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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렵 남해안의 왜군 현황 |
○ 이 무렵의 조선군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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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변사 이빈과 전라병사 이시언은 소수의 병력으로 함안 등지에서 복병했다. 한산도의 전선(판옥선)은 200척인데 50척만 참전한 것은 그 무렵 장병들이 가을걷이 휴가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4일 ※
맑다. 곽재우, 김덕령들과 함께 약속한 뒤 군사 수백 명을 뽑아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선봉은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하였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나가며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도들은 갈팡질팡하며 형세를 잃고 동서로 분주하였다. 그런데 육군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고 몸을 돌려 배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임금께서 잘(담비 가죽)을 하사하시었다.
백병전 단계가 되자 조선 육군은 기가 죽어서 후퇴해 내려 왔다. 표신과 선유교서는 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임금이 내린 것인데, 이는 윤두수의 요청으로 내려진 것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5일 ※
큰 바람이 종일토록 불었다. 장계를 썼다.
날씨 때문에 칠천량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6일 ※
맑다. 아침 일찍 선봉을 장문포의 적의 소굴이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왜인들이 패문을 써서 땅헤 꽂아 놓았는데, 거기에 쓰인 글은 ‘일본과 대명(大明)이 방금 화친을 맺으려 하니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 는 내용이었다.
왜놈 1명이 칠천량 산기슭으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불러서 배에 태운 후 물어 보니, 그 자는 영등포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었다. 진을 흉도(거제도)로 옮겼다.
왜군들의 패문을 본 조선군은 허탈감에 빠졌다. 게다가 명군의 출전 금지령을 어겼으므로 추후 어떤 책임 추궁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작전을 개시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각 부대들에는 식량도 떨어져 가고 있었으며, 때는 바야흐로 겨울로 들어서는 음력 10월이었다.
이번 작전에는 여러 위험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만약 가덕 · 김해 · 부산에 주둔해 있던 4만여 왜군들이 야습을 해 온다면 곽재우와 김덕령 등이 이끄는 3천의 조선 육군은 위기를 맞게 되고, 조선 육군이 섬멸되고 나면 명군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함안 · 의령 · 거창 · 선산 · 상주, 그리고 전라 · 충청도가 일거에 왜군들의 수중에 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곽재우, 김덕령 등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때에는 총사령관이 직접 나서서 군심을 안정시키고 대책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윤두수는 4백리 밖 후송인 순천에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곽재우 등은 각자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7일. 맑다. 선병사(선거이), 곽재우, 김덕령 등이 돌아갔다. 띠 183동을 베었다.
8일. 맑고 바람도 없었다.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있는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들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군사의 위엄만 보인 후 흉도(거제도)로 돌아와서 띠 260동을 베고, 그대로 배를 띄워 한산도에 이르니 밤이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9일. 맑다. 첨지 김경노, 첨지 박종남, 조방장 김응함, 조방장 한명달, 진주 목사 배설, 김해 부사 백사림 등이 모두 돌아갔다. 활을 종일 쏘았다. 남해(현집), 하동(성천유), 사천(기직남), 고성(조응도)이 돌아갔다.
수륙의 장수들도 각자 군병을 이끌고 돌아갔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10일. 맑다. 장계를 수정하였다. 박자윤과 곤양(이광악)은 유숙하고 떠나지 않았고, 흥양(배흥립), 보성(김득광), 장흥(황세득)은 돌아갔다.
11일. 맑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충청수사가 와서 만나보았다.
12일. 경상수사(원균)가 적을 토벌한 일에 대하여 자기가 직접 장계를 올리고 싶어하므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비변사 공문에 의거하여 원수가 쥐 가죽으로 만든 남바위(이엄)를 좌도에 15벌, 우도에 10벌, 경상도에 10벌, 충청도에 5벌을 갈라 보냈다. 장계를 수정하였다.
원균 수사가 직접 장계를 올리려고 해서 문제가 되었다. ‘장계를 수정하였다’ 고 하였는바, 종사관이 쓴 초고를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올려 보낸 장계가 도중에 분실되었는지 《선조실록》에는 수록된 것이 없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13일. 맑다. 종사관(정경달)이 벌써 사천에 왔다고 하였다. 사천의 제1선을 내어 보냈다.
14일. 맑다. 새벽녘 꿈에 왜적들이 항복하여 육혈 총통 5자루를 바치고 환도도 바쳤다. 말을 전하는 자는 이름을 김서신이라 하였는데 왜놈들이 모두 항복한다고 하였다.
15일. 맑다. 박춘양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6일. 맑다. 순무어사 서성이 날이 저물녘에 도착하여 우수사(이억기), 원수사(원균)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순무어사 서성이 온 것은 이번 작전에 이순신 · 원균 간에 있을 수 있는 갈등을 예방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제2차 당항포해전 때에도 원균은 독자적으로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를 바로잡고자 장계를 올린 바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17일 ※
맑다. 어사(서성)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종사관(정경달)이 들어왔다.
‘속이고 무고하는 말’ 이라고 하였는바, 영등포 · 장문포 작전 중에 있었던 일인 듯하다. 한편, 이번 작전을 주도한 좌의정 윤두수는 이 무렵에도 원균을 두둔했으며, 후에 이순신을 모함 · 실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작전에서의 윤두수-원균 관계가 주목된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18일. 맑다. 종사관(정경달)이 교서에 숙배하는 예를 행하였다.
19일. 바람이 순조롭지 않았다. 아침에 종사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20일. 아침에 흐리다. 순무어사(서성)가 나갔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돌아간다고 고하였다.
순무어사 서성도 돌아갔고, 이억기 함대도 귀항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21일 ※
맑다. 종사관(정경달)과 우후(이몽구)와 발포(황정록)가 나갔다. 항복해 온 왜놈 3명이 원 수사(원균)에게서 왔다. 문초를 하였다.
종사관, 우후, 발포 만호도 귀항했다. 영등포 · 장문포 수륙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22일. 흐리다. 이적과 승 의능이 나갔다.
23일. 맑다.
24일. 맑다. 우후를 불러서 활을 쏘았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25일 ※
맑으나 서풍이 크게 불었다. 남도(강응표)와 영등(우치적)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전 낙안 신 첨지(신호)가 체찰사(윤두수)의 공문과 목화 벙거지와 정목(正木) 한 동을 가지고 와서 같이 의논하다가 밤이 되어 물러갔다. 순천 부사 권준이 잡혀가면서 와서 보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권준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잡혀갔고, 이에 이순신은 마음이 아팠다. 이때 권준은 영등포 · 장문포 해전에 참전 중이었다. 권준이 잡혀가게 된 자초지종은 권준을 파직시키기 위해 순천부에 온 윤두수가 순천부에 대한 표적 수사를 하면서 어떤 꼬투리를 잡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당파 싸움과 중요한 관직에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사리(私利) 추구 행위가 왜적을 상대로 한 전쟁 중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26일. 맑다.
27일. 아침에는 비가 오고 저녁에는 개었다. 미조항 첨사(성윤문)가 와서 교서에 숙배(肅拜)하는 예를 행하고 그대로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28일. 맑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금갑도(이정표)와 이진 권관이 와서 보았다. 식후에 전라우도 우후(이정충)와 경상우도 우후(이의득)가 와서 목화를 받아 갔다.
29일. 맑다. 서풍이 몹시 차가웠다.
30일. 맑다. 수색하고 토벌하도록 하기 위해 적진으로 들여보내고 싶었으나 경상도 전선이 없어서 모이기를 기다렸다. 자정에 회가 들어왔다.
작전 종료를 위한 마지막 단계인 수색 · 토벌전을 준비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였다.
2일. 맑다. 좌도에서는 사도(김완)를, 우도에서는 우후 이정충을, 경상도에서는 미조항 첨사 성윤문 등을 장수로 뽑아 수색 토벌하도록 들여보냈다.
3일. 맑다. 아침에 김천석이 비변사 공문을 가지고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 세 명을 데리고 진으로 왔다.
잔적을 소탕하는 단계에서 왜인 탈영병 등이 붙잡혀 왔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4일. 맑다. 항복한 왜인들의 사연을 들었다. 유생이 전문(箋文)을 가지고 들어왔다.
5일. 흐리고 실비가 내렸다. 순변사(이일)가 자기 군관을 시켜서 항복한 왜인 13명을 보내왔다.
순변사 이일도 영등포 · 장문포 해전에 참전했으리만큼 조정은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3천 명으로는 거제도에 있는 왜성 하나도 공격할 수 없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6일. 흐리나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이영남, 이정충, 신첨지(신호)가 와서 같이 이야기하였다.
7일. 늦게 개었다. 금갑도(이정표), 사도(김완), 여도(김인영), 영등포(조계종)가 와서 보았다. 신 첨지(신호)가 보고하기를, 원수(권율)가 수군 진중에 머무른다고 하였다.
권율이 ‘수군 진중에 머물고 있다’ 고 하였다. 수군 진중은 한산진인데, 이때 이순신은 영등포 · 장문포 앞에서 작전 중이었다. 권율은 한산진에 오기 전에는 구례에 머물러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8일. 비가 뿌리다가 늦게 개었다.
9일. 맑으나 바람이 불순하였다.
10일. 맑다. 이희남이 들어왔다. 조카 뇌도 영문으로 왔다고 하였다.
‘영문으로 왔다’ 고 하였는바, 뇌가 한산진으로 온 소식을 영등포 근해에서 들은 것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11일 ※
동지(冬至)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고 군사들에게 죽을 먹였다. 우도 우후(이정충)와 정담수(전 어란포만호)가 와서 만났다.
‘죽을 먹였다’ 고 했다. 동짓날이라 팥죽을 먹인 것인지, 아니면 군량미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12일. 맑다.
13일. 맑다. 원수가 방어사(防禦使) 군관에게 항복한 왜인 14명을 인솔시켜 보내왔다.
14일. 맑다. 우병사(김응서)가 항복한 왜인 7명을 자기 군관에게 인솔시켜 보내왔다.
권율과 김응서 등의 부대에서 포로로 잡힌 왜인들을 이순신의 진영으로 보내왔다. 이렇게 보내진 왜인들은 ‘왜인 귀화 부대’ 로 다시 보내졌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15일.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음(陰)과 양(陽)이 순서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오늘은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므로 나가지 않고 혼자 방안에 앉았으니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아들 울 등의 편지를 보니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고 하였다. 다행, 다행이다. 영의정(유성룡)의 편지가 왔다.
16일. 맑다. 바람이 조금 차다. 우도 우후(이정충), 여도(김인영), 회령포(민정붕), 사도(김완), 녹도(송여종), 금갑도(이정표), 영등포(조계종), 전 어란 만호 정담수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잔적 소탕도 끝났고, 또 전투가 없는 겨울이었기에 견내량을 지키는 병력만 남고는 모두 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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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견제하는 조정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17일. 맑고 따뜻하다. 서리가 눈같이 내렸다. 조카 뇌와 아들 울이 들어왔다.
18일. 맑다. 큰바람이 저녁 내내 불었다.
19일. 맑다. 큰바람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20일. 맑다. 원 수사(원균)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21일. 맑다. 이설이 포폄(褒貶)하는 장계를 가지고 갔다.
22일. 맑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3일. 맑다. 흥양과 순천에서 군량이 들어왔다. 이경복이 왔다. 순변사 등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가을 추수기에 있은 과격한 모병 등의 행위로 순변사(이일과 이빈 등)들에 대한 책임추궁이 거론되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24일.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25일. 흐리다. 새벽녘 꿈에 이일과 만나서 말을 많이 했는데, 나는 그에게 “국가가 이처럼 위태하게 된 때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뱃장 좋게 음란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성 바깥 여염집에 있으면서 남의 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무슨 생각으로 그러하며, 또 수군 각 고을과 포구에 배정된 육전의 병기를 독촉해 가져가기에 바쁘니 이것은 또한 무슨 까닭이냐?” 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깨어보니 꿈이었다. 식후에 대청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꿈에 이일에게 책망하는 말을 많이 했는데, 이일뿐 아니라 평소 나라를 잘못 경영하고 있는 조정 대신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꿈으로 표출된 것 같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26일. 소한(小寒)이다. 맑고 따뜻하다.
27일. 맑다. 좌우도로 갈라 보냈던 항복한 왜인들은 모두 모아오게 하여 총 쏘는 연습을 시켰다. 우도 우후(이정충), 거제(안위), 사도(김완), 여도(김인영)가 모두 와서 보았다.
1593년 8월 8일, 이여송은 3만 명을 이끌고 귀국해 돌아갔다. 그후 유정(후에 순천 왜교성 전투를 지휘함) 등이 1만 5천을 거느리고 잔류해 있다가 1594년 9월 11일 역시 귀국했다. 명군은 귀국하면서 부산에서 의주까지 30리 간격으로 5명 단위의 파발 조직을 구축해 놓고서 조 · 왜의 동태를 감시했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11일 ※
임금이 총병 유정을 모화관으로 나가서 전송하였다.
선조 :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직 대인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제 철수하니 서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유정 : 나 역시 두 해 동안이나 이 나라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정리로 보아 차마 작별할 수 없습니다. 돌아갈 때에 경략을 만나 귀국의 사정에 대하여 힘껏 진술하겠습니다. 오직 전하가 더 한층 나라를 걱정함으로써 온 나라를 편안하게 하기 바랍니다.
선조 : 이런 말을 들으니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인이 만약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흉악한 적들을 섬멸하고 우리나라 백성들을 구제하여 만대에 전할 특이한 공훈을 세운다면 이 또한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정 :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군들 공로를 세우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기러기는 지나가면 소리를 남기고, 사람은 태어난 이상 이름을 남겨야 한다’ 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공로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제가 전하를 모신 지 오래 되었으니 한 마디 말씀 올리겠습니다.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며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고 형법(刑法)을 너그럽게 쓰는 것, 이 네 가지를 전하께서 힘쓰셔야 합니다.
선조 : 우리나라 군병들은 모두 교련되지 않은 군졸이어서 위급한 때에는 쓸 수 없으므로 감히 큰 나라 군사를 청했던 것입니다.
유정 : 군사는 10만이고 20만이고 동원하기 어렵지 않으나 군량 공급이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천리 행군에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다면 용병할 수 없습니다.
선조 : 대인의 생각에는 군대를 얼마나 동원하면 이 적들을 섬멸할 수 있겠습니까?
유정 : 10만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조 : 흉적들이 대인을 두려워하여 감히 발동하지 못했는데 오늘 대인께서 서쪽으로 돌아가시니 전라도를 장치 지켜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만약 전라도를 잃는다면 대군이 나오더라도 구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정 : 저 적들이 매번 양식을 얻기 위하여 진격하는데 지금 만약 다시 동병(動兵)한다면 전라도로 나올 것이니 요해지에 매복하였다가 요격하고, 백성과 곡식을 들에서 산성으로 철수시킨 다음 적을 기다리십시오.
그리고는 서로 읍(揖)을 한 후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
아무튼 명나라 군사 1만여 명의 군량미를 해결하지 못했기에 명군은 귀국했고, 이렇게 되자 조선군 단독으로 왜군과 싸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11일 ※
임금이 이어서 대상(臺上)으로 나아가 무사(武士)들의 말 타고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무사 1인이 말을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다쳤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무사 중에 맞히지 못하는 자가 많은데 연습을 안 해서 그런가?” 하였다.
영의정 유성룡이 말하기를 “대개 연습을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또 말을 달리며 표적을 쏘아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표적을 쏘아서 맞힌 자에게는 상으로 말을 주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지당합니다.” 라고 하였다.
말 타고 활쏘기가 끝나자 임금은 환궁하였다.
유정을 전송한 후 훈련장을 관람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도 임금과 대신들이 이처럼 관심을 갖고 국방력을 키웠더라면 온 나라가 적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적의 칼날에 어육(魚肉)이 되는 일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11일 ※
선조 : 방어사는 권응수로 삼는 것이 어떻겠는가?
김수 : 경상도는 군량 공급이 어렵기 때문에 이시언은 전라병사로서 경상도를 지키고 이사명은 충청병사로서 경상도를 지키는데, 모두 본도의 군량을 가지고 영남에 가서 지키니, 만약 권응수로 경상방어사를 삼는다면 군사를 먹일 계책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유성룡 : 지금의 계책으로는 충주를 진관으로 삼아 병사로 하여금 진에 남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상도 육군의 군량미를 전라도와 충청도에 의존하고 있고, 충주를 중심으로 진관제도를 회복시켜서 명군 철수 후의 군사적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11일 ※
김수 : 경상감사 한효순이 경상도의 상주 · 대구 · 경주 · 울산 등 네 읍(邑)의 선비들과 인민들을 포장(褒奬)할 것을 장계했는데 전하께서 온당치 않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아마 영남의 인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맥이 풀렸을 것입니다. 영남은 풍속이 순후하여 명현(名賢)들과 큰 선비들이 모두 여기에서 배출되었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김면과 정인홍이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고, 김해 역시 의(義)를 주창해 기병하였지만 불행히도 죽었으니, 이 사람들을 추후로 포장해 주어야 합니다.
선조 : 내 생각에는 영남의 풍속이 무예를 익히지 않고 문사만 숭상하여 폐풍을 개혁하기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에 전날 그렇게 지시한 것이다. 추후로 포장하는 것은 비변사가 참작해서 하도록 하라.
밤 1시 경에 대신 이하가 물러났다.
선조는 영남 유림들에 대한 기송사장의 폐풍을 개탄해서 영남 지역에 대한 표창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이에 경상감사 한효순은 김면, 정인홍, 김해 등은 기송사장이 아닌 실학적 자질의 인물로서 공을 세웠다고 재차 상신했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14일 ※
비변사에서 건의하였다.
“항복한 왜인들을 처음에는 깊고 외진 곳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모두 서울로 올려 보낸 다음 양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로에서 전송할 때 폐해를 끼치는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양계의 군읍은 한결같이 잔악하게 파괴되어 수많은 항복한 왜인들을 모두 그곳으로 보낸다면 물력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금후로는 항복해 오는 자들 중에서 재능이나 기예가 있고 공순하여 부릴만한 자는 진중에 남게 하고, 나머지는 도검(刀劍)을 거둔 후에 한산도의 수군이 있는 곳으로 들여보내 여러 배에 나누어 두고 격군을 삼게 하며, 정상이 의심스러운 자가 있을 경우에는 장수들로 하여금 즉시 선처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 건의대로 따랐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15일 ※
경상 좌병사 고언백이 급보를 올렸다.
“승장 유정(사명대사)이 이겸수 등과 함께 8월 10일 가등청정의 진영에 가서 독부(명나라 도독부)의 편지를 청정에게 주었더니, 청정은 뜯어 본 다음 붓을 잡고 다음과 같이 써서 보였습니다.
‘전날에 명나라와 혼인을 하자던 문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조선의 4개 도를 떼 내어 일본에 소속시키자던 문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내자던 문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조선 대신의 인질 문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전처럼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던 문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또 두 조항을 더 썼습니다.
‘명나라 사람 한 명을 인질로 들여보내는 문제는 어떻게 하겠으며, 명나라에서는 무슨 수단으로 일본과 관계를 가지려는가?’
유정 : 먼저 말한 다섯 개 조항에 대해서는 전날 여기에 왔을 때 이미 써 냈고, 이번에 온 독부의 편지에서 회답한 것도 역시 전날 송운(사명대사의 호)이 한 말과 같으니 이제 다시 논의할 일이 없으며, 나중에 첨가한 두 개의 조항은 우리들이 마음대로 논의할 것이 아니다. 다만 도독부가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청정 : 그렇다면 독부가 일본과의 화친을 논의하면서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
유정 : 독부의 뜻은, 귀하는 호걸스러운 인물이면서 관백의 부하로 있는 것을 기꺼이 여기는데, 황제에게 건의하여 귀하를 일본의 관백으로 봉하고 군사로 돕도록 하려는 것이다.
(청정은 귀를 기울이고 묵묵히 들으면서 다른 말을 하지 않다가 말했다.)
청정 : 다섯 가지 일은 바로 관백이 지시한 것이니 성사시키지 않을 수 없다.
유정 : 아무리 관백의 지시라 하더라도 그것은 큰 나라 조정의 뜻과 맞지 않고 또 의리에도 맞지 않는다. 설령 천지가 뒤바뀌더라도 이 의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청정 : 이 다섯 가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를 가지고 강화를 한다고 말하겠는가?
유정 : 먼저 말한 다섯 가지 문제 가운데 사이좋게 지내자는 한 가지 문제는 그래도 혹시 가능하겠지만 그 나머지는 논의할 여지조차 없다.
청정 : 만약 사이좋게 지내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유정 : 조선에서는 여러 대째 내려오면서 원씨(일본)와 서로 관계를 갖고 서로 유무상통(有無相通)하며 왕래하는 것에 대하여 화의를 맺었을 뿐이다. 이밖에 다시 무엇을 더하겠는가?
청정 : 사이좋게 지낸다면 지난날 대마도에 주던 물건(고니시 측에 제시한 강화회담의 조건)들을 다 적어서 보여주겠는가?
유정 : 그 물건 목록은 우리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니 돌아가서 조정에 보고하여 처리하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경상좌병사 김응서-요시라-고니시 간의 강화회담’ 과 함께 ‘경상우병사 고언백-유정-가토 간의 강화회담’ 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가토가 요구한 강화회담의 조건에 대해서 유정은 ‘천지가 뒤바뀌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이라고 하였는바, 강화회담의 진행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점과 정유재란의 조짐을 감지할 수 있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19일 ※
비변사에서 건의하였다.
“육지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의 군영과 보루가 이미 공고해지고 병력도 아주 많은 상황에서, 우리의 나약한 군사와 무딘 병기를 가지고는 한 개 주둔지를 격파하기도 사실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러나 수군으로 하여금 바닷길을 가로막고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끊게 한다면 적의 형세가 저절로 수그러들 것이니, 이것은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바 견고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고리를 친다는 전술입니다. 그리고 거제에는 적이 주둔하고 있기는 하지만 형세가 외롭고 약하며 특히 김해 · 웅천에 있는 적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며 멀리서 성원할 뿐입니다.
그러나 거제에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수군들이 견내량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마땅히 거제의 왜적을 쳐서 그들로 하여금 지탱해내지 못하고 웅천의 적과 합치게 한다면 우리나라 수군이 동쪽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 여러 도의 전선들을 이동시켜 영등포 앞으로 나아가 정박하고 있으면서 출몰하여 적을 공격 · 소멸시키고, 깃발을 많이 세우고 징과 북을 쳐서 서로 들리게 한다면 해안에 있는 적들은 오직 바다를 방어할 생각에 반드시 배로 내려올 것입니다. 그때 육지의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여 동시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의 숲 속에 군사를 위장시켜 놓아 적으로 하여금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 헤아리지 못하게 했다가 간혹 정예 군사를 내보내어 선두와 후미를 쳐서 차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제일 좋은 기책(奇策)입니다.
그리고 거제의 형세에 대해서는 신 등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영등과 옥포 사이에는 수림이 울창하고 수풀이 뒤덮여 있으며, 거제 사람들 중에는 활을 쏘아 사냥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 만약 그들을 전부 한 곳에 집결시켜 밤낮으로 적진의 좌우에서 공격하여 땔나무를 하는 적들이 문득 화살에 맞아 죽게 한다면 거제의 적들이 반드시 도망칠 것입니다.
그런데 (수륙의 장수들이) 이러한 계책 하나 내지 못하고 천연덕스럽게 날만 보내면서 지금까지 한 가지 계책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선전관을 급히 파견하여 이런 내용을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알려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대답하였다. “매우 타당하니 속히 거행하라.”
《난중일기》 1594년 9월 3일자를 보면, 이순신에게 전달된 임금의 밀지에 ‘수륙의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 고 책망하는 내용이 있다. 비변사가 이 같은 책망에 대한 대책으로 제시한 것이 위의 구상이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27일 ※
겸삼도 도체찰사 좌의정 윤두수가 급히 보고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지 이미 세 해나 되어 재물이 거덜났으므로 지키기 어려운 형편은 갈수록 심해 가니 이런 형편으로는 결코 오래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구차하게 요새를 만들고 파수를 서느라 백성들의 힘을 다 허비하여 마침내 보람이 없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중앙과 지방의 세력을 모으고 힘을 합쳐서 한바탕 싸워서 이긴다면 그것은 하늘의 신령이 도운 것이고 설사 이기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종묘와 사직 앞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생각에 늘 잠겨 있다가 전날에 이미 도원수와 비밀리에 의논하였더니 원수의 생각도 신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지금은 명나라 장수들이 철수해 돌아갔고 사람들도 확고한 뜻이 없으니 우리 힘으로 나아가 쟁취하려는 계책을 늦춰서는 안 될 형편입니다.
경상우도에 있는 적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시일을 지연시킨다면 군량을 얻을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가을 추수철이어서 양곡의 저축이 좀 넉넉하고 각 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의 군량으로도 한 달 분의 양식은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서, 호남의 군사 3천 명은 도원수가 이미 전주에 불러 모았으니 수군은 동쪽으로 내려가고 육군은 남쪽으로 나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일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도 나아가 주둔하여 세력을 합치고 원수의 지휘를 받게 할 것입니다.”
가을 추수로 얼마간의 군량미가 확보되었기에 권율과 상의해서 작전을 계획했다. 아래는 ‘윤두수-권율의 작전안’ 에 대한 비변사의 의견이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27일 ※
비변사에서 회답 보고하였다.
“전쟁에서의 기회는 한순간에 결정됩니다. 그래서 만약 ‘만약 기회를 탈 수 있다면 어찌 꼭 천리 밖에까지 가서 싸우기를 청하겠는가’ 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윤두수가) 이 장계를 올린 것은 실로 흉악한 적을 섬멸하지 못한 것이 분하고 오래 끌면 지탱하기 어렵다는 걱정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힘을 합쳐 한번 결사전을 해보자는 것으로서 승패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자는 것이니 그 의도가 좋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걱정하는 것은 우리 군사는 갈수록 약해지는 반면에 적의 세력은 소굴에 웅거하고 있으므로 많은 군사와 정예로운 무기를 쓰지 않고서는 소탕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지금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들은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고, 가지고 있는 무기는 공고한 성을 공격하거나 험한 요새를 파괴할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활과 화살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갑자기 튼튼한 보루 밑에 군사를 주둔시켜 적과 맞서 싸울 경우, 승패 여부를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자신을 알고 상대방을 알아야 한다는 이치로 말한다면, 꼭 이길 형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번 실수한 다음에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해지고 우리 군사가 흩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역시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대개 오늘의 형세로는 지켜낼 수도 없고 싸워낼 수도 없으니, 윤두수의 계책도 결사전을 벌이는 가운데서 살길을 찾아보려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이미 도원수와 자신의 노력으로 나아가 쟁취할 것을 의논하고 결정하였으니 일이 난처하다는 점을 핑계대고 중지시킬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작전이지만 그렇다고 윤두수의 작전을 말릴 수도 없다면서 난감해 하고 있다.
※ 《선조실록》 1594년 9월 27일 ※
“신들이 전에 주청한 것은 수군으로 하여금 거제도의 적을 공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오로지 바다를 막는 데에 마음을 쓰게 한 뒤에 육지의 병사는 적의 진영 가까이 가지 말고, 산 정상과 숲속 등지에 의병(疑兵: 적을 속이기 위한 가짜 군사)을 많이 설치해서 적으로 하여금 놀라고 당황하게 한 다음, 아군의 정예병을 뽑아 좌우에서 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약간의 가망이 있을 듯합니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견고한 곳을 공격하면 허술한 곳도 견고해지고, 허술한 곳을 공격하면 견고한 곳도 허술해 진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城)에는 공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고, 지형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 있는 것입니다. 또 먼저 성세를 떨치고 후에 실제가 따르게 한다는 것도 모두 이런 종류를 이르는 것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은 또 염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정 총병이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돌아오면 양식을 대주어야 하는데 이를 모두 전라도에서 차출해야 합니다. 지금 군읍(郡邑)의 조금 있던 양식을 적도 섬멸하지 못하는 군사들에게 다 내주고 있는데, 만약 일단 중국군이 나온다면 다시는 양식이 나올 곳이 없으니, 이 또한 도적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틀림없이 망할 것입니다.
신 등이 밤낮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적과 서로 맞서서 싸운 지 이미 3년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훌륭한 장수는 한 명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체찰사가 다시 도원수와 참작하여 논의하여 처리하되, 늦추지도 말고 너무 급하게도 하지 말게 함으로써 위급한 형편을 크게 구제하라는 뜻으로 선전관을 보내어 지시를 내려 보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 의견을 따랐다.
※ 《선조실록》1594년 9월 28일 ※
비변사에서 건의하였다.
“선전관이 유지(諭旨)를 가지고 체찰사에게 내려갑니다. 군병들이 이미 모이고 군사들의 마음이 서로 분기(奮起)한다면, 마땅히 임기(臨機)하여 계책을 결정해서 편의한 대로 종사해야 할 것이고 먼 곳에서 억측(臆測)으로 하는 말에 구애되어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는 뜻도 또한 문서로 지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나라의 큰 일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나의 의견은 초봄에 거사하려고 할 때 이미 다 말하였으니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징을 쳐서 싸움에 이긴 사람도 있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귀신이 도와주면 혹시 만분의 일이라도 성공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아가 공격하여 수일 내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군량은 어디서 나오며 어떤 사람이 날라다 줄지 모르겠다. 하늘에서 곡식이 내려오고 귀신이 날라다 주겠는가.
견고한 성 밑에서 군량이 떨어지면 적들이 총 한 방 쏘지 않아도 흩어져 달아날 겨를도 없을 것이다. 수백 리에 걸쳐 군영이 연달아 있는 적군은 아마도 4~5만 명 이하로는 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다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이 본성이며 여러 해 동안 싸움에 익숙해진 자들이다.
그런데 지금 호남이나 호서의 훈련받지 못한 군사 3천 명을 뽑아가지고 한 번 휘둘러서 적을 박멸하고자 하니, 괴이하고 괴이한 일이다. 구구한 의견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다만 성사되기를 하늘에 빌 뿐이다.”
선조는 ‘초봄’ 에 공격하기를 바랐는데 이미 작전을 시작했으니 ‘저지’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또 왜군들은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며 살아온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며, 그 위에 견고한 왜성과 4~5만의 왜군들을 상대로 조선군 3천의 오합지졸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면서 ‘괴이하고 괴이한 일이다. 다만 하늘의 도움을 빌 뿐’ 이라고 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일 ※
도원수 권율이 급히 보고하였다.
“9월 22일, 수륙전을 직접 독려하는 일로 신은 사천 · 고성으로 떠나 그믐 전에 거제에서 거사할 계획입니다.”
임금이 지시하였다.
“지금 도원수의 장계를 보면 이미 거사하여 성패가 판가름이 났을 것이다. 이는 중대한 일이니 비변사의 낭청 문관을 급히 보내어 주야로 달려가 실정을 자세히 알아 와서 보고하도록 하라고 비변사에 말하라.”
왜군은 물론 명군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 작전에 대한 보고였다. 조정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었기에 권율의 장계는 임금만이 읽는 대외비의 장계였고, 어명을 받은 낭청의 문관도 은밀히 달려갔을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일 ※
경상도 좌병마절도사 고언백이 보고하였다.
“신의 군관 이극함이 적의 형세를 정탐하기 위하여 동래 등지로 들어갔는데, 신에게 보고하기를 ‘평의지의 부하 요시라 등으로부터 적정을 탐문해 보니, 일본 국왕(히데요시)이 평의지를 미워하기 때문에, 의지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고, 또 우리나라와 종전처럼 교린(交隣) 관계를 갖고 싶어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양 현감 유덕화가 보고하기를 ‘기장의 두모포에 주둔하고 있는 적병 5백여 명이 같은 현의 석남촌을 갑자기 포위하여 분탕질한 후 남녀 5명을 붙잡아 갔다’ 고 하였습니다.”
대마도주 종의지는 히데요시가 자기를 미워한다면서 강화와 교린을 요청해 왔다. 그런가 하면 기장의 왜군들은 분탕질을 하는 등 강화에 역행하고 있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4일 ※
사간원에서 건의하였다.
“순천 부사 권준은 가렴주구만을 일삼아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공장(工匠)들을 모아 진귀한 물건들을 만들도록 하는가 하면, 토지 면적에 따라 배정하고는 고기와 생선을 바치도록 독촉하는 등 자신을 살찌우고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기 위한 밑천을 장만하는 일이라면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또 창고의 쌀을 훔쳐내어 배 3척에 가득 실었다가 감사(監司)에게 적발되었으며, 짐바리로 무명을 실어다가 서울의 곽지추의 집을 샀습니다. 수군에 있을 때에는 술과 고기를 잔뜩 차려놓아 낭비가 끝이 없었고, 심지어는 창녀(娼女)까지 데리고 거리낌 없이 음탕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활 쏘는 군사들을 뽑아내어 거제에서 몰래 붉은 빛깔의 노루를 사냥하게 하였다가 몽땅 왜적에게 빼앗겼습니다. 그의 좌상을 따진다면 극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잡아다 신문하여 법에 따라 죄를 주기 바랍니다.”
대답하기를 “건의한 대로 하라.” 고 하였다.
《난중일기》 1594년 10월 25일자를 보면서 군사 작전중인 권준이 왜 잡혀가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대체로 군량미 조달을 위한 군영 경영 프로젝트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부정이나 비리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또 주로 한산진에 나와 있었던 권준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었는지 위의 기록만으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거제에서 몰래 노루를 사냥했다가 왜적에게 빼앗겼으니’ 라고 했는데, 이 같은 일이 사간원으로부터 탄핵받는 사유가 되었다는 것도 의아스럽다.
그런데 이 사건이, 왜 하필이면 윤두수가 순천에 왔을 때, 불거져 나왔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이순신의 오른팔 격인 권준을 표적수사해서 사소한 트집을 잡아 부풀린 후 권준을 파직시키고, 더 나아가 이순신까지 실각시키려는 당쟁적 책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는 것이다.
어영담도 암행어사의 감사에 지적되어 파직되었다가 이순신의 구명 장계를 통해 복직되었지만, 그 후 윤두수에 의해 다시 파직된 바있다.
아래는 《선조실록》 1594년 10월 8일자에 수록된 원균의 장계이다. 장문포 · 영등포 작전 관련 장계들 중 첫 번째로 실려 있으며, 의아스럽게도 이순신 통제사의 장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장문포 · 영등포 작전은 윤두수가 이순신을 제외시키고 원균과 기획 · 추진한 작전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8일 ※
경상우수사 원균이 장계를 올렸다.
“9월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장문포에 주둔해 있던 적의 형세와 맞붙어 싸운 경과에 대해서는 이미 급보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2일 해가 뜰 무렵 다시 장문포에 진출한 적을 보면 틀림없이 구원을 청하려고 주둔한 왜놈들로서 전에 비해 좀 많았습니다. 무려 1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세 곳의 높은 봉우리에 주둔하여 깃발을 크게 벌려놓고 수없이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우리 군사들이 의기가 북받쳐 나갔다 물러났다 하면서 하루종일 맞붙어 싸우다가 어둠을 타서 조금 퇴각하여 외질포에 진을 쳤습니다.
3일 진시(오전 8시경)에 수군을 동원하여 장문포에 벌려 세우자 적들은 강어귀에 진을 쳤습니다. 먼저 선봉으로 하여금 성에 접근하여 도전하게 했더니 적의 무리가 화살과 돌팔매에 멀리 피하여 혹은 성 안으로 도망쳐서 매복하기도 하고 혹은 성 밖에 땅을 파고 몸을 숨기기도 했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탄환도 쏘고 큰 포도 쏘았는데 그 탄환의 크기는 주먹만 하고 3백여 보까지 갔으며, 전날보다 갑절이나 맹렬하였으며, 기타 장비들도 아주 흉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진 근처에는 마초가 수없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신이 정예 군사들을 뽑아 보내어 경계를 서는 왜놈을 쏘아서 쫓아버리고 전부 불태우게 하니 화광이 밤새도록 하늘에 잇닿았습니다. 대체로 육군이 아니면 육지에 있는 적을 수군만으로는 싸움으로 끌어낼 형세가 더 이상 없었으므로 지극히 한스러웠습니다.
신이 다시 통제사 이순신, 육병장(육군 장수)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수륙군이 합세하여 공격하는 문제에 대한 계책을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길을 자세히 아는 거제의 활 쏘는 군사 15명을 뽑아내어 길잡이를 시키고 신이 관할하는 여러 배들에서 육지 싸움에 적합한 자원병 31명을 함께 뽑아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거듭 강조하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일 묘시(오전 6시경)에 여러 배들이 적진에 돌압하여 혹은 명화비전도 쏘고 혹은 현자총통과 승자총통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 선들을 영등포의 적의 소굴로 갈라 보내어 서로 들락날락 하면서 동쪽을 치는 척하다가 서쪽을 치는 모양을 보이며 놈들끼리 서로 응원할 수 있는 길을 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보루를 굳건히 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섬멸할 길이 없어서 분개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원균 자신이 통제사나 총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전개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장계이다. 옛날에는 문장을 두고도 예절을 따졌는데, 이순신 통제사의 시각에서 보면 ‘군례(軍禮)도 군령(軍令)도 없는 글’ 이다.
아무튼 《난중일기》에는 이순신도 장문포 · 영등포 관련 장계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올린 장계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또 그 무렵(11월 29일~12월 30일)의 《난중일기》는 왜 또 누락되어 있을까?
※ 《선조실록》 1594년 10월 8일 ※
“육군 장병들은 도원수 권율에게 형세를 직접 보고하고 뒷 날을 기약하고 7일에 떠나갔으며, 신 등의 수군들은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육군 장병들은… 7일에 돌아갔고’ 고 하였으니 원균의 장계는 7일 이후 거제도 앞바다에서 작성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8일자 어전회의에 보고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이 날자 《실록》에 기록될 수 있었을까? 이 역시 수수께끼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8일 ※
“5일 군사를 쉬게 할 때에 신이 거느리고 있는 정탐하는 배에 장수를 선정하여 정심포곶으로 떠나보내면서 왜놈들의 형세를 급히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일 묘시에 정탐 나갔던 장수인 원사웅, 조준표 등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정탐선 4척으로 선단을 엮어 거제 오비질포까지 가서 적선 2척을 만났으므로 적의 깃발을 향해 돌입하였더니 왜적들의 절반이 육지로 올라갔고 배를 지키던 적들도 우리 배를 보고는 갈팡질팡하다가 물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수문장 김희진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싸웠더니 화살에 맞고 상한 왜적이 꽤 많았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린 적 30여 명이 총을 쏘아대며 와서 응전하는 바람에 쫓아가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적선 2척과 기타 실려 있던 여러 가지 물건들을 몽땅 불태워버리고 돛으로 쓰는 돗자리, 물통, 낫, 도끼, 노, 돛대 등을 싣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불타다 남은 적선을 가져다 증명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7일에 돌아와서 보고하는 말이 ‘오비질포에 급히 갔더니 왜적 5~6명이 바닷가에서 마치 무엇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육지에 올라가 활을 쏘면서 쫓아가니 적의 무리는 산골짜기로 흩어져 달아났고 한 명의 왜적이 막다른 지경에 이르자 칼을 풀고 항복을 애걸하기에 생포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불에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원사웅은 원균의 아들(18세)인데 그의 선단도 약간의 공을 세웠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8일 ※
“그리고 신의 중위장인 곤양 군수 이광악은 6일에 출동하여 군사를 매복시켰는데 왜적이 은밀히 바닷가에 매복하여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엿보고 있기에 배를 급히 몰아 돌진하여 1명을 생포하였습니다.
선봉장인 웅천현감 이운룡은 적진에 달려 들어가 왜인의 작은 서판(書板)을 탈취해 왔습니다. 그 서판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보내고, 군사를 데리고 돌아와 한산도에 진을 치고 새로운 각오로 변란에 대처하고 있습니다.”
‘왜인의 작은 서판’ 은 왜군들이 땅에 꽂아 세웠던 ‘싸워서는 안 된다’ 는 패문이다. 그런데 원균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양 기술했다. 그 무렵에는 관리나 장수들에게 강화회담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패문으로 인해 사실상 작전이 중단되었다는 점에서 패문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원균은 이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수륙의 총사령관인 양 작전을 지휘했고 자기 아들 원사웅은 앞장서서 돌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는 식으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투의 결과는 난리법석만 부리고 성과는 형편없는, 말하자면 ‘태산명동에 서일필’ 격이었다.
윤두수와 원균은 이 장계를 통해서 임금과 조정 대신들로 하여금 ‘원균은 용맹했고, 이순신은 멀리서 팔짱만 끼고 있었다’ 는 인식을 심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0일 ※
순변사 이일이 장계를 올렸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자질로서 외람되이 순변사의 중임을 맡게 되었으니 어쩌 성심성의를 다하여 조금아니마 보답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재주는 한정되어 있고 아는 것이 적다 보니 모든 일에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비방(誹謗)의 말부터 먼저 모여듭니다.
신이 받아가지고 온 임무 세칙(細則)에 ‘본도의 백성을 남김없이 동원하여 모두 군량 준비에 협력하게 하라’ 고 하였기 때문에, 신은 변방의 고을들을 순행하면서 한가하게 노는 사람들을 찾아내었는데, 그 인원이 큰 고을에서는 수 백여 명이나 되었고 작은 고을에서는 백 명이었습니다. 신은 형편을 참작하여 될수록 간편한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충청) 감사 윤승훈은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사무치고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텅 비게 한 죄를 신에게 돌리고 심지어 장계를 올리기까지 하였으며, 전라도의 전후 관찰사인 이정암과 홍세공 등도 전하에게 보고함으로써 신은 신소(伸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본래 위엄과 덕망이 적은데다가 하는 일마다 구애되는 것이 많아서 결코 하루라도 염치없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속히 신을 파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회답하여 타일렀다.
“이제 경(卿)의 장계를 보니 매우 괴이하다. 경은 순변사의 중임을 띠고 군사 문제에 관한 일을 조처하였으니, 비록 경이 처치한 일의 잘잘못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고을 수령들이 지시를 시행하지 않고 감사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위령(威令)이 권위를 잃고 군정(軍政)이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죄가 꼭 경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오늘의 사태는 매우 위급하다. 인심이 해이해진 현상이 나날이 더해가고, 또 사세가 어쩔 수 없어서 성사시킬 만한 일이 없으니, 다만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논의까지 있는 실정이다.”
이일이 순변사로서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는 고을들을 다니면서 왕명으로 군병을 차출하고 다니자 충청 · 전라도 감사들이 이일의 모병이 지나치다고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모병하는 과정에서 과격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임금은 감사와 수령들의 마음이 해이해져 있다고 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