렸다.
투어차량이 뚜레 호수 선착장에 도착하자 다른 가이드가 우리를 인도했다. 나는 승선 줄 앞에 섰다. 가이드는 나에게 한 팀으로 승선하라고 했다. 그래서 뒷줄에 서있는 부부 팀과 아줌마 팀을 불렀다. 20분간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넜다. 배는 빙하가 있는 건너편 선착장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팻말을 지나 산장으로 올라가 대기했다. 산장에서는 미니 트레킹에서 필요한 장갑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우리는 빙하 체험으로 인도할 안내인을 따라 오솔길을 걸어갔다. 산책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평지에 와서 스페니시 팀과 잉글리시 팀, 두 팀으로 나누라는 가이드 지시에 따라 나뉘었다. 가이드의 영어 회화 능력에 따라 팀을 구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잉글리시 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빙하 가까운 곳에 있는 막사 같은 임시 시설물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아이젠을 장착했다. 직원이 아이젠을 일일이 착용해 주었다.
아이젠의 무게가 우리가 통상 겨울 등산에 착용하는 아이젠의 몇 배가 될 정도로 묵직했다. 많이 걷기는 힘들어도 균형을 잃어 옆으로 쓰러지는 일은 없겠다. 그런데 스텝이 엉기면 채일 수 있었다.
가이드가 출발하기 전에 걷는 방법 외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주었다. 도중에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라, 크레바스가 있을 수 있다. 또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마라고도 했다. 우리는 주의해서 대열지어 따라갔다. 그러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말라는 주의사항은 지키지 않았다. 가이드는 얼음 덩어리를 들고 왜 호수가 크리스탈 빛을 띠는가를 설명했다.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영어 실력이 짧아 못 알아 들었다.
가이드는 우리를 언덕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두 가이드 중 한 명은 선두에 서서 설명하고 또 한 가이드는 묵묵히 뒤에서 우리가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언덕으로 올라간 뒤 한 동안 사진 찍는 타임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냥 내려가 했는데 다시 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 역시 산책하는 기분. 기분이 좋았다.
다시 사진 찍는 타임이 주어졌다. 조현종님께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모습을 본 가이드가 나에게 피켈을 빌려 주었다.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도중 작은 언덕에 탁자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용도로 세워져 있는지 몰랐다. 탁자 위에 그라스가 팀 숫자대로 놓여 있었다.
가이드가 캐온 얼음을 그라스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두 가이드가 양주와 물을 그라스에 채웠다. 얼음물은 미성년자에게 주고 성인들에게는 위스키를 부어 마시게 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위스키를 건배했다.
우리는 다시 임시 시설물 앞으로 돌아왔다.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각자 아이젠을 풀었다. 두 시간 정도 트레킹을 한 것 같다. 등산 체험을 했다기보다는 가볍게 언덕에 올라갔다가 내려 온 느낌이었다. 그래도 시원한 빙하 속에서 체험하고 왔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우리는 산장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빨리 돌아온 것은 우리나라 배낭 팀뿐이었다. 다음은 온 브라질에서 온 부자. 이들은 우리를 숨 가쁘게 따라온 듯. 가벼운 한숨 소리를 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인의 속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가 전에 여기서 받은 장갑을 임시막사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내가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 아이젠을 풀 때 장갑을 옆에 두고서는 돌아올 때 그냥 놓고 온 것이었다. 그런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돌아오다가 또 선착장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아까 못 찍은 풍경 사진을 찍었다. 야생화도 찾아 찍었다.
배를 타고 돌아와 다시 투어 차량을 탔다. 차량은 손님을 호텔마다 들러 내려 주었다. 6시 반이 되었다. 우리가 가장 마지막으로, 가장 초라한 호텔에서 내리는 손님이었다.
숙소에서 먼저 온 교장님을 만났다. 배에서 빙하를 보며 유람하다가 돌아 왔다고 했다. 이런 투어는 이미 남미 크루즈를 경험한 교장에게는 재미가 있을 리가 없었겠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오늘 재미있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오늘은 트레킹을 한 만큼, 스테이크를 먹자고 했다. 그런데 또 호텔에서 말하는 식당은 찾아보아도 없었다. 전번처럼 방향을 바꿔 말한 것은 아닌지.
차선책으로 고기 뷔페식당으로 갔다. 가격은 비쌌다. 그래도 음료수는 시켜야 한다기에 물은 시켰다. 나중에 콜라를 시켜 나눠 마셨다. 식사 후 나는 조현종님과 슈퍼에 들러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에 우리 방은 청소하지 마라고는 했다. 그렇지만 숙소에 수건까지 갖다 놓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주인인 듯 관리인에게 수건이 없다고 갖다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물어 보았다. 수건을 실에 갖다 놓았다는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내가 확인했는데도 그런 말을 들으니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로 수건이 ‘없어요’라고 다시 말했다. 그랬더니 나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숙소에 돌아와 생각하니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말인지 불쾌했다. 심바를 찾아 그런 점을 불평했다. 심바는 프런트에 말하러 갔다. 도중에 청소 아줌마가 나에게 수건을 갖다 주었다. 그리고는 실내에 들어와서 과연 수건이 없었는지 들러보고 갔다. 심바가 돌아왔기에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이제 샤워하고 잤다.
- 다시 국경을 넘어 칠레로 가다 -
1월 24일(화), 23일차
일찍 일어나 7시 반에 출발했다. 짐을 끌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계단 길로 올라갔지만 거리가 짧아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오늘은 다시 국경을 건너 칠레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간다.
국경 출입국 심사를 거쳐 칠레로 건너갔다. 거리가 가까워 심사를 거쳤어도 5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 우리는 칠레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갔다. 거기서 1박 2일 동안 머물면서 또레스 델 빠이네를 감상했다. 그리고 오전에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출발해서 오후에 아르헨티나 우스아이아로 오게 된다.
- 대륙의 땅끝, 우스아이아에 도착하다 -
1월 26일(목), 25일차
국경에서 다시 아르헨티나 거친 길로 떠났다. 기사는 어떻게 한결같이 이런 거친 길을 쉬지도 않고 달리는지 그 무쇠 신경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점차 리오그란데 시에 가까워지면서 좀 풍경이 나아졌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드디어 리오그란데 강이 나타났다. 차량은 배 속에 진입했다. 우리는 하차하여 선상 갑판 위로 올라갔다. 거친 땅만 보다가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니 기분 전환이 되었다.
심바가 갑자기 ‘고래다!’라고 외쳤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그 말뜻을 알아듣고 강을 내려다보니 저 멀리서 고래 꼬리가 살짝 보였다. 나는 사진을 제대로 찍으려고 다시 그 고래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고래는 더 이상 우리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쉬웠다. 모처럼 좋은 기회였는데.
그러는 가운데 배는 항구에 다다랐다. 우리는 내려서 다시 그 차량에 탑승했다. 아르헨티나 입국 사무소는 황량했다. 짐 검사는 없었지만 기사가 절차를 밟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우리는 차량 밖에 나와 서서 대화를 나누며 기사를 기다렸다. 기사가 돌아와 다시 차는 줄기차게 달렸다. 그러다가 차차 언덕 쪽으로 올라갔다. 나무들이 보이고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스아이아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우스아이아에 근접하면 할수록 산세는 더 험해졌고 침엽수 나무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풍광이 볼만해졌다. 과연 절경 우스아이아인가!
우리는 우스아이아 관문을 지나 리오 오나 호스탈에 도착했다. 기사는 우리를 내려주고는 다음 목적지로 홀연히 떠났다. 잘 있어라, 잘 가거라는 인사도 없이. 12시간을 줄기차게 운전한, 정말 과묵한 사나이였다.
도착하자마자 심바는 이 호텔에 오게 된 감회를 말했다. 딱 10년 전 마지막으로 팀을 인솔하여 이 호텔에 머물렀다고 했다. 지금 있는 노인이 그때 만났던 그 아저씨였다고 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는 4인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전 양해가 있긴 했지만, 우리 팀에게만 계속 불리한 조건이 주어졌다. 심바도 숙소가 없어 다른 호텔에서 자야한다고 했다.
숙소는 해안가에 가까웠다. 심바는 식당 몇 군데를 소개해 주었다. 대게 식당과 중국집 뷔페식당이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대게 식당은 가격이 대단히 비싸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벽화가 이 해안 도시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사진으로 찍었다.
막상 대게 식당에 가보니 손님이 꽉 차 식사 순서를 기다리기도 뭐했다. 결국 ‘밤부’라는 중국집 뷔페식당으로 갔다. 결국 팀들이 전부 여기에 와서 식사했다. 가격은 싼 편은 아니었지만 대게도 있고 먹을 것이 풍부했다. 식사 문제로 고생하던 박동문님도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심바도 식사하러 이 식당에 들어오더니 우리가 이곳에서 음식을 품목별로 사가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 내가 계산하러 카운터에 갔더니 여주인이 금액이 ‘∼이네요’라고 했다. 나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하니 그 여인이 한국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바에게 물어보니 중국인이라고 했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말도 하게 되나 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음식물을 구입했다.
- 크루즈 선을 타다 -
1월 27일(금), 26일차
7시에 식사하고 8시에 숙소에서 나섰다. 우스아이아는 남미의 끝이자, 대륙의 끝이다. 아무리 여기가 여름이라고 해도 남극의 전진 기지인 이곳은 추울 줄 알았다. 그러나 봄 날씨 같았다. 아침인데도 하나도 춥지 않았다. 해안가에 다다랐다.
해안가 풍광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떤 사나이가 우스아이아 팻말 앞에서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자동카메라로 자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과연 그럴 만했다. 남미 여행 중에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사나이들을 많이 보았다. 필시 이 사나이도 남미 대륙을 오토바이로 여행했으리라. 그리고 드디어 대륙의 끝, 우스아이아에 온 감회를 그리 표현했으리라.
우리는 생각하지도 않은 부두세 20페소를 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심바도 투어비를 낼 때 말해 주지 않은 것이었다. 9시 반에 배는 출항했다. 이번 투어는 크루즈를 타고 비글 해협으로 들어가서 강치, 바다표범, 펭귄 등을 보고 오는 여정이다.
우리는 배 선두 앞 유리창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가끔 밖으로 나가거나 이층으로 올라가 보고 사진을 찍었다. 배는 펭귄이 많이 있는 섬 앞에 머물렀다. 펭귄이 얼마나 많던지 섬 전체가 까만 모습이다.
이번에는 등대가 있는 섬 앞에 한동안 정선하듯이 서 있었다. 거기에는 펭귄도 많았지만 물개도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도 맘껏 사진을 찍었다.
배는 다음 섬 앞에 섰다. 또 펭귄이 집단으로 서식하는 섬이었다. 그 많은 펭귄 중 암수 두 마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 두 마리는 서로 눈이 맞아 사랑하는 사이 같았다. 인간이 하는 행동과 유사해서 그 두 마리를 집중해서 찍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만 그리 찍은 것은 아니었다. 그 두 마리 펭귄의 행동이 특이해서 모든 관광객의 주시 대상이었던 것이다.
배는 풍광이 좋은 섬에 당도했다. 그 섬엔 호텔도 있었다. 일부 손님들이 하선했다. 나도 하선하려니 선원이 제지했다. 여기서 하선하는 손님은 여기서 점심 식사하기로 예약한 손님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음 배로 돌아올 손님들이었다. 우리는 싼 투어비를 내고 온 손님이었다.
배가 귀항할 때는 바람도 세게 불고 풍랑도 일었다. 풍경도 아까 다 보았던 것이다. 이제는 풍광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다. 자연히 실내로 들어와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를 즐기는 박동문님이 어떤 소년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페인어를 모르니 대화가 잘 진전이 안 되었다. 영어로 어렵게 대화하면서 그 소년에 대해 나도 알게 되었다. 그는 유소년 클럽 팀에 있는 축구팀 주장이었다. 나중에는 박동문님과 소년은 이름도 전화번호도 이메일도 교환했다. 그 소년은 우리에게 파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파세라, 나는 파세가 무엇일까 하다가 문득 생각해 냈다. 애는 우리에게 페이스북이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박동문님도 나도 페이스북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다시 대화가 끊겼다. 배는 항구에 도착했다. 나는 그냥 헤어지기에는 뭔가 서운함을 느꼈다. 그래서 노트를 꺼내 영어로 ‘너는 메시같은 베스트 풀레이어가 될 것이다.’라고 써주었다. 그리고 박동문님과 함께 한글로 사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우리는 하선한 뒤 국립공원엔 가지 않았다. 시간도 없었고 갈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심바에게 어제 우리가 한 방에서 불편하게 잤다고 말했다. 호텔에서는 2인실을 새로 내주었다. 조현종님과 박동문님은 그리로 짐을 옮겼다.
우리는 로비에 앉아 대화를 했다. 심바는 아프리카 경험 이야기를 꺼냈다. 마사이족은 용맹해서 마사이족의 특징인 붉은 옷을 입고 다니면 어린 아이라도 사자도 건들지 못하고 알아서 피한다고 했다. 이는 대대손손 이어져 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투어할 때 경비는 마사이족이 담당한다고도 했다. 마사이 신발도 그들이 폐타이어에 끈으로 묶어 신 대신 신고 다니던 것을 회사에서 개발한 것이라고도 했다. 내가 심바 명칭을 갖게 된 연유를 물어보았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사자를 심바라고 한다고 했다. 자기가 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 마사이족이 자기에게 이름을 묻기에 심바라고 했다고 했다. 그 후부터 마사이족은 자기 후계 가이드들을 통칭해서 심바라고 부른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저녁 식사 이야기도 오갔다. 저녁은 어제 먹은 밤부 식당에서 품목별로 음식을 사와 호텔 식당에서 식사하자고 했다. 부부 팀의 사내는 경제적인 문제인지 와인 한 병만 내놓고 식사비 분담은 어렵다는 뜻으로 빠지겠다고 했다. 그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아줌마 팀 큰언니에게 이야기를 해서 두 팀이 전체 식사비를 분담하기로 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우리는 심바와 밤부 식당에 갔다. 그리고 품목별로 음식을 샀다. 나는 음식 양을 얼마로 해야 할지 셈하기 어려웠다. 경험 많은 심바가 주도해서 음식을 주문했다. 숙소로 돌아오다가 슈퍼에 들러 맥주 몇 병도 샀다. 그 사이 부부 팀과 아줌마 팀은 식사 준비를 했다. 우리는 호텔 식당에서 와인과 맥주로 건배하면서 푸짐한 저녁식사를 했다. 설날 전야를 그렇게 보냈다.
- 땅고의 고장에 오다 -
1월 28일(토), 27일차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은 그리 멀지 않았는데 서둘러 일찍 출발했다. 오늘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다. 참고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들’이라는 뜻이다. 비행기는 9시에 출발해서 12시 반에 도착했다. 짐을 찾는데 수하물 운반 기계가 고장이 났는지 정지되었다. 안내 없이 30분 이상 지연되었다.
오후 2시에 숙소인 아스펜 타워스 호텔에 도착했다. 중심지에 위치한 4성급 호텔이었다. 호텔 앞에서 한국말을 하는 직원이 안내했다. 누구신가 했더니 여행사 현지 직원이었다. 팀장을 기다린다고 했다. 심바를 그리 불렀다.
그 직원이 오늘 안내를 맡았다. 도난 주의를 먼저 이야기했다. 길을 가다 보면 어떤 여인이 다가와 똥을 찍 뿌리고 간다. 당황하는 사이에 도와준다고 남자들이 접근하면서 털어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뿌리치며 갈 길 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그리고 볼거리를 안내했다. 오늘 낮에는 보까 지구 방문하는 것이 좋고, 저녁에는 탱고쇼를 보는 것이 좋다. 밤의 야경은 마데오 거리가 좋고 내일 일요일 시장이 열리니 산딸보 지구로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탱고쇼에 참여할 분은 신청하라고 했다. 호텔에 대기하고 있으면 저녁에 데려다 준다고 했다. 아가씨와 아줌마 팀이 신청했다. 우리 팀 중에서는 박동문님이 신청했다. 우리는 환전에 대해 물어보고 한식당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오늘 설날이라 한식당이 많이 쉰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알아보고 저녁에 호텔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현장을 잘 아는 직원이 설명하니 편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명동 거리인 플로리다 거리에 가서 환전부터 했다. 그리고 부부 팀과 함께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이 우리에게 그림이 그려진 메뉴판을 갖다 주었다. 그 중에서 뭘 먹을까 고민했다. 그때 할머니 종업원이 주문받으러 왔다. 우리는 논의 끝에 각자 주문했다. 교장이 내가 시킨 음식을 보더니 전에 시킨 것을 취소하며 그 종업원에게 다가가 다시 설명했다. 내가 보니 그 종업원은 대단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역시나 취소한 음식이 그대로 나왔다. 그리고 내가 주문한 음식은 하나만 나왔다. 불만 속에서 식사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뒤늦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그 음식을 취소한다고 했다. 주문한 음식이 제대로 안 나왔고 또 너무 늦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화를 내면서 도로 음식을 가져갔다. 상황이 불쾌했다. 내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할 것을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내가 그리하지 않았냐면 부부 팀이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황당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부부 팀이 먼저 계산을 하는데 식사비가 다르게 나왔나 보다. 부부 팀 사내는 먼저 계산을 취소하고 식비를 다시 계산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카운터에 있던 중년 남자종업원이 사내를 놀래준다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 사나이도 지지 않고 맞장구쳤다. 그 종업원은 고객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다. 그리고 부부 팀은 우리 시야에서 빨리 사라졌다. 문제는 우리였다. 우리 역시 계산이 다르게 나왔다. 원 가격보다 훨씬 비쌌고 취소한 음식 값이 계산되어 나왔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가운데 고성이 오갔다. 한동안 설전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제대로 계산하자며 그림으로 그려진 메뉴판을 가져 오라고 했다. 결국 우리가 먹은 음식은 그림 메뉴판에 나와 있는 값대로 치르고 취소한 음식도 값을 치르고 나왔다. 취소한 음식은 싸가지고 나왔다. 이 식당에서는 관광객을 상대로 이런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박동문님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식당 측에 더 항의를 하고서 나왔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보까 지구로 갔다. 라 보까 지구는 땅고를 잉태한 원색의 항구였다.
자료에 의하면, 라 보까 지구는 아르헨티나 최초의 항구였다고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3백만 명이 넘는 유럽 이민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왔다. 이 부두는 부두 노동자와 선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머나먼 나라에 홀로 온 이민자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삶의 애환을 선술집이나 거리에서 술과 땅고 춤으로 달랬다. 힘든 낮 동안의 삶을 거부하고 밤에는 멋진 옷을 입고 나와 남녀가 춤추며 거리를 채웠다.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이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 땅고는 자신의 남성다움을 과시하기 위한 필수적인 춤이었다. 이것이 지독히 매력적인 땅고의 서글픈 출발이었다.
※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땅고라고 한다. 스페인어 발음이 그렇다.
지금 보까 지구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노점상이 많이 있고 관광객이 넘쳐나고 노천카페와 레스토랑 앞에서 고객 앞에서 노래하고 땅고 춤을 추며 고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 거리는 까미니또라고 한다. 라 보까 지구의 100미터도 채 되지 않은 골목길이다. 거기에 다양한 원색의 양철 판자로 덧씌운 집들로 거리가 화려했다. 인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카 주니어스 클럽 운동장도 있었다.
우리는 골목길을 다녀 보고 노천 레스토랑에 앉아 종업원에게 콜라를 주문했다. 노래하는 진행자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춤추는 무용수와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박동문님이 나가 무용수와 사진을 찍었다. 여자 무용수는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게 해 주었다.
진행자는 노래를 마치더니 모자를 들고 순회했다. 박동문님이 팁을 모자 안에 넣었다. 우리는 이제 그만 보고 일어나서 다른 곳을 가려고 했다. 콜라 값을 치르려니 역시나 비쌌다. 노래를 듣고 춤을 본 값이 계산된 것이었다.
우리는 다른 골목길도 순회했다. 다른 레스토랑에서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연주하면서 춤을 추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보까 지구를 돌아다녔다. 아르헨티나의 3대 유명인사인 전설의 무용수 까를로스 가르델, 에바 페론, 마르도나의 인형으로 치장한 집을 보았다. 시장 안을 더 돌아보다가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어서 박동문님은 일행과 탱고쇼를 보러 갔다. 우리는 가이드를 기다렸다. 가이드가 돌아왔기에 우리는 심바와 같이 한식당에 갔다. 평소 같으면 좋은 식당이 많지만 명절이라 많이 쉰다고 했다. 오늘 가는 곳은 고기는 무제한 제공하는 식당이라고 했다. 값이 비쌀 것 같았다. 사람수가 많아 차 두 대로 갔다.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그리고 한식당 부근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우리나라 교민은 대개 옷 장사를 하는데 5시면 가게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여기가 빈민가는 아니고 땅값은 비싼 곳이라고 했다. 택시비가 많이 나왔다. 그렇게 거리가 멀었다. ‘큰식당’이라는 한식당이었다. 명절이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역시 김치가 맛없었다. 고기는 많이 먹었지만 큰 만족을 얻지는 못했다. 식사를 하고 박동문님을 생각하여 고기와 밥과 김치를 싸왔다.
11시 반이 지나 식당에서 나왔다. 큰 택시를 불러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밤중이었고 한 대의 택시에 과원이 탔으므로 기사에게 팁을 주었다.
- 온종일 걸어서 시내 투어하다 -
1월 29일(일), 28일차
오늘은 전일 자유일정의 날이다. 시내를 걸어서 도시를 느껴보기로 했다. 조현종님이 주도하기로 했다. 7시에 일어나 식사하고 호텔에서 나섰다. 일요일이어서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택시를 타고 레골레타 묘지로 갔다. 이곳은 영화 ‘에비타’로 유명한 에바 페론이 있는 묘지로 유명한 곳이다. 레골레타 묘지에서 부부 팀을 만났다. 아침 일찍 걸어서 왔다고 했다. 관광지를 가면 서로 만날 약속이 없어도 자주 만나게 된다. 레골레타 묘지는 시에서 관리하여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 묘지는 역대 대통령을 비롯하여 아르헨티나의 주요 인사들의 무덤이 모여 있다. 납골당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조각 박물관을 연상하게 한다.
이중 대부분의 관광객은 에비타 묘지를 찾는다. 에비타는 사생아로 태어나 여배우로 살다가 페론 대령과 결혼해서 영부인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부유층을 적대시하며 저소득층과 여성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페론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가족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여기 묻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묘지에는 항상 추모하는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우리도 에비타 묘지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었다. 많은 관광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찍 이곳에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공원 쪽으로 나왔다. 엄청나게 큰 수목이 서있었다. 그 엄청난 나뭇가지를 어깨로 받치고 있는 사내가 힘겨워 하는 모습의 조각상이 재밌었다.
우리는 거리를 걸었다. 일요일어서 예배를 보는 듯 가게는 문을 닫았고 거리는 한산했다.
우리는 산 마르띤 광장의 벤치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명동 거리인 플로리다 거리를 걸었다. 여기는 제1의 쇼핑 거리로 가죽제품, 옷 가게, 음식점과 카페, 환전소가 몰려 있다. 곳곳에서 환전하라는 ‘깜비오’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여러 가게를 기웃거렸다.
5월 광장에 왔다. 이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 광장이다. 1810년 5월 25일 스페인에 대한 독립 선언을 한 ‘5월 혁명’의 이름을 딴 광장이다.
우리는 광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대성당부터 찾아갔다. 부조가 새겨진, 삼각형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로 이 건물이 언뜻 성당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그러나 건물 뒤에 서있는 종탑이 이곳이 대성당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성당 앞 오른쪽 벽에는 남미 해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산 마르띤 장군을 추모하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예배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려다가 경건한 분위기를 방해할까봐 자제했다.
5월 광장 동쪽 편에 있는 대통령궁(까사 로사다)에 가까이 가서 건물 사진을 찍었다. 붉은 색을 표방하는 자유당과 하얀 색을 대표로 하는 연합당의 단합을 상징하기 위해 사르미엔또 대통령이 지금 분홍색으로 칠할 것을 명령했다는 건물이다.
우리는 계속 걸어 노점상이 펼쳐져 있는 산딸모 시장으로 걸어갔다. 땡볕이내리쬐고 있고 가게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도중에 지쳐 가게에 들어가 하드를 사먹었다. 슈퍼에 가서 콜라와 과일도 사서 먹었다.
가게에서 하드 사먹었을 때 이야기다. 하드 4개를 달라고 하니 240페소를 달라고 했다. 한 개에 60페소다. 그간 회계 맡느라고 짠돌이가 된 내가 점원에게 왜 이리 비싸냐는 투로 비싸다고 했다. 그랬더니 점원이 놀란 듯이 이것은 싼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는 이보다 훨씬 싸다고 대꾸했다. 하드를 먹고 가게에서 나오면서 그 점원에게 인사로 손짓을 하니 그 점원은 싼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대꾸가 재밌었다.
어제 우리만 한식당에 가서 한식을 먹었고 공금을 썼기에 식사비를 계산해서 박동문님께 드렸다. 또 열쇠고리를 공금으로 사려는데 박동문님은 사지 않겠다고 해서 그 돈도 드렸다. 박동문님은 그 돈으로 티셔츠를 사신 것 같다. 그 옷이 잘 어울렸다.
우리는 지쳐 산딸모 지구까지 가지 않고 중도에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가까운 거리 같은데 여기는 일방통행로가 있어 요금이 많이 나왔다. 쉬다가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다시 나섰다. 이번에 맥도날드 점에 가서 햄버거 세트를 주문해 먹었다.
마데로 항구로 걸어갔다. 잘 관리된 항구였다. 여자의 다리라고 여자의 다리를 형상한 듯한 다리가 보였다. 나는 그 명칭이 호사가가 만든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리 앞에 가서 쓰여 있는 명칭을 보니, 다리: “여자의”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공원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또 부부 팀을 만났다. 노점에서도 만났고, 오늘 세 번째 만나는 것이다.
평지가 넓은 공원의 한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고 있었다. 배구를 하고 럭비공을 주고받고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박동문님과 부부 팀의 아저씨가 배구하는 이들과 어울려 한동안 같이 운동하기도 했다.
우리는 다시 수변 공원으로 산책하듯이 걸어갔다. 거기서는 단체 플래시 몹이 한창이었다. 거기서도 한동안 구경하다가 다시 강가로 돌아왔다.
이제 저녁이 되었다. 우리는 마데로 거리의 야경을 즐겼다. 그리고 숙소로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오월 광장을 지나다가 광장 한 편에 묘비가 여러 개 세워진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군부 통치 시절 행방불명된 이들의 묘지인 듯했다. 지금도 이곳 어머니들이 행방불명된 가족들의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면서 20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후에 이곳을 행진한다고 한다. 이 나라의 아픈 역사를 보는 듯했다.
오늘 하루 종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를 걸어 다녔다. 우리는 지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렇게 걸어 다니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가 더 가까이 느껴지는 듯했다. 투어비를 내지 않고도 투어를 한 듯 마음속으로 뿌듯했다.
1월 30일(월), 29일차
오늘은 오전 자유일정이다. 오후에 버스로 푸에르토 이과수로 떠나게 된다. 그래서 11시 반에 체크아웃하고 2시 15분에 모여서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전에 어제 보지 못한 곳을 들르기로 했다. 박동문님은 오늘 호텔에서 그냥 쉬겠다고 했다. 그래서 교장과 조현종님과 같이 나섰다.
오늘도 걸어서 가기로 했다. 첫 목적지는 세계 3대 극장의 하나라고 알려진 콜른 극장이었다. 먼저 부에노스아이레스 7월 9일 대로를 만났다. 이 대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로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서를 가르는 중심대로다. 우리나라 세종로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다. 도로 중간에 쉼터가 두 개나 있고 차선도 넓다. 우리는 쉼터의 평상에서 잠시 쉬다가 미화원이 청소하기에 일어났다.
- 콜른 극장과 오벨리스크에 다녀오다 -
도로 건너편에 있는 콜른 극장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여기는 건물 내부 관람만 해도 가이드가 있어야 하고 입장료를 내야 하는 곳이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바로 제지를 당했다. 우리는 도로 나왔다.
이번에는 멀리서만 바라보았던 오벨리스꼬로 걸어갔다. 나는 그 기념비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비에 새겨진 문자를 사진으로 찍었다.
더 이상 볼 곳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와 과일 가게에 들렀다. 음료수, 빵, 과일 등을 샀다.
- 까마 버스를 타다 -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로비에서 쉬다가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짐을 싣고 차를 타려는데 심바가 우리 일행을 모아 놓고 대표가 가위바위보 로 좌석을 정하자고 했다. 이유는 좌석 배치상 1층에 네 분이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2층 자리가 1층 자리보다 전망이 좋고 타기에도 낫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런 내기 방식이 싫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대표로 나서서 내기하는 것도 싫었다. 뜸을 들이고 있으니 박동문님이 나서서 1층에 타겠다고 했다. 승차 안내원이 우리 일행에게 탑승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여자팀이 우리 모두가 1층에 타는 것으로 간주하고 올라가 버렸다. 심바도 우리가 양보했다는 뜻으로 알았는지 먼저 승차해 버렸다. 내기가 성립되지 못했다. 내가 박동문님에게 그렇게 말한 뜻을 물어보니 단순히 둘만 양보하여 1층 버스에 탄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했다. 졸지에 우리 모두가 자리를 양보해서 1층에 탄 것이 되어 버렸다. 교장님이 심바에게 불쾌감을 표현하였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늘 우리가 타는 버스는 까마 버스였다. 이번 여행 중 처음으로 타는 버스다. 까마 버스는 좌석 배치가 우리나라 우등버스와 같다. 버스에서 제공하는 음식도 기내식 같았다. 선택권이 없는 점만 달랐다.
- 푸에르토 이과수에 도착하다 -
1월 31일(화), 30일차
푸에르토 이과수 터미널에 8시 반에 도착했다. 19시간이 걸렸다. 근 하루 정도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었지만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차가 편안했다. 이것은 내 생각이다. 나는 차속에서 잘 자니까.
우리는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그란드 크루세로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도 4성급이었다. 심바는 오늘과 내일 일정을 간단히 안내했다. 오늘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국립공원에 가서 폭포를 관람한다. 내일은 택시를 타고 국경을 넘어 브라질의 포스 두 이과수에 간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는 폭포는 폴이라 하지 않는다. 스페인어로 ‘까따라따스’라고 해야 통한다고도 했다. 나는 이 말을 몇 번 반복했다. 입에 잘 붙지 않았다.
우리는 여장을 풀고 호텔에서 나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점심 식사를 한 뒤 이과수 폭포로 가기로 했다. 식당을 찾아 나섰다. 아무래도 터미널 쪽에 식당이 있을 것 같았다. 호텔에 올 때는 택시를 탔지만 이제는 걸어갔다. 터미널 위치를 여러 사람에게 물어 찾아갔다. 그리고 뷔페식당에 들어가서 식사하기로 했다. 값이 비싼 편도 아니었고 먹을거리도 많아 좋았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 이과수 폭포를 체험하다 -
우리는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폭포수에 젖을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호텔 앞 택시 주차장에서 기사에게 이과수 폭포 국립공원까지 가는 택시 요금을 물었다. 250페소를 달라고 했다. 심바가 말한 택시비보다 쌌다. 우리는 그 택시를 탑승하고 국립공원으로 갔다. 시니어 할인은 없었다. 입장료 330페소를 냈다.
국립공원 경내는 규모가 컸다. 길도 여러 갈래여서 표지판을 잘 살펴야 했다. 스피드 보트 선착장이나 ‘악마의 목구멍’을 보러 가는 관람 열차 탑승 장소 등 여러 정보가 필요해 관광안내소에 찾아갔다. 거기서 지도도 얻고 안내도 받았다. 영어로 잘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철도 정류장 앞에 왔다. 날은 땡볕이었다. 나는 배낭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고 선크림도 꺼내 교장님께 드리고 나도 얼굴에 발랐다. 그런데 앞선 일행이 안 보였다. 우리를 두고 먼저 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보이지 않으니 그냥 걸어갔다.
길은 여러 갈래였다. 인파는 끊임없이 밀려 들었다. 나는 일행이 앞에서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혹 뒤따라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참을 걷다가 쉬다가 했다.
도중에 폭포수 물줄기를 여러 번 만났다. 그러다가 이과수 폭포의 장관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과수는 원주민인 과라니 족이 폭포를 부르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구(Igu)는 물이라는 뜻이고 아수(Azu)는 크고 웅장한 것에 대한 경탄, 놀람, 공포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이과수 폭포는 세계 문화 유산의 하나다. 브라질 파라나 주(20%)와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 주(80%)의 국경의 이과수 강에 있는 폭포다. 강을 따라 2.7킬로미터에 걸쳐 270여개의 폭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폭포 중에는 최대 낙폭이 82m인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64m이다.
시야의 전경이 폭포수와 강물이었다. 한 마디로 물이었다.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사진을 찍었다. 거기서 나는 일행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런데 교장님이 본 전망대는 따로 있다고 하면서 계속 가자고 하셨다. 분명 교장님은 여기 와 보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 본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10여분 걸으니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가 바로 눈앞에 떨어졌다. 그야말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금세 안경이 뿌예졌다. 관람객 중 우산을 든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다들 이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었다. 교장님도 나도 즐겼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조현종, 박동문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였다.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전망대에서 다시 내려갔다. 가다가 일행을 만났다.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보다 앞서 가지 않았고 도리어 우리를 찾았다고 했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찾아봤다고 했다. 길을 찾아오다가 헤매기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교장님과 나는 다시 일행과 함께 전망대를 거쳐 본 전망대까지 갔다. 거기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돌아오다가 잠시 쉼터에서 휴식을 취했다. 거기도 두 줄기 폭포수가 쏟아지는 곳이었다. 본 이과수 폭포와는 떨어져 있는 폭포였다. 그렇지만 저 폭포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아마도 전국적인 명소가 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걸어가서 휴게소에서 앉아 콜라를 사마셨다. 야생 오소리가 상위에 올라왔다 내려갔다 했다. 우리는 이제 스피드 보트는 타지 않기로 했다. 본 전망대에서 폭포수를 맞았으니 그대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조현종님과 박동문님은 산책을 하겠다고 나섰다. 교장님은 나에게 악마의 목구멍을 보여 주시겠다고 했다. 아까 교장님은 왜 열차를 타는 데 반대하셨는지 의문이 들었다. 교장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스피드 보트를 타는 것은 악마의 목구멍 폭포를 실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드 보트를 타지 않기로 한 만큼 이제 열차를 타고 가서라도 악마의 목구멍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교장님 뜻에 따라 산책길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입구에서 5시반에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아까 우리 일행을 놓쳤던 철도 정류장까지 걸어왔다. 4시 15분이었다. 그런데 막차가 4시에 떠났다는 것이었다. 내일은 일정상 다시 여기에 올 수도 없다. 5분만 일찍 왔으면. 교장님은 나에게 악마의 목구멍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대단히 안타까워하셨다.
거기서 우리는 무료 열차를 타고 입구로 왔다.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입구에서 비를 피하며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5시 반이 못 되어 일행이 돌아왔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갈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국립공원에 올 때는 쉽게 왔다. 그때는 돌아갈 손님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국립공원으로 관람하러 오는 손님은 없고 타고 갈 손님만 있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는 택시를 잡았다. 요금을 물어보니 260페소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250페소에 온 경험이 있었다. 250페소로 흥정해서 호텔에 돌아왔다.
이제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점심 먹었던 뷔페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갔다. 저녁에 고기 욕심을 냈는지 요금이 많이 나왔다. 낮에는 커피를 돈 내지 않고 먹었는데 종업원이 커피도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낮에는 내가 요금을 치르지 않고 커피를 가져 왔다. 그때는 종업원이 못 보았던 것일까. 아무튼 낮보다는 훨씬 맛없었다. 그리고 비싼 값을 치렀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깜깜한 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아줌마 팀의 큰언니가 우리에게 맥주 각 1병을 시켜주었다. 우리는 호텔 출입문 앞에 있는 식탁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들어가는데 심바가 일행이랑 맥주 한 잔 하자고 권했다. 우리는 사양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 택시로 국경을 넘다 -
2월 1일(수), 31일차
우리는 7시 반에 식사하고 9시에 출발했다. 오늘은 국경을 넘어 브라질로 간다. 심바가 사전 계약한 택시를 탔다. 어제 갔던 국립공원을 지나니 바로 브라질 국경과 맞닿았다.
거기서 우리는 간단한 절차를 밟고 브라질의 포스 두 이과수 시로 들어갔다. 3시간 이내 돌아오면 이런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정도로 빈번하게 이곳은 오가는 곳이었다. 기사는 우리 숙소인 브라질 레파인 호텔까지 데려다 주고 되돌아갔다.
뒤엣말
9박 10일의 아르헨티나의 여정 중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이과수 폭포를 꼽고 싶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온 분이 규모면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는 이의 20%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정확한 수치에서 나온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이과수 폭포가 압도적이라는 말이 되겠다. 남미에서 세 가지만 선택 관광하라고 하면, 나는 페루의 마추픽추,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 그리고 여기 이과수 폭포를 선택하겠다. (끝)
첫댓글 첫 페이지입니다. 환율 계산을 1페소에 70 - 80원으로 바로잡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는 파타고니아 지역이 아니기에 이도 바로잡습니다. 지적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