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1-11)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를 제2이사야서라고 부릅니다. 1-39장은 제1이사야서로서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유다의 죄를 고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선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여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제2이사야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심과 회의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바라실만큼 좋은 분이신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만큼 강한 분이신가? 이런 의심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고 살아왔는데, 바벨론에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 왔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믿는 신이 패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신에게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느냐를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심판을 받았다고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이 50년 가까이 계속 이어지면, 백성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구원의 희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포기, 신앙의 포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이사야서의 오늘 말씀에서, 예언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절망하지 않도록, 구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유대 백성이 의심한 것에 대해 대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잊지 않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의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그들을 용서하여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하실만큼 강한 분이신가?'라는 의심입니다. 도와주지 못하는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유서를 남겼습니다. '우울증으로, 여러 가지 형편으로 힘들어할 때, 다 잘될거야라는 말은 독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희망섞인 말을 하는 것은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할 능력도 없으면서 '너희를 위로한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심에 대해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6절, 7절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모든 육체는 풀, 꽃과 같으니 꽃, 풀은 시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되리라.' 인생은 풀이나 꽃과 같습니다. 살아 있는듯 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시들고, 생명을 다하고 끝이 납니다. 포로로 잡혀간 유다의 상황이 시든 꽃과 풀인 것입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 또한 유다의 형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영원할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끝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강한 분,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으로 선포됩니다. 마르고 시든 풀꽃같은 유다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겠다,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가 친히 그의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니 모든 백성은 양과 같이 목자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언자는 우리를 위로하며,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라고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칩니다. 광야에서, 사막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광야는 결코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언제나 위험한 곳이었고, 하나님을 배반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이끄셨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쩌면 포로생활이 그들에게 광야와 같이 위험한 곳, 절망적인 곳, 하나님을 의심하고 신앙을 포기하는 곳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것 같이 포로생활에서도 이 백성을 이끄시겠다, 구원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시내 광야에서처럼, 지금도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길은 고속도로나 철도와 같은 길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시내 광야에서 십계명을 통해 백성이 여호와의 길을 따른 것처럼,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른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3-4절 말씀입니다. 평탄케 하라,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 험한 곳이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길은 '우리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모난 것들을 회개를 통해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합니다. 미움, 증오, 게으름, 불순종 등 하나님을 맞이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것들을 치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비한 주의 길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위로consolari'라는 말은 '고독한 이와 함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더이상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하시며 위로하십니다. 주님은 예언자를 통해 '내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를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포로생활에 힘들어 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고 절망하지 않도록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한 팔로 우리를 지켜주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친히 인도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나에게만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고통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노동자 농민들의 절규에 정부는 불법 시위라고 주장하며 처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요, 이웃인 그들의 외침에 사회는 못 본 척 외면합니다. 종교계 또한 외면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고통받는 노동자, 농민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3포, 7포 세대라며 절망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내 백성, 내 아들 딸'이라고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종교도 그 무엇 하나 의지할 곳 없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시며, 인도하여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주님의 길을 예비합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시다. 유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교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몇 번인지 모를 만큼 주여, 주여를 외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오실 수 없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영원한 말씀이 바로 서는 그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절망과 고통에서 구원하시며, 주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모든 불의와 거짓, 폭력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