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고향의 향기, 방랑과 노마드 제주 – 변시지
변시지 화백은 1926년 5월 20일 서울 서귀포 서홍동에서 5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시기는 우리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모두가 궁핍한 속에서 살던 시절. 다만 변화백의 살림살이는 물려받은 농토와 재산이 있어 그래도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부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일본을 왕래하면서 신학문을 익혔고 평생을 책과 벗하며 신문물을 받아들일 정도로 신지식의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변화백의 어린시절은 꿈 많고 장난기 그득했던 말 그대로 장난기 그득한 소년이었다.
아버지 영향으로 서당에서의 공부 시절, 당시에는 초보였지만 그때 눈 떴던 한학과 붓글씨가 후일 그의 화풍 중에 두드러지게 수묵화의 바탕을 이룬 뿌리가 되었다.
그의 그림이 간결하고 검은색 외곽선으로 완결 짓는 구조인가를 해석하는데 매우 소중한 말이다.
여섯 살 되던 해 부친은 ”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데 서귀포 촌구석에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너희는 개화된 일본에서 공부하여 세상 넓은 것을 보려무나“ 그 길로 가산을 정리, 일본행 여객선에 오른 때가 1931년
그는 오사카 화원심상 고등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소학교 2학년 때 4학년 선배와 씨름을 하다 오른쪽 다리를 접질리면서 평생 불편한 몸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운명처럼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뛰어놀지 못한 아픔을 품고사는 대신 그림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이것은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동 미술전에서 오사카 시장상을 수상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42년에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화가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45년에는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동경으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스 프랑세즈 불어과에 입학하고, 인물화와 풍경화를 수학했다.
그 영향으로 1940년 후반 그의 인물화와 서울로 와 그린 비원 등 풍경화에서 당시 그의 표현력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뛰어났는지를 확인하는 결정적 증거를 보여준다.
이런 실력으로 그는 전형적인 좌상의 인물화와 풍경에 전념하면서, 공모전에서 스물세 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최고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수상한 사례는 일본 화단에서도 유사 이래 전무후무 한 일로 화제가 되어 일본 NHK방송에서 토픽으로 선정, 방송 할 정도였다.
이 화려한 수상과 경력에도 이방인에게 일본에서의 작가 생활은 만만치 않았고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민족성이나 민족의식을 자각하면서 ”고향으로 가자, 내 조국 풍속이나 문화에 젖으면 새로운 화풍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강박관념에 오랫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마침 1957년 윤일선 서울대 총장과 장발 미대학장으로부터 조국의 미술 발전을 위해 서울대에서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는 영구 귀국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자유당 말기 황폐한 서울의 분위기는 창작보다는 우리나라 특유의 패거리 문화인 지연, 학연 혈연으로 지켜줘 화단의 반목과 질시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술과 작업으로 신음했고 이때 부인을 만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인가 새로운 예술 세계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고, 또 다른 도전을 꿈꾸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그는 고향 제주로 44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제주는 다시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예술가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변시지 너의 것을 찾으라“고 제주의 본질을 추구하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크게 갈등했다, 일주일을 술로 배를 채우기도 하고, 이 세상을 떠나 버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변시지의 외딴 고향의 향기, 방랑과 노마드 제주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탄생한다.
여기서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흥미롭게 지적 하는 부분은 환경에 따라 늘 화풍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일관된 주제를 갖기 보다는 서울에 있을 때는 서울 풍경, 제주에 갔을 때는 제주의 전형적인 풍경이 등장하는 스타일이다.
특히 약한 바랜 듯한 장판지 색이나 좋아 비닐처럼 일어나는 터치의 경계선 화풍이 그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변시지 화백은 소박하면서도 아주 단조로운 구성으로 말 그리고 바다, 노인의 제주에서 닥쳐오는 한없는 쓸쓸함과 그리움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들면 그의 작품에는 한 마리의 새와 돌담의 까마귀, 낮게 엎드린 초가와 소나무 이 모든 것을 휘몰아치는 제주의 바람이 전부였다.
그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빠짐없이 구부정한 촌로,어쩌면 아니 화가 자신이 거친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런 풍경과 이미지가 어디서 왔는가를 작가는 자주 등장하는 까마귀는 지워졌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 했다.
제주에서 까마귀는 길조로 인식됐고, 차례를 지낸 후 곳으로 지붕에 음식을 뿌리면 까마귀가 새카맣게 날아들어 좋아 먹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시지의 작품 속에는 드러나는 주제와 스토리만으로 다 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누룩처럼 번져 있다.
그의 그림이 황갈색으로 시작한 것도 제주의 적막감과 유비되어 자신의 적막감으로 소통한다. 그의 그림 어느 곳에도 하늘도 바람도 바다, 사람도 심지어 바람까지 황갈색으로 덮여 있다. 그뿐이 아니라 휘어질 대로 휘어진 노인의 신체와 제주도의 초가집 그 바람에 흔들리는 가엾고 쓸쓸한 소나무. 조랑말과 돛단배가 그의 화면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바로 그것은 고향이었다.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었다.
단순한 필치, 그 속에는 더 할 수 없는 예술가의 방랑과 외로움에 중독된 풍경이 펼쳐진 제주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또 거부할 수 없는 자기자신이었다. 오랜시간 구둘장에 장작을 피워 누런 장판으로 변해버린 바탕에 울림 가득한 변시지의 독창적인 화풍에는 유년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씨를 이겼던 수묵화의 고유한 방법에서 연유되었다.
작가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방랑자처럼 떠돌던 노마드의 삶속에서 심장에 아로새긴 운명적인 상처들을 어둡고 절망을 상징하는 제주의 검은 바다로 화폭에 묵시적으로 담아냈다. 그것은 자신의 심정이었다.
때로는 이 제주도의 척박함과 외로움을 혼자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심경을 담아냈다. 이것이 변시지 화가의 초상이며 그의 처절한 눈물이며 운명이다.
이 외로움과 쓸쓸함, 예술가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상처로 그는 제주의 삶을, 가려주고 숨겨주던 살을 태워 온몸에 옹이 맺힌 예술가의 궤적을 치열하게 노래하고 있다. 가슴을 후벼 파듯, 뜨거운 색채로 그는 자기 자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