勸持品(권지품) 第十三
9. 우리는 세존(世尊)의 사자(使者)
“우리는 세존의 사자”,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법사품에 오종법사가 있었지요.
書寫(서사), 受持(수지), 讀(독), 誦(송), 解說(해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오종법사(五種法師) 속에 들어가지요.
법사라면 그대로 사자고 부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광이지요.
이런 것은 영광이라고 생각을 하고
사람들에게 부처님 말씀 한 말씀 전할 때
‘정말 아! 나는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다.
내가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영광된 일이냐?’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돼요.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큰 보람입니까?
세상에서 이런 저런 상과 공로패도 많지요.
그런 것 많지만 그까짓 거 뭐 별겁니까?
사실은 부처님으로부터 이런 영광스러운 일을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마을과 도시에서 불법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들은 그의 처소에 가서 부처님께서 부촉하신 법을 설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부촉하신 법입니다.
부촉하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전하도록 하라” 라고 하는
최후의 가르침이지요.
그것이 부촉입니다.
우리들은 세존의 심부름꾼(使者)이라 대중 속에 있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법을 잘 설하리니 부처님께서는 편안히 계십시오.
우리들은 세존과 시방에서 오신 모든 부처님 전에 이러한 서원을 말씀 드리니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심부름꾼, 사자다 이것입니다.
참으로 이 보살들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선택이라고 자부하고
그것을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법화행자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오종 법사 속에 저희들이 다 포함됩니다.
조금만 법화경과 인연이 있어도 다 오종 법사 속에 포함이 되고
그러므로 역시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런 그 일들은 정말 살아가는 데 가치 있는 일이고
보람된 일이라고 하는 그런 가치관을 우리가 확고부동하게 세웠을 때
그때 참으로 인생이 좀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처음에야 뭐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부처님께 귀의를 하고
불법과 인연을 맺게 되고 그렇게 되지만,
결국은 이렇게 좋고 보다 더 큰 그리고 보다 더 훨씬 유익한
그런 곳으로 회향 되고 그 쪽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탁하러 오고 얻으러 오고 요구하러 오고 내 문제 해결해 주십시오.
대개 이런 마음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그런 그 소망을 버려라. 그런 욕심을 버려라.
그러면 더 편안할 것이다.
어차피 그것은 허망한 것이고 환상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매달려 가지고 그렇게 할 게 아니라,
거기서 좀 더 새로운 차원의 눈을 뜨고
채우려고 하지 말고 비우려고 해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버리려고 해라.”
우리 생각하고 반대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요.
아직도 불교 안에서
“심중소구소망 원만성취지대원(心中所求所望 圓滿成就之大願)” 해 가지고
자기가 하는 어떤 일, 도둑질하는 사람은 도둑질 잘 되게 하고
사기 치는 사람은 사기 잘 되게 하고
자기 노력도 하지 않고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구하려고 채우려고 하거든요.
설사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불교는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니
우리 마음 하고는 정 반대지요.
그런데 부처님이 제시하신 길로 가면
훨씬 길은 더 넓고 탄탄대로고 행복하고 그 행복은 요지부동이지요.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마를 때 짠물 한 컵 마시면
마실 때는 모르지마는 마시고 나면은 바로 목이 또 마른 거지요.
그러면 또 짠물 한 컵 마십니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됩니까? 마시는 순간은 모르지만
마시고 나면 또 바로 목이 마르고 또 마르고 하는 여기서
부처님은 그대로 있지 않고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우려고 해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버리려고 해라.”
이것이 사실은 부처님의 진심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어떤 소구 소망 원하는 바 구하는 바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어떠합니까?
인도하는 스님들도 법사님들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소망을 이룰 것이고 기도 성취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 사람한테 한번 그렇게 휘말려 들고 저 사람한테 휘말려 들고
그러면 계속 업이 되고 습관이 되어 지고 계속 그런 쪽으로 불타는데
불을 끄려고 휘발유를 붓는 형식으로 되어가고 있다고요.
우리 불교가 그렇게 가고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휘발유가 물인 줄 알고 불타는데 갖다 끼얹는 거예요.
끌려고 하면서 오히려 불을 더 짚이는 그런 격이 되고 말죠.
우리들 하는 일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진심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는 안 들겠지요.
아유! 나는 지금 이것을 지금 이루어야 되고 이것을 성취해야 되고
이것을 쟁취해야 되고 이것을 얻어야 되고
이것을 채워야 되고 이런 마음이 꽉 차있는데,
내가 하는 소리나 부처님이 하는 그 소리가 마음에 썩 들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것을 이해할 때
참으로 편안해지고 진정 행복해 지고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긴다면
정말 불교를 조금 이해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 불교의 본분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이런 소리도 다 군더더기예요.
이런 소리도 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비위 맞추자고 하는 소리입니다.
불교의 정말 근본 취지에서 보면 이런 소리도 좀 차원이 낮은 소리지요.
그러나 그 정도로만 이해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본래의 마음이 어디 있구나 하는 것을
다소는 이해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오늘 권지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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