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점필재 김종직선생 연보(佔畢齋先生年譜)
간옹(艮翁-李瀷의 號/慶州人) 이공(李公)이 박재(璞齋/점필재 손자 김유(金紐)의 號)가 편집한 것을 따라 다시 교정(校正)을 하였다.
황명(皇明) 선종황제(宣宗皇帝) 선덕(宣德) 6년 신해(1431) 우리나라 세종대왕(世宗大王) 13년. 6월경자일 갑신시에 선생이 밀양부(密陽府)의 서쪽 대동리(大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막 나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동복(同腹) 소생이 모두 삼남이매(三男二妹)였는데, 형제들 중에는 선생이 맨 끝이었다. 이에 앞서 강호선생『江湖先生/점필재의 부친인 김숙자(金叔滋)선생의 號』이 영락(永樂 박씨(朴氏)의 세계(世系)는 《이준록(彛尊錄)》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 7년 임자(1432) 우리나라 세종대왕 14년. 선생 2세.
선덕 8년 계축(1433) 우리나라 세종대왕 15년. 선생 3세.
선덕 9년 갑인(1434) 우리나라 세종대왕 16년. 선생 4세.
선덕 10년 을묘(1435) 우리나라 세종대왕 17년. 선생 5세.
영종황제(英宗皇帝) 정통(正統) 원년 병진(1436) 우리나라 세종대왕 18년. 선생 6세. 선생이 비로소 수학(受學)하였다. 선공(先公)께서 선생을 가르쳐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데는 차례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하고,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幼學字說)》, 《정속편(正俗篇)》을 가르쳐주어 모두 배송(背誦)하게 한 다음에 《소학(小學)》을 읽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효경(孝經)》,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전(詩傳)》, 《서전(書傳)》, 《춘추(春秋)》, 《주역(周易)》, 《예기(禮記)》 등의 순서로 읽은 다음에야 《통감(通鑑)》 및 제사 백가(諸史百家)의 서적을 자기 마음대로 읽도록 하였다.
그리고 활쏘기를 배우는 데에 대해서도 또한 금하지 않고, 일찍이 이르기를, “궁시(弓矢)는 몸을 호위하는 물건이니, 익혀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옛사람은 이것으로 덕(德)을 관찰하였으니, 박혁(博奕)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 글씨 쓰기를 권면할 적에는 이르기를,
“글씨는 마음의 그림[心畵]이니, 모해(模楷)를 반드시 단정하게 써야 하고, 초서(草書)와 전서(篆書) 또한 모름지기 정숙(精熟)하게 익혀야 한다.” 하였고, 산가지 잡는 방법을 권면할 적에는 이르기를, “일상 생활의 사물(事物)에 대하여는 이것이 아니면 그 숫자를 쉽게 파악할 수 없으니, 위치를 기울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정통 2년 정사(1437) 우리나라 세종대왕 19년. 선생 7세.
정통 3년 무오(1438) 우리나라 세종 대왕 20년. 선생 8세.
선생이 《소학》을 읽었는데, 수군(獸君)에게 준시에 “열 살이 되어서 소학을 읽으니 너는 이미 나에게 뒤졌구나.[十齡入小學 汝已後於吾]”하였다. 이 해에 《소학》을 배워서 명확하게 알았다.
정통 4년 기미(1439) 우리나라 세종대왕 21년. 선생 9세.
정통 5년 경신(1440) 우리나라 세종대왕 22년. 선생 10세.
정통 6년 신유(1441) 우리 나라 세종 대왕 23년. 선생 11세.
정통 7년 임술(1442) 우리 나라 세종 대왕 24년. 선생 12세.
이 때부터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날마다 수천언(數千言)을 기억하여 문명(文名)이 크게 떨쳤다.
정통 8년 계해(1443) 우리 나라 세종대왕 25년. 선생 13세.
이 해에 《주역(周易)》을 배웠다. 선공(先公)이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가 있었는데, 이 때 한여름이라서 청사(廳事)에 앉아 사송(詞訟)을 간명(簡明)하게 처리하였다. 선생은 중씨(仲氏)인 과당공『(苽堂公) 휘는 종유(宗裕)이다.』과 함께 《주역》을 배웠는데, 선공께서는 책상 위에서 친히 시초를 하나하나 세어 괘를 펼쳐서[揲蓍布卦] 가르쳤다.
정통 9년 갑자(1444) 우리 나라 세종 대왕 26년. 선생 14세.
정통 10년 을축(1445) 우리 나라 세종대왕 27년. 선생 15세.
선생은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면서 거의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정통 11년 병인(1446) 우리 나라 세종 대왕 28년. 선생 16세.
이 해에는 경사(京師)에서 과거(科擧)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賦)를 지었으나 낙제(落第)하였다. 이 때 김수온(金守溫)이 태학사(太學士)로 있으면서 낙방(落榜)한 시험지들을 응시자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에 선생의 낙방한 시험지인 백룡부가 있으므로, 이것을 읽어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는 후일에 문형(文衡)을 맡을 솜씨이다.”
하고, 그 높은 재주가 낙제된 것을 애석하게 여겨 그 시권(詩券)을 가지고 들어가 아뢰었다. 그러자 상(上)이 선생을 기특하게 여기어 명하여 영산 훈도(靈山訓導)를 제수하였다. 이 때 한강(漢江)의 제천정(濟川亭)에 걸려 있는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 경치는 / 雪裏寒梅雨後山(설리한매우후란)
구경하긴 쉬우나 그림 그리긴 어렵다오 / 看時容易畫時難(간시용이화시난)
시인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일찍이 알았으니 / 早知不入時人眼(조지불입시인안)
차라리 연지 가져다 모란이나 그려야겠네. / 寧把脂寫牡丹(영파연지사모란)
라는 시가 있었다.
그런데 뒤에 김수온이 제천정에 들러서 그 시를 보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지난날에 백룡부를 지은 솜씨이다.”
하고, 그 종적(?跡)을 물어서 알고 보니, 과연 선생의 작품이었다.이 사실은 군현기사(群賢記事)에 실려 있다.
정통 12년 정묘(1447) 우리 나라 세종 대왕 29년. 선생 17세.
정통 13년 무진(1448) 우리 나라 세종 대왕 30년. 선생 18세.
이 해에는 선공(先公)을 모시고 경사(京師)에 있었다. 하루는 남학(南學)에서 물러나와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선공이 불러 이르기를,
“태학(太學)의 책제(策題)를 들었는데, 너도 지어보았느냐?”
하자, 대답하기를,
“융회 관통(融會貫通)이 되지 않아서 조사(措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니, 선공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여겼는데, 내 희망이 끊어졌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등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렸다. 그로부터 이후로는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하였다.
정통 14년 기사(1449)우리 나라 세종 대왕 31년. 선생 19세.
경종황제(景宗皇帝) 경태(景泰) 원년 경오(1450)우리 나라 세종 대왕 32년. 선생 20세.
경태 2년 신미(1451)우리 나라 문종 대왕(文宗大王) 원년. 선생 21세.
이 해에 선생이 창산인(昌山人) 울진 현령(蔚珍縣令) 조계문(曺繼門)의 딸에게 납채(納采)하였는데, 고려 시대 상서(尙書) 이거(李?)의 후손인 선공감 정(繕工監正) 하빈(河濱) 이호신(李好信)이 바로 그의 외조(外祖)이다. 매계(梅溪) 조 선생 위(曺先生偉)는 선생의 처남이다.
경태 3년 임신(1452) 우리 나라 문종 대왕 2년. 선생 22세.
선생이 백씨(伯氏)휘는 종석(宗碩)이다.와 함께 감문(甘文)개령(開寧)의 고호이다.에서 선공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때 지지당(止止堂) 김맹성 선원(金孟性善源)이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와서 마침내 현(縣)의 별관(別館)에서 강학(講學)하였다.
그 후에도 선원은 또 선생과 함께 황악(黃嶽)의 능여사(能如寺)에 들어가 옛날에 읽은 글들을 익히 복습(復習)하여, 전후로 학덕(學德)을 서로 도와 닦은 것이 매우 많았다.
경태 4년 계유(1453) 우리 나라 단종 대왕(端宗大王) 원년. 선생 23세.
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겨울에는 초례(醮禮)를 올렸다. 이 해에 처음으로 태학(太學)에 유학하면서 《주역(周易)》을 읽으며 성리(性理)의 근원을 탐구하니, 동배(同輩)들이 공경하여 복종하는 이가 많았다.
경태 5년 갑술(1454)우리 나라 단종 대왕 2년. 선생 24세.
선공이 여묘(廬墓)살이를 할 때에 몸을 크게 상하여 병들고 또 수척해졌으므로, 선생이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면서 유천부(?天賦)를 지었다. 선공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있다가 성주 교수(星州敎授)로 나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중씨와 함께 가서 뵈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 곳 학교에 머물러 있으면서 글을 읽었다. 이 때 제자(諸子)들을 이끌고 부자묘(夫子廟)에 들어가 예배(禮拜)하고 대성(大聖) 이하 사성(四聖), 십철(十哲)을 죽 둘러보니, 모두 흙으로 만들어진 소상(塑像)들이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혹은 눈이 없어지고 손가락이 이지러졌으며, 혹은 관(冠)이 거꾸로 쳐지고 홀(笏)이 땅에 떨어지기도 하였는데, 어두침침한 것이 마치 고사(古寺)에 들어가 천년 묵은 우상(偶像)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선생이 몹시 경악하여 감히 가리켜 보이지도 못하면서 이르기를,
“대성(大聖) 대현(大賢)이 만일 영혼이 있다면 여기에 의탁하여 향사(享祀)를 받으려 하겠는가.” 하고, 이에 맨 처음 소상을 만든 자의 황
당무계함을 책망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부(賦)를 지어서 제자(諸子)들에게 끼쳐주어 밤나무 신주[栗主]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진계(陳啓)하여 위판(位版)으로 개조(改造)하였다.부사(賦辭)는 문집(文集) 속에 실려 있다.
경태 6년 을해(1455) 우리 나라 세조 대왕(世祖大王) 원년. 선생 25세.
선생이 백씨와 함께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다.
경태 7년 병자(1456) 우리 나라 세조 대왕 2년. 선생 26세.
3월 모일에 선공의 상(喪)을 당하여 전죽(饘粥)만 마시며 곡읍(哭泣)하였는데,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다. 밀양부(密陽府)의 서쪽으로 6리쯤에 있는 고암산(高巖山) 분저곡(粉底谷)에 장례(葬禮)를 거행하였으니, 선공의 뜻을 따른 것이다. 선생은 백씨, 중씨와 함께 여묘살이를 하면서 성효(誠孝)가 지극히 순수하여 향려(鄕閭)가 모두 감화(感化)되었다.
이 해 정월에 회시(會試)가 임박하여 선생이 백씨와 함께 당(堂) 아래에서 하직 인사를 올리니, 선공이 술잔을 잡고 축복하여 이르기를,
“너의 형제가 고과(高科)로 급제하여 고향에 돌아온다면 내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느냐. 감히 이 술잔으로 너희들을 위해 축복하노라.”
하였다.
선생이 평소에는 아무리 크게 슬픈 일이 있더라도 일찍이 슬하(膝下)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 그것은 어버이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마침내 백씨와 함께 서울에 가서 백씨는 급제를 하고 선생은 낙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이문(里門)에 못 미쳐 황간(黃澗)의 노상(路上)에서 선공의 부음을 들었다. 선생은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푸른 하늘이여, 푸른 하늘이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선조(先祖)여, 선조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술잔 잡아 축복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니, 이것이 바로 선공께서 영결(永訣)하신 말씀이었구나. 생각해보니, 그 당시의 눈물은 또한 하늘이 내 마음을 유인하여 선공의 곁을 떠나지 말도록 했던 것인데, 이록(利祿)에 얽매임을 면치 못하여 끝내 선공의 곁을 떠나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극악(極惡)하고 극역(極逆)한 죄를 누구에게 책임지우겠는가. 악독하고 악독하도다. 인간 세상에 무슨 즐거움이 있어 혼자만 살아남는단 말인가.”《이준록》에 실려 있다.
영종황제(英宗皇帝) 천순(天順) 원년 정축(1457)우리 나라 세조 대왕 3년. 선생 27세.
선생은 수질(首絰), 요질(腰絰)을 벗지 않고 거적자리에 누워 나무 토막을 베고 자며, 거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시전(侍奠)의 여가에는 여소(廬所)에서 조석으로 내려가 모부인(母夫人)을 뵙고 돌아갔는데, 이러한 일을 비록 추운 때나 더운 때나 비오는 날이라 하더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니 조의제문(吊義帝文)에서,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가는 도중에 답계역(踏溪驛)에서 묵었다.”
고 한 말은 착오인 듯하다. 선생은 집에서 사숙(私淑)하면서 유독 포은 선생(圃隱先生)을 추앙하여, 쇠퇴한 세상에 스스로 우뚝이 서서 습속(習俗)에 휩쓸리지 않고 능히 성인(聖人)의 예제(禮制)를 따라 자진(自盡)의 정성을 다하였고 보면, 선생이 어찌 거상(居喪) 중에 출입을 했을 리가 있겠는가.
천순 2년 무인(1458) 우리 나라 세조 대왕 4년. 선생 28세.
복(服)을 마치고는 두어 칸의 집을 지어 명발와(明發窩)라 이름하였다. 여기에 거처하면서 첫닭이 울면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먼저 가묘(家廟)를 배알한 다음 모부인을 뵙고 물러와서는 단정히 앉아서 경전(經傳)을 강구(講究)하되 부지런히 하여 마지않았다.
그리고 선공의 지극한 덕과 훌륭한 행실이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한 것을 몹시 슬퍼하여 손수 한 기록을 찬(撰)해서 《이준록(彛尊錄)》이라 이름하였는데, 맨 먼저 보도(譜圖)를 기록하고, 다음으로는 기년(紀年)을 기록하고, 또 다음으로는 사우(師友) 관계를 기록하였으며, 이어서 평생 동안 벼슬살이할 적의 행사(行事)와 훈계(訓戒)한 말과 가묘(家廟)에서 행하는 제의(祭儀)로서 법받을 만한 것들까지 자세하게 갖추 기재하여 빠뜨린 것이 없었다.
선생은 과거(科擧) 공부에 뜻이 없었는데, 백씨가 모부인께 사뢰어 과거를 보도록 권하게 한 결과, 이 해 가을에 별거(別擧)의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백씨가 종기[癰]를 앓았는데, 의원(醫員)이 구인즙(蚯蚓汁)이 좋다고 말하자, 선생이 그것을 먼저 맛보고 백씨에게 마시게 하였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천순 3년 기묘(1459) 우리 나라 세조 대왕 5년. 선생 29세.
선생은 사문(斯文)을 진작시키고 후인(後人)을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니, 쇄소(灑掃)의 예를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는 제자들이 앞에 가득하였다.
봄에는 고태정(高台鼎)의 방하(榜下)에서 급제하였다. 이 해 11월에는 선생이 백씨와 함께 조정(朝廷)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모부인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와 영연(榮宴)을 열었다. 이 때 선공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중직대부(中直大夫) 예문관직제학 겸 춘추관기주관(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에 추증되었고, 모부인도 또한 영인(令人)에 올려 임명되었다.
영연을 여는 날에 미쳐서는 먼저 선롱(先壟)에 분황(焚黃)하고, 이어서 모부인을 판여(板輿)에 모시어, 선생이 백씨와 함께 앞에서 인도하였다. 이 때 부사(府使) 강숙경(姜叔卿)이 청도 군수(淸道郡守) 이약동(李約東), 영산 현감(靈山縣監) 최계동(最繼潼), 교수관(敎授官) 유효담(柳孝潭)과 함께 공당(公堂)에다 경연(慶宴)을 크게 베풀고 친히 술잔을 받들고 들어가서 축수를 올리니, 일읍(一邑)이 그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어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천순 4년 경진(1460) 우리 나라 세조 대왕 6년. 선생 30세.
봄에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에 승진 임명되었다. 어공 세겸(魚公世謙)은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그가 본원(本院)의 선배로서 선생의 시를 보고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가령 나 같은 사람은 말채찍을 잡고 그의 노예가 된다 하더라도 의당 달게 받겠다.”
하였다.
백씨 직학공(直學公)은 3월에 서울에서 객사(客死)하였는데, 나이는 38세였다. 널[柩]을 받들고 가서 고향에 반장(返葬)하였다. 백씨의 자식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돌보아 기르고 가르쳐서 성립(成立)하게 하였다. 조카인 치(緻)는 정유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인(縯)은 경자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되었다.
천순 5년 신사(1461) 우리 나라 세조 대왕 7년. 선생 31세.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에 승진되었다. 12월에는 교지(敎旨)를 받들어 왕세자빈(王世子嬪) 한씨(韓氏)의 애책문(哀冊文)을 제진(製進)하였다.
천순 6년 임오(1462) 우리 나라 세조 대왕 7년. 선생 32세.
교지를 받들어 인수왕후(仁壽王后)에 대한 봉숭옥책문(封崇玉冊文)을 제진하였다.
천순 7년 계미(1463) 우리 나라 세조 대왕 9년. 선생 33세.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전임(轉任)되었는데, 마침 입대(入對)하여 상(上)의 뜻에 거슬리어 파직되었으니, 대체로 불사(佛事)에 관하여 간언(諫言)을 올렸던 것이다. 중추절(仲秋節)에는 왕세자(王世子)가 문소전(文昭殿)에 대제(代祭)하였는데, 이 때 선생이 대축(大祝)이 되어 그에 대해 지은 시가 있다.
천순 8년 갑신(1464) 우리 나라 세조 대왕 10년. 선생 34세.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학도(學徒)들이 모여들어 마을 거리에 가득 차서 넘쳤다.
헌종황제(憲宗皇帝) 성화(成化) 원년 을유(1465) 우리 나라 세조 대왕 11년. 선생 35세.
영남 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로 기용되어 열읍(列邑)의 군사를 점열(點閱)하였는데, 순도(巡到)한 곳마다 모두 제영(題詠)한 시첩(詩帖)이 있다. 감사(監司)의 관문(關文)을 가지고 경주(慶州)에 가서는 추정(秋丁)의 석전(釋奠)의 초헌관(初獻官)이 되었다.
이 해에 형재선생시집(亨齋先生詩集)의 서문을 지었고, 또 경상도지도지(慶尙道地圖誌)를 찬(撰)하였다.
성화 2년 병술(1466) 우리 나라 세조 대왕 12년. 선생 36세.
순변사(巡邊使)의 막부(幕府)에 있었다. 평사(評事)로 절도사(節度使) 진례군(進禮君)을 따라 다인현(多仁縣)에서 묵을 적에, 영가(永嘉)안동(安東)의 고호이다.사람이 뒤따라와서 작별인사를 하므로, 옛일이 느꺼워 시를 지었다.
7월에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선생이 절도사의 관문(關文)을 가지고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영해부(寧海府)에 갔다. 군사를 다 모집하기 전에 교수(敎授) 임유성(林惟性), 진사(進士) 박치강(朴致康)과 함께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호)의 옛집을 찾아보고, 인하여 관어대(觀魚臺)에서 노닐었다.
이 날 바람이 조용하고 물결이 잔잔하였으므로, 고기떼가 벼랑 밑에서 헤엄쳐 노니는 것을 내려다보고 마침내 목은(牧隱)의 소부(小賦)에 화답하여 두 사람에게 끼쳐주었다. 그리고 경상도 좌상원수부(慶尙道左廂元帥府)의 제명기(題名記)를 찬하였다.
성화 3년 정해(1467) 우리 나라 세조 대왕 13년. 선생 37세.
일을 마치고 조정에 들어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은 입대(入對)할 적마다 기강(紀綱)을 정돈하고 예악(禮樂)을 닦아 밝히는 등의 일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성화 4년 무자(1468) 우리 나라 세조 대왕 14년. 선생 38세.
천거로 이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 교서관교리지제교(吏曹左郞兼春秋館記注官校書館校理知製敎)에 임명되었다. 이 해 9월 8일에 세조 대왕이 승하하였다. 이 해에 정감찰 석견 부 연경서(鄭監察錫堅赴燕京序)를 짓고, 영일현인빈당기(迎日縣寅賓堂記)를 찬하였다.
성화 5년 기축(1469) 우리 나라 예종 대왕(睿宗大王) 원년. 선생 39세.
조산대부(朝散大夫) 전교서교리 겸 예문관응교지제교(典校暑校理兼藝文館應敎知製敎)에 임명되었는데, 병 때문에 세 차례나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6일에 상(上)이 본서(本署)에 명하여 《제범훈사(帝範訓辭)》를 인쇄하여 올리도록 하자, 이 날 밤에는 기뻐서 잠도 자지 않고, 시 3수를 지었다. 예종이 승하하자, 교지를 받들어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올리고, 만사(挽詞) 3수도 지어 올렸다.
성화 6년 경인(1470) 우리 나라 성종 대왕(成宗大王) 원년. 선생 40세.
성묘(成廟)가 즉위하여서는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고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을 특별히 선발하여, 그 선발에 든 사람이 모두 19인이었는데, 그 중에 선생이 으뜸이었다. 이 해 6월 3일에 예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藝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었다.
겨울에는 선생이 경악(經幄)에 입시(入侍)하여, 당시 모부인(母夫人)의 나이가 71세인지라 사직하고 돌아가 모부인 봉양하기를 청하니, 상이 명하여 함양 군수(咸陽郡守)를 제수하였다.
12월 16일 납일(臘日)이다. 에 상이 세조(世祖)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태묘(太廟)에 부제(?祭)하고 법가(法駕)를 갖추어 환궁(還宮)할 적에, 선생은 외임(外任)에 보직된 관계로 옛 반열에 서지 못하고, 시를 지어 제안(齊安) 최숙정 국화(崔叔精國華)에게 바치었다.
성화 7년 신묘(1471) 우리 나라 성종 대왕 2년. 선생 41세.
정월 상순(上旬)에 조령(鳥嶺)의 길을 경유하여 함양(咸陽)의 임소(任所)에 당도하였다. 선생은 직무를 보는 여가에 그 경내(境內)의 총명한 관자(冠者)와 동몽(童蒙)들을 선발하여 가르치되 일과(日課)를 정하여 강독(講讀)시키니, 배우는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먼 데로부터 와서 모이었다.
9월에는 조열대부(朝列大夫)에 승진되었고, 12월에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승진되었다. 유자광(柳子光)이 일찍이 이 군(郡)에서 노닐면서 시를 짓고는 군 관아에 부탁하여 그 시를 판(版)에 새겨서 벽 위에 걸어놓았었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그 따위 자광(子光)이 감히 현판(懸版)을 걸었단 말이냐.”
하고는, 즉시 명하여 거두어서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성화 8년 임진(1472) 우리 나라 성종 대왕 3년. 선생 42세.
봄, 가을로 향음주의(鄕飮酒儀)와 양로례(養老禮)를 설행(設行)하였다. 8월 5일에 두류유산록(頭流遊山錄)을 짓고, 관해루기(觀海樓記)를 찬하였다. 일두(一 蠹) 정여창(鄭汝昌)과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은 서로 친구 사이로서 함께 선생의 문하(門下)에 와서 배우기를 청하니, 선생은 고인(古人)이 학문한 차례를 따라 가르쳐서, 먼저 《소학(小學)》, 《대학(大學)》을 읽히고 마침내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읽게 하였다. 그들은 날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서, 이윽고 강령(綱領)과 지취(旨趣)를 알고 나서는 도의(道義)를 연구하였다.
성화 9년 계사(1473) 우리 나라 성종 대왕 4년. 선생 43세.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승진되었고, 표소유(表少遊)에게 답하는 편지를 썼다.
성화 10년 갑오(1474) 우리 나라 성종 대왕 5년. 선생 44세.
목아(木兒)가 경인년 5월에 태어나서 이미 5세가 되었는데, 이 해 2월 28일에 반진(斑疹)으로 죽었다. 그의 생년월일이 모두 목성(木星)을 만났으므로 목아라 이름 지었었다. 시 2수를 써서 슬픈 회포를 서술하였으니, 그 시에,
언뜻 은애를 하직하고 어찌 그리 바삐 가느냐 / 忽辭恩愛去何忙
다섯 살의 생애는 참으로 전광석화 같구나 / 五歲生涯石火光
자모는 손자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 慈母喚孫妻喚子
이 때야말로 천지가 몹시도 아득하구나 / 此時天地極茫茫
하였고, 목아를 우선 성(城) 서쪽 석복리(石卜里)에 초빈(草殯)해 두었다가 장차 금산(金山)의 미곡촌(米谷村)에 있는 그 외조모(外祖母) 이씨(李氏)의 묘소 곁으로 옮겨 묻으려 하면서 시(詩)로써 보냈는데, 그 시에는
퇴지의 창자 백 년이나 괴롭고 아팠어라 / 百年酸痛退之腸
네가 무슨 죄가 있어 내 앙화를 대신 받았나/ 汝有何辜代我殃
재명이 장차 뛰어나리라 그 누가 말했던고 / 誰謂才名將卓犖
의원 무당이 끝내 황당함을 더욱 알겠네 / 益知醫卜竟荒唐
장주는 깨끗하게 지금 흙으로 돌아갔는데 / 掌珠皎皎今歸土
추어는 낭랑하게 아직도 당에 들리는구나 / 雛語琅琅尙在堂
외가로 잘 가서 체백을 편히 하고 있거라 / 好向外家安體魄
속함 땅의 산수는 바로 타향이란다 / 速含山水是他鄕
하였다.
4월 일에는 안의현신창향교기(安義縣新創鄕校記)를 찬하였다. 선생은 연해서 아이들을 잃고 마음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감사(監司)에게 사직장을 올렸다. 9월 23일에는 산음(山陰)에서 자친(慈親)을 작별하고 함양(咸陽)으로 돌아왔다.
10월 1일에는 재차 사직장을 올리고 금산(金山)의 농사(農舍)로 돌아왔는데,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이 편지를 보내 유임(留任)하기를 청하니, 선생이 그에게 답서(答書)를 보냈다.
감사는 사직장을 수리하지 않고 속히 직무를 수행하라고 재촉하였다. 9일에는 소마현(消馬峴)을 지나다가 눈이 내리므로 시를 지었다. 상공(上供)하는 차[茶]가 본군(本郡)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므로, 해마다 백성들에게 부과(賦課)하면 백성들이 값을 가지고 전라도(全羅道)에 가서 사오는데, 대략 쌀 한 말[斗]에 차 한 홉[合] 비율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함양군에 부임한 처음부터 그 폐단을 알고서 백성들에게 차를 부과하지 않고 관(官)에서 자체로 구해다가 나라에 바쳤었다. 그런데 선생이 한번은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해 보니, “신라(新羅) 때에 차 종자[茶種]를 당(唐) 나라에서 얻어다가 명하여 지리산(智異山)에 심도록 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자 선생이 이르기를,
“아, 군(郡)이 바로 이 산 아래에 있는데, 어찌 신라 때의 남은 종자가 없겠는가.”
하고, 매양 부로(父老)들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찾아보게 한 결과, 과연 엄천사(嚴川寺)의 북쪽 죽림(竹林) 속에서 두어 그루를 얻었다.
그러자 선생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 땅을 다원(茶園)으로 만들도록 하고, 그 근처가 모두 민전(民田)이었으므로 관전(官田)으로 보상해주고 그것을 사들였다. 그리고는 겨우 수년이 지나자 차가 자못 번성하여 원내(園內)에 두루 퍼지니, 약 4, 5년 간 더 기다리면 상공(上供)의 액수를 충당할 만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다원시(茶園詩) 2수를 지었으니, 그 시는 문집 속에 실려 있다.
이 해 모춘(暮春) 사이에 선생이 김(金), 곽(郭) 두 수재(秀才)에게 답한 시가 있었는데, 김은 곧 굉필(宏弼)이고, 곽은 바로 승화(承華)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궁벽한 데서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던고 / 窮荒何幸遇斯人
보배를 싸들고 와서 찬란하게 펼쳐놓았네 / 珠貝携來爛慢陳
잘 가서 다시 한 이부를 찾아보게나 / 好去更尋韓吏部
나는 쇠해서 곳집 못 기울임이 부끄럽구려/ 愧余衰朽未傾囷
하였으니, 이것은 대체로 한훤(寒暄 김굉필의 호임)이 처음 선생의 문하에 갔을 때이다. 한훤이 학업을 청하니, 선생이 《소학(小學)》을 가르쳐 주면서 이르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의당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고, 인하여 답시(答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는
그대의 시어를 보매 옥이 연기를 뿜는 듯하니 / 看君詩語玉生煙
진번의 걸상을 이제부터 걸어둘 것 없겠네/ 陳榻從今不要懸
은반을 가지고서 힐굴에 몰두하지 말고/ 莫把殷盤窮詰屈
모름지기 마음 하나 맑게 할 줄을 알아야지 / 須知方寸湛天淵
하였다. 한훤은 선생의 말씀을 정성껏 마음속으로 지키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시를 지어 선생에게 바쳤는데, 그 시에
학문에서는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는데 / 學問猶未識天機
소학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 小學書中悟昨非
앞으로는 절로 명교에 대한 낙이 있으리니 / 從此自有名敎樂
구구하게 어찌 좋은 옷 살진 말을 부러워하랴 / 區區何用羨輕肥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평론하기를,
“이 말은 곧 성인(聖人)을 만드는 근기(根基)이니, 허노재(許魯齋)이후에 어찌 또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호임)의 《사우록(師友錄)》을 상고해 보면, 한훤(寒暄)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受業)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공 적(李公勣)이 찬(撰)한 한훤의 행장(行狀)에서는 한훤의 학문을 일러 부전(不傳)의 학문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적실하지 못하다.
퇴계(退溪)의 문인 금응훈(琴應薰)이 《퇴도선생문집(退陶先生文集)》의 발문(跋文)을 유서애(柳西厓 서애는 유성룡(柳成龍)의 호임)에게 청하니, 유서애가 보낸 답서(答書)에서,
“또한 나의 견해가 한 가지 있습니다. 서발(序跋)의 있고 없는 것이 선생의 문집을 전하는 데에 무슨 손익(損益)이 있겠습니까. 적합한 사람이 있고 또 시기가 그럴 만하면 하는 것이 매우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대로 두었다가 후일의 양자운(揚子雲)을 기다려서 하더라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옛날 이천 선생(伊川先生)이 작고하였을 적에도 문인 윤화정(尹和靖 화정은 윤돈(尹燉)의 호임) 등 여러 사람들이 그 사문(師門)을 위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염려가 응당 또한 지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한 마디 말도 없었고 곧장 회암(晦庵)에게 이르러서야 운운(云云)한 바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정성이 부족(不足)해서가 아니라, 시기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근세(近世)에 김한훤(金寒暄)의 행장은 이적(李勣)이란 사람이 하였는데, 사람의 뜻에 매우 불만스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이런 문자(文字)는 조만(早晩)과 선후(先後)에 관계 없이 오직 적합한 사람을 얻어서 부탁하는 것이 귀중하니, 너무 급히 서두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또한 이공 적은 한훤을 사사(師事)하였는데, 선생이 세상으로부터 크게 꺼림을 받게 되자, 다만 수업하고 사사한 혐의만 알아서 그 실적(實蹟)을 온통 없애버렸단 말인가.
한훤은 선생의 문도(門徒)로서 유배될 즈음에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말이 없었고, 갑자년(甲子年)의 사화(士禍)가 적소(謫所)에 미쳤던 날에 이르러서도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듯이 여겼으니, 그렇다면 한훤의 학문이 선생에게서 나온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성화 11년 을미(1475)우리 나라 성종 대왕 6년. 선생 45세.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승진되었다. 함양성(咸陽城)의 나각(羅閣)이 모두 243칸(間)이었는데, 한 칸마다 세 가호(家戶)가 함께 출력(出力)하여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왔다.
그런데 해마다 비바람에 지붕이 걷힐 때면 비록 한창 농사철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이 반드시 우마차에 볏짚과 재목을 싣고 와서 수리를 하곤 하였다. 역대에 걸쳐 계속 이렇게 해오다 보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기었다.
그래서 2월 어느 날에 선생이 부로(父老)들과 상의하여 다시 전지(田地) 10결(結)을 비율로 삼아 한 칸마다 거의 열 가호씩을 배정해서 그 썩은 재목을 바꾸고 또 기와를 이게 하였더니, 한 가호에 겨우 기와 10여 장씩만 내놓아도 충분하였고, 일도 5일이 채 못 가서 마치게 되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졸속하게 경장(更張)시키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었으나, 일이 완성된 뒤에는 모두 기뻐하며 좋다고 일컬었다.
4월 7일에는 성모묘(聖母廟)에 가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났다. 정일두(鄭一蠹)와 김한훤(金寒暄)이 선생의 문하에 함께 유학하면서 도의(道義)를 강설(講說)하여 서로 연마하였다.
선생은 함양군을 다스리는 데 있어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민중과 화합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정사의 성적(成績)이 제일이었다. 그래서 상이 이르기를,
“김모(金某)는 군을 잘 다스려서 명성이 있으니, 영전(榮轉)시키라.”
하였다. 군리(郡吏) 연남(延男)이 서울에서 관교(官敎)를 받들고 왔는데, 십고 십상(十考十上)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승진시키고, 특지(特旨)로 승문원사(承文院事)에 임명하였다.
이 해에 마침 중시(重試)가 있었는데, 모두 권하여 말하기를,
“중시는 문사(文士)가 신속히 승진할 수 있는 계제가 된다.”
고 하였으나, 선생이 끝내 응시하지 않았으니, 여론이 선생을 고상하게 여겼다. 군인(郡人)들이 선생의 청덕(淸德)과 선정(善政)을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고 매월 삭망(朔望) 때마다 참알(參謁)하였다. 이 해에 《신문충공문집(申文忠公文集)》의 서문을 찬하였다.
성화 12년 병신(1476) 우리 나라 성종 대왕 7년. 선생 46세.
정월에 선생이 지승문원사로 들어갔다가, 또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 봉양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7월 2일에 상이 특명으로 선산 부사(善山府使)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전후로 선생을 외직에 보임시킬 적마다 모두 부임한 곳으로 모부인을 맞아 봉양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선산(善山)은 바로 선생의 향관(鄕貫)인데다 선조(先祖)와 선공(先公)께서 살았던 곳이 성(城) 서쪽에 가까이 있으니, 여기는 실로 모부인께서 옛날에 친히 제수(祭羞)를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여기에서 강씨(康氏) 집으로 출가한 자씨(?氏)가 살아온 지 30년이 되었는데, 원림(園林)과 당실(堂室)이 예전 그대로 있었다.
선생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아전들을 어솔하는 데에 모두 조법(條法)이 있었으므로, 아전들은 정숙해지고 백성들은 선생을 사모하였다.
매월 삭망 때마다 먼저 선성(先聖)을 참알(參謁)하고 다음으로 향음주의(鄕飮酒儀)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봄, 가을에는 양로례(養老禮)를 설행하였는데, 이 때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이 해에 윤 선생 상(尹先生祥)의 시집(詩集)의 서문을 찬하였다.
성화 13년 정유(1477) 우리 나라 성종 대왕 8년. 선생 47세.
무진년(1448, 세종30)에 선공(先公)이 개령(開寧)의 원으로 있을 적에 선생의 삼형제가 모두 그 관아(官衙)에서 글을 읽었는데, 고령(高靈)의 권 생원 처지(權生員處智)가 선생의 백겸(伯謙) 형과 구의(舊誼)가 있어 그 또한 와서 학업을 익히었다.
그런데 그때가 마침 여름철이라, 관아의 정원에 있는 세 그루의 잣나무 밑에 정자를 짓고서, 모두 네 사람이 매양 그 안에서 기거(起居)하며 읊조리곤 하였었는데, 이제 벌써 30년이 지났고, 백겸 형이 작고한 지도 20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권군이 얼마 전에 개령에 들렀다가 세 그루의 잣나무가 아직도 덤불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시 한 수를 지었었다. 그리하여 정유년 정월(正月) 인일(人日)에 선산(善山)으로 선생을 찾아가서 그 시를 기록하여 보여주므로, 선생이 마침내 슬픈 마음으로 화답했는데, 그 시에
그 옛날 현송향에서 아버님께 글을 배우며 / 憶昔趨庭絃誦鄕
해송 나무 그늘 아래서 서로 배회했었네 / 海松陰下共回翔
그대 만난 오늘에는 슬픔만 더하여라 / 逢君此日增怊悵
세어보니 사람 죽은 지 이십 년이 되었구려 / 屈指人亡二十霜
하고, 또
인끈 품고 돌아온 게 바로 내 고향인데/ 懷印歸來是故鄕
기심이 다하지 않아 갈매기가 빙빙 도누나/ 機心未盡海鷗翔
초라한 배반으로 정월 인일을 만났는데 / 盃盤草草逢人日
손잡고 서로 보니 귀밑털이 벌써 희어졌구려 / 握手相看鬢已霜
하였다.
강씨(康氏) 집으로 출가한 자씨(姉氏)의 아들 백진(伯珍)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백씨(伯氏)인 직학공(直學公)의 아들 치(緻) 또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므로, 선생이 태수(太守)로서 향중(鄕中)의 부로(父老)들과 제족(諸族)의 부인(婦人)들을 모아놓고 크게 음악을 설치하여 영연(榮宴)을 베푸니, 구경하는 인파가 마치 담장을 둘러친 것 같았다.
이 해 중하(仲夏)에 김 수재 굉필(金秀才宏弼), 이 생원 승언(李生員承彦), 원 참봉 개(元參奉?), 이 생원 철균(李生員鐵均), 곽 진사 승화(郭進士承華), 주 수재 윤창(周秀才允昌)이 부(府)의 향교(鄕校)에 모여서 옛 글들을 토론하면서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개월 동안 묻고 논변하였었다.
그런데 8월 중에 주상께서 장차 학궁(學宮)을 시찰하고 선비를 취할 것이라고 하므로, 응시하기 위해 제군(諸君)들이 행장(行裝)을 꾸려가지고 하직을 고하자, 선생이 시로써 그들을 보냈는데, 그 시에
박대 포의가 정히 서로 벗을 이루었도다 / 博帶褒衣正匹儕
월파정 서쪽에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반가웠지 / 跫音喜聽月波西
너풀너풀 박잎은 닭고기국보다 나았는데 / 幡幡匏葉勝鷄臛
자잘한 홰나무 꽃은 말발굽 좇아 날겠구나/ 細細槐花逐馬蹄
듣건대 현관에 규벽이 동했다고 하니 / 聞道賢關動奎壁
응당 채색 붓으로 무지개를 토해내리라/ 應將彩筆吐虹蜺
오당에 뛰어난 선비 많음을 좋아하노니 / 自多吾黨多奇士
눈을 씻고 장차 담묵으로 쓴 것을 보련다 / 洗眼行看淡墨題
하였다. 《송도록(松都錄)》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9월에는 선산지도지(善山地圖誌)를 찬하였다. 원 참봉 개, 이 생원 승언 등 제자(諸子)의 운(韻)에 화답한 시에는
학교에서 옛 글들을 이미 다 연구했으니 / 簡已窮文杏館
선아가 응당 녹운의를 만들어 놓았으리/ 仙娥應剪綠雲衣
평소의 뜻이 요순 시대 임금 백성 만드는 건데 / 平生堯舜君民志
어찌 경쾌한 수레와 살진 말을 부러워하랴 / 肯羨車輕馬亦肥
하고, 또
쓰디쓴 차 석 잔의 병 치료는 술과 맞먹거니와 / 苦茗三盃醫當酒
성긴 주렴 한 횃대엔 기녀가 옷 지어 걸어두었네 / 疏簾一桁妓爲衣
사군의 가난하고 병든 걸 누가 의아해 하는고 / 使君誰訝貧兼病
시끄럽고 조용한 중간에서 도가 절로 살찐다오 / 喧靜中間道自肥
하였고, 유학(遊學)하는 제자들에게 돼지 머리를 주면서 지은 시에는
태수의 가슴 속엔 창도 칼도 없건마는 / 太守胸中無寸鐵
오장군은 이미 제 머리를 잘리었다오 / 烏將軍已喪其元
오늘 아침 학문 연구하는 손들에게 묻노니 / 朝來爲問窮經客
그 얼마 동안이나 부추와 소금으로 날을 보내었던고 / 幾把虀鹽到日昏
하였다. 황화집서(皇華集序), 주례발(周禮跋), 시전발(詩傳跋)을 찬하였다.
성화 14년 무술(1478) 우리 나라 성종 대왕 9년. 선생 48세.
조석(朝夕)으로 안부를 물어 살피며 모부인을 지성으로 봉양하였는데, 밤이면 이부자리를 펼치고 아침이면 베개를 거두는 일을 몸소 스스로 하였다. 처자(妻子)가 그 일을 대신하려고 하면, 선생이 이르기를,
“어머니가 이제 늙으셨으니, 후일에는 비록 어머니를 위해 이런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성화 15년 기해(1478)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0년. 선생 49세.
10월에 모부인이 병환으로 누워 치유가 되지 않자, 중씨(仲氏) 과당공(苽堂公)은 청송(靑松)으로부터 와서 모시었고, 조카인 치(緻) 또한 거창(居昌)에서 돌아왔다.
이 때 계매(季妹)는 밀양(密陽)에 있었는데, 평소에 모부인이 그를 가장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였으므로, 선생은 매씨가 만일 와서 모부인을 뵙는다면 혹 기쁨으로 인하여 병환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 사람을 보내어 그를 맞아옴으로써 5인이 함께 모이게 되었다.
모부인이 마침내 12월 21일에 공아(公衙)의 중당(中堂)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0세였다. 이 달 28일에 선생이 널[柩]을 받들고 발인(發引)하여 길에 올랐다.
성화 16년 경자(1480)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1년. 선생 50세.
정월 3일에 널을 운반하여 지동(池洞)의 분저곡(粉底谷)에 이르러 초빈하였다가, 3월에 선공 및 민 부인(閔夫人) 두 묘의 중간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묘 밑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처하면서 상례(喪禮)를 일체 주 문공(朱文公)의 예에 따라 하였는데,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진 것이 예에 지나치므로, 사람들이 선생의 성효(誠孝)에 감복하였다.
《이준록(?尊錄)》 가운데 보도(譜圖), 기년(紀年), 사우 성씨(師友姓氏) 등의 기록은 무인년(1458, 세조4)에 이미 찬술(撰述)한 것인데, 이 해에 다시 더 고정(考定)하였고, 사업(事業) 및 제의(祭儀)에 대해서는 모두 무인년에 찬술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
성화 17년 신축(1481)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2년. 선생 51세.
양 수재 준(楊秀才浚)이 그의 아우 침(沈)과 함께 홍 공생 유손(洪貢生裕孫)을 따라 서울로부터 도보(徒步)로 천리 길을 걸어와서 배웠다. 홍유손은 남양인(南陽人)이다.
성화 18년 임인(1482)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3년. 선생 52세.
이 해 2월에 복을 마쳤다. 이 때 안시숙(安時叔 시숙은 안우(安遇)의 자)이 종학(從學)한 지 2년이 되었는데, 대상(大祥) 뒤에 초계(草溪)로 돌아갔다.
전 집의(前執義) 김 선생 맹(金先生孟)이 그의 아들 기손(驥孫), 일손(馹孫)을 보내어 수학(受學)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그들에게 한유(韓愈)의 문장(文章)을 가르쳐 주어, 각각 그 재주에 따라 성취시켰다. 그리고 절효(節孝) 김 선생 극일(金先生克一)의 효각명(孝閣銘)을 찬하였다.
3월 15일에는 화물선(貨物船)에다 가속(家屬)들을 싣고 금릉(金陵)의 옛 집으로 돌아갔는데, 통지(通之) 형이 중보(仲甫) 아우와 함께 수안역(水安驛)에서 선생을 전송하였다. 이 때 중보의 시에
평생의 부탁에 대해서는 황간이 아니요/ 平生付托非黃榦
만년의 슬픈 읊조림은 정수와 흡사하네/ 晩歲悲吟似靜修
라고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감히 두 분을 바랄 바는 아니나, 평생에 한되는 것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니, 비록 나의 실록(實錄)이라 하더라도 되겠다.”
하고, 거기에 감동하여 마침내 화답하였다.
손 생원 효조(孫生員孝祖)가 선생에게서 《춘추(春秋)》를 배운 지가 모두 석 달이 되었는데, 이 때 영산(靈山)의 일문역(一門驛)까지 선생을 전송하였다.
선생이 금산(金山)에 이르러서는 서당(書堂)을 지은 다음 그 옆에 못을 파서 연(蓮)을 심고는 경렴당(景濂堂)이라 편액을 걸었으니, 그것은 대체로 무극옹(無極翁)을 사모한 때문이었다. 선생은 날마다 그 안에서 시나 읊조리면서 세상일에는 뜻이 없었다.
4월에는 밀양(密陽)의 제자(諸子)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권면하여 학규(學規)를 만들게 하였고, 또 향헌(鄕憲)을 만들어서 읍속(邑俗)을 바로잡았으니, 열읍(列邑)이 풍문을 듣고 모두 준행(遵行)하였다.
3월 11일에는 상(上)이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을 제수하였는데, 4월 15일에 선생이 병을 이유로 응교를 사면한다는 서장(書狀)을 초(草)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달려가 바쳤다. 그리고 인하여 동파(東坡)의 “벼슬이 없으니 몸이 가벼움을 깨닫겠다.[無官覺身輕]”는 시구를 외웠고, 조용히 소헌(小軒)에 앉아 졸고 얘기하며 시를 지어서 창(窓)에 써붙이었다.
또 김대유(金大猷)의 다섯 수의 시에 화답한 것이 있는데, 그 시에
백발에 외람되이 한 서찰을 받고 나니 / 白首叨蒙一札頒은거지만 헛되이 양렴의 사이에 부치었네 / 幽居空寄讓廉間
그대는 나라 다스림을 성급한 계책이라 하는데 / 君言醫國太早計
우리의 도는 예로부터 굴곡이 간난했다오 / 吾道從來骪骳難
하고, 또
늙어지매 세월이 아까운 게 스스로 가련해라 / 自憐老夫惜居諸
흥공을 일으키어 수초를 물어보고 싶구나/ 欲起興公問遂初
허허 참 오늘 아침에야 내 일이 판단났으니 / 咄咄今朝吾事辨
한 칸의 왜소한 집에 서책을 쌓아 둠일세 / 一間矮屋庋藏書
하였으며, 또
한공이 오궁 보내던 것을 배우지를 말고 / 莫學韓公送五窮
장차 송옥과 같이 웅풍부나 지으려무나 / 且同宋玉賦雄風
세간의 만사가 참으로 소가 싸운 것 같으니 / 世間萬事眞牛鬪
내 또한 연래에 귀 밝은 병이 생기었다오/ 我亦年來患耳聰
하고, 또
삼년 동안 황야에서 세상 일을 단절하고서 / 三年荒野斷知聞
적막하게 오직 병든 양자운을 본받았는데 / 寂寞唯師揚子雲
오늘은 달려온 척일에 눈살을 활짝 폈으니/ 今日軒眉馳尺一
어떤 사람이 다시 수현의 글을 말하리오 / 何人更道守玄文
하였으며, 또
큰 일을 내가 어떻게 감히 담당하리오 / 大事吾何敢擔當
고황에는 예로부터 좋은 약이 별로 없다네 / 膏?從古少良方
어전에서 임금의 고문에 장차 대비하려면 / 細氈顧問如將備
그대의 시 다섯 수를 가져다가 외워야겠네 / 要取君詩誦五章
하였다.
상(上)이 선생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일어나서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는데, 말은 간략하면서도 뜻이 통창하여 강독(講讀)이 가장 훌륭하였으므로, 상의 권주(眷注)가 선생께 유독 융숭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예문관 직제학 지제교 경연 춘추관 기주관을 제수하니, 선생이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30일에 숙인(淑人) 조씨(曺氏)가 작고하였다. 가을에는 김 직장 준손(金直長駿孫)과 기손(驥孫) 형제가 청도(淸道)에 영친(榮親)하러 가는 데 대한 서(序)를 지었고, 김 도사 윤종(金都事潤宗)의 시서(詩序)를 찬하였다. 11월 일에는 유 처사 음(兪處士蔭)의 묘지명(墓誌銘)을 찬하였다. 전지(傳旨)로 휴가를 받아 11월 20일에 숙인을 금산(金山)의 미곡(米谷)에 장사지냈다.
성화 19년 계묘(1483)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4년. 선생 53세.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지제교에 승진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선생이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에는 상이 승정원에 연해서 3일 동안 술을 하사하였다. 그 다음날에 또 시(詩)와 술을 하사하였는데, 그 시에
삼일간의 음주에 이미 피곤하겠지만 / 三日雖旣困
내가 주는 것을 사양하지 말라 / 莫辭予所錫
이 뜻은 다른 마음에서가 아니라 / 此意非他心
종실을 길이 반석처럼 만들려는 거라오 / 宗圖永磐石
하였다. 그리하여 승정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화답해서 올렸는데, 선생은 이 때 비각(?閣)에 있으면서 두 수를 의화(擬和)하였다.
3월 임술일에 대행대비(大行大妃)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온양(溫陽)의 행궁(行宮)에서 승하하여, 모월(某月) 일에 광릉(光陵)으로 옮겨 장사지냈으니, 이것은 예에 따른 것이다. 선생이 교지(敎旨)를 받들어 애책문(哀冊文)을 제진(製進)하였다.
당시의 풍속이 오로지 상문(桑門)의 법식을 숭상하였는데, 선생이 사서(士庶)들로 하여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따라 사당을 세우고 신주(神主)를 만들어서 선사(先祀)를 받들도록 할 것을 청했으므로 예속(禮俗)이 다시 진흥되었다.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묘갈명(墓碣銘)을 찬하였다.
원월(元月) 원일(元日)의 영상(迎祥) 때에는 상이 운자(韻字)를 내주므로, 오전(五殿)의 시첩(詩帖)을 제진하였다.
성화 20년 갑진(1484)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5년. 선생 54세.
좌부승지에 승진 임명되어, 교지를 받들어서 내반원기(內班院記)를 지어 내시(內侍)들을 경계하였다. 또 교지를 받들어서 환취정기(環翠亭記)를 찬하여 상을 풍간하여 깨치는 말을 기록해서 바치니, 상이 명하여 이것을 새겨서 문지방에 걸도록 하였다.
8월 6일에는 상이 특명으로 가선대부 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지제교 예문관제학 상서원정에 승진 임명하였는데, 선생이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의 문장(文章)과 정사(政事)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6일에는 상이 특별히 선생에게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성균 관사를 제수하자, 사양하는 소장을 세 차례나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은 용관(冗官)들을 도태시키고 현량(賢良)들을 천용(薦用)하였다.
하루는 선생이 경악(經幄)에서 퇴청하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상이 중관(中官)을 시켜 금대(金帶) 하나를 상(賞)으로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경의 언행(言行)이 검약(儉約)하고 ……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으므로, 선생이 들어가 사은(謝恩)하였다. 12월에는 병으로 체직되었다.
성화 21년 을사(1485)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6년. 선생 55세.
정월 27일에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홍문관제학 성균관사를 제수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남평인(南平人) 문극정(文克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를 맞아 서울의 명례동(明禮洞)으로 우귀(于歸)시켰는데, 부인(夫人)은 18세로 정부인(貞夫人)에 승진 임명되었다.
부인은 부도(婦道)를 매우 잘 닦아서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 법칙이 있었으므로, 일을 까다롭고 잗달게 간섭하지 않아서 집안이 화목하였다. 선생이 모든 제사(祭祀)에는 반드시 《가례(家禮)》를 준행하여, 변두(?豆)의 품절(品節)이 세속과 같지 않았고, 재계(齋戒)와 희생(犧牲)을 씻는 일 등을 모두 최선을 다하였는데, 부인이 그 뜻을 그대로 체받아 마음을 다해 공경히 하여 조금이라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비복(婢僕)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전조(銓曹)는 권세가 치성한 곳이기에 참으로 청렴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비방이 생기기가 쉽다. 예로부터 비첩(婢妾) 무리들이 몰래 청알(請謁)을 받음으로써 그 주인(主人)에게 누가 미쳐 화패(禍敗)를 당한 경우가 많았으니, 너희들은 신중해야 한다.”
하고, 모든 친구들이 안부를 묻고 물품(物品)을 보내오거나, 혹은 직접 찾아오는 자가 있더라도 가벼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문정(門庭)이 엄숙하여 관절(關節)이 통하지 않았다.
선생은 교지(敎旨)를 받들어 평안 감사 성현(成俔), 충청 감사 채수(蔡壽)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정하기 위하여 마침내 경복궁의 홍문관에 국(局)을 개설하고, 또 전한 이창신(李昌臣), 부정 신종호(申從濩), 정랑 김맹성(金孟性) 등과 함께 삼가 원고를 열람하여 산집(刪輯)을 하다가, 얼마 안 되어 가뭄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여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남쪽으로 밀양(密陽)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가니, 학자(學者)들이 사방에서 찾아와 모였다. 선생은 주자(朱子)의 학규(學規)에 의거하여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것을 진덕(進德)의 기반으로 삼고, 성리(性理)를 궁탐(窮探)하는 것을 수업(修業)의 근본으로 삼으니, 학자들의 소견이 더욱 높아졌다.
9월 29일에는 첨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0월에는 가선대부 홍문관 제학을 제수하고 교지(敎旨)를 내려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극력 사양하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서 돈유(敦諭)하였다. 11월에는 마지못하여 대궐에 들어가 경석(經席)에 입시(入侍)해서 상을 인도하여 결점을 바로잡는 데에 보탬이 매우 많았다.
성화 22년 병오(1486)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7년. 선생 56세.
3월 3일에 예문관 제학을 제수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지를 받들어 다시 《여지승람》 편차(編次)의 일을 시작하여 이창신, 신종호와 함께 그 첫머리의 정리를 마쳤는데, 교리(校理) 이의무(李宜茂), 유호인(兪好仁), 수찬(修撰) 최보(崔溥)가 서로 이어 함께 종사하여 모두 8개월을 들여서 완성하였다.
7월 22일에는 아들 숭년(嵩年)이 태어나자, 선생이 그 기쁨을 기록한 시의 말구(末句)에,
후일의 효도하는 것이야 누가 책임지우랴 / 他時反哺將誰責
우선 밝은 구슬 희롱하며 혼자 즐길 뿐이네 / 且弄明珠獨自娛
라고 하였다. 《여지승람》의 발문(跋文)과 이국이(李國耳)가 경사(京師)에 가는 데 대한 서(序)를 찬하였다.
성화 23년 정미(1487)우리 나라 성종 대왕 18년. 선생 57세.
봄에 이조 정랑(吏曹正郞)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이 작고(作故)하자, 선생이 제문(祭文)을 지어 조문(弔問)하였다.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京畿道觀察使兼開城留守)에 제수되자, 세 차례 상소(上疏)하여 체직을 윤허받았다.
5월에는 예문관 제학에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 전주부윤(全羅道觀察使兼巡察使全州府尹)에 체제(遞除)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은 호남을 관찰하면서 성색(聲色)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조용히 대사(大事)를 처리하고 대의(大疑)를 결단하여 좌우로 수답(酬答)하는 것을 모두 온당하게 하니, 일로(一路)가 숙연해졌다.
그리고 열읍(列邑)을 순찰하면서 권과강독(勸課講讀)과 향음주의(鄕飮酒儀)와 향사례(鄕射禮)를 거행하고, 사운시(四韻詩)를 썼는데, 그 시에 “몸이 행단에 있어 만족하게 얻음이 있는 듯하네.[充然身在杏壇中]” 하였다.
효종황제(孝宗皇帝) 홍치(弘治) 원년 무신(1488) 우리 나라 성종 대왕 19년.선생 58세.
5월에 상소하여 체직되었다가 특별히 병조참판 겸 홍문관제학(兵曹參判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6월 8일에 선생이 신임 부사(府使) 이공 집(李公?)과 더불어 도의 경계에서 교귀(交龜)하고, 마침내 고산(高山)의 안심사(安心寺)에서 묵으면서 시(詩) 세 수를 지었다.
대궐에 당도하여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6일에는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동지성균관사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선생이 찬집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세상에 행해졌다.
홍치 2년 기유(1489) 우리 나라 성종 대왕 20년. 선생 59세.
정월 21일에 공조참판 겸 동지경연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에 제수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일에는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제학 지성균관사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은 송옥(訟獄)을 판결하는 데에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정함에 감복하였다. 가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지중추부사에 옮겨졌다.
이 때 상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지자 선생을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선생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하루는 동래(東萊)의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선생은 그대로 밀양(密陽)의 전장(田庄)에 가 누워 있었는데, 상이 전직(前職)을 체직하지 말도록 특별히 윤허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또는 녹봉을 받도록 권하기도 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연해서 세 차례를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친히 비답(批答)을 지어 보낸 것이 두 차례였는데, 비답에는 “마음이 바르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의 연원이 있다.[端慤無僞 學問淵源]”는 등의 말이 있었다.
홍치 3년 경술(1490) 우리 나라 성종 대왕 21년. 선생 60세.
원근의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선생은 문인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상읍례(相揖禮)를 마치고 나서는 경전(經傳)을 강론하였는데, 반드시 정주(程朱)의 본지(本旨)에 합치하도록 힘쓰고, 말마다 반드시 충효(忠孝)를 위주로 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질병이 있는 때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항상 도학(道學)을 밝히는 것을 사업으로 삼았다. 상이 선생의 청빈(淸貧)함을 듣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 70석을 내리게 하였는데, 선생이 세 차례나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치 4년 신해(1491) 우리 나라 성종 대왕 22년. 선생 61세.
도하(都下)를 출입한 지 거의 30여 년에 이르렀으나 끝내 초옥(草屋) 하나도 짓지 않고 항상 명례동(明禮洞)에 우거하였으니, 그것은 그 동명(洞名)을 사랑하여 그 곳에 거주한 것이다. 당시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선생의 청절(淸節)과 검소(儉素)함을 사모하고 존숭하였다.
선생의 질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사관(史官)을 보내어 문병(問病)을 하고 약물(藥物)을 연해서 지급하니, 차자(箚子)를 올려 사은하였다.
상이 선생의 빈한(貧寒)함을 특별히 생각하여 밀양(密陽) 백산(柏山)에 소재한 노비(奴婢) 15구(口)와 동래부(東萊府) 북쪽 온정(溫井)의 원답(員畓) 7석(石)지기를 사패(賜牌)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받지 않았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홍치 5년 임자(1492) 우리 나라 성종 대왕 23년. 선생 62세.
7월에 생질 강백진(康伯珍)에게 명하여 서적(書籍)을 맡게 하고, 또 명하여 다른 사람의 서책을 돌려주게 하였다. 8월에는 병세가 매우 위중해지자, 본도의 감사(監司)가 병세가 위중해진 사유를 계문(啓聞)하니, 상이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약을 가지고 역말로 급히 달려가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이 달 19일에 선생이 명발와(明發窩)에서 작고하니, 향년이 62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이르기를, “김모(金某)가 끝내 죽어서 선비들이 기강을 잃게 되니, 내가 매우 슬프게 여긴다.”하였다.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吊祭)하고 치부(致賻)하였다. 부(府)의 남쪽 무량원(無量院)의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숭년(嵩年)은 나이 7세였으므로, 정부인(貞夫人) 문씨(文氏)가 상(喪)을 주관하고, 생질인 사인(舍人) 강백진(康伯珍), 수찬(修撰) 강중진(康仲珍)과 호조 참판(戶曹參判) 조 선생 위(曺先生偉)가 호상(護喪)을 하여 장례를 완전하게 치렀다.
선생이 작고하자, 원근의 사림(士林)들이 허둥지둥 달려가서 조문하였는데, 비록 평소에 일찍이 급문(及門)하지 못한 사람들도 또한 모두 슬퍼 탄식하였고, 무식한 하천배들도 모두 대단히 애석하게 여겼다. 이 때 회장(會葬)한 문생(門生) 및 사대부(士大夫)와 유생(儒生)이 모두 5백여 인이었다.
홍치 6년 계축(1493) 우리 나라 성종 대왕 24년.
선생이 작고한 뒤에는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이 더욱 귀중하게 여겨져, 문도(門徒)들이 본집(本集)과 《이준록(?尊錄)》을 찬집하여 매계(梅溪) 조 선생 위에게 편차(編次)의 일을 위촉하였다.
이 해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상(太常)에서 의논하기를,
“공(公)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온화하고 선량하고 인자하고 은애로웠으며, 일찍부터 시례(詩禮)를 배워서 몸소 사도(師道)를 담당하였다. 덕(德)과 인(仁)에 의거하여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아서, 사문(斯文)을 진흥시키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그가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왕도(王道)를 귀히 여기고 패도(?道)를 천히 여겼으며, 직사(職事)에 임해서는 지극히 간편하게 하여 번거로운 일을 제어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글을 널리 배우게 하고 예(禮)로써 단속하게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남의 착한 일을 숨기지 않았고 남의 악한 일을 들추어내지 않았으며, 청결하면서도 편협하지 않았고 유화하면서 세속에 뇌동하지 않았다.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세상에 우뚝 뛰어나 참으로 삼대(三代)의 남긴 인재로서 그 사문에 공(功)을 끼친 것이 중대하다. 시법(諡法)에 도덕 박문(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염방 공정(廉方公正)을 충(忠)이라 한다.”
하였다. 재사당(再思堂) 이원(李?)이 지은 것이다.
홍치 7년 갑인(1494) 우리 나라 성종 대왕 25년.
마침 선생의 유초(遺草)를 찾아 들이라는 상의 명을 받들어 마침내 선사(繕寫)하여 올렸는데, 미처 간행하여 반포하기 전에 성묘(成廟)가 승하하였으니, 아, 애통하도다.
매계 조 선생이 대제학(大提學) 홍귀달(洪貴達)에게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요청하여 빗돌에 새겨서 옛 여문(閭門) 앞에 세웠다.
숙묘조(肅廟朝) 기사년(1689, 숙종15)에 7대손 시락(是洛)이 상소하여 증직(贈職)과 복시(復諡)의 일을 청하였고, 남 상공 용익(南相公龍翼)이 예조 판서로서 입계(入啓)하여 찬성(贊成)을 추증할 것을 청하니, 상이 특별히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복시는 미처 못 했었다.
그러다가 무자년(1708, 숙종34)에 예조 판서 조 상공 상우(趙相公相愚)가 이 상공 인엽(李相公寅燁)의 청을 따르고 또 공의(公議)를 채택하여 복시의 일을 계청(啓請)하니, 전교하기를,
“지금까지 미루어온 것이 실로 매우 미안하다. 복시하는 것이 옳다.”
하고, 즉시 은명(恩命)을 선포하였다.
상고하건대, 선생은 본디 문충(文忠)으로 시호가 내려졌는데, 허백당(虛白堂) 홍공(洪公)이 찬한 신도비(神道碑)에는 문간(文簡)으로 기록하였으니, 그 후에 혹 개시(改諡)한 일이 있었던가.
지금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무자년 복시할 때에 문충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사판(祠版)에도 또한 여기에 의거해서 기록하고 있으니, 지금은 의당 문충으로 하는 것이 옳겠다.
[註解]
[주01]강호 선생(江湖先生) : 저자인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로서, 호가 강호산인(江湖山人)인 김숙자(金叔滋)를 가리킨다.
[주02]납채(納采) : 혼례(婚禮)의 육례(六禮) 가운데 하나로서, 즉 혼인하기를 청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때 여자의 집에 예물(禮物)을
보내는 것을 이르기도 한다.
[주03]분황(焚黃) : 관원(官員)이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증직(贈職)이 내려졌을 때에 그 교지(敎旨) 한 통을 누런 종이에 베껴 써서
분묘(墳墓)에 가지고 가서 고제(告祭)를 지낸 다음, 그 누런 종이의 부본(副本)을 불사르는 의식을 말한다.
[주04]네가 무슨……대신 받았나 : 당(唐) 나라 때 한유(韓愈: 자가 퇴지임)가 일찍이 조주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면서 그의 가속(家屬)
또한 견축되어 함께 가던 도중에 어린 딸아이가 죽자, 층봉역(層峯驛) 근처의 산기슭에 초빈해 두었다가, 사면을 받고 환조(還朝)할
때에 그 묘에 들러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두어 가닥 등넝쿨로 목피관을 꽁꽁 묶어서, 황량한 산에 초빈하니 백골도 썰렁하겠지.
무고한 너를 죽게 한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 백년토록 참통하여 눈물이 줄줄 흐르는 구나.[數條藤束木皮棺 草殯荒山白骨寒 致汝
無辜由我罪 百年慚痛淚闌干]”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十》
[주05]장주 : 손에 쥔 구슬이란 뜻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비유한 말이다.
[주06]추어 : 어린아이의 말소리를 애칭(愛稱)으로 이른 말이다.
[주07]나는 쇠해서……부끄럽구려 : 한 이부는 바로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한유(韓愈)를 가리키는데, 한유가 일찍이 산양(山陽)에
있을 적에 두 수재(竇秀才)가 편지를 올 려 사사(師事)하기를 청해오자, 한유가 그에게 보낸 답서(答書)에 “비록 도덕(道德)을 깊
이 쌓고서 그 빛을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그 입을 틀어막아 전해지지 않던 옛날의 군자(君子)라 할지라도, 족하(足下)의 이처럼 간
절한 청(請)을 받았을 경우에는 장차 자기의 곳집을 기울여서 있는 대로 다 바칠 것인데, 더구나 나 같은 불초한 사람이야 또 어찌 감
히 좌우(左右)에게 아낄 것이 있겠는가.”고 한 데서 온 말인데, 한유의 뜻은 험난한 곳에 굳이 와서 고생할 것이 없다고 사절한 것이
다. 《韓昌黎集 卷十五》
[주08]진번의……걸어둘 것 없겠네 : 빈객(賓客)을 공경히 대우함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때 진번이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으면서 다
른 빈객은 전혀 접대하지 않았고, 오직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걸상 하나를 비치하여 접대하고, 그가 간 뒤에는 다시 그 걸상을 걸
어놓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09]은반을……몰두하지 말고 : 장구학(章句學)에만 몰두함을 경계한 말이다. 은반은 《서경(書經)》 상서(尙書)의 반경(盤庚)을 가리
키고, 힐굴(詰屈)은 힐굴오아(詰屈牙)의 준말로, 문장이 몹시 까다롭고 어려워 읽기 힘듦을 이른 말이다.
[주10]허노재(許魯齋) : 원(元) 나라 때의 학자로 호가 노재인 허형(許衡)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소학》을 독신(篤信)하여 일찍이 말
하기를 “《소학》의 글을 나는 신명(神明)처럼 독실히 믿고, 부모(父母)처럼 공경한다.” 하였다.
[주11]현송향 : 공자(孔子)의 제자 자유(子遊)가 일찍이 무성(武城)의 원[宰]이 되었을 적에 고을을 시례(詩禮)로써 잘 교화시킴으로 말
미암아, 그 고을에 거문고 타고 시가(詩歌)를 읊는 사람이 많았다는 데서, 교화가 잘된 지방 고을을 뜻한다.
[주12]인끈 품고……내 고향인데 : 한(漢) 나라 때 주매신(朱買臣)이 자기 고향인 회계(會稽)의 태수(太守)가 되었을 적에 인끈을 품속에
숨기고 고향에 내려가서 관아의 아전들을 매우 놀라게 해주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고향의 지방관이 되었음을 의미한
다. 《漢書 卷六十四》
[주13]기심이……빙빙 도누나 : 기심은 어떤 사물을 해하고자 하는 교사(巧詐)한 마음을 이른 것으로, 즉 미물(微物)인 새도 사람의 낯빛
이 좋지 않음을 보면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데서 온 말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낯빛을 보고는 날아 올라가서 빙빙 돌면서 자
세히 살핀 다음에야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 하였다. 《論語 鄕黨》
[주14]박대 포의 : 폭(幅)이 넓은 띠와 품이 큰 옷을 이르는 말로, 즉 선비의 옷차림을 가리킨다.
[주15]자잘한……날겠구나 : 중국에서는 옛날 홰나무 꽃[槐花]이 노랗게 피는 음력 7월경에 진사시(進士試)를 보였으므로, 사람들의 말
에 “홰나무 꽃이 노랗게 피면 거자(擧子)들이 바빠진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16]현관에……동했다 : 문운(文運)이 열리었음을 뜻함. 현관은 곧 태학(太學)을 가리키는데, 규성(奎星)은 문장(文章)을 주관하고 벽
성(壁星)은 문서(文書)를 주관한다고 하므로 이른 말이다.
[주17]채색 붓으로……토해내리라 : 훌륭한 문장을 짓는 것을 비유한 말. 채색 붓이란, 양(梁) 나라 때 문장가인 강엄(江淹)이 일찍이 문장
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곽박(郭璞)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자기 붓을 이제 그만 돌려달라고 하자, 강엄이 품 속에
서 오색필(五色筆)을 꺼내어 그 사람에게 주었던바, 그 후로는 강엄에게서 훌륭한 문사(文詞)가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
다. 무지개를 토해낸다는 것은 또한 시문(詩文)의 재주가 풍부함을 형용한 말이다.
[주18]담묵으로 쓴 것 : 과거(科擧)에 급제함을 뜻함. 담묵은 진하지 않은 먹물을 이르는데, 당(唐) 나라 때에 진사방(進士榜)의 첫머리에
는 반드시 담묵으로 ‘예부공원(禮部貢院)’네 글자를 썼던 데서 온 말이다.
[주19]선아가 응당……만들어 놓았으리 : 과거에 급제한 것을 비유한 말. 선아는 달속에 있다는 신녀(神女) 항아(姮娥)를 가리킨 말이고,
녹운의(綠雲衣)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녹포(綠袍)를 가리키는데, 비파기(琵琶記)에 “상아가 녹운의 를 만들어 놓으니, 달속
의 계수나무 첫째 가지를 꺾었네.[嫦娥剪就綠雲衣 折得蟾宮第一枝]” 하였다.
[주20]오장군 : 돼지의 별칭인데, 또는 장훼참군(長喙參軍)이라고도 한다.
[주21]평생의 부탁에……황간이 아니요 : 황간(黃?)은 송(宋) 나라 때 주희(朱熹)의 사위이며 고제(高弟)였는데, 주희가 임종(臨終) 때에
그에게 도통(道統)을 전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22]만년의……정수와 흡사하네 : 정수(靜修)는 원(元) 나라 때의 고사(高士)인 유인(劉因)의 호이다. 유인은 뛰어난 재주로 일찍이 이
학(理學)에 전념하였고 시(詩)에도 뛰어났는데, 끝내 자식이 없이 죽었으므로, 여기서는 그를 저자인 김종직에 비유한 것이다.
[주23]무극옹(無極翁)을……때문이었다. :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송(宋) 나라의 주돈이(周敦?)를
가리키는데, 그의 호가 염계(濂溪)이므로 이른 말이다.
[주24]양렴의 사이 : 양렴은 양주(凉州)에 있는 양수(讓水)와 염천(廉泉)을 합칭한 말. 남조송(南朝宋) 때에 양주의 범백년(范柏年)이 송
명제(宋明帝)를 알현했을 적에 명제가 광주(廣州)의 탐천(貪泉)을 언급한 다음, 범백년에게 묻기를 “경(卿)의 고을에도 이런 물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양주에는 오직 문천(文川)·무향(武鄕)과 염천·양수가 있을 뿐입니다.” 하므로, 명제가 또 묻기를 “경
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사는 곳은 염천과 양수의 사이입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25]흥공을……물어보고 싶구나 : 홍공은 진(晉) 나라 때 손작(孫綽)의 자이고, 수초(遂初)는 벼슬을 버리고 야인(野人)으로 돌아가고
자 하는 당초의 숙망을 이룬다는 뜻인데, 손작이 일찍이 수초부(遂初賦)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피력하였다.《晉書 孫綽傳》
[주26]한공이……보내던 것 : 한공은 당(唐) 나라 한유(韓愈)를 가리키고, 오궁(五窮)은 한유가 지은 송궁문(送窮文)에 나오는 지궁(智
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궁귀(窮鬼)를 가리키는데, 자세한 내용은 송궁문에 나타나 있다.
[주27]송옥과 같이 웅풍부 : 송옥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의 제자인데, 그가 일찍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사(驕奢)함을 염려
하여 풍부(風賦)를 지어서 임금을 풍간하였던바, 그 풍부에 “맑고 시원하여 이목(耳目)을 발명시키는 것이 바로 대왕(大王)의 웅풍
(雄風)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8]내 또한……생기었다오 : 진(晉) 나라 때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 은사(殷師)가 늘그막에 귀가 너무 잘 들리는 병이 생기어, 와상
(臥牀) 밑에서 개미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는 이를 소가 싸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四》
[주29]척일에……폈으니 : 임금으로부터 관직에 임명하는 조서(詔書)를 받고 기뻐했다는 것을 뜻한다. 척일은 곧 임금의 조서를 이르는
데, 옛날 조서를 쓸 적에 일척 일촌(一尺一寸)의 목판(木版)을 사용한 데서 온 말이다.
[주30]수현의 글 : 현(玄)은 곧 도(道)를 뜻하는 것으로, 한 애제(漢哀帝) 때 양웅(揚雄: 자가 자운〈子雲〉임)이 세상에 나가지 않고 들어앉
아 초(草)했던 《태현경(太玄經)》을 이르는데, 즉 양웅이 《太玄經》을 초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
다. 《漢書 卷八十七》
[주31]고황 : 본디 고질병을 이른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산수(山水)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침을 의미한다.
[주32]관절(關節) : 당(唐) 나라 때에 시험관(試驗官)이 자기가 사적으로 봐주려는 선비의 답안지(答案紙)에 기호(記號)를 붙여서 식별
(識別)하는 데에 편리하게 했던 것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요인(要人)에게 뇌물을 바치고 청탁(請託)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33]교귀(交龜) : 관리(官吏)가 귀형(龜形)으로 된 관인(官印)을 후임자(後任者)에게 넘겨주는 것을 이른 말로, 즉 직무를 인계하는 것
을 의미한다.
[주34]사패(賜牌) : 왕(王)이 왕족(王族)이나 공신(功臣)에게 노비(奴婢) 또는 토지(土地)를 하사할 때에 주던 문서(文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