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림월산
크게 죽지 않으면 결코 크게 살 수 없다
경허.만공.보월.금오스님의 법맥을 계승한 성림월산(聖林月山, 1913~1997)스님. 올곧은 수행가풍을 후학들에게 전승한 우리 시대의 선지식이다. 월산스님의 법문을 수록한 <월산선사법어집(月山禪師法語集)>을 중심으로 수행가풍과 행장을 살펴보았다. <월산선사법어집>은 1998년 월산문도회에서 편찬했다.
“크게 죽지 않으면 결코 크게 살 수 없다”
경허·만공·금오스님 법맥 계승
“도를 위해 몸 던질 각오로 공부”
○… 선맥을 계승한 월산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납자들의 수행정진을 당부했다. 월산스님은 “요즘 선방 다니는 사람을 보면 한 철 두 철 몇 해가 지나도 모조리 꿀 먹은 벙어리나 다름없다”면서 경책한바 있다.
“선방에 왔으면 치열하게 물을 것은 물어보고 선배든 조실이든 귀찮게 해야지 왜 모두 꿀만 먹고 아무 말이 없는가? 그렇게 몇 십 년 선방 다니다가 입 한 번 벌리지 못하면 그것 어디다 쓸 것인가.”
<사진>월산스님 진영.
○… 월산스님은 “결제때 수행정진하지 않으면 ‘다섯 가지 도둑중’에 몰린다”고 했다. 수행자의 바른 길을 걸어갈 것을 강조한 내용이다. 이는 조선시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가르침을 전한 것이다. 오서승(烏鼠僧), 아양승(啞洋僧), 독거사(禿居士), 지옥재(地獄滓), 피가사적(被袈裟賊)이 그것이다. 월산스님은 “종문(宗門)의 조사 가운데는 참으로 도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이 많다”면서 “두 다리가 성하고 싶으면 부끄럽지 않게 공부하라”며 강하게 경책했다.
○… 월산스님은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도 ‘수행자’임을 인식하고 흐트러짐 없이 정진에 몰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견성 성불하는데 있다”면서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부처를 찾지 못하면 100년 동안 불교공부를 해도 헛수고”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마음’을 바로 볼 것을 당부했다.
“부처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 없는 사람 없으니, 부처를 보기란 세수하다가 코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 “백천간두에서 뛰어내리라. 두 눈 딱 감고 뛰어내리라” 치열하게 정진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발 더 나가는 ‘혁명적 인식 전환’이 수행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월산스님은 “백척간두에서 한 발 앞으로 내딛지 못하는 것은 죽을 것이 겁나서라”면서 “욕심껏 모은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애착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
“백천간두에서 아무리 줄타기를 해봐야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진 월산스님은 “차라리 백척간두에 서서 그것을 다 쏟아내고 새 것을 구해야 한다”면서 “크게 죽지 않으면 결코 크게 살 수 없다”고 강조했다.
○… “수행자는 가난해야 한다.” 월산스님은 사람은 누구나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특히 수행자의 뒷모습은 가난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스님은 향엄(香嚴)화상이 앙산(仰山)화상에게 지어 바친 게송을 통해 수행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강조했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去年貧未是貧(거년빈미시빈), 今年貧始是貧(금년빈시시빈),
去年貧無卓錐之地(거년빈무탁추지지), 今年貧錐也無(금년빈추야무)”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다. 올 해의 가난이 참으로 가난이다.
지난해는 송곳 꽂을 땅이 없었으나, 올 해의 가난은 송곳마저 없구나.”
후학들에게 이 같은 게송을 전하며 월산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했다.
“인생은 무상해서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른다. 어느 날 나나 그대들이 죽고 나면 누군가가 뒤를 정리할 것이다. 그 때 만약 수행자의 분수에 맞지 않은 소유물이 나오거나 뒷말이 무성하다면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 1987년. 군부가 정권을 잡은 5공화국 시절이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암흑의 시기였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연일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무렵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게 된 월산스님은 “민주적인 개헌 방향을 밝혀야 시위가 진정될 수 있다”며 정부 정책의 전환을 요구했다. 당시 스님은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이었다.
○… 월산스님이 경주 불국사에 주석할 무렵의 일화이다. 불국사에서 탑돌이 법회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대중과는 반대 방향으로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탑돌이는 우요삼잡(右繞三)이라고 해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한번 예를 올리는 것이 법도였기에, 할머니의 모습은 눈에 쉽게 띄었다.
월산스님이 할머니에 질문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오른쪽으로 돌고 있는데 왜 할머니는 왼쪽으로 도십니까?”
스님의 물음에 할머니는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하면 부처님이 어찌 나 같은 미천한 늙은이를 쳐다보겠습니까.”
그래서 월산스님이 다시 물었다. “할머니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할머니가 “아직 탑돌이도 안 끝났는데 그걸 말하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답했다.
스님은 이 같은 일화를 수좌들에게 전하며 “금년 겨울의 공안으로 내걸 테니 시험 잘 보기 바란다”며 해답을 찾을 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일상 생활 모두가 수행정진의 연속이었다.
■ 어록 ■
“범부(凡夫)가 곧 부처이며 번뇌가 곧 보리이니 앞생각이 미(迷)하면 범부였으나 뒷생각에 깨치면 곧 부처이며 앞생각이 경계에 집착할 때는 곧 번뇌였으나 뒷생각이 경계를 여의면 곧 보리이다”
“토함산록이 단풍이로다. 주먹을 펴면 바로 손바닥이니 홀로 삼계(三界)밖으로 뛰어나가거든 다시는 사바세계를 그리워 말라”
“바로 깨달아야 허물이 없을 것이다. 금생을 놓치면 후신(後身)이 두려우니 학인들은 방일치 말지어다.”
“수행자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은 수행자를 수행자답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어찌 스스로 가난해지려고 애쓰지 않는단 말인가?”
“출가수행자가 도착해야 할 서울은 어디인가?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성불’이라는 이름의 도시다. 그곳으로 가는 이정표가 계율이니 성불을 기약하고 출가한 사람은 반드시 이 이정표대로 걸어야 한다. … 역대조사와 천하 선지식이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은 그만큼 계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생각을 비우고 법문을 들으면 반드시 깨달을 때가 있으리니 말만 배우는 사람처럼 입으로만 판단하지 말지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그것은 불가득(不可得)이라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참선하는 납자는 허망한 것에 눈을 돌리지 말고 화두를 타파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
■ 행장 ■
부친 별세후 무상 ‘절감’ 출가
‘봉암사 결사’ 한국불교 재흥
1913년5월1일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 원평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흥규(崔興奎)선생과 모친은 노씨(魯氏)의 3남2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종렬(鍾烈)이다. 엄격한 가정교육과 서숙(書塾, 글방, 서당)을 거쳐 신학교에서 학문을 익혔다. 부친 별세후 무상(無常)을 절감하고 구도의 길에 올랐다. 정처 없이 천하를 주유(周遊)하다 안변 석왕사와 치악산 상원사를 거쳐 도봉산 망월사에 이르렀다.
1944년 망월사에서 춘성스님의 안내로 금오(金烏)스님을 친견한 후 출가 수행자의 길어 들어섰다. 해방을 전후해 덕숭산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정진을 거듭하고 ‘이 뭣고’라는 화두를 받았다. 금봉(錦峰).금오.전강(田崗) 스님 등 당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수선 안거한 후 가르침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3년간 운수행각에 나섰다. 금오스님의 보임처(保任處)인 보길도 남문사와 청도 적천사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섰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향곡.청담.성철.보문.자운 스님등과 함께 결사 수행을 시작했다. ‘문경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 재흥(再興)의 초석을 놓은 의미 있는 결사였다. 공주청규(共住淸規)를 제정해 가행정진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은사 금오스님을 모시고 정화불사에 나섰다. 팔공산 동화사, 속리산 법주사, 설악산 신흥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각화사의 도량을 일신했다. 1968년 금오스님이 입적할 당시 “모든 일은 월산에게 부촉(咐囑)하노라”며 법을 전했다. 경허.만공.보월.금오스님의 법맥이 월산스님에게 이어진 것이다.
<사진>1993년 경주 불국사에서 사형사제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월산스님.
스님은 법주사.불국사.금산사.대승사.불영사 등 제방 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또한 1968년과 1978년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1986년 원로회의 의장으로 불자들의 정신적 지주로 법등(法燈)을 밝혔다.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으며 정화불사와 종단발전을 위해 노력한 월산스님은 1997년 9월6일 오후8시10분 경주 불국사 선원 염화실에서 원적했다. 세수 86세, 법납 55세. 상좌로 성타.활안.법달.정휴.장주.종상.종후.종광.종현.종성 스님 등이 있다.
■ 월산스님 임종게 ■
廻廻一生(회회일생)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未移一步(미이일보)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本來其位(본래기위) 본래 그 자리는
天地以前(천지이전) 하늘 땅 보다 먼저이니라.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