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김윤배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창마다 입김처럼 피어오르는 따스한 불빛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마지막 전동차의 브레이크 소리 빈 가슴 울리는 사당이나 구파발 종점의 어둠이 얼마나 아픈 상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할 일 없는 봄날 마음 그늘 흐드러진 진달래꽃 무덤이 얼마나 사무친 밥그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미명, 아내 유리 그릇 부딪는 잔잔한 울음이 얼마나 기막힌 위안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비스듬히 살아보지 않았다면 새벽 3시 서울역 대합실 노숙의 꿈이 얼마나 속 쓰린 사랑인지 알 수 없습니다
- 『부론에서 길을 잃다』 김윤배 시집, 문학과지성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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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슬픔과 소멸의 아름다움
김병익
서재 한쪽에 천관우 선생이 써준 글씨로 만든 편액 한 점이 걸려 있다. “逍遙一世之上 睥睨天地之間”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睥睨(비예)’라는 말은 대상에서 조금 떨어져 그것을 지긋이 내려 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상을 느긋하게 슬슬 돌아다니며 만물을 거리를 두고 비스듬히 바라보며 음미하는 태도를 말한다. 나는 이 시에서 ‘逍遙(소요)’와 ‘睥睨’의 정경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시인은 비스듬한 시선으로 밤거리를 헤매고 지하철을 타고 종점에 이르며 봄 언덕에도 오르고 아내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연상한다. 그가 바라보고 자신의 내면에 담는 정경들은 “창마다 입김처럼 피어오르는 다스한 불빛” “전동차의 브레이크 소리” “진달래꽃 무덤” “아내 유리 그릇 부딪는 소리”, “노숙의 꿈” 등 가지가지이며 빛과 소리, 정경과 꿈으로 서로 다르지만 그것들을 가로지르는 시인의 정서는 따뜻하면서, 그래서 스며드는 슬픔이다. 그것은 “따스한 불빛”이지만 “큰 슬픔”이고 “빈 가슴 울리는” “아픈 상처”이며 화사한 진달래꽃 무덤은 “사무친 밥그릇”이고 아내가 유리 그릇을 만지며 내는 소리는 ‘울음’으로 들려오지만 “기막힌 위안”이 되고 노숙자의 고된 꿈은 “속 쓰린 사랑”에서 빚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슬퍼서 아름답고 정겹기에 고통스러우며 울음이기에 위안이고 따스함이 상처가 되는, 엇갈림의 감정이 하나의 측은한 긍정의 정서로 피어나는 내면적인 모습이 ‘소요와 비애’로 갖게 되는 시인의 세상에 대한 시선인 듯하다. 그 시선이 봄날의 화사한 햇빛 속에 진달래꽃 무덤을 바라보는 3연을 중심으로 하여 한밤과 새벽으로 나누어지고 있어 그의 소요와 비예는 대체로 어둠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김윤배 시인의 근원적인 서정의 뿌리는 어둠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예시해 주고 있다. (115~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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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듬함에 대하여
두레박이 우물물에 내려가서는 비스듬히 구부러집니다. 그래야 물이 두레박에 담깁니다. 우물에서 올라와서는 다시 비스듬히 구부러져서 물을 비웁니다. 우리도 비스듬히 구부러져 살 때 보람들이 차기도 하고 비워도 집니다.
술잔도 마찬가지입니다.
2026년 4월 11일 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