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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진’ 황해도 안악군 안악 2호분 안 칸 서쪽 벽에 그려진 ‘비천상’의 모사도(평양미술관 소장). 북방형의 청초한 미인으로 고구려인들이 이상형으로 꼽은 얼굴이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치는 뛰어난 회화미나 과학적 제작기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벽화는 1400∼1600년 전 고구려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여가생활은 어떠했고 교통수단은 무엇이었는지를 생생히 증언하는 ‘타임캡슐’이기도 하다. 필자 이태호 교수는 2부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밝히고 그것이 현재 우리 삶 속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소개한다.》
최근 20년 사이 한국인, 특히 여성의 얼굴형이 전반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얼굴이 갸름하며 턱이 좁고 뾰족해지면서 광대뼈와 눈두덩의 뼈가 덜 도드라진다고 한다. 그런데다 성형수술로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서구형 취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한 북한의 미녀 응원단은 예스러운 미인상으로 인기를 끌었다. 나도 그들을 보러 부산과 대구로 내달려간 사람 중의 하나였다. 1998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스쳤던 여성들의 사근사근한 얼굴이 떠올랐고 혹여 고구려 고분벽화의 여인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 미(美)는 남방계의 건강미인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많은 여인이 등장한다. 묘 주인의 부인인 왕비나 귀족 여성을 비롯해 무용수와 악사, 그리고 시녀 등 다양하다. 이들은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 3호분의 왕비상과 궁중여인을 제외하고는 뚱뚱한 여인이 드물다. 대체로 키가 크지 않고 턱이 둥근 얼굴형을 보여준다. 또 사후세계의 공간이라는 무덤의 특수성 때문인지 미소 짓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 그럼에도 벽화에는 고구려의 여성상과 미의식이 잘 표출되어 있다.
벽화를 제작한 화가가 낮은 신분인 데다 남자여서일까. 호사스러운 옷차림의 상류층 여인은 자태가 당당하나 멋있게 그려지진 않았다. 그보다는 서민층 여성이나 어린 소녀를 한층 돋보이게 그렸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통틀어 ‘미스 고구려’의 진선미(眞善美)를 가려 보자.
먼저 건강미인의 으뜸은 중국 지린(吉林)성 퉁거우(通溝) 지역의 5세기 벽화고분인 무용총에서 음식상을 들고 부엌문을 나서는 두 여인일 법하다. 왼편 벽 쪽으로 걷는 여인들의 방향으로 보아 묘 주인이 서역의 두 손님을 맞이하는 벽화와 연결된다. 앞 여인은 다리가 달린 소반을, 뒤쪽 여인은 평반을 들고 따르고 있다.
검은 점의 물방울무늬가 있는 흰색과 붉은색 두루마기 형태의 겉옷차림이다. 겉옷의 가장자리에는 검은 띠가 둘러져 있고 허리띠로 묶여 있다. 그 밑으로 흰 주름치마와 붉은색 바지를 살짝 드러내고, 버선 같은 신발을 신고 있다. 귀빈을 접대하는 맵시 있는 차림새다.
두 여인은 하체가 튼실하고 키가 작다. 둥글납작한 얼굴에 머리를 올리거나 뒤로 묶은 맨머리의 맵시는 함박꽃을 연상시킨다. 무던하고 후덕하게 자랄, 젊고 건강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남방계 미인형이다. 일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니 미스 고구려 ‘미(美)’ 쯤이 어떨까.
● 선(善)은 북방계 시녀, 진(眞)은 비천상
다음으로 청순한 소녀상이 떠오른다. 5∼6세기에 그려진 남포시의 수산리 고분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안 칸 서벽 상단에 무덤 주인 부부가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하는 장면 가운데 부인의 양산을 받쳐 든 시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고구려 벽화는 고대 회화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신분에 따라 인물을 크거나 작게 그렸다. 귀부인의 허리춤밖에 안 차는 키의 소녀는 흰 주름치마에 긴 저고리 차림으로 10대 초반쯤으로 보인다.
벽화의 손상이 심하지만 치마의 잔주름 처리가 움직이는 자세의 리듬감을 살려 화가의 묘사력이 돋보인다. 턱이 둥글고 달걀형인 갸름한 소녀의 얼굴은 북방형에 속한다. 마치 달밤에 활짝 핀 하얀 박꽃처럼 아리따운 미모이고 수줍어 고개를 숙인 수선화 향기가 물씬 난다. 양산의 무게에 개의치 않고 언제나 생글거릴 앳된 표정에는 착하디착한 심성이 그대로 우러나 있다. ‘미스 고구려 선(善)’ 으로 선정하고 싶다.
5∼6세기 고구려인들은 이런 참한 소녀상을 기준 삼아 지고의 이상미(理想美)를 추구한 모양이다. 안악군 안악 2호분에 보이는 안 칸 서벽의 비천상(飛天像)들이 눈을 번뜩이게 한다. 비천은 연꽃 수반(水盤)을 들고 하늘을 헤엄친다. 하늘에 떠서 두 손으로 연꽃잎을 뿌리는 자연스러운 자태이다.
두광(頭光)을 먹으로 강조한 얼굴에 검은머리를 붉은 천으로 감아 곱게 올리고 있다. 짙은 눈썹의 또랑또랑한 눈에 입을 반쯤 벌린 표정은 그야말로 뇌쇄적이기까지 하다. 허리 부분이 지워졌지만 바지를 입은 맨발의 뒤꿈치를 보면 돌 지난 아기의 보드라움이 느껴진다. 꽉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고구려 사람들이 하늘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염원하던 것을 이같이 소녀형의 비천상으로 묘사해 놓았다. 단연 미스 고구려 ‘진(眞)’이다.
그런데 여인상에 구현한 미의식은 ‘고구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고구려의 여인들이 억세고 적극적일 듯하지만 선입견과 달리 소담하면서 여성스럽다. 이에 걸맞게 선묘법이나 색감도 섬세하고 유연하다. 집안일을 돌보며 자식을 키우던 전통적인 우리네 어머니의 소녀시절 마음결 같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이태호교수
▼‘미스 中國’은 서시-양귀비형… 고구려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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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한 북한 응원단. 둥그스름한 턱선이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미인들과 닮았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미인을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춘추시대 서시(西施)로 대표되는 ‘버들가지형’으로 호리호리한 미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양귀비(楊貴妃)형의 풍만한 당나라 미인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서시형이나 양귀비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구분법이 잘 맞지 않는 것이다. 통상 한(韓)민족은 유목민 계열의 북방계와 농경민 계열의 남방계, 그리고 그 중간형인 귀화계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북방계는 대체로 체격이 크고 얼굴이 갸름하며, 남방계는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고 얼굴이 넓적한 편이다. 고구려 벽화에 표현된 여인들을 보면 남방계나 귀화계로 추정되는 얼굴이 많다.
무용총의 두 여인은 퉁거우 지방의 그림인데도 이마가 좁고 얼굴이 각진 남방형에 가깝다. 이에 반해 평양 수산리 고분벽화의 소녀상과 안악 2호분의 비천상은 북방형의 청초한 이미지다. 특히 수산리 고분의 소녀상은 시원한 이마에 가늘고 둥근 눈썹과 큰 눈의 미인상이다.
현재의 미인형에 가까우면서도 턱이 원만해 요즘 여성들의 뾰족한 턱에 비해 훨씬 예쁘다. 현대의 미의식이 이미 1500년 전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고구려를 다시 보자]<2>벽화로 본 고구려…(2)어떻게 입나 document.prelistenMon = new Image; document.prelistenMon.src = "/news/newsimg/listen_m_on.gif"; document.prelistenWon = new Image; document.prelistenWon.src = "/news/newsimg/listen_w_on.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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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후반 남포시 용강군 쌍영총 무덤 안칸 동벽에 그려진 승려와 부인의 공양 행렬. 왼쪽 여밈식 저고리에 주름치마 투피스(왼쪽부터 첫째, 셋째, 넷째)는 고구려 여성의 전형적 옷차림이다. 오른쪽의 점무늬 투피스 차림은 5세기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사람들은 정말 실용적인 옷을 입었다.
고구려 복장은 남녀 모두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바지 위에 주름치마를 걸친 차림이 많다. 저고리는 남녀 모두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다. 말을 타던 유목생활에서 농경 중심 생활로 정착하면서 완성된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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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저고리의 고구려식 투피스는 세계복식사에서 가장 오래된 최선의 일상복으로, 현대에도 보편적인 패션이다. 고구려 복장이 현대적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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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영총 무덤 안길 동벽에 그려진 주름치마 입은 여인.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귀족 서민 모두 실용적인 바지저고리 차림
황해도 안악군 안악 3호분이나 평남 남포시 덕흥리 고분벽화의 왕과 왕비, 관료들의 겉옷은 길고 풍성하다. 웃옷과 치마가 한통으로 붙은 포(袍)의 형태다.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초, 고구려가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중국식 관복제도를 일부 상류층이 수용한 것이다. 원피스형의 중국식 겉옷은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그게 불편했던지 5세기 중엽 이후의 벽화에는 원피스형 겉옷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인은 귀족과 서민 모두 바지저고리형 투피스를 즐겨 입었다. 다만 신분이 높을수록 저고리의 소매통과 바지통이 넓어졌다. 백제나 신라의 패션도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왕실이나 귀족층은 주로 화려한 색깔과 무늬의 비단옷을 입었고, 서민들은 무명과 삼베로 무늬가 단순하거나 없는 옷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唐)나라 역사가 장초금(張楚金)의 ‘한원(翰苑)’에 나오는 고구려의 ‘오색금(五色錦)’이나 구름무늬의 ‘운포금(雲布錦)’ 등은 고구려의 염직 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을 알려준다. 이를 증명하듯이, 벽화에도 꽃자주 진홍 분홍 등의 붉은색 계열이나 노란색 푸른색 등의 원색 천에 연속 문양으로 치장한 옷차림들이 보인다.
고구려에서는 한때 점무늬가 크게 유행했던 것 같다.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장천1, 2호분 등 5세기 중국 지린(吉林)성 퉁거우(通溝) 지방의 고분벽화에 주로 나타난다. 서민층 옷은 물방울무늬로 단순하다. 반면 상류층의 옷에서는 마름모꼴이나 네모꼴에 작은 점무늬가 들어가거나 두줄무늬, 바둑판무늬, 물결무늬 등 복잡해진 패턴 장식이 눈에 띈다.
장천 1호분 앞칸 오른쪽 벽에 묘사된 20여명의 남녀행렬이나 무용 장면을 보면, 그야말로 물방울무늬의 패션 축제 같다. 장수왕(재위 413∼491년) 시절 퉁거우 사람들이 점무늬를 아주 좋아한 모양이다. 이는 호랑이 표피의 점무늬를 연상시킨다. 만주 벌판을 질주하던 고구려인의 기개를 잘 반영한 패턴이다.
●베스트 드레서는 진홍색 드레스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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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총 앞 칸 서벽에 그려진 진홍색 드레스 차림의 여인(왼쪽). 필자가 고구려의 베스트 드레서로 꼽은 여성으로 오른쪽은 여인의 원피스 앞치마 를 복원한 모습이다.
서민 여성의 옷은 질박하면서도 우아한 맵시로 생활복의 멋을 한껏 뽐낸다. 저고리나 두루마기는 앞섶을 개방한 형태로, 오른쪽 섶을 위로 얹은 왼쪽 여밈식이다. 깃과 소매, 도련은 검은색 등의 띠를 둘러 변화를 주고 허리띠를 묶었다.
대부분 잔주름을 잡은 흰색 주름치마는 아래로 넓게 퍼진 전형적인 A라인 스타일이다. 이는 키가 작으면서 좁은 어깨에 굵은 팔, 긴 상체에 하체가 짧고 단단한 우리네 체형과 잘 어울린다.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오는 이른바 ‘한복’의 원형을 보여준다.
남포시의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고분인 쌍영총의 안길 동벽에 시녀로 보이는 세 여인이 나란히 서 있다. 잔주름의 흰 치마에 받쳐 입은 저고리에는 검은색 띠에 붉은 선이 가미돼 있고, 줄무늬와 흰 점선무늬로 수를 놓은 듯하다. 여인들은 의상과 어울리게 양 볼과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발라 예쁘게 화장하고 맨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맸다. 5세기 퉁거우 지방의 여성들보다 한층 장식성이 두드러지고 세련되게 변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베스트 드레서는 평남 온천군에 있는 5세기 초반 감신총의 앞칸 서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손을 합장한 이 여인은 양 갈래로 두 줄씩 머리를 땋아 올리고 뾰족한 코의 신발을 신은 멋쟁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복장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보통 여성과 다르다. 중국옷으로 보이는, 안악 3호분의 왕비나 시녀가 입은 벙벙한 겉옷과도 아주 다르다. 땅에 끌리는 길이의 진홍색 드레스에 흰 앞치마를 둘렀다. 붉은 옷에 흰 띠를 두른 V자형 깃과 소매, 흰색의 둥근 앞치마와 뒤로 묶은 허리띠의 붉은색 두 줄 장식 등 붉은색에 흰색 악센트를 조화롭게 살렸다. 상큼하고 품위 있는 디자인이다.
중국식 포 형태의 영향을 받은 듯하면서도 고구려식으로 다시 꾸민 패션감각이 역력하다. 원피스이면서도 상체의 갸름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허리 아래쪽으로 넓게 퍼진 A라인 의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고구려인이 외국문화를 자기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미술사학과
▼"고구려벽화 그린 화가는 기술직 하급관료"▼
4∼7세기에 제작된 90기가 넘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주제 선정에서 묘사 방식까지 닮은꼴이 하나도 없다. 동일계층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복색이 모두 같지 않고, 같은 주제도 조금씩 다르게 표현돼 있다.
이러한 벽화마다의 개성은 시대에 따라 많은 화가들이 묘 주인의 신분과 생애를 고려하여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화가의 신분이나 이름이 밝혀진 경우는 거의 없다. 벽화고분이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이었던 만큼 담당 화가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에 빗대어 보면 벽화가는 궁전이나 사원 건물의 단청과 벽화, 탱화, 초상화 등을 맡았던 기술직 하급관료였으리라 여겨진다.
고구려 화가들과 신분이 가장 비슷한 사람으로는 경주 황룡사 담벼락의 노송도,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 그리고 단군 초상을 그렸다는 신라의 솔거(率居)가 떠오른다.
당시 신라의 공예가로 범종을 만드는 종박사(鐘博士)가 오두품(五頭品)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솔거나 고분벽화를 그린 화가도 비슷한 정도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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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중엽 황해도 안악 3호분 곁방 동쪽 벽에 그려진 부엌의 모습.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떡을 찌는 여인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강아지가 정겨운 농가 풍경을 보여준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근래 들어 부쩍 주부들의 ‘명절증후군’이라는 말이 오간다.
온 가족의 연휴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야 하는 여성들의 고단함에서 나온 말이다. 고구려시대의 아낙네도 그랬을까. 물론 왕족 여자나 귀부인들은 손에 물 묻히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여성들의 집안 살림살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 떡 찌는 부엌
고구려 여성들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은 황해도 안악 3호분, 남포시 태성리 1호분과 약수리 벽화고분 등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고분들에 나타난다. 안악 3호분의 앞 칸 동벽에 딸린 곁방에 빙 둘러 집안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방에 들어서면 맞은편 동벽에 부엌과 푸줏간이, 북쪽에 우물이, 남쪽에는 외양간이, 서벽 입구 왼편에 마구간이, 입구 오른편에 방앗간이 각각 배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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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에 그려져 있는 우물 풍경. 지렛대와 도르래를 이용한 우물은 4세기 중엽 고구려 사람들의 과학 기술 수준을 가늠케 해 준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서민층 여성들의 가사노동 현장을 들여다보자.》
동벽의 왼편에 비스듬히 사선 구도로 그려진 가옥이 부엌이다. 측면에 출입구가 나 있고, 정면은 개방된 형태로 부엌 내부가 공개돼 있다. 한데 그 작도법이 뒤쪽으로 넓은 역원근법이다.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 투시도법과는 반대로 그려진 것이다.
흔히 고대회화에서 나타나는 미숙한 표현으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부엌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담는 데는 오히려 효과적인 기법이다. 지붕 위에는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고 부엌 앞에는 두 마리의 개가 어슬렁댄다. 부엌 주변의 풍속화답다.
부뚜막에 얹힌 큰 그릇은 떡시루다. 앞 여인은 쭈그려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부뚜막 뒤의 ‘아비(阿婢)’라는 여인은 오른손에 주걱을, 왼손에 긴 젓가락을 들고 있다. 아마도 떡시루에 물을 축여 가며 긴 젓가락으로 떡이 익었나 찔러 보는 장면인 것 같다. 뒤쪽의 여인은 교자상에 닦은 그릇을 포개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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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엌 그림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부뚜막이다. 이 모양과 똑같은 이동용 쇠부뚜막이 평북 운산의 3, 4세기 적석총인 용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연통 부분이 잘려 있으나 66.7cm 길이의 ‘ㄴ’ 자형으로, 아궁이가 옆에 뚫려 있다. 아궁이와 연통이 한 방향인 중국제품과는 다르다.
이 떡 찌는 일은 장례행사에서 중요한 일로 농경문화의 발달 정도를 알려준다. 떡시루는 벼농사가 정착된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나며, 손잡이가 달리고 둥근 밑바닥에 여러 구멍이 뚫린 토기가 그 원형이다. 그런데 안악 3호분의 밑이 납작한 토기는 우리 할머니들이 집에서 사용하던 떡시루 옹기와 흡사하다. 고구려의 농업기술이 꽤 높았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 물 긷는 우물
부엌 옆에는 푸줏간이 있다. 멧돼지, 노루, 꿩 같은 조류 등을 4개의 S자형 쇠고리에 걸어놓은 모습은 여전히 사냥을 통해 먹을거리를 구했던 고구려인의 식(食)문화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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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운산의 3∼4세기 적석총인 용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이동용 쇠부뚜막. 안악 3호분의 벽화에 그려진 부뚜막과 형태가 똑같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또 부엌의 왼쪽 벽화는 ‘정(井)’이라 쓰여 있는 우물이다. 정사각형의 목책을 두른 우물에는 모래주머니를 달아 지렛대와 도르래를 이용한 용두레 형태의 물 긷는 장치가 있다. 고구려인의 과학적 지혜를 보여준다.
우물가에는 두 여인이 떡시루와 그릇들을 닦으러 나온 듯하다. 서 있는 여인 위에 ‘아광(阿光)’이라는 붉은색 글씨가 씌어 있다. 또 우물 앞에는 물을 담는 목제 구시통(구유)이, 그 왼편으로는 두 점의 배부른 큰 토기가 놓여 있다. 역시 당당한 형태의 고구려 실물토기와 근사하다.
우물의 오른편 벽면 그림은 ‘대(대)’라고 쓰인 방앗간이다. 단칸집 안에서 디딜방아를 찧고 있는 두 여인이 보인다. 줄을 잡고 한 발을 구르는 자세나 공이에서 곡물가루를 정리하는 모습이 근래까지 전해져 오는 것과 닮아서 흥미롭다. 붉은 글씨의 ‘아비’나 ‘아광’ 등 여인들은 모두 올린머리에 가채를 하고 있고 원피스 차림이다.
이처럼 벽화의 부엌과 푸줏간 등은 고분에 부장품으로 실물 부뚜막을 넣는 것과 함께 사후에도 무덤 주인이 그 안에서 먹을거리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일 게다.
오랜 민속으로 내려오는 가택 신앙과도 관계가 깊다. 집안에는 조상신, 문신(門神), 우마신(牛馬神) 등을 모셔 가정의 화복과 안락을 꾀하였다. 고구려 여성들의 집안 살림은 불과 30, 40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던 우리네 농촌 가정의 정겨운 모습과 비슷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이태호 교수
▼안약3호분 주인은…南 “장군 冬壽”-北 “고국원왕” ▼
1949년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세 고분이 발굴됐다. 이 중 오국리의 3호분 벽화는 약 30×33m의 방형(方形)에 높이 7m로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외형이 가장 크다. 내부 묘실도 앞칸과 안칸, 앞칸의 좌우 곁방, 회랑 등 다실(多室) 구조다.
안악 3호분에서는 앞칸 서쪽 곁방의 바깥벽에 씌어진 ‘동수(冬壽)가 벼슬을 살다 영화(永和) 13년(357) 69세에 죽었다’는 글이 주목을 끌었다. 고구려 무덤 중 고분의 제작시기가 밝혀진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동수는 요동사람으로 고국원왕 6년(336) 전연(前燕)에서 망명 온 장군이었다(‘진서·晉書’ 등에는 ‘동壽’로 표기).
한국 일본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묘라고 본다. 그러나 북한 학계에서는 문제의 글이 무덤 주인을 수호하는 무인 인물화 위에 씌어져 있는 점을 들어 동수가 묘 주인을 수호하는 장군이라고 본다. 고분의 크기는 물론 묘 주인의 초상화와 회랑의 대행렬도 같은 벽화의 내용으로 볼 때 안악 3호분은 장군묘가 아니라 왕묘라는 것이다. 1960년대에는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설을 제기했다가 근래에는 고국원왕 무덤으로 확정하고 있다. 아직도 동아시아 학계에서는 이 고분을 두고 ‘동수’와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
첫댓글 모니카님 감사합니다. 고구려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